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

이번 방학 때 변변치 않은 글을 하나 썼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거칠게 정리해 보았다.

 

글의 들어가는 부분만을 싣는다.

관심 있는 블로거께서는 덧글에 메일 주소를 남겨 주시면 메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 왜 클라우제비츠에 주목하는가.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단적인 폭력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극단적 폭력 형태의 전쟁을 막을 방도도, 그리고 막을 주체도 아직 없어 보인다. 역사 발전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도 이 극단적 폭력 형태의 전쟁을 어찌 해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세계화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상황이 이러한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클라우제비츠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게 전쟁이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는 것이 근대적 주체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사 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는 민족국가의 국경이 해체됨을 의미하며, 민족국가 내에서 국가와 인민(그람시에 따르자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동의’ 체계가 무너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해 민족국가 자본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좀더 값싼 노동력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시장 확보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가 있을 때에는 그들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노동자들을 비롯한 인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통제하고 제도화하지 못했을 경우 국가의 정치권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상당히 우려하였다. 즉 그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통하여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로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의 해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론 체계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자신의 『전쟁론』을 출판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곧바로, 필연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20세기 초에 근대적 주체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계급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노동자 계급이(그들이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간에) 이 전쟁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가지고 있는 아포리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