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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6.

 

(7) 플라톤   

 

플라톤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자들을 종합적으로 통일하여 지신만의 독특한 이데아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먼저 아낙시만드로스의 체계를 받아들인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최초의 자연 질서라 할 수 있는 온․냉, 건․습의 대립적 체계를 받아들여 이데아들의 대립적 체계를 세운다. 예를 들어 김․짧음, 넓음․좁음, 깊음․앝음, 아름다움․추함 등의 이데아의 대립적 체계를 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아의 대립적 체계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처럼 유한한 몇 개의 대립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무수한 대립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자론자들의 원자의 무수함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런데 원자론자들의 원자의 무수함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리하여 <다(多)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을 종식시켜 <다(多)의 공존>을 가능하게 위해서는, 즉 이러한 투쟁을 극복하여 사회를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이 플라톤에게는 여러 이데아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관계 맺게 하는 <선(善)의 이데아>로 나타난다. 선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들을 비춘다.

이런 선의 이데아는 헤라클레이토스의 Logos(영혼, 이성, 정신) 개념을 받아들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Logos는 자기 자신 안에 변화의 개념을 안고 있다. 변화의 개념을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권력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귀족정을 옹호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권력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은 귀족정이 다른 권력 체제, 즉 민주정으로 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플라톤에게는 권력 자체가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의 일원론과 <운동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 자체 영원불변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은 세계를 두 개의 세계, 즉 세계에 대한 참된 진리를 알 수 있게 하는 불변적 가지(可知)계인 이데아 계와 참된 진리를 파악할 수 없는 변화하는 가시(可視)적인 현상계(만물계)로 나눈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어떻게 만물을 낳는가? 다시 말해서 서로 상반된 성격의 두 세계는 어떻게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우주적 조화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가, 세계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는지, 또 어떻게 조화롭게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한계임을 위에서 보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조화롭게 관계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는 <관여> 또는 <분유(分有)>(methexis)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1)

<관여>또는 <분유>라는 개념은 현상계(경험 세계)의 경험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이 이데아 계(경험으로 알 수 없는 세계,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세계)의 보편적 본질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유될 수 있는가? 이는 <상기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상기설>은 인간의 참다운 인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상기설>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과학적 세계관의 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이데아 계에 속해 있던 존재이다. 인간은 신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영혼은 이데아 계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여 현상계에 속하는 인간(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만물의 하나로서의 인간)이 될 때 영혼은 신체에 속박 당하게 되고2) 그리하여 신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영혼이 인식했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허망한 현상계 속에서 인간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즉 <나 자신을 알기>3) 위해서는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참다운 본질을 인식하였던 영혼이 있음을 일깨우는(상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데아에 대한 분유가 일어나게 되고 완전한 앎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

그런데 이데아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과정, 즉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일의적이 아니라, 이중적이다.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크게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로 대별된다. 수학적 사유는 이데아에 대한 분유가 일어나게 되는 과정이고, 변증법적 사유는 이데아에 대한 완전한 앎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과정이다.5) 변증법적 사유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영향 받은 바(<너 자신을 알라>와 관계된 산파술)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상기)은 교육(사유의 계발)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교육은 귀족과 시민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다. 귀족정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당시의 귀족정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귀족정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시민을 주축으로 한 민주정과 혼합된 형태의 귀족정이라고 할 수 있다(예> 호민관). 이것은 곧 사회의 분업화 과정에 따른 것이고, 또한 지배 계급의 이원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전히 귀족을 우선순위에 두었다.6)    

이러한 상기설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국가론을 정립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세 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통치 계급, 수호(전사) 계급, 생산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인식론과 관련해서는, 통치 계급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 수호 계급은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 생산 계급은 감각적 지각과 대비된다. 존재론과 관련해서는, 통치 계급은 선의 이데아, 수호 계급은 이데아, 생산 계급은 현상계의 만물과 대비된다.

이 국가론은 개인의 영혼의 구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개인의 영혼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머리, 가슴, 배로 이어진다. 머리는 이성, 지혜로 나타난다. 가슴은 의지, 용기로 나타난다. 배는 욕망, 절제로 나타난다. 국가론과 관련해서는, 머리는 통치 계급을, 가슴은 수호 계급을, 배는 생산 계급과 대비된다.

그런데 이 세 부분(영역)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에서처럼 각기 다른 부분(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통치 계급은 국가 통치에만 관여해야 되고, 국방 부문이나 경제 부문에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돈과 관련해서는 돈에 눈독을 들여서는 안 된다. 다른 계급들도 마찬가지이다. 수호 계급이나 생산 계급이 통치를 한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신분 상승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이 맡고 있는 부분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꿈꾸던 다(多)의 공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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