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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

역사소설 <<혁명>> 제1권에 나오는 또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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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宰)란 무엇인가. 재제(宰制)함이다. 백관의 상이한 직책과 만민의 상이한 직업을 두루 관장하며 공평하게 처결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무엇인가. 보상(輔相)함이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명령에는 순종하고 추한 명령은 바로잡는다.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은 막는다. 이를 통해 왕을 대중(大中)에 들게 만드는 것이다.

 

송나라의 대학자로 <<대학연의>>를 지은 진덕수가 강조하지 않았던가. 재상은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왕을 바르게 하며, 인재를 뽑고 업무를 훌륭하게 처결해야 한다.

 

신하가 명군(明君)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만 왕이 양신(良臣)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대장군은 패자(覇者) 시대의 왕들처럼, 충분히 보상(輔相)의 의미를 이해하고 전권을 재상에게 맡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여러 번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권세가 왕에게 집중되지 않는 나라는 혼란에 빠져 사라지고 만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재상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하늘엔 두 개의 해가 빛날 수 없다는 논리다.

 

왕도 사람이다. 어진 이도 있고 각박한 이도 있으며 똑똑한 이도 있고 멍청한 이도 있으며 유악한 이도 있고 강건한 이도 있다. 왕이 전권을 휘두른다면 혼군(昏君) 혹은 폭군(暴君)의 도래는 시간 문제다. 왕은 신하를 두려워해야 하고 신하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두려움은 힘에서 나오고 그 힘은 법과 제도를 통해 뒷받침된다. 내 구상의 핵심은 왕을 예외로 두지 않는 것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지만 전체를 뒤바꾸지는 못하는 체계 속 일원이다. 이렇게 짜 둬야 왕이 설령 삼강과 오륜을 무시하더라도 체계 속에서 고쳐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재상은 백관과 만민뿐만 아니라 왕의 삶 전체를 세세히 살피고 알아야 한다. 왕의 패악함과 우유부단함이 구중궁궐 바깥까지 알려지기 전에 단속하고 고치고 바꿔야 하는 것이다. 빈첩(嬪妾)은 물론이고 내시나 궁녀, 수레와 말 그리고 의복과 음식까지 재상은 하나하나 챙겨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재상은 왕의 부끄러운 비밀조차도 알아야 한다.

 

재상은 어떻게 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지식을 자랑해서도 아니 되고 말재주를 뽐내서도 아니 된다. 재상의 진심을 헤아리고 그 정성에 감동할 때에만 왕은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재상에게 너무 많은 권세가 얹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누군가가 권세를 쥐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지만물의 움직임과 국방의 엄중함에 무관심한 왕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지닌 재상이다. 권세만큼 업무도 막중하니 재상은 단 한순간도 사사로움을 추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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