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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가끔가다, 나를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이 물어온다.
명색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니, 그런 질문을 할만도 하다. 솔직히 별 답이 없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생각을 하게된다.
이런저런 토론을 곁들여 대답을 하기는 했다.
내가 만들려는 영화
1. 몇몇의 사람들, 백명(?) 혹은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당신이 만든 것을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 것에 관해서 심각하게 같이 토론해 봐요.'라고 말하는 영화
2. '영화제작 행위'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소외된 노동을 하지 않는 것
- 이때, '관계자'라하면, 극영화의 경우,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이 되겠고, 다큐멘터리라면, 소수의 스태프와 소위 사회적 배우(social actor=출연자) 가 되겠다.
-영화제작이라는 협력적 노동이 참여한 스태프들에게, 소통의 즐거움, 성찰의 계기, 화두의 발견, 새로운 감성, 시선의 확장, 영감 , 새로운 착상 등 '이윤' 을 넘어선 선물나누기가 될 것.
-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찍히는 사람들에 대한 카메라의 절대적 우위'라는 구조적 위험성을 명심하고 그것을 극복할 세심한 대안들을 마련할 것.
3. 스스로 생각할 때, 쪽팔린 영화적 장치 (술수)를 사용하지 않는 것
-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더많은 관객으로부터 더 빨리 시선을 끌기위해, 또는 연출자인 나자신의 숙련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너무 같잖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게 표현하면 더 극적이지 않을까? 이렇게 해야 나의 무지나 무신경이 좀 더 감춰지지 않을까? 등등'
4. 소망 : 죽기 전에, 100년 쯤 후에 몇몇 사람들이, 어느 공공 아카이브에서인가 내가 만든 영화를 빼보곤, '음, 100년 전의 사람들중에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구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싶어.' 라고 생각하는 영화 5 편 정도 만들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1. 현재의 미디어 구조에서 주류의 '상영 및 방영(보여주기-보기)' 시스템은 '제작자의 인기확장과 이를 통한 이윤확보'라는 써클에 결박되어 있어서, '소통'과 '교감' 이라는 영화제작-보급활동의 본래의 의미를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 현재의 대자본이 주도하는 상영시스템은 '수백만을 일거에 감동시키는 그런 영화'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조장한다. 자본의 이윤확보 써클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주로 '투자비를 회수해야한다.' 라는 명목이 대중들의 비판적인 의식을 무마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혹은 그의 정신이) 일거에 동시대의 다수의 공동체 사람들의 정서를 쥐락펴락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 아니라, 특히 요즘들어서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의제화된 욕망이다.
- 나는 나의 영화를 보아준 사람들이 수십명이든, 수백명이든, '대안적 상영운동'이 발달하여 '수천명이 되든, 그들간에, 혹은 그들과 내가, 오손도손, 왈가왈부, 속삭이며 논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영화제작과정은 그 자체가 삶, 노동, 소통의 과정이다.
- 영화제작은 나 외에 누군가와 협력작업을 해야하는 작업이다. 즉 만드는 이들의 공동의 열의와 창의적 노동이 수반되는 활동이다.
- 그리고 그 협력노동과정은 참여한 사람들의 '삶(생활)'이기도 하다. (그동안 그들은 호흡을 하고, 정신적,감성적 육체적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조금 늙는다.)
- 자본주의는 '자아실현' 따위가 아니라, ' 지위 = 돈 = 편하고 폼나는 삶'을 위하여 '노동'을 하라고한다. 그러니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 하라' 고 강제한다.
- 우선, 나는 지금의 사회시스템에서, 생존에 불가피한 만큼의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기는 하겠지만, '돈'을 벌기위한 이윤활동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영화제작'이라는 노동을 하고싶진 않다. 혐력하는 사람들도 '돈을 위하여' 활동에 동참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3. 설득력을 강화하는 장르적 장치에 기대는 일은 '낯간지럽다'
- 출연자를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순수하게, 불쌍하게, 매력적이게' 그려내거나
- 사건들을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 극적이게, 아니러니컬하게, 역설적이게, 환상적이게, 정교한 인과관계를 암시하여' 재현하는 것 등은 시간이 조금 흐른후에 보면, 참 낮간지러운 일이다.
- 만드는 이와 감상하는 이 간의 '보다 친밀하고, 보다 의미있으며 소중한 소통' 은 그런 잡스러운 장치와는 별로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아닐까?
4. 이거 지나친 욕망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10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이, 자본에 의한 계급구분, 소수 인간들의 타 계급과 대지에 대한 착취가 계속되는 사회라면 어쩌지?
그 전에 자본주의가 전쟁으로 지구의 생명들을 멸종시키는 짓거리라도 하면, 100년 후의 사람들과 소통해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도 도루묵이겠군.
나이 든 여성노동자를 '어머니'라고 의제화시켜 표현하는 일이 노조의 집회현장에서 종종 있는가봅니다. 뭐, 이것은 그 발언자가 ,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년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정말 자신과 가까운 '어머니', '이모,'고모' 들의 모습이 연상되었거나, 아니면 어떤 친밀한 연대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칭했으리라고 (좋게 )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이 것이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서 장년의 남성 노동자나 활동가를 '아버님', '아저씨', '삼촌(엉클)' 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어쨋든 '어머니'란 이름은 사회적 지위, 혹은 '가족내에서의 관계'를 표현 하는 말이고요,
국어사전을 들춰보니
'자녀를 둔 여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는 말.' 이 이 단어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적혀있군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족 관계 속에 있는 중년 여성이 상당히 많을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자녀를 낳지 않는 분, 낳을 수 없는 분, 자녀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분,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돌보는 분, 아니면, 한국의 현재의 제도나 현재까지의 관습이 포괄하지 못한 다른 가족적 공동채 생활을 하는 분, 혼자 지내시는 분, 또는 그 내용을 제 3자가 잘 알 수 없는 삶을 살고계신 분 등등...
그런데, 보통 낯선 성인 여자에 대해서는 보통 뭐라고 부르지요?
...
저도, '아주머니!'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그 외에 막상 떠오르는 단어가 없는 것을 보면..., 뭐, 음... 어쨋든 복잡한 지하철에서 많은 짐 때문에 물건을 떨어뜨린 사람을 보면, '아주머니! 장갑을 떨어뜨리셨네요!' 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참,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뭐 그래도, 영미식의 '유 (You) ' 따위 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각설하고,
그런데, '어머니'란 말에는 다른 뜻도 있군요.
' 사랑으로써 뒷바라지하여 주고 걱정하여 주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이랍니다.
'뒷바라지'와 '걱정' 은 공동체에서 필수적인 것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어머니 만큼은 그것을 의무로 해야하는 존재' 처럼 여겨지는 현재의 상황을 묵인 용인하는 효과가 있다고 느껴지는군요.
따지고 보면, '돌보기', '걱정하기(배려하기)' 는 '어머니'들만이 해야하는 것이 절대 아니지요. 또 이것은 모든 공동체의 대다수의 많은 구성원들이 서로 나누어야하는 일일겁니다. ( 이 것은 전통적 가족관계가 강했던 10여년전 전까지는 '돌보는 일이 뭐가 힘들어. 그것은 다 큰 여자들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것 아니야? ' 라는 식이었다가, 지금으로서는 점점 더 '상품'처럼 되어가고 있지요. - '돈이 없냐? 돈을 벌어서, 그 돈을 들여서 노동력을 사서 돌보는 일을 남한테 맡겨라. 돈이 많으면 (물질적으로 폼나는) 돌봄이 가능하다. 네 집 아이들이 외로와서 상처받냐? 그러니 투잡, 쓰리잡 마구 뛰어 돈을 벌어야지 !' 가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이 되었으니까요.)
저는, 일전에, 제 딸의 일로,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 간 적이 있었는데, 교사가 저를 '아버님'이라 부르더군요. 다른 분들은 '대표님' 혹은 '어머님' 등으로 불리고...
그 자리는 그래도, 제가 '자녀의 아버지' 지위란 명확한 지위로 참여한 것이었는데도, '대표'를 제외만, 많은 학부형들이 '어머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대기업의 처분과 탄압에 저항하여, 집회현장에서 싸우는 많은 '아주머니'들(이거 말고 더 나은 일반지칭이 있엇으면 정말 좋겠군요.)은 위의 두 가지의 정의에 따를 때, '어머니(성격)' 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이 매우 껄끄러운 분들도 계실거구요.
또 이분들이 '어머니'라고 불리는 순간, 또하나의 낡은 족쇄 하나가 무심코 그들에게 채워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단어에 붙어있는 '(다른 지위의 사람들보다 더욱 더) 돌보아야 하는 자, 더 남을 배려해야하는 자' 라는 함의 말이지요.
복면과 마스크를 쓰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잡아넣어야겠다는 집시법 법률안이 나왔다.
미친 놈들...
아래의 사람들을 다 잡아 넣어라 !
이들은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인 KBS의 [열린채널]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던 독ㄹ비영호ㅘ제작자들이다.
06. 06 10 꿈돌이
세련된 신자유주의자들도 ‘지금의 한미FTA를 반대한다'는 식으로 돌아선다면?
6월 4일, 일요일 [일요스페셜]은 현재국면에 일정한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과 FTA를 실제로 맺은 나라의 상태’를 지상파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뭐가 뭔지' 아직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미국과의 FTA란 무엇인지... 그 부작용을 생각하게 하는 일정한 계기를 제공할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음..., 최근의 분위기로 봐서, '협정으로서의 FTA에 대해서만큼은, 유보하자는 견해‘가 어느정도 여론의 분위기로 떠오르지 않을까 한번 예상해 봅니다. 주류미디어들의 일부도 서서히 '신중론' 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국내의 자본가'들 조차도, '미국측의 1차 협정초안'에 비해 한국 정부 측의 어설픔이 드러나자, '미국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할'수도 있는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까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한국의 자본들은, 노무현도 암시하고, 한국국적으로 출발한 자본가들도 암시하는 바, '구조 개혁, 규제철폐' 등을 통해, '알짜배기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여 '자기들이' 먹는 것은 내심바라지만, 더 힘이 셀 수도 있는 초국적 자본과 이를 두고 '직접 경쟁'하게 되거나 그들에게 빼았기는 상황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어떤 공기업을, 삼성이 먹는 것은 괜찮은데, 엔론이 먹는 것은 문제아냐?’ 라고 생각하는 보통사람의 ‘국가주의적 심성’을 부추기면서, 자신들의 본질을 감추며 동시에 이익을 챙기려할 게 뻔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한미 FTA 반대' 만 외치는 것은, 앞으로의 국면에서, 그 의미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듭니다. 열린 우리당 내에서도, 한나라당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자본들도 '일단 지금의 한미 FTA는 위험하다'라고 말하며, 서서히 현 정부와 거리를 두고 차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 우리당의 이번의 지자체 선거 참패를 보세요. 정치가로서 생명을 유지하려는 누가 노무현 편인 척 하겠어요? )
이런 시기에, 좀 더 노련한 (듯이 보이는) 신자유주의들이, 점잔을 떨며, ‘나라의 경제개혁(?)상태나 우리국민의 상태를 보거나, 정부의 무능력을 보건대, FTA는 미루는 것이 낳을 듯하다’ 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보수적 정치세력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무현이 FTA추진’이라는 뻘 짓을 하는 것을 속으로 즐기면서, (‘노무현이가 욕을 많이 먹어가면서, 무지막지하게 민중세력을 뭉게놓고, 자본가들을 위한 정지작업을 해 놓으면, 손 안대고 코푸니, 좋은 일이지...’ 라고 내심 부추기면서, 1년 반 후의 대통령선거에서 자신들이 집권하면, 좀 더 편하게, ‘FTA를 추진하는 것이 낫다’ 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차기정권을 노리는 진짜 신자유주의 세력들은, ‘민중들의 고통이 신자유주의적 재벌연맹들의 기획’임을 감추고, 민중들의 저항의 방향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것을 교묘히 회피하면서, 대중여론전에서는 '국익을 위해서 미국과 FTA를 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와 같은 소모적이고 지엽적인 논쟁으로 축소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목적이 교란되고 혼돈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세계도처에, 특히, 한반도에 항시 존재하며 강화되는 신자유주의적 힘'을 민중의 지혜와 저항으로 저지시키고, ‘대안 사회 / 대안 세계화의 희망과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 이라 할 것입니다. 냉정하게 표현하면, ‘무현과 부시 혼내주기’가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것이죠.
지난 상영회의 강의에서 송유나 활동가가 말했듯이, 이미 '가스'는 기업들의 손에 있고, 물과 전력은, 언제라도 무너질수 있는 1-2퍼센트의 지분제한 조치만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형국에서, 우리의 운동의 목표는 결국, '보다 많은 민중들이 보다 깊이, (한-미 간의 FTA추진 국면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음모 전반에 대해 저항할 수 있도록 설득해내고 민중적 대항전선을 강화하는 것' 입니다. 남미의 민중들이 미제국과 자본들의 대항 전선을 형성하면서 외치는 구호 '단결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는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신념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초국적 자본과 한국의 초국적 자본, 그리고 이미 한 몸이 되어가는 그들의 기획이 ‘한미FTA를 유보’한다고 멈춰지겠습니까? 이미 정치적으로 파산한, 노무현 대통령을 바보로 만든다고 초국적 자본의 음모와 공세가 저지됩니까? - 본질에 대한 민중의 각성과 저항이 조직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그는 이미 충분히 ‘웃음거리’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지금 '한-미 FTA저지투쟁'의 중요함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하루가 멀다하고 확인하고 있는, 민중들의 피곤한 삶, '한-미FTA' 그리고, 그 배후에 깔려있는 '맹목적 자본의 음모'까지를 연관시켜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미 (최소한 그들끼리는) 자신들의 목표에 대해, 공공연히 말해왔습니다. - (아래 정리한 것은 지난 5월 17일 김종훈이 미국정부와 협정문초안을 교환할 무렵, 무역협회, 대외경제정책연구원등이 연 [한미FTA 민간대책위] 토론회에서의 발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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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TA는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다. 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국내 기업들의 구조조정’
(= 이는 민중들을, 특히 공공기업들의 노동자들을 파트타임 노동자로 만드는 것, )
2. ‘생산성 향상’
(= 노동비용을 줄이거나, 싼값으로 함부로 부릴 수 있는 이주노동자를 사용하거나, 기업의 주요 생산기지를 5-8만원의 월급만 줘도 되는 다른 나라로 가는 것 )
3. ‘규제철폐’ (기업들이 금융뿐 아니라, 교육, 의료 등으로 자유롭게 장사해먹기, 환경파괴를 손쉽게 하기, 어떠한 공공적 간섭도 받지 않기, 그리고 자본이 자유로이 전세계를 날아다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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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자본은 'FTA'라는 수단이 설사 막히더라도, 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다른 수단'을 찾을 겁니다. (굳이 FTA가 아니라도, 이들은, '구조조정', '폐업', '공공서비스 민영화', '농촌 공동체의 해체' 등을 꾸준히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꾸준히 해왔죠. '노무현'은, '외부충격(한미FTA=수단)'으로 '경제선진화(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개편= 목적)'를 대중 앞에서 당당히 주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그는 ‘한미FTA로, 경제구조 개혁!’ 이라는, 민중들과 생명체들의 선순환구조를 파괴할 매우 위험천만 기획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눈에 FTA의 부작용이 드러날수록, 이에따라, 민중들의 각성이 높아져갈수록, 세련된 남한의 신자유주의자들은, 협상의 교착상태, 혹은 민중생활 파탄의 책임을 노무현의 품성과 능력문제로 돌리며, '자신들의 본질은 감추는' 전술로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경제성장과 경제 선진화인데, 노무현 행정부는 FTA를 한다하니, 두고는 보겠는데, 준비부족, 철학부족, 능력부족이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노무현이 무능해서 미국에 당당히 대응하지 못했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 대안적인,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영화'가 '이윤'이 목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 혹은 '소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목표는 뭡니까? 그리고 주류미디어와, 세련된 신자유주의자(?)도 ‘한-미 FTA는 시기상조’라고 말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때, 우리는 민중들과 어떤 소통을 해야할까요?
결국, 민중들의 각성과 저항이 조직되지 않는 한, 한미FTA 성사여부와 관계없이, 자본의 기획은 은밀하게 계속될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실천단은,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면서도, 동시에 조급하게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리사회를 위협하는 구조적인 악에 대한 좀 더 현명한 판단속에서 우직하고 꾸준히 실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소 먼 여행이 될 수도 있으니, 서로 지치지 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서로의 꿈과 상상력을 업그레이드 시켜가며 실천해야겠습니다. 많은 독립영화인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테러리즘 비판 : 실행을 통한 전선
상호부조의 원리를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했던 크로포트킨은 다가올 새로운 사회가 민주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회로 가는 방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봤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이 혁명이후에 세워질 사회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민들이 혁명의 주체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혁명은 그 당사자인 노동자, 농민, 학생의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서만 참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 방법 역시 가능하면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예컨대 고귀한 방식으로 이뤄질 때에만 고귀한 목적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 크로포트킨의 주장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은 비밀결사나 혁명조직이 아니다. 비밀 결사와 혁명조직의 임무와 역사적 사명은 혁명에 정신을 불어 넣는 것이다. 그리고(외부의 상황도 허락되고) 혁명의 정신이 준비됐을 때 최후의 박차를 가하는 것은 선도적인 그룹이 아니라 사회의 하부조직 바깥에 머물러 있는 대중이다.
실제로 크로포트킨은 한때 바쿠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음모주의자 네차예프를 강력히 비판했고,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나 비밀조직을 완강히 거부했다. 크로포트킨이 바쿠닌과 달리 어떤 비밀조직도 만들려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조직에 대한 거부는 자연스럽게 테러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사실 러시아가 혁명가들(특히 인민주의자들) 중에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릴 만한 인물들이 많았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1905년 러시아혁명 이후 인민들과 동떨어진 소규모 비밀모임들이 조직적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다니던 것을 우려했다. 물론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 테러리스트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선천적으로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차르와 오크라나(Okhrana)라 불렸던 비밀경찰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반란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오크라나는 심지어 유럽 각국으로 첩자들을 보내 러시아의 망명 혁명가들을 감시하고 본국으로 잡아들였다. 이처럼 차르를 반대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쿠닌이 테러를 혁명의 도구로 인정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크로포트킨 역시 활동 초기에는 차르 암살을 포함한 여러 방식의 테러를 지지했다. 물론 차르에 대한 증오보다는 억압을 당하는 인민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로포트킨은 점점 더 폭력과 멀어졌다. 사실 크로포트킨은 1880년 『반란자』에 기고한 글 「반란의 정신」을 통해 이미 테르리즘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크로포트킨은 이 글에서 "며칠에 걸친 단일한 행동이 수천 개의 팸플릿보다 선전에 더욱 효과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실행을 통한 선전'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이 주장에는 인민들의 반항적인 본능을 말과 글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도 일깨워야 한다는 아니키스트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처럼 크로포트킨 역시 말로만 떠들어대는 '종이 위의 혁명', 즉 이론상의 혁명을 비판했다. 요컨대 아나키스트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는 방식은 곧 행동이었다. 이런 면에서 실행을 통한 선전도 테러만큼이나 반혁명 세력과의 물리적 충돌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행이 곧 테러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행동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 모든 형태. 실제의 상황, 분위기, 가용수단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익살맞게, 그러나 항상 대담하게. 때로는 집단적으로, 때로는 순전히 개별적으로. ...... 무엇보다도 이런 행동은 인민들의 용기를 일깨우고 반란의 정신을 부채질하는 가장 현실적인 본보기를 통해 수행된다 (「반란의 정신」).
모든 형태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테러도 배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기 없는 무차별 테러, 즉 부르주아지와 반동분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폭탄을 던지는 테러는 크로포트킨이 강조하는 "가장 현실적인 본보기"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형태였다. 결코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지 않았던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테러는 인민들의 용기를 일깨우기보다는 인민들이 아나키즘을 신뢰하지 않게 만드는 잘못된 행동일 뿐이었다.
- 冊,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 中에서
# 이 책의 '책머리에' 보면
아나키즘은 매혹적이다. 아나키즘에는 푸른 초원을 힘차게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로움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자유로움,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이. 아나키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듯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도자나 선장이 없다는 없음(無)의 실재보다 누구라도 지도자나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有)의 여백이 바로 아나키의 질서이다. 고정된 질서를 억지로 강요하면 곧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수한 혼돈, 그것이 곧 아나키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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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브리치는 『상호부조론』이 인기를 끈 이유를 두 가지로 꼽는다. 첫번째 이유는 『상호부조론』이 당시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 준 가장 성공적인 최초의 연구였다는 점이다. 『상호부조론』을 계기로 아나키즘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던 맑스주의에 맞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 두번째 이유는 『상호부조론』이 아나키즘에 윤리적인원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진화뿐만 아니라 윤리의 관점에서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다. 크로포트킨에게 상호부조란 "인간 존재 한 사람 한 사람과 자신이 하나라는 인식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 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윤리의 문제를 죽을 때까지 고민했는데,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 채 후세에 남긴 그의 유작도 『윤리학』이었다("위대한 인본주의자이자 혁명적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노래"인 이 책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애브리치가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 세번째 이유도 생각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은 애초의 헉슬리와의 논쟁을 목적으로 집필했던 『상호부조론』의 논의를 확장시키며, 훗날 '아나코-코뮨주의'라고 불리게 될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 크로포트킨의 또 다른 걸작 『빵의 쟁취』(1892)와 『들판, 공장, 작업장』(1898)은 바로 그 성과물이었다. 『반란자』와 『19세기』에 기고한 논문들을 모은 이 두 권의 책은 『상호부조론』이 책으로 출판되기 전에 이미 크로포트킨의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요컨데 『상호부조론』의 인기는 이 앞선 책들의 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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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는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를 간략히 올려 볼까 합니다. | |||
‘[닫힌채널]과 같은 활동으로, 철옹성 KBS의 독선적 운영으로부터, [열린채널]을 구출할 수 있을까 ?’ 하고 생각하는 분들께
영어 관용표현 중에, ‘더 엣지 오브 더 웻지 (The Edge of the Wedge)’ 라는 표현이 있답니다. 발음이 재미있으니 관용표현이 되었겠지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제가 모르는 언어들 중에도, 그와 유사한 표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쐐기의 끝' 정도가 되겠는데요. 석유나 석탄을 태우는 동력장치들이 생겨나기 전에, 석공들은 거대한 바위를 쪼갤 때, 나무 쐐기를 사용했답니다. 나무토막으로 바위를 쪼갠다니 말이 안 된다구요? 말이 됩니다. 석공들은 바위의 떼어낼 자리에 금을 긋고 일정한 간격으로 정으로 쪼아서 작은 구멍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들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토막(쐐기)에 날마다 조금씩 물을 주는 거죠. 그러면 나무는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을 머금어 팽창을 합니다. 그렇게 몇 날 몇 밤, 혹은 몇 개월 동안, 나무쐐기들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합니다. 석공들은 기다립니다. 중간에 비바람에 쓸려나가거나 햇볕에 말라 부스러져버리는 쐐기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또 다른 쐐기를 갖다 박고, 때때로 물을 줍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쐐기들의 미세한 숨쉬기 운동은, 완고한 바위조직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던 어느 날 , 바위는 예고없이, 쩍 ~ 하며 쪼개집니다. 저는, 열린채널 도입 육년 째, 2006년 9월12일, 국회의 토론회에서, 방송위와 KBS시청자 서비스팀 실무자들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으면서, ' 앗! 그들은 거대한 바위로구나 ! 우리의 열린채널(수정)이 그 단단한 바위 속에 갇혀 있구나 !'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린채널이 숨이 막힐만하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그 단단한 바위로부터 떼어내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위를 완전히 쪼개는 것이 무모하다면, 또 그럴만한 연장도 힘도 없다면 무엇을 이용하여 열린채널을 구출하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쐐기'라는 관념이 제 머릿속을 떠돌았나 봅니다. 무모하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소중한 것을 떼어내는데 사용되는 도구 ! 조용히 숨쉬는 나무토막 ! 쐐기! <닫힌채널>은, 이제 생긴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뭐 힘이 쎈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의 사람들은, 무모하게도,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에 갇혀 있는 석영을 잘라내려 합니다. 그 걸 잘 다듬어, 우리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과 프리즘을 만들려고 합니다.
프리즘은 우리에게, 그냥 보아서는 하나로만 느껴지는 빛의 세세한 결을 보여줍니다. ‘음... 거기에 보랏빛이 있었구나. 그래 너는 초록빛이었어... 너는 우리가 겨우 일곱 빛깔로만 이름붙인 것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고운 빛깔을 가지고 있구나...’
거울은 우리에게 성찰의 시간을 줍니다. ‘그래, 나의 모습이 이렇구나. 나의 뒷모습이 이랬었구나. 내가 사는 동네가 이런 곳이었구나. 내 옆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구나.’ <닫힌채널>의 사람들에겐 다소 조급한 마음도 있습니다. 빨리 <열린채널>을 구출하여 우리 공동체의 세세한 결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프리즘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기왕의 방송물들이 거의 반영하고 있지 못한 보통사람과 작은 공동체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택 대추리에서 멀쩡한 집을 부수려고 국방부가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쇳덩이 기계들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연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기계팔과 쇳덩이 해머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하게 때려대거나 쪼아대는 크레인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구요. 우리는 그럼 무엇을 가지고 <열린채널>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끝이 뾰족한, 숨쉬는 작은 나무토막' , '쐐기'가 이런 때 필요합니다. ' 작은 정! 숨쉬는 나무토막 ! 물 ! 그리고 기다림! ' - 이것으로 바위를 떼어낼 수 있습니다. 속도, 그리고 경제적 성과에만 취한 사람들은 바위에 박힌 쐐기의 끝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그 것이 무슨 힘을 가지고 바위를 쪼개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그 작은 나무의 끝은, 장차 벌어질 거대한 균열과 변화의 발단이 되는 것입니다. 쐐기의 끝 ! 저는 <닫힌채널>에 참여하는 분들이 KBS와 방송위원회라는 거대한 바위에 박힌 작은 쐐기의 끄트머리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해머나 포클레인같이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니지요. 그리고 <닫힌채널>의 사람들은 그 동안의 활동을 통하여, ‘바위를 깨는데, 쐐기들의 존재와 그들의 인내는 불가피’하단 점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다 정의로운 미디어를 꿈꾸며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생각하자고 권유합니다. ‘와! 신난다!’ ‘우리가 물을 머금어 숨을 쉬고, 지치면 오그라들기도 하다가... 다시 물을 머금고... 다른 구멍에 또 다른 쐐기가 되고... 뭐 그런 일이 꾸준히 계속되면, 어느 순간 바위가 쩍하고 깨지는 거야! ’ ‘돌 속에 갇혀있는 열린채널을 구출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과 서로의 마음의 스펙트럼까지 보여줄 프리즘을 만드는 거야. 정말 신나는 일이야.’ 자! 이제, 이 쐐기들의 운동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은 [닫힌채널]로 오세요. 그게 많으면, 바위를 깨는 것이 좀 더 쉬워지겠죠? 여기에 한번 가보세요. (http://cafe.naver.com/shutchannel.cafe) 으쌰 ! |
난 다른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흙이 될텐데...
1. 사는 동안, 생각과 마음이 넓어져서,
지난 오랜 시간,
내가 죽을 때까지 감히 알 수 없을 생명의 순환고리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던
뭇 생명들의 영혼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길...
2.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나를 둘러싼 폭압적인 국가와 그 제도, 지배-피지배의 사회관계, 망가진 야생에서 도망해버릴 수는 없는 일.
생명이기를 포기하고 그것의 부품이 되거나, 스스로 유폐된 해방구로 숨어들지 못한다면, 맞설 수밖에...
이 것이 부자연스러우며, 섭리를 거스르는 것임을 이야기할 수밖에...
3. 저항할 수밖에...
많은 경우에, 많은 시간동안,
굽히고, 오그라들고, 간사해지고, 뒷걸음 치고, 어리석게 굴 수도 있지만,
저항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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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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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만들거야?라는 질문..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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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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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잇는데...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