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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깨우침..

허균의 혁명 과정을 그리는 역사소설 <<허균, 최후의 19일>>(김탁환 지음,  민음사, 2009) 중 상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163~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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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허균의 이인생에서 가장 큰 영영향을 끼친 사람은 둘째 형 허봉이었다. 

일찍이 허봉은 서애 유성룡, 손곡 이달, 석봉 한호 등과 교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허균에게 문과 시 그리고 서채를 가르치도록 했다. 허균이 열여덟 살 때에는 허봉이 직접 백운산에서 고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조선 제일의 감식안을 자랑하게 된 것도 허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균은 허봉에게서 청운의 길과 백운의 길, 인생의 환희와 치욕을 동시에 목도했다. 약관 스물두 살에 과거에 급제한 허봉은 성절사(聖節使, 중국 천자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고, 예조좌랑과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림이 동서로 나뉜 조정에서 동인의 중론을 이끄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허봉은 계미년(1583년)에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고 뒤이어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때부터 허봉은 청운의 꿈을 접고 무자년(1588년) 금강산에서 죽을 때까지 팔도를 유람하며 백운의 길을 즐겼다. 

병술년(1586년)에 백운산에서 허봉을 만나자마자, 허균은 이렇게 물었다. 

"형님!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왜 이런 곳에서 세월을 죽이고 계시는 겁니까?" 

"울분의 근원을 찾고 있느니라." 

"울분의 근원이라면......?" 

"처음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었지. 허나 지금은 그런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한심한 내 몰골에 대한 분노가 앞서는구나. 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는 한적한 곳에 머물러야겠지." 

"울분의 근원을 다스리게 되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실 겁니까?" 

"물론!" 

허균은 알고 있었다. 을유년(1585년)에 귀양이 풀린 다음, 서애 유성룡이 그토록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서찰을 띄웠음에도 불구하고 허봉이 왜 나아가지 않았는가를. 허봉은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부둥켜안기 위해 홀로 고뇌하였다. 그 여름이 끝날 무렵 오랜 벗인 사명당이 찾아왔을 때, 지는 해를 바라보며 허봉이 뱉어 내던 말들을 잊을 수가 없다. 

"대사!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서애가 아무리 독촉해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외다. 공자 왈 맹자 왈로는 사바세계의 중생이 억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애야 맑디맑은 위인이지만 서애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바다와 나무가 온통 탁하니, 어찌 중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소이까? 나는 탁하디탁한 만물을 한꺼번에 불사르는 법을 찾고 있소이다. 단 한 번의 깨우침으로 열반묘심(涅槃妙心, 불생불멸의 진리)을 이루기 위해, 이 더운 여름날에도 둔한 머리를 다스리고 있다오." 

단 한 번의 깨우침! 

허균은 그 말이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허봉 개인을 위한 깨우침이 아니었다. 허봉은 이 땅의 백성들이 억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유교라는 사상, 조정이라는 제도 안에서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곳을 떠나 그곳 밖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 길이 무엇이었을까?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허봉은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석씨를 가까이한 것도, 신선술에 관심을 가진 것도 허봉의 영향이었다. 허균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유교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불교로, 불교가 부족하면 도교로 깨달음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균아!" 

마침내 허공의 목소리가 다시 들여왔다. 이번에는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찾는다고 보일 대상도, 찾지 않는다고 사라질 목소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요순을 이 땅에 재현하는 것이냐? 참과 거짓, 공과 사를 명명백백하게 구별할 수 있는 군왕을 세우는 것이냐?" 

"아닙니다." 

"너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는 교산이 용상을 차지하기 위해 일을 도모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너는 정녕 용상을 위해, 허씨 왕조를 세우기 위해 군관과 역관과 땡초와 시정잡배를 끌어들였느냐? 그들을 위해 벌써 관직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아닙니다."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서냐? 너를 가두고 모함하고 협박하는 이들의 수족을 자르기 위해 뜻을 세운 것이냐? 억울하게 죽어간 벗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수군거리는 무리도 있다. 그게 정녕 네가 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백성을 위해서라고 대답하겠구나.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을 위해서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네 뜻이냐? 내가 삼십 년 전에 품었던 뜻을 네가 이루겠다는 것이냐? 나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금강산에 머물렀지만, 너는 그 뚯을 위해 관송의 심장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하려느냐? 과연 너는 백성을 위한 마음뿐이었느냐? 그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네가 읽은 서책들 속에서, 네가 만난 여러 사람들 속에서, 네가 본 천지 만물의 움직임 속에서, 그 깨달음이 찾아들었다고 대답할 작정이냐?" 

"형님!"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우러렀다. 소리의 근원을 찾았지만 지독한 어둠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고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완전히 바꾸어 버리지 않고는 가슴속의 울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금상을 죽이고 북인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이 울분이 사라질까요?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이들에게 높은 벼슬과 귀한 보석을 안긴다고 분노와 회한이 사라질까요? 사람만 바뀔 뿐 울분은 그대로라는 걸 누구보다도 형님이 더 잘 아시질 않습니까? 다시는 그런 울분을 느끼지 않도록 단칼에 세상을 바꾸렵니다. 이씨의 나라도 허씨의 나라도 아닌 만백성의 나라를 만들렵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도덕과 제도를 단숨에 지워 버리렵니다. 두렵지 않냐고요? 두렵습니다. 허나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형님, 이 아우를 도와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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