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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1>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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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도 맑스는, 인간의 역사성을 바로 감각의 영역에서 강조하고 인간의 5가지 감각의 형성이 “지금까지의 전체 세계사의 노동”(Ⅰ.2/270; EB 1/541f)일 수 있음을 확정할 때 포이어바흐를 넘어서게 된다.

 

포이어바흐를 넘어서는 인간 유적 존재에 대한 규정은 포이어바흐와는 아주 다른 헤겔의 평가로 이어진다. 『수고』의 세 번째 노트에서 맑스는 세 개의 긴 부분으로 헤겔의 철학과 대결하였다.(주41-) 거기서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그리고 특히 브루노 바우어를, 그의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헤겔 논리학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오로지 포이어바흐만이 헤겔 변증법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주-42) 그러나 맑스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인간 존재의 역사적 생성을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포이어바흐와는 다르게 헤겔을 인정하고 있다.(주43-)

맑스의 존재 개념이 포이어바흐와 구별되는 두 가지 계기가 있는데, 그 두 가지 계기는 역사성과 생산으로서, 인간 자신의 생산으로서 대상성, 즉 맑스가 헤겔에게서 재발견하고 있는 대상성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

 

“헤겔은 근대 국민경제학자들의 관점에 서 있다. 그는 노동을 존재로서, 즉 인간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서 파악한다.”(Ⅰ.2/292f; EB 1/574) 

 

물론 맑스는 헤겔이 역사성과 노동을 오로지 사변적인 방식으로만 파악한다는 사실을, 즉 헤겔이 알고 있는 노동이 “추상적이고 정신적인”(같은 곳)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이것은 헤겔의 소외 개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 헤겔이 소외를 이미 대상화 속에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헤겔은 현실적인 소외를 결코 해소(지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소외의 대상적 형태를 없애 버림으로써 의식 속에서만 폐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대립하여 헤겔에서 긍정적 계기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본다. 즉

 

“소외 안에서 나타난, 대상적 존재의 소외의 해소에 의한 그 존재의 전유(소유, Aneignung)에 대한 통찰,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실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통찰”(Ⅰ.2/301; EB 1/583).

 

맑스에게 있어서 국민경제학과 헤겔 철학은 소외 안에서의 과학들이다. 맑스는 “참된 유물론”과 “실제적 과학”을 이들과 대립시킨다. 참된 유물론과 실제적 과학을 토대를 닦은 사람은 포이어바흐라고 할 수 있다(Ⅰ.2/276; EB 1/570). 이러한 실제적 과학은 바로 이 과학이 인간 존재를 그 존재의 소외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형태로 파악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 특징이 나타난다.

 

맑스가 인간 유적 존재의 대상화를 대상적 생산으로 파악하고 이 생산을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포이어바흐의 비역사적인 인간학은 이미 잠식당하고 있다.(주44-)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유적 존재의 내용을 지니고 있는(inhaltliche) 규정으로 여겨진다. 맑스의 담론 구조는 여전히 하나의 인간학적인 존재철학이다. 특히 이것은 분명히 유적 존재의 사회성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게서 이러한 사회성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로서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다.(주45-)

맑스는 『수고』(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사회적 현실성을 인간 존재의 객관화로 파악한다 : 사회성은 개별적 개인들에게 내재해 있는 유적 존재를 통해 나타난다. 분명히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무엇보다도 ‘사회’를 또 다시 개인과 대립하는 추상으로서 정립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Ⅰ.2/267; EB 1/538)(주46-)

 

그러므로 여기서 맑스는 정치경제학과 똑같은 개인주의(Individualismus)로부터 출발한다. 사회는 직접적으로는 개인이라는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구성되므로 이러한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파악될 수밖에 없다.(주47-) 그런데 정치경제학이 현존 사회를 인간 사회로 파악했던 반면에, 맑스는 인간 유적 존재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바탕으로 해서 현존 사회가 다만 이러한 소외의 객관화라는 사실, 즉 (현존 사회의) 인간이 참된 사회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립한다.(주48-)

이러한 참된 사회성은 공산주의를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공산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

 

“인간의 자기소외로서의 사적 소유의 긍정적 해소(지양)로서 공산주의, 따라서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인간 존재의 현실적 전유(소유)로서의 공산주의 ; 그러므로 완전히 지금까지의 모든 부의 발전을 의식하고 또 그 안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인간, 즉 인간적인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로서의 공산주의.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연주의 = 인간주의, 완전한 인간주의 = 자연주의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순의 참된 해소이며, 현존재와 존재(또는 본질) 사이, 대상화와 자기 확증 사이, 자유와 필연성 사이, 개인과 (인간) 유 사이의 진정한 해소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자기 자신을 이러한 해결로 알고 있다.”(Ⅰ.2/263; EB 1/536)

 

여기에서 맑스의 존재개념과 소외개념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계기들이 모여 있음을 보게 된다. 현실성은 관념적인 인간 존재와 대조되는데, 여기서는 현존재와 존재(또는 본질)의 불일치, 모순, 현실적 존재의 소외가 확정된다. 이러한 모순은 공산주의에서 해소된다.(주49-)

맑스가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존재로 “복귀”(주50-)하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에 관해 말할 때, 인간이 여전히 자신의 인간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함축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근원적인 통일의 분리, 상실, 심지어 자신의 고유하고 참된 본질(또는 존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분리, 상실에 다름 아닌 소외의 개념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주51-) 상실로서 하나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그러나 항상 이미 이런 상실 앞에 있는 다른 하나의 상태를 가정하게 된다. 물론 맑스는 소외되지 않는 국면으로서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비추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물론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이런 근원적인 상태의 지위(상)에 관한 문제를 낳는다.(주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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