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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6/05/19
    혼이여 돌아가자!
    곰탱이
  2. 2016/04/28
    부처의 도-물 자체
    곰탱이
  3. 2016/04/21
    곰탱이
  4. 2016/04/21
    백성
    곰탱이
  5. 2016/04/20
    산은 산인가?
    곰탱이
  6. 2016/04/12
    좋은 대가리와 나쁜 대가리..
    곰탱이
  7. 2016/03/19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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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6/02/17
    왜 아프니!!(2)
    곰탱이
  9. 2016/01/28
    상대성이론
    곰탱이
  10. 2016/01/27
    변증법
    곰탱이

혼이여 돌아가자!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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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은 오는 것이었다. 병이 깊어지고, 꿈이 얕아지고, 몸이 무거워지고, 생각이 가벼워진 것으로써, 그 동안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에 매달려서 온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다. 매월당 자신이 오고 와서 이만큼 늙어 버린 것이었고, 세월이 스스로 오고 와서 이만큼 낡아 버린 것이었다.

하늘에는 북녘으로 돌아가는 새들이 며칠째나 무리를 지어서 날아가고 있었다.

덧없이 그새 이월로 접어들어 벌써 초엿새라나 초이레라고 하니, 그러고 보면 새들이 가고 싶어할 때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매월당은 하늘의 새소리가 아녀자들이 먼 데서 앙살거리는 소리처럼 들리거나, 새들의 그림자가 눈앞을 한꺼풀 걷어가듯이 후딱 가로질러 갈 때마다 얼른 고개를 들어 새 떼를 쫓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고니인지, 물오리인지, 기러기인지, 두루미인지는 번번이 넋을 놓고 바라보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새들이 줄을 지어서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약간 비슷하기는 해도 매월당이 언뜻 떠올렸었던 것처럼 겅그레나, 쳇다리나, 가새나, 곱자 따위와 같이 굽거나 가지를 친 어떤 물건의 모양이 아니었다. 새들은 사람들이 살림살이에 만들어서 쓰는 그런 도구의 형상을 시늉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새들은 산의 능선을 그리거나, 굽어도는 들길을 그리거나, 휘어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매월당은 오늘도 가벼운 생각에 잠기어 있었다.

들앉으나 나앉으나 그렇게 묵은 일들을 되새기고 곰새기고 하는 것이 요즈음의 소일이었다.

생각하면 그 동안 걸어온 길은 아득하도록 길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내일 모레가 이순(耳順)인 것을.

매월당은 이제 몇 달만 더하면 나이가 육순이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것이 이 봄에 들면서 새로 붙은 습관이었다.

오늘은 느닷없이 울릉도를 생각하였다. 그러자 자연히 삼십여 년 전에 떠나간 천석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 곁들여서 시도 한 수 떠올랐다.

 

삼신산 이야기 들을 만큼 들은 터라                            玄洲篷島飽曾耳

신선놀음이나 하면서 한세상 잊자 하니                        思欲仙遊謝世氛

마침 울릉도가 알맞다는 말 있어                                人說羽陵?避隱

높이 올라 바라보니 아득하기 구름일레.                       登高試望渺如雲

 

금오산에 살면서 한동안 동해로 나와 노닐 적에, 선사의 성류굴(聖留窟)을 거쳐서 평해의 월송정(越松亭)과 망양정(望洋亭)을 노래하던 끝에 <우릉도를 바라보며(望羽陵島)>로 제하여 천석이의 일을 잠깐 생각해 봤던 시였다. 천석이는 그 후로 아무 소리가 없었다. 뜻을 이루었기에 다른 말이 없으려니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러나 심기가 마냥 흐뭇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석이의 일만 보더라도 신선이 정녕 따로 없지 않은가 싶을 때마다, 유문(儒門)을 열지 않았으니 유가(儒家)도 아닌 듯하고, 불문을 열지 않았으니 불가도 아닌 듯하고, 도문을 열지 않았으니 도가도 아닌 듯하고, 그 셋이 뒤범벅이 되어 두루뭉실한 무엇인가 하면 그도 아닌 듯하고, 아닌 듯하면서도 아닌 것이 아닌 듯하고, 그렇게 듯하고 듯해서 듯하고 듯한 몰골로 그럭저럭 나이 육십의 턱밑에 다다른 현실을 느낄 때마다 허망하고, 허무하고,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심사가 되는 것이었다.

무릇 육십줄에 바짝 다가선 나이란 대자로 재거나, 줄자로 재거나, 곱자로 재거나 간에 앞날은 더이상 재기가 어려울 뿐더러, 마땅히 계한(界限)은 있을지언정 기약이란 없는 나이인 것이었다. 그 아무 무엇도 아닌 몰골로 그렇게 이르렀다고 한다면, 앞으로 그 무엇이 기어이 되리라거나, 그 무엇에 영 못 미치리라거나, 그 무엇에서 오히려 지나치리라거나 하는 따위의 앞날에 대한 어떤 기약도 막연해지는 나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은 대체 무엇이더란 말인가.

매월당은 그에 대한 답도 생각하고 있었다.

다된 미완성.

아직까지는 그것이 답이었다.

그러나 매월당은 또 물었다. 그리고 또 답을 하였다.

그러면 다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해서,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한다고 한들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할 수 있는 날은 또 얼마나 된다는 것인가.

이날토록 걷는다고 걸어왔지만, 그 걷다가 미끄러졌던 길이 바로 이 길이 아니었던가.

걷는 사람들이 이른바 산행야숙(山行野宿)을 꺼렸던 것은, 산길을 가던 이가 날이 저물었다고 하여 산에서 가까운 곳에다 잠자리를 정할 경우, 네 발가지 짐승들에게 사냥감이 되어 주기가 십상인 까닭이었다.

매월당 자신도 그것을 경계해 왔다. 가다가 때로 자리를 잡고 쉬더라도 반드시 도회에서 쉴자리를 찾지 않았으니, 머리 검은 짐승들의 사냥감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머리 검은 짐승들이 먹이감이 되는 꼴 그 한 가지만은 마침내 면한 셈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다음은 또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 있으며, 앞으로는 무엇이 더 있을 것이란 말인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냥 이대로 있기만 할 수 있는 날마저 얼마 안 되리라는 것이, 그것도 짐작만으로 겨우 하나 있다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찍이 웃으면서 지하로 돌아갔던 사람들과, 울면서도 굳이 늦도록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과의 차이였더란 말인가.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魂?歸來無四方)'.

매월당은 그 귓글을 자주 되뇌었다. 소쩍새는 으레 돌아감만 못하다고 이르고, 그 자신은 으레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없다고 읊었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언제나 옛임금의 혼이었지 매월당 자신의 혼은 아니었다.

어이하여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산이 있지 않은가. 강이 있지 않은가. 구렁텅이가 있지 않은가. 바다 밖이 있지 않은가. 어이하여 이 내 한몸 버려 둘 곳이 없을 것인가. 소쩍새는 또 으레 서쪽을 부르면서 울부짖었지만, 옛임금의 혼이 아닌 바에야 구태여 서쪽만을 찾을 것도 없는 일인 것 같았다.

혼이여 돌아가자.

매월당은 어느덧 설악산에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을 혼자서 키우고 있었다. 겨우내 몸져 누워 자리보전을 하는 동안에 슬며시 움텄던 생각이었다.

다시는 못일어나게 할 줄 알았던 병이 설을 쇠면서부터 누꿈해지더니, 이제는 뜰에 나와서 볕을 쪼이며 돌아가는 새 떼를 여겨볼 만한 여유까지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매월당은 그 여유를 전에 없이 귀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설악산에서 떠나보고 싶은 마음을 더욱 도스르게 된 거였고, 들앉으나 나앉으나 묵은 일들을 되새기며 가벼운 생각으로 소일을 하는 것도, 그렇게 마음으로 하고 있는 떠날 채비 가운데의 하나인 것이었다.

 

(298~301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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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도-물 자체

<매월당 김시습>(이문구 지음, 문이당, 1993)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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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부처의 도는 굳건한 마음을 펴고 결단성 있고 열렬한 뜻을 일으켜서, 뜨거운 자비심으로 몸을 닦고 실상(實相)으로써 물(物)을 맞이하여, 삶과 죽음을 영영 끊어버리고도 항상 살고 죽는 마당에 처해 있으며, 이미 번뇌를 버리고도 항상 번뇌의 울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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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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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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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 객이었다. 손, 길에서 살아온 길손이었다. 길에서 살면서도 길에서조차 주인일 수가 없었던 덧없는 나그네. 자리가 없어서 떠돈 나그네였고, 그것도 여느 나그네와 달리 갓쓰고 헤매는 중이었다.

길, 길도 가까운 데서부터 쳐서 먼 편이 되거나 먼 데서부터 쳐서 가까운 편이 되는 길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길이 저절로 붇는 아득한 후미길이었다.

그 길을 걷고 걸었다. 그리하여 속절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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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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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역사 소설 <매월당 김시습>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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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떼가 소리로 점을 찍어 가며 건너간 하늘에 노송 한 그루가 빈자리를 메웠다. 솔은 제물에 삭아서 떨어진 삭정이의 마들가리에 곰이 피도록 늙더라도 머리는 언제나 청솔이어서, 반쯤 취하여 먼발치기로 건너다보면 마치 금방 단장을 마치고 일어나 울짱너머로 밖을 엿보는 앳된 기녀의 운계(雲髻)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취안에 얼비친 객기의 잔재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다. 솔은 노송일수록 청운(靑雲)을 형용할 때가 많았다. 송라(松蘿)가 켜켜로 뒤덮은 노송은 송운(松韻)이 길었고, 송운이 긴 노송은 송도(松濤)도 또한 힘졌다. 그러나 청운이란 것도 객기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송홧가루가 안개처럼 자욱하고 는개처럼 휘날려 흩어지고 나면, 한 덩이의 청운도 신록을 빌어서 치장한 한 그루의 청송으로 돌아가 있게 마련이었다. 매양 두고 보아 왔기에 알지만, 사람이란 대저 미욱스럽기가 한량이 없어서 비록 저도 모르게 미혹에 빠지기를 동짓달 야삼경에 물마시듯 하더라도, 솔은 소담하고 아리따운 운계라거나, 일찍이 시들어서 못내 가슴이 저린 지난날의 청운으로 착각할 만큼 그리 신기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노송은 또 그 허다한 산지일모(山之一毛, 초목)의 한가지로 가벼이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하다가 못다한 듯한 느낌이 접히는 것도 일쑤 겪어 본 감정이었다.

매월당의 망막을 차지하고 있던 노송이 율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곧 <영마루의 노송(嶺上老松)>으로 제영(題詠)하였다.

 

모든 초목이 겨울을 타는데                                   歲寒百初彫零後(세한백초조령후)

영마루의 솔 하나 그대로구나                                只有嶺上松獨秀(지유령상송독수)

줄기는 비바람에 늙을수록 굳세고                          幹排風雨老逾壯(간배풍우노유장)

너럭바위에 뿌리내려 기운 채로 견딘다                    根盤石上偃不仆(근반석상언불복)

혹이 있으니 먹줄은 맞지 않을 터                            臃腫不中繩與墨(옹종부중승여묵)

생김새가 그런 것도 신령의 보호라                          奇怪怡受鬼神祐(기괴이수귀신우)

그대 보지 않았던가 봄을 다투던 것들                    君不見春前桃李競嬋姸(군불견춘전도이경선연)  

봄바람에 며칠 안 가 지고 말던 것을                        不日又被春風瘦(불일우피춘풍수)

보굿마다 터져서 이끼는 끼었지만                           紫鱗慘裂襯莓苔(자린참열친매태)

굵은 가지 흰 것으로 장수할 걸 알겠구나.                  大枝輪囷知汝壽(대지륜균지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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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51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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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인가?

역사소설 <매월당 김시습>(이문구 지음, 문이당, 1992)에서 마음을 머물게 하는 글월이 있어 발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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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으로 가는 길은 산이 산처럼 있고 바다는 바다처럼 있어서 예나 한가지로 풍광이 명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산수와 뜬구름만으로 일러서는 아니 될 것이 또한 풍광이기도 하였다.

풍광은 모름지기 민생과 더불어서 이야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풍광이란 것이야말로 민생이 피폐하고 암담한 다음에는 비록 금강산의 만물상이라고 하더라도 천하제일 강산은커녕 한갓 꿈자리 사나운 바위츠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척으로 가는 길이 바로 그러하였다. 바다는 사납고 산은 거칠었다. 갯가난 산기슭에 잔뜩 웅송그리고 있는 인가들의 꼴이 그만큼 볼썽사납고 너절한 탓이었다. 그런가 하면 후미진 변방답게 사납고 거친 것이 제격이라 할 길바닥은 영판 딴판이었다. 말 그대로 탄탄대로가 그것이었다. 길이 훤하고 판판한 정도로 인가가 찌부러들고 우그러져서 대낮에도 어스름녘처럼 어둑할 뿐이었다. 그 동안 삼척에서 금강산까지 중앙의 대소 관원들과 고량자제들의 관광행각이 여북이나 잦았으며, 외방의 수령방백과 토반호족들의 유람 행렬이 오죽이나 질탕하였으면 길이 나도 이렇게 났겠는가 싶은 것이었다. 길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호된 부역으로 민력(民力)을 쥐어짰을까. 고을 아전들은 그를 기화로 하여 또 얼마나 바삐 뛰어다니며 민생을 주장질하여 제몫을 여투기에 급급했을 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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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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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가리와 나쁜 대가리..

일요일에 학회의 노선배 모친상 문상을 갔다.

거기서 아주 오랜만에 선배 한 분을 반갑게 만났다.

그 선배가 수염도 안 깎은 내 몰골을 보더니만 한마디 하셨다.

- 옛것을 좋아하는가?

- 네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 선배께서 가방에서 무엇을 하나 꺼내어 나에게 건네신다.

책이다.

그러고선

- 너를 보자마자 너와 이 책이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준다.

알라딘에서 일천 원 주고 산 책인데, 소장하려고 산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었는데...

책 이름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이문구 선생께서 1992년에 쓰신 역사소설이다.

처음 부분을 읽었는데, 통쾌한 부분이 있어서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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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은 소주 두 종발을 거푸 들이켰다. 안주는 정인지의 소식(정인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 좋은 대가리를 좋지 않게 굴리는 것은, 나쁜 대가리를 나쁘게 굴리는 것보다 훨씬 흉악한 법.

선행이 조심성 있는 어조로 곁다리를 들었다.

- 그이는 그래도 다소의 독서와 저작은 있지 않습니까.

매월당은 웃으면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광에 추수를 모두 쟁여 놓았는데 쥐란 놈이 벽에 구멍을 내고 드나들면, 그 쥐구멍이 광의 통풍을 돕게 되니 다소의 득도 없지 않다는 말이것다.

선행은 점직스러운지 입을 다물었다.

매월당은 따라 놓은 잔을 비우고 나서 애써 성미를 누그려가지고 말했다.

- 인지는 그 다소의 독서와 저작으로 인하여 그 동안 쌓아올린 악이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니, 광에 뚫어 놓은 쥐구멍도 공덕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구나.

매월당은 취기가 오른 뒤에도 어조에는 높낮이를 두지 않았다.

- 대저 사람이 산에 오르면 먼저 그 높은 것을 배우려고 할 줄 알아야 하느니. 또 물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걸 먼저 생각하고, 돌에 않으면 그 굳음을 배울 걸 생각하며, 소나무를 보게 되면 그 푸름을 배울 걸 생각하고, 달과 마주하게 되면 그 밝음을 먼저 배울 걸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대가리를 제대로 굴릴 줄 아는 자의 모습이니라. 허나 장차는 저 인지를 따라가서 대가리를 제대로 굴리려는 자가 매우 드물 터인즉, 두고 보면 알려니와 필경 산에 오르면 먼저 그 편한 길부터 알고자 기웃거리게 되리. 또 물을 만나면 그 흐름에 얹힐 꾀를 궁리하게 되고, 돌에 앉으면 그 차가움부터 생각하게 되며, 소나무를 보면 그 오래 사는 수를 생각하게 되고, 달을 마주하면 그 은밀함을 생각하게 되어, 좋은 대가리를 좋지 않게 굴리려는 자가 비온 물꼬에 송사리 몰리듯이 꿇을 터이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장차 이 백성들에게 뿌리 내릴 불운의 싹이 아니겠느냐.

선행은 저만치에서도 들리게끔 숨을 내리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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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씀, 문이당, 1992, 30~1쪽에서 발췌

 

나는 좋은 대가리일까... 아니면 나쁜 대가리일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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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서울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이별이 희망이다...

감기와의 아름다운 이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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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니!!

올해 들어 크게 앓았다, 두 번씩이나...

1월 초에 8일을 꼼짝도 못하고(밖에 한번도 나가지 못한 채) 끙끙 앓았다.

그런데 2월 들어서, 정확히는 2월 1일부터 2월 16일까지 밖에 한 번도 못 나간 채,

감기 몸살로 된통 앓았다..

올 겨울은 앓다가 볼 일 다봤다...

오늘은 정말 큰 맘 먹고 학교 도서관에 왔다..

집에 들어가기가 겁난다..

내일 또 퍼질까봐...

 

혼자 있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같이 있는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오타쿠(?)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집에 처박혀 있으면 집밖에 나오기가 싫다..

나오기 싫어서 집에 처박혀 있으면 또 얼마나 한심한 모습을 보게 되는지...

햇볕 잘 드는 따뜻한 남쪽에서 살고 싶다...

 

내일도 무조건 나와야지..

근데 나올 수 있을까..

두렵다.. 공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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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연속 학교에 나오고 있다.

반길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밤에 잠을 잘 못 이루고, 오후 늦게나 학교에 나오고 있다..

아침에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다음 주부터 개강이며, 1교시 수업이라는 생각으로 생활을 '전회'해야 할 듯...

그리고 다시 운동을 재개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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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

<<목격자들 2>>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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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가득 찬 뭇별이 모두 하나의 세계라네. 별들로부터 본다면, 지구 또한 하나의 별이지. 단 하나의 중심 따윈 없네. 무한한 우주에서 모두가 저마다의 중심이니, 지금 여기에서 중심의 삶을 충실히 살고 정성껏 이야기 나누면 그것으로 아름답네."

 

(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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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목격자들 2>>(김탁환 지음, 민음사)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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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모든 곳과 통한다. 또한 바다는 모든 곳으로부터 끊어진다' 이 문장 어떠한가?"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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