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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 편견 넘기

이름없음님의 [집회장에서 청소년들이 호구냐!] 에 관련된 글.

맞아요. 타자에 대한 규정에 운동권이 무감하거나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질서가 뿌린 편견들에 오염되어있는 것 같아요. '장애인'이란 말에 달라붙어있는 그림자 속엔 '불쌍함,보호가 필요함,작업효율성 떨어짐'과 같은 편견들이 숨겨져있죠. '청소년'들에 대해서도 그런것 같군요. '어른들을 공경하고 그들을 위해 재롱을 피우는 사람' 이란 편견이 묻어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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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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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갈길을 가야지 - 신자유주의시대 독립미디어전략

한미FTA 독립영화 실천단 활동이 1년이 되어간다.

'몇 편의 영상이 제작되었고, 몇 명의 활동가들이 얼마나 활동했는가? ' 와 같은 계량화된 것말고...

 

'어떻게 대안적 시선과 미학으로, 사회운동의 맹아들과 결합하여 민중적 상상력의 확장에 기여하였는가?'   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할 때이다.

 

지금 양국의 인민을 대표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관료들은 (단언컨대, 나는 한덕수와 김현종등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그들에게,  나와 내 동료들, 우리 공동체의 생명들의 삶의 환경들을 맘대로 바꾸라고 위임한 바가 없다!)   '어떻게 민중적 저항에 직면하지 않고, 자본의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제통합'을 해낼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상황은 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의 FTA의 체결여부와 관계없이,  이 질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대안적 상상력' 을 발휘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은 계속되어야한다.

 

그래서 1년 전,  [FTA 저지 독립영화실천단]을 제안한 문서를 다시 들춰본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독립영화 실천단 설립을 제안하는 메모

 

2006. 4. 12 한국독립영화협회운영위원장  꿈이

 

1. 한미 FTA저지를 위한 독립영화실천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현실인식

 

(1) 시청각미디어 제작물에 대한 통합적 이해 필요

 

주류영역에서 미디어 (콘텐츠 생산/윈도우/규제방식) 통합경향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진영에서는 ‘독립영화는 영화냐 ? 영상물이냐?’ 라는 식의 초보적이고 소모적인 담론에 묶여, 새로운 실천 전망을 내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초국적 자본들에 의한 ‘윈도우와 미디어콘텐츠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의 통합’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 기술의 발전(?)에 따른 독립영화실천의 개별화/ 분자화 경향

독립영화의 (잠재적) 생산자는 급증하였으나, 한독협의 주체와 혁신의 확장은 더디다. 새로운 의제의 개발과 전망의 소통은 부족하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독립영화운동은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 이라는 차원으로 위축되고,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에 대한 건강한 문화적 상호작용, 혹은 운동의 의미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 독립영화운동은 개인들의 ‘표현의 자유’ 운동으로 위축될 것인가? 그렇다면, 사회권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3) 미디어 관련 공적영역의 부실함 / 독립 영화진영의 개입 취약

보통사람들과 작은 공동체들을 미디어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과 발언의 주체로 만들어야한다는 사고와 실천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즉 시간과 경험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정치권력에서, 자본이 조종하는, 혹은 그와 공조하는 거대미디어 권력으로 급속히 이동했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독립영화진영이 개입한 사례들을 잠깐 돌아보면,

 

1) 재벌/관료/주류방송국 종사자 연합의 퍼블릭액세스구조 [열린채널]의 연성화/체제내화 욕망과 이에 대한 독립영화인들, 미디어 활동가들의 저항 (2005년 3차례의 분쟁)

- 삼성, 현대, 관료기구등의 지배력이 공영방송사에 미치고 있음을 확인함.

 

2) 지역방송사들의 [퍼블릭액세스 구조]에 대한 관계기관의 무관심과 이에 대한 미디어운동주체들의 대응

- 퍼블릭액세스를 ‘비전문 시민들을 이용한 영상콘텐츠 공급구조 (지역방송사들의 영리활동에 대한 보조)’ 정도로 위축시키는 조치들에 대한 강력한 대응. 이 과정에서 독립미디어 활동가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함.

 

3) 시청각문화 공적영역의 부실함

- 영화진흥위는 2010 년까지 소위 ‘Next Plus' 란 이름의 공공상영관을 전국에 100개 만들겠다고 (난데없이) 선언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으며, 최소한의 연구도 없다. 지금까진)

- 방송위와 문광부는 급작스럽게, 경쟁적으로, 각 지역도시에 ‘시청자 미디어센터’설립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추진 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정부부처간의 관할권 다툼’, ‘운영계획 없음’, ‘산업활동의 연장이라는 인식’, ‘화려한 겉모양’, ‘ 해당기관 괸료들의 권위주의적 개입 - 운영주체와 시민사회의 자율성 억압’ ‘사전 조사없는 선진국 시설 이식’ 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해 그간 독립영화진영이 능동적 대응/혹은 개입을 못해왔다.

 

4) 고단했던 RTV의 혁신과 새로운 도전

 

2년여의 혼란기를 지나고, 독립영화진영이 그 운영에 개입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이 낡은 관행의 혁신이라는 과제는 남아있다.

 

5) [독립영화 전용관] 문제를 둘러싼 진통

 

- 영화진흥위는 한독협 측에 ‘극장임대에만 1억 5000만원, 운영비는 4000만원’으로 독립영화 전용관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길 바란다.

- 한독협은 다른 인프라가 전혀 없고, 관계기관들이 오로지 ‘산업진흥’ (이는 신자유주의의 강화경향 속에서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확장’ 에 다름 아니다.)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영화전용관’이, 대안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기관이라기보다는, 기업활동의 포화에 둘러싸인 고립된 공간으로 위축되거나,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 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점, 단지 1600여개의 극장주의 한 ‘극장’이 기능을 넘어서, 이후, (상업적 경쟁이 가속화할 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독립영화와 대안문화의 소통의 기지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 ‘현재, 너무나 빈약한 공공문화영역을 방어할 방공호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 등 전용관‘에 대한 철학의 차이와, ‘국내 독립영화의 제작과 유통에 관한 사전조사가 전무할 뿐 아니라, 해외의 공공적 문화공간에 대한 기초조사도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조사와 준비를 촉구하고 있다.

 

- 독립영화 전용관의 설립과 확산 문제는 ‘대안적 실천과 상상력을 이미테이션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싸움’ 이어야한다.

 

6) 대안적(비시장적) 유통구조의 형성을 위한 담당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힘겨움

 

한독협이 지향하며 실험하고 있는 ‘공동체 상영/ 비극장상영 구조의 확장 ’, ‘독립영화상영 네트워크 건설’과 같은 활동은(이 역시 자본제 질서하에서는 ‘어리석은 일’로 치부된다). 독립영화를 ‘독점자본주의’하에서 ‘표정없는 상품-화폐교환’ 이 아니라, 만든 이와 보는 이의 콘텐트를 매개로 한 직접적인 교감/쌍방향적 소통을 지향한다. 즉 ‘돈-상품-돈’의 순환구조만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하의 생산/소비활동이 아니라, 비시장적 구조를 갖는 ‘상호교감과 토론의 자율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시작된 이 일은 크게 눈에 띄게 진척되지는 않는다. ( 15년 전 아니 10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관객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작대기를 들고, 상영장 입구에서 영화상영을 지켜내곤 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화’의 ‘비시장적 소통’은 기존의 미디어권력과 자본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독립영화인들이, 영화를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강화에 기여하는, 문화적 소통물’ 로 만들어내겠다, ‘그런 구조를 형성해 내겠다.’ 는 야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독립영화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해보자.

이런 질문에 답을 내야한다.

‘고도화된 신자유주의 질서의 일부로 편입되어 이미테이션 상품으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막강해지는 현질서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영역안으로 들어가 조용한(?)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

아니면, 힘겹지만 ‘대안적 소통구조를 찾아내고, 마련해내고, 이를 강화하기위해 실천할 것인가?’

 

그 실체를 감춘 채, 어느새 민중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게 된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야심/ 상상력/ 실천’없이 지금까지 독립영화(진영)이 지녀왔던 진보적, 공동체적 함의들은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4) 공동체내의 중대한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체제의 미비

 

여기에선, 독립영화 활동가들과 제작자들이 경제적으로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서글픈) 사실문제는 접어두자.

 

콘텐츠의 측면에서 보자면, 독립영화들은 주류미디어가 기피하는 작은 공동체들과 주제들에 대한 깊은 접근을 통해 (양은 많지는 않지만) 대안적인 문제의식을 생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제작자들은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온갖 도전을 감수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그러나, ‘생산과정’ 과 ‘소통구조’, ‘평가/비평문화의 형성’ 의 면에서는,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생산과정’의 측면에선, 점점 더 ‘개인적 창작활동’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고, ‘사회적 / 공동체적 실천’의 분위기는 약화되어간다. 개별창작자들의 경험과 문제의식은 쉽게 교류, 전파되지 않고, 타 제작자들은 그로부터 영감과 유대감을 얻지 않는다. ‘소통구조’ 마련에는 개별적 노력만 존재할 뿐, 힘을 모은 야심찬 설계는 더디다. 필자의 생각엔 진영 내에서 조차, ‘인상비평’ 이상의 상호작용적인 비평문화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즉 우리의 관심과 실천이 ‘개별제작자의 창작활동’ 에 너무 집중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환경이 독립영화진영 바깥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힘을 모아 연대하는 공동의 실천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5) 주류미디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침묵 혹은 편승 욕망

 

- IMF 이후로, 주로 제조업분야에서 일해 온 기층민중들의 삶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 인간의 삶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활동의 단위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 지난 수 년동안,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정규직화 되었다. 지금 850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은 초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기업의 계산에 따라,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쉽게 버릴 수 있는’ 생산요소일뿐이다.

- 지난 수 천년간 유지되었던 농업은 사라질 위험에 있다. 수백 만 농부들이, 뭇 생명을 기르고 순환시켰던 한국의 땅에서 햇살과 바람과 씨름하며 작물을 재배하는 일, 이 매우 오래된 일은 최근 몇 년 동안 완전히 어리석은 일로 되어버렸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

- 민중들이 영문도 모르게 사회양극화는 심화되었고,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초국적 기업중심의 세계화’는, 그 파괴력에서 (다소 수사적이긴 하지만) ‘IMF의 10배 이상의 쓰나미’ 라는 ‘한미자유(누구의 자유?)무역협정’에서 그 정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FTA가 약소국들의 공공영역을 파괴할 것이며 민중들의 삶과 공동체의 가치가 파괴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 그러나 주류미디어를 통해서는 그 연관과 구조는 거의 해명되지 않는다.

자신이 왜 항상 불이익을 당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실직할까봐 전전긍긍해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농민들에게, 자본의 유연적 지배전략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미FTA의 진행사항은 (정부의 의도대로라면) 금년이 지나기 전에 거의 모든 사안이 결정이 될텐데, 지금까지도 감추어져있고, 주류미디어는 낙관적 전망을 유포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 한미 정부간의 기왕의 관계를 고려할 때, 자유무역체제를 추동하는 초국적 기업들의 위력을 감안할 때, 시청각서비스분야, 특히 통신과 융합되어가는 방송분야에 대한 개방압력은 틀림없이 벌어지고, 이는 그나마 유지되어왔던 지금의 공영방송체계를 크게 무력화시킬것이 예측되지만 정작 방송계 내부에서 그와 같은 일을 막아내려는 대비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 독점적 이윤을 거두어들이는 거대 상업미디어기업의 일원이 되어 지금보다 나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더 관심이 가있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

 

(6) 민중운동세력과 시민운동(개혁운동세력)들이 ‘한미 FTA저지 국본 결성’

- 각 분야의 공동 대책위 결성 (500여개 시민 사회단체의 참가)

- 어떤 우려와 이를 돌파하는 상상력의 필요

각각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단체들이 모여있으며, 지향하는 가치들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대의 약화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2. 독립영화진영의 시야의 교정 혹은 확장의 필요

 

(1) 독립영화의 ‘의미’ 재점검 필요

이제 누구나 ‘다양성’과 ‘독립영화’ 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류질서(유연화된 얼굴을 한 독점자본주의)는 이제 ‘독립영화’를 ‘뭐든지 살 수 있다’ 라는 판매전략을 가지고 ‘값싸고 특이한 상품’ 으로 그들이 마련한 거대 시장의 한귀퉁이에 진열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은, 90년대 중반에 이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는 너무 다르게 되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 저항성 : 정치권력의 통제, 자본의 지배력, 주류 미디어의 획일적 가치관 유포 등에 대한 저항

- 대안성 : 주류사회가 당연한 것이라며 유포하고 강요하던 삶의 방식, 획일적 가치관, 을 넘어서는 ‘다른 가치’ ‘다른 해석’ ‘다른 상상력’을 추구하는 것.

 

(2) ‘스크린 쿼터 분쟁’을 넘어서는 사고의 필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범영화계에서 스크린 쿼터 축소저지를 위한 강력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독립영화진영이 적극 졀합할 수 없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지난 1990년대 중반이후, 영화산업이나 관계기구들이 영상문화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산업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독립영화와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이해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항의는 정당하다. (지난 10여년 동안 영화계가 산업확장에만 힘을 기울이고. 농촌의 해체와 농민 삶의 붕괴에 대해서, 비정규직의 양산에 대해서, 문화의 상품화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 바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 문제는 FTA로 표현되는 초국적 기업에 의한 지배구조가 한국사회전체 경제기반을 무너뜨릴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삶의 가치들,(사람들 간의 관계, 공동체들간의 유대, 문화적 감수성, 더 나은 사회로의 희망, 수만년 동안 내려온 생명의 순환고리) 등을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 독립영화운동을 ‘돈벌이로서의 영화제작/유통’ 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소통’행위로서 사고하는 우리로서는 ‘공공영역이 위축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자율이 약화되고 그 대신에, ‘몇몇 대기업이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를 그냥 두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3. FTA저지 독립영화 실천단 (명칭 미확정) 구성 아이디어들

 

(1) 실천단의 활동 목표

- '한미FTA 저지‘를 위한 사회운동단체의 활동에 에너지와 영감을 주고 받는다.

- 민중투쟁에의 결합. 혹은 해당 미디어 활동에의 지원

- 독립미디어센터 구상 (투쟁체와 같이하되, 종속되지는 않는다.)

- 독립제작운동/미디어운동/문화운동 간의 연대강화를 통한 독립미디어 가능성 구축

 

(2) 활동 영역

- 주요정보입수와 관리 (협상현황/ 민중투쟁 동향/ 주요쟁점 등 )

- 네트워킹 (사회운동단체 / 민중의 삶의 현장/ 제작자 / 영화제작자원 )

- 콘텐츠 제작 (개별제작 / 협동제작 )

- 제작자원 관리

(스탭, 배우, 촬영/녹음보조장비, 장소, 운송수단 등의 확보 혹은 네트워킹 )

- 소통구조 마련

 

(3) 활동기간

 

1) 1차 : 현재 - 2006 년 말

 

- 정부의 공언과 정황을 볼때, 금년 안에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질 것.

- 중요한 결정이 월드컵이 열리는 올 상반기에 결정이 될 수도 있음.

- 따라서, 시급히 저항이 조직되는 것이 중요하고, 미디어 실천이 이에 복무하기 위해서는 다소 가벼운 접근이 필요함.

- 초기엔 대중들에게 주의환기를 위한 콘텐츠가 필요하고, 시간이 지나며 구조를 암시, 해명하는 콘텐츠가 필요함.

 

2) 2차 : 2007년 이후 : 이후의 진행상황에 따라 재구성

 

(4) 옹호하는 가치

- 각 단위의 자율적 실천과 경험의 교류

- 제작, 소통에서의 공동체적 방식

- 미디어실천의 주체 확장을 위한 오픈 네트워크

- 주류미디어내의 진보적 주체들과의 협력

- 민중투쟁에 시청각 미디어로 영감을 제공하기

- 정보공유라이센스 (연구 필요)

- 영상 소스의 합리적 공유

 

(5) 제작 (production)

- 제작은 개인 제작자. 혹은 제작자들 간의 협력제작 등 다양한 실천

- 지나친 중복 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율장치 마련.

- 제작물들의 노출시기가 중요하므로 이를 지원할 자율적 긴급협력시스템 마련

 

(6) 콘텐츠

- 각 민중투쟁의 수위에 조응하는 단계별 구성

- 10초짜리부터, 2시간자리까지

- 매 콘텐츠의 정확한 타겟팅 (누구에게 / 어떤 메시지를...)

 

(7) 소통

- 민중투쟁 현장에서의 직접소통

- 정보공유 라이선스 등을 통한 자율적인 인터넷 유포 유도.

- 각종 (비영리 영화제/ 문화행사/ 문화행동)에서의 적극 활용

- 퍼블릭액세스 구조에 대한 ‘집중 액세스 기간’ 설정, 실천

- 주류 방송 매체에 대한 적극적인 엑세스 시도.

 

* 이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고, 그 분들의 창의를 모아냅시다.

* 모일 수 있는 공간 (6-7평 정도)는 마련이 가능합니다.

 

4. 하나의 사족

* 아래의 글은 매일 투쟁의 현장에 나가 있는 미디어참세상의 안00활동가가 제게 들려준 말입니다. 이를 덧붙인 이유는 우리의 느낌과 판단을 콘텐츠화하고 소통시키는 ‘독립영화 실천’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제목 : [괴물의 왕국 (동물의 왕국)이 아니라]

메세지 : 이웃의 고통을 외면할 때, 작은 공동체는 자신도 모르게 붕괴한다.

줄거리 :

극지방, 평평한 빙판 위에 수백마리의 바다사자들이 평화롭게 서로 몸을 맞대고 일광욕을 합니다. 작은 보트에서 두사람이 빨래방방이를 갖고 내립니다. 그들에 대해 바다 사자들은 무감합니다.

두 사람은 바다사자의 바로 앞에 다가가, 한마리씩 정수리를 내려칩니다. 바다사자는 세번쯤 맞으면 고통속에 몸부림치다가 죽습니다. 바로 옆의 바다사자는 사람이 다가가서 동료를 죽일때, 다시 자리를 잡기위해 약간 몸을 뒤척여서 다시 편한 자세를 잡을 뿐입니다. 그런식으로 사냥꾼들은 편하게 죽여나갑니다. 수백마리의 바다사자들은 자기 근처에 사냥꾼이 나타날때, 시선만 줄 뿐 그 살육의 현장을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자신은 고통을 못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냥꾼들은 기계적으로 한마리 한마리 죽인 다음 그 자리에서 가죽을 천연덕스럽게 벗깁니다. 바로 옆에 많은 바다사자들이 있는 그자리에서 말입니다.

해가 뉘엿뉘엿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두사람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다 죽고 두마리가 남았습니다. 한사람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마리의 정수리를 칩니다. 나머지 한마리는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천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봅니다.

 

(여기까지는 모 방송사의 동물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방송된 것입니다. )

 

편집

- 위의 서사의 전개에, 한국 각지에서 벌어진, (미디어의 외면속에서 고립된 채 벌어진) 농민/노동자 들의 저항과 그들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 (경찰의 몽둥이와 깨님 머리)장면 등, 극적인 장면들의 교차편집 (스텝프린팅이나, 반복, 느린화면, 등 이미지의 연관성을 강조한 맥락화)

 

- 문자 텍스트들 (조용히 찾아오는..., 고립된 공동체..., 화려한 태양..., ) 들의 적절한 활용

- 영상이미지와 소리, 문자텍스트의 적절한 배합을 통한 간명하고 압축적인 서사

-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 포맷(스타일)의 활용여부 검토

 

(예상되는 카피)

' 이웃의 아픔에 분노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죽습니다. '

' 침묵이 습관이 될 때...,

 

* 함의

- IMF 의 개입과 신자유주의적 조정과정에서, 이미 한반도 공동체에서 지난 3000년 이상 이어져 왔던 농업은 이제 사라질 위기에 있습니다. FTA가 그 치명타가 되겠죠.

- 1백만의 현재의 농민들은 (아마도 땅과 호흡하는 마지막 농사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곧 사라지겠죠.

-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IMF 개입 이후 (이제 8년차군요.) 850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 그들은 계속 절규하며 저항해 왔으나, 미디어들의 외면 속에서 저항들은 고립되어갑니다.

- 왜 불과 10년 사이에 농촌 공동제가 붕괴하는가? 왜 노동자들은 생명체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부품으로만 전락하고 있는가? 에 대해 의문을 갖게하고,

- 이웃(사회)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무관심과, 연대의 파괴가 매우 위험함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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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저축들기는 잘한 일인가?

야스피스님의 [20대 노동 시작해 30대 투쟁하고 40대 집을 산 후 우린 온순해진다] 에 관련된 글.

 

1.   청약저축에 가입하다.

앞으로 살 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결코 길지않을텐데,  소위 청약저축이란 걸 가입했다. 
5년간 살아온 집의  주인 아줌마가  30만원이던 월세를 금년 봄부터는 5만원은 올려받아야겠다고 해서  충격을 받고 한 달내내 방황하던 터에,    친구의  조언을 듣고  '에라이 모르겠다'는 식으로  가입한 것이다.

3개월째 전기세를 못내고, 2개월째 가스비가 밀려있는 상황에서도 호기를 부린 셈이다.   

' 그래 50이 될때가지는 15평짜리 임대주책 하나라도 있어야하는 것 아니겠어?   지금이야  뭐 ,  정 궁해지면 친구집에 얹혀지낼 수도 있고,   아니면 가난한 놈들끼리 몽쳐서 지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 쉰넘어서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잖아? '

'돈이 어디있어서 다달이  저축을 하냐구?   ? 뭐 정 안되면 카메라나 캠코더 같은거 내다 팔면 되지 뭐 '

뭐 이정도의  생각이었을거다.  
어쨋든...

2.  '주택은 상품이 아니다' 라는  구호를 들으면서 느껴지는 공허함. 
 
작년부터는  FTA반대 집회현장에서  젊은 활동가들이   ' 주택은 상품이 아니다  !'   라고 쓰인 팻말을 일사불란하게 들고, 리드미컬하게  구호를  외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 때,   어떤 동질감과 희망, 위안 같은 걸 느끼곤  했었다.  
'맞는 말이네! '
'자산'으로서가 아니라 ,  내가 사는 동안  잠시 빌려쓸  아주 작은 주거공간으로서의 주택... ' 이런 나의 소박한 욕망에 부응하는  좋은 말이야 !   

그런데 ,   나의 삶속에서  어떻지?   내가 아는 동료들의 삶에서 주택이란 그들에게 무얼까 ?  
* 친구1(남35세) : 집에 대한 욕망없이 이곳저곳 에서 산다. 친구의 단칸 옥탑 전셋방에서 월세 분담하며 살고 있다.
* 친구2(여 30세):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곰팡이 피는 반지하방에 기식한다.  아마도 수입의 2/3가량을 월세로 쓸거다.
* 친구3(여 27세) : 편의점 비정규직 노동을 하면서 ,  월 25만원짜리  고시원에 산다.
* 친구4(남 40세) : 어머니에게 떼를 써서 (등골을 파서?)  산꼭대기에 4000만원짜리 전셋방을  얻어 산다.
* 친구들 5 (남, 이주노동자들,30대중/후반 )  보증금 1000만원 , 월세 30만원, 방 2개인 집에서 5명이 상주하고, 두어명이 기식한다.

아마도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살고 있을거다...
'주택은 상품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 내 친구들이  '욕심쟁이'가 아닌데...,  다달이  월세걱정하며 산다. 

그런데 800만이 넘는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  다른 세입자들은 어떻게 살고있는거지?  
그들에게  '주택은 상품이 아니다 !'  라는 슬로건이 어떤 울림을 주고있을까?   그 말이 어떤 본질적인 지향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말을  듣는 순간  짜증나지 않을까?

민중들의  주거현실과 슬로건 사이에 지나친 간극이 있어서 그럴게다.

3. 그럼, 주택청약부금에 가입한 행위는  주택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강화에 기여하는 거야? 

     누군가 이에 대해 말해줬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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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곧 분해되어 흙이되는거야.

따따탄님의 [분류에 ‘생명’을 포함시키자] 에 관련된 글.

 

장면 1

 

저는 지지난해 가을, 어떤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적 있었어요.  

소리소문없이 도로에서 차에 치어죽는 야생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였죠. 

[어느날 그 길에서](감독: 황윤) 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어느날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삵' (고양이처럼 생겼고 콤집도 그 만한데, 이 것이 지금 한반도 남쪽에서 살아있는, 고양이과 육식동물중  가장 큰 종이라고 하는군요. )  을 발견했어요. 

 

 보통은 완전히 으깨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애는 잠자고 있는 듯 했어요.  그래서 그 애의 모습을 찍을 필요가 있다고 연출자는 판단했어요.  '도로에서 죽는 동물의 살아있던 당시의 모습을 암시하는 형상'이 필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촬영할 사정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 애를 일단  촬영차에 싣고 적당한 시기에 찍기로 햇어요. 

 

아마 다음날이었을 거예요.

우리는 촬영에 적당한 도로를 발견하곤, 그 애를 꺼내려고 비닐봉지를 풀었어요.

그랬는데....

 

아!  거기엔  삵이 아닌 다른 생명들이... 수만 마리쯤 되는 구더기들이  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텁게 싸고 있었어요.   

잠시동안 멍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곤 촬영을 포기하고 그애를 다시 싸서 이동하는 동안,  4명 정도가 타고 있던 차 안은 조용했어요.

다들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었을 거예요.

저도 생각했어요.   

 

' 음,  동물이 죽으니까 다른 생명체가 와서 그의 몸에서 자양을 얻고  자라는구나....'

' 사람도 죽으면 그렇게 되겠지... -  방부제나  강한 화학물질을 잔뜩 바르지 않는한 말이야...'

' 삵은 10여년 내외를 살고 현대인은 70-80년  내외를  살고서는 흙으로 돌아가는거야.'

' 세상은 그렇게 반복되어 온 거야.'

'생명을 받고 태어나, 어떤 시공간에서 주위의 것들과 호흡하면서 살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거지...'

 

야생동물도, 야생식물도, 인간이라는 동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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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2

작년 가을 이었어요.

한미 FTA 반대영상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여기에 미국의 한 소수자공동체의 문화 활동가가  방문해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그녀는 지금  한국의 농축산물 수입물량의  70%  가량(혹은 그 이상)을 독점 유통하고 있다는 카길이란  초국적 곡물회사의 사장을 만난 적이 있대요.  그런데 그 때 그 카길 사장이란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대요.  

'미국인의 90% 는 이미 유전자 조작식품을 먹고있다.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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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조작식품을 먹어야하는 현재의 미국인이나  (아마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겠죠.)  카길이 공급하는 식품을 먹어야하는 한국의 민중들이나,  저나,  노무현 대통령이나 한덕수총리나... 길게 잡아  50년 쯤 후에는 다른 생명체들의 도움을 받아,   흙으로, 물로 혹은 먼지로  분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수십만년 된  개펄을 콘크리트로 막고,  고기를 먹는 소를 만들어내고, 초파리의 유전자를 가진 감자를 만들어내고,  동물의 유전자를 가진 옥수수를 만들고,  항생제와 방부제로  범벅이 된 농수산물을 만들고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해요.

 

곧 흙이 되고 썩어서,  이후 세대의 다른 생명체들의 자양이 될  사람들이 말이죠...  

어떻게 해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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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협회에서인가?

싱아님의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종교를 똑같이 존중하라!] 에 관련된 글.

 

1970년대에, 이미 인류가 서구사회처럼 화석 연료를 때댄다면, 지구가 5개 정도가 필요할 거라고 했대요.

지금쯤이면  10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할지도 모르죠...

 

또, 향후 몇십년안에  지난 수십세기 동안 존재했던 작은 공동체의 언어중에   2,500개 이상이 사라질 거라고 하는군요.   지난 100년동안  인류가 그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멸종된 생명체들이 수백만 종이상일거라는데 그것도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터이니 모를거구요.

 

어쨋든 국민국가가 형성된 이후,  오랫동안 있어왔던 지구라는 행성이, 자본주의와 개발이라는 맹목적인 힘에 의해 엄청난 위협속에 빠진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우주인이 와서 조만간 이 문제를 해결할까요? 

우리는 착한마음으로 기다리면 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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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협회에서인가 ?

1970년대에, 이미 인류가 서구사회처럼 화석 연료를 때댄다면, 지구가 5개 정도가 필요할 거라고 했대요.

지금쯤이면  10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할지도 모르죠...

 

또, 향후 몇십년안에  지난 수십세기 동안 존재했던 작은 공동체의 언어중에   2,500개 이상이 사라질 거라고 하는군요.   지난 100년동안  인류가 그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멸종된 생명체들이 수백만 종이상일거라는데 그것도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터이니 모를거구요.

 

어쨋든 국민국가가 형성된 이후,  오랫동안 있어왔던 지구라는 행성이, 자본주의와 개발이라는 맹목적인 힘에 의해 엄청난 위협속에 빠진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우주인이 와서 조만간 이 문제를 해결할까요? 

우리는 착한마음으로 기다리면 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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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jinbo.net/dalgun/

밥상의 문제에 대해 옮긴글

제가 RSS니 이런 것들을 몰라

좋은 글을 보면 긁어붙이기 밖에 못하는군요.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0267.html 에서 갖고 왔습니다.

조금은 짐작하고 있던 일이지만,   그 대응의 기운이 안느껴져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과연, 어떤 계기, 어떤 실천을 통해서  이걸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다국적 곡물 자본에 점령된 세계의 밥상.

당신이 평균적인 식사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난 한해 동안 83.2kg의 쌀을 먹었을 것이다. 쌀 한 가마니가 80kg이니까 1년에 한 가마니 조금 넘게 먹는 셈이다. 밥 한공기를 125g으로 잡으면 모두 665.6공기, 하루 평균 1.8공기 정도다. 하루에 두 공기를 채 못먹는다는 이야기다. 이 통계는 밥으로 먹는 쌀 뿐만 아니라 쌀 가공식품 등 전체 쌀 소비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당신이 실제로 먹는 밥의 양은 좀 더 줄어들 수 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1990년 120kg에서 2003년 83.2kg으로 해마다 급감하는 추세다.

당신은 또 지난 한해 동안 8.1kg의 소고기와 17.3kg의 돼지고기, 7.9kg의 닭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육류 소비량은 159만5천톤에 이른다. 1인당 33.3kg이다. 흔히 식당에서 먹는 삼겹살 1인분 200g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사람이 1년에 평균 166인분 정도 육류를 먹는다는 이야기다. 1인당 육류 소비량은 쌀 소비량과 반대로 1990년 24.7kg에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6월 말 기준 우리나라에서 사육되고 있는 소는 모두 214만마리, 돼지는 902만마리, 닭은 1억2274만마리에 이른다.

문제는 이 소와 돼지와 닭들이 먹는 사료다. 200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사료 소비량은 2003만톤. 배합사료가 1580만톤을 차지하는데 이 가운데 1175만톤이 수입 배합사료다. 우리나라 배합사료의 자급 비율은 24.7%에 지나지 않는다. 사료로 쓰이는 곡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 곡물은 878만톤으로 우리나라 전체 곡물 소비량의 41%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국산은 19만톤 밖에 안된다.

특히 665만톤에 이르는 옥수수의 경우는 99.9%가 수입 옥수수다. 우리가 먹는 소와 돼지와 닭, 대부분이 수입 옥수수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다. 이밖에 기타 사료 곡물의 자급 비율도 15.7%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료 곡물 수입은 1980년 201만톤에서 2002년 860만톤으로 네배 이상 늘어났다.

사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 비율은 심각할 정도로 낮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곡물 소비량은 2098만톤. 이 가운데 우리는 1544만톤을 수입했다. 자급 비율은 26.9%로 2002년 30.4%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30개 OECD 국가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특히 511만톤에 이르는 쌀을 빼면 자급 비율은 2.7%로 줄어든다. 참담한 상황이다. 품목별로 보면 옥수수가 855만톤, 콩이 145만톤, 밀이 38만톤에 이른다. 금액으로는 각각 10억달러, 4억달러, 6억달러 규모다.

이처럼 폭증하는 수입 물량 덕분에 인천항은 이미 세계 최대의 곡물 수입 항구가 됐다. 2001년 기준으로 인천항의 곡물 수입 물량은 978만톤. 유럽 곡물 수입의 관문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959만톤)이나 로테르담(849만톤) 보다 큰 규모다. 우리나라 곡물 수입은 세계 곡물 무역량의 몇 4.8% 규모에 이른다. 일본(10.1%)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는 상황이 또 다르다. 일본은 일찌감치 식량 주권 개념을 앞세워 해외 생산 기지 건설에 주력해 왔다. 일본의 곡물 수입은 2002년 기준 2624만톤에 이르지만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일본 기업들이 해외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물량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다국적 곡물 자본에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해마다 곡물 가격이 급등락을 거듭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는다.

2001년 기준 세계 인구는 61억3414만명. 곡물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20억1876만톤으로 1인당 329kg 수준이다. 특히 선진국의 곡물 생산량이 돋보인다.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의 경우 1인당 곡물 생산량이 각각 1291kg과 1197kg, 1166kg에 이른다. G7 국가로 넓혀보면 1인당 생산량은 816킬로그램으로 세계 평균의 2.5배에 이른다. 11.5%의 인구가 전체 곡물의 28.4%를 생산해 세계적으로 잉여 곡물을 공급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1인당 곡물 생산량은 117kg에 지나지 않는다. 자급 비율은 오히려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한해 소비하는 곡물을 350kg 정도로 잡는다면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곡물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적으로 1인당 곡물 생산량은 329kg, 우리나라는 여기에도 한참 못미친다.

7월 1일 미국 농업부가 발표한 세계 곡물 수급 동향에 따르면 올해 곡물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5.7% 늘어난 19억4198만톤이 될 전망이다. 생산이 크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문제는 소비량이다. 소비량은 지난해보다 1.4% 늘어난 19억6403만톤으로 여전히 공급이 소비를 못따라가는 상황이다. 곡물 재고는 3억1838만톤으로 재고 비율은 16.2%까지 떨어졌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권고한 식량위기 방지를 위한 권고 수준 16%가 위협 받는 수준이다. 이같은 위기는 1984년 이래 처음이다.

세계적으로 곡물 시장은 미국의 카길과 ADM(아처 다니엘스 미들랜드), 두 회사가 장악하고 있다.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75%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밖에 역시 미국의 콘 아그라와 프랑스의 루이 드레퓌스와 아르헨티나의 분게 등 이른바 5대 곡물 메이저의 시장 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옥수수의 경우 상위 3개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81%가 넘고 콩도 역시 상위 3개 회사의 점유율이 65%에 이른다. 밀은 상위 4개 회사의 점유율이 61% 수준이다.

특히 세계 최대의 곡물 자본인 카길은 우리나라 곡물 시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이 회사는 비공개 개인 기업이라 구체적인 실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지난해 11월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조사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카길의 지난해 매출액은 599억달러, 세계를 통털어 비공개 기업 가운데 최대 규모다. 우리 돈으로 치면 72조원,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43조원) 보다 훨씬 큰 규모다.

1865년 윌리엄과 새뮤얼 카길 형제가 설립한 이 회사의 경영권은 150여년 동안 혼인으로 엮인 카길과 맥밀란 두 가문에 상속돼 왔다. 이 두 가문의 지분 비율은 아직도 55%를 넘어선다.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500대 부호' 순위에서 이 회사의 최대 주주, 제임스 카길과 마가렛 카길의 재산은 각각 15억달러로 공동 140위를 기록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 회사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이다. 대니얼 암스터츠 전 부회장은 198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농업협상에 제출됐던 미국의 '예외 없는 관세화' 방안의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미국 협상팀의 농업 대표를 맡았다. 지난해부터 이라크 재건사업 농업부문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휘트니 맥밀런 전 사장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심사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어네스트 마이섹 전 사장은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대통령 수출 자문단으로 활동했다. 그는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 농업협상에도 깊숙히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를 두고 인도의 환경 운동가 반디나 시바는 "WTO 협상은 카길 협상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프랭크 심즈 사장은 2001년 미국 농부부 생명과학기술 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유전자 조작 식품 재배를 확대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거침없는 인수합병 전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길은 1999년 콘티넨털 그레인을 인수합병하면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다. 당시 카길의 곡물 저장 능력은 4억부셀(1부셀은 약 35.24ℓ)에서 5억5천만부셀로 늘어나 2위인 ADM을 크게 앞질렀다. 2003년 기준, 카길의 세계 곡물 시장 점유율은 50%를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카길은 2000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사료 회사, 애그리브랜드 인터내셔널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어 2001년에는 칠면조 가공회사 로코 엔터프라이즈를 인수했고 2002년에는 녹말과 감미료를 만드는 체레스타를 인수했다. 카길은 곡물 교역 뿐만 아니라 옥수수와 밀 제분업을 비롯해 설탕과 면화, 석유의 무역과 운송, 식품 가공, 금융 거래, 철강과 카지노 등 광범위한 사업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에 본사를 두고 세계 61개국에 걸쳐 800개의 공장과 10만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제 3세계 국가에 진출해 협동조합과 계약을 맺고 시장을 장악, 농민들을 저임금 계약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카길이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해도 카길 아니면 작물을 팔 데가 없는 농민들은 울며겨자먹기로 이 회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카길은 인공위성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곡물 경작 상황을 점검하고 흉작이라고 판단되면 곧바로 매점매석에 들어간 다음 가격을 끌어올리고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과정에 미국 CIA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한편 카길과 합작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 최대의 농업생명공학기업 몬산토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몬산토는 콩과 면화 종자 판매에서 미국 1위 기업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콩의 53% 가량이 유전자 조작 과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옥수수나 면화의 경우도 이 비율이 각각 21%와 11%에 이른다.

카길은 지난해 식품 소매업체 크로거와 소고기 납품 계약을 맺고 소매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이른바 "종자에서 슈퍼마켓까지"라는 농식품 체제 지배 전략이 현실화하고 있는 분위기다. 카길은 이제 유전자에서 시작해 곡물의 생산, 가공, 사료 생산은 물론이고 육류의 생산과 가공과 유통까지 개입하고 있다. 그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카길 뿐만 아니라 ADM이나 다른 주요 곡물 자본의 시장 지배 전략도 비슷하다. ADM도 역시 농업생명공학기업 신젠타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신젠타는 해충에 내성을 갖춘 유전자 조작 옥수수 종자를 생산하고 ADM은 이 종자를 농민들에게 보급한다. ADM은 특히 농민협동조합인 컨트리마크 등을 인수, 미국 동부지역의 옥수수를 싹쓸이하고 있다. 신젠타는 1997년 서울종묘와 농진종묘 등 국내 종자회사들을 잇따라 인수하기도 했다.

콘 아그라도 역시 세계 최대의 종자 기업 듀폰과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 콘 아그라가 계약생산 농장에서 사들인 옥수수는 콘 아그라의 대규모 사육농장에 공급되고 여기서 나온 육류는 다시 콘 아그라의 상표를 달고 세계의 슈퍼마켓으로 팔려 나간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수입 육류의 상당 물량도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다.

이들은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후진국 식량 원조를 통해 성장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수출 개방을 강요하고 곡물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었다. 동시에 미국의 곡물 자본은 정부의 재정 지원과 융자 등의 혜택에 힘입어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72년의 세계적 식량 위기는 이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소련에 대대적인 흉작이 들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했고 이 기회를 노려 미국의 곡물 자본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막강한 과점 체제를 구축했다.

문제는 이처럼 세계 곡물 시장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부 다국적 곡물 자본에 장악되면서 세계의 식량 위기가 더욱 가중되고 있다는데 있다. 이들의 관심은 철저하게 기업의 이익에 집중돼 있을뿐 곡물의 안정적인 공급이나 제 3세계의 기아와 빈곤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세계 곡물 시장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면서도 이들에게 그에 걸맞는 책임 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위기의 징후는 수두룩하다. 다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과점 시장인데다 마땅한 대체제도 없는 상황이라 공급이 조금만 달려도 가격은 폭등하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일본이나 스위스, 이스라엘, 네덜란드 등이 곡물 자급 비율 회복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1980년 흉작이 들었을 때 국제 가격으로 1톤에 200달러하던 쌀을 550달러씩 주고 미국에서 사들여 왔다. 이에 앞서 1972년에는 661달러씩 주고 쌀을 수입하기도 했다. 일본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일본이 1993년 쌀을 수입했을 때 국제 쌀 가격의 70% 이상 급등했다. 미국 쌀 경작자 협회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쌀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쌀을 수입해야 했다.

북한도 피해자다. 1998년 북한은 카길에게 밀 2천톤을 사들이고 그 대가로 아연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아연지급이 늦어지자 카길은 화물선을 그대로 돌려서 가버렸다. 1976년 콩고의 기아 사태도 비슷한 경우다. 곡물 대금 결제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콘티넨털은 밀 공급을 즉각 중단했고 이 나라는 곧 심각한 식량 위기에 부딪혔다. 시장 확장을 가로막으면 경제 보복도 서슴지 않는다. 1988년 나이지리아가 밀 수입을 거부하자 카길은 미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나이지리아의 섬유 수출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곡물의 독점은 그 어떤 전쟁 무기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의 곡물 회사들에게 소련에 밀과 옥수수, 콩 등을 수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1979년 30억달러 규모였던 수출 규모는 1980년 13억달러로 줄어들었다. 소련은 사료 곡물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겼었다. 미국은 1985년 사회주의 개혁을 막는다는 이유로 니카라과에도 곡물 수출을 금지시킨 바 있다. 미국의 곡물 수출 제재는 친미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5년 넘게 이어졌다.

담합에 의한 시세 조종도 빈번하다. 1972년 세계 밀 생산량이 2.4% 줄어들자 국제 시세가 3배나 뛰어올랐다. 창고에는 재고가 쌓여있었지만 이들은 재고를 풀지 않았다. 국제가격이 4.6배나 뛰어올랐던 1973년의 콩 파동도 비슷한 경우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이렇게 곡물 가격이 뛰어오를 때 그 피해를 고스란히 축산 농가들이 떠안게 된다는 사실이다. 국제 옥수수 가격이 오르면 수입 업체는 당연히 수입 옥수수의 가격을 올리고 뒤어어 사료 가격도 가파르게 뛰어오르게 된다. 그러나 축산 농가는 이렇게 비싼 사료를 울며겨자먹기로 사다 먹이면서도 가축 가격을 제대로 올려받지 못한다.

양돈용 배합사료의 가격은 25kg 기준으로 1994년 4747원에서 2002년 7036원으로 무려 48.2%나 뛰어올랐다. 그러나 비육 돼지의 산지 가격은 90kg 기준으로 같은 기간 15만9천원에서 17만8천원으로 11.9% 오르는데 그쳤다. 곡물 가격이 급등락을 거듭할 때마다 그 부담은 모두 축산 농가의 몫으로 돌아갔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곡물 소비량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데서 비롯한다. 2001년 통계를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7위의 곡물 수출국(899만톤)이면서 우리나라에 이어 세계 3위의 수입국(993만톤)이다. 소득 향상과 수요 증가에 힘입어 중국의 곡물 수입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중국의 곡물 생산은 4억3천만톤으로 소비량 4억8500만톤에 크게 못미쳤다. 중국은 앞으로 곡물 수출국에서 곡물 수입국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곡물 재고는 2000년 이래 꾸준히 줄어들어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중국의 1인당 곡물 재고는 350kg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국가곡물원유정보센터는 콩 수입이 내년 한해동안 17% 이상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자칫 세계적인 곡물 파동이 일어날 조짐도 있다.

30년 가까이 곡물 수입 문제를 연구해 온 유상철 대한벌크터미널 사장은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 비율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옥수수 가격은 이미 국내 옥수수가 수입 옥수수의 5배에 이른다. 품질을 감안하더라도 도무지 가격 경쟁이 안되는 상황이다. 유 사장은 "정부가 아예 식량 주권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사장은 "이제와서 곡물을 자급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친 의존 비율을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는 있다"며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량 주권을 통째로 다국적 곡물 자본에 넘겨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경고했다. 유 사장은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미국의 곡물 선물 시장에 진출해 직접 구매 방식으로 안정적인 곡물 확보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전체 수입 물량의 90% 이상을 직접 구매 방식으로 구매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75% 가량을 아직도 공개 입찰 방식으로 구매하고 있다. 담합에 의한 가격 조정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윤병선 건국대학교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다국적 곡물 자본의 세계 시장 지배에 따른 식품의 다양성 파괴를 우려한다. 유전자 조작 품종을 비롯해 생산성과 수익성이 가장 높은 품종을 중심으로 세계 곡물 시장이 재편되면서 전통 품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특히 IMF 금융 위기 이후 흥농종묘를 비롯해 종자 회사들이 무더기로 다국적 곡물 자본에 넘어갔다. 고추나 양배추, 무우 등 헐값에 팔려나간 국내 토종 유전자원을 훨씬 비싼 가격에 되사서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박민선 농협대학교 교수는 세계 농식품 체제의 재구조화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제 1세계에서는 토지 이용형 식량 작물을 생산하고 제 3세계는 선진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채소나 과일 같은 노동 집약적 농산물을 생산하는 국제적 공정 분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 수준의 노동 분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한 나라의 농식품 체제를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박 교수는 특히 “곡물 자본과 식품 가공 또는 소매 기업의 결합 가능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까지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 사료 곡물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식용 곡물 시장은 물론이고 식품 가공과 소매 시장까지 파고들어 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국적 소매 기업의 국내 진출과 이를 통한 농식품 체제의 재구조화를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계적으로 시민운동과 농민운동, 환경운동을 연계하고 다국적 곡물 자본의 시장 장악을 막아낼 필요가 있다.

다국적 곡물 자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식량 주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쌀 시장만은 지켜내야 한다.

이정환 기자 top@leejeonghw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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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봅시다.

* 아래 글은  한미 FTA 협상이 막 시작되고 있던 지난 2006년 4월에 써 본 글이예요.

   게으름 때문에 시도해보진 못했지만,  이런 영상물을 만들어 유포해 볼 생각이예요.

   이글을 본 누구라도 시도해보셔요.  

 

      FTA 저지를 위한 교육 선전용 영상물 아이디어 1

                                                                                     2006. 4. 27  꿈돌이


(1) 시리즈 영상물의 제목  - [22세기에 한반도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1) 대안적 세계화/FTA저지 캠페인의 어느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획은 빠를수록 좋을 듯합니다. 6월에는 돌아야하니까요.


2) 기획의 목적 :

 - 오늘의 민중들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해 생각게 하고, 저항의 의지를 다지고 그 실천을 모색할 수 있도록,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 동시에 ‘진짜로(!)’ 1세기 후의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제작물을 만든다. (우리가 100년 전의 어떤 도판과 문자텍스트 등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는 것처럼)


3) '100년 후의 한반도 거주자들에게...'의 관념으로, 대화 혹은 편지, 혹은 타임캡슐의 영상메세지 형식으로, 오늘의 이야기와 우리의 상상을 담아 전하는 방식의 교육선전물


4) 다큐/극영화의 형식을 버무릴 수도 있다.

 -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1세기후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이야기,소개) 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한다.

 - 인터뷰의 주요내용에 대한 실사 자료화면의 편집도 가능하다.

 -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영상유언의 느낌이 날 수도 있다.

 - 배우들을 이용하여,  특정 사안 (의료, 서비스 공공성의 붕괴에 대해 말을 할 수도 있다.) 

 - 유명세가 조금있는 사람들 (교수들 이영희 선생등) 의 연속인터뷰 형식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대중적 언어를 사용해야한다는 것.



 (2) 기획의 의미


1) 소통의 상상력 강화

 활동가들, 제작자들, 미디어운동 기획자들 모두가, 더 나아진 미래, 혹은 악화된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함으로써, 좀 더 영감을 얻고, 이를 통해, 시야를 확장하고 이를 통해 선전의 핵심을 점검할 수 있다. ( 1세기 후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호소력 있게 설명할 것인가 ? 이는 지금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고통의 호소와 고립된 저항을 반복하고 있는 민중들에 대한 선전의 수사학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 약간 변주한다면, ‘어린 조카에게, 나이든 어머니에게, 주변의 아저씨들에게 어떻게 이 국면을 설명할까 생각해봅시다.)


2) 콘텐츠들의 호소력의 강화 : 콘텐츠가 ‘세대를 뛰어넘은 대화/소통’ 형식을 취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연속성속에 또 사회와의 유기적 연관 속에 있음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성찰적 태도를 강화할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이 땅과 사회는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 나의 행동은 단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미래세대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


(3) 제작방법


1) 다수의 참가 (옴니버스 혹은 연작 )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창의에 의해서, 이 아이디어를 ‘변용’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다.

2) 자유로운 스타일 (기획자의 비독점) 과 상호협력

3) 각 부문 운동의 활동가들과의 강력한 연대와 협력작업

 (그 분들에게 1세기 후의 사람들을 위한 편지를 쓰라고 한다거나, 이를 위해 시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해서 마련하라고 주문하여 그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덧붙인 기획도 시도한다.) 



 (4) 내용 (의 예)


< 불연속적인 깜빡이는 화면 ? (100년 된 테잎...) / 자막 : 이 도상들은 1세기 전의 한반도에 거주하던 몇몇 인간들이 ‘비디오카메라’라는 기구를 이용하여 ‘자기테이프’에 담아놓은 영상과 신호들을 복원한 것입니다.>


1> ‘당신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살 만 합니까? 당신들이 황량한 불모지라 여기고 있는 그 새만금 지역의 평지는 사실은, 태고 적부터 1세기 전까지 온갖 생물들이 숨쉬던 습지였습니다.

 그것이 온갖 자양분을 품고 생명을 길러내던 풍요로운 습지에서, 별 쓸모없는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뀌는 데는 불과 10여년에 불과했습니다. 저희는 불행히도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상황을 추동하는 거대한 욕망의 흐름 - 그것은 그것을 통해 ‘자기 몸집을 불리려는 ‘돈덩어리’ 자체의 욕망이, 지역개발 - 지역의 번영 이라는 수사로 포장되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당신들은 이제 그곳에서 다양한 뭇 생명들이, 생명의 고리 속에서 순환하던 땅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겠지요... 몇몇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합니다.’

 (* 여기에는 그동안 찍힌 자료화면들을 모아 편집한 것도 괜찮겠군요. )


2>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들어보세요. 우리는 불행히도... 몇몇의 형체는 없지만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허공을 떠다니는 돈덩어리들과 관료와 대통령이란 사람에 의해 7000만에 달하는 공동체의 운명이 휘둘리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사람들과 생명체들 간의 교감과 의사소통을 통해 지속가능한 삶과 공동체를 꾸려나가고 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20세기 초부터 소위 전파란 것을 소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국가기구와 집적된 돈덩어리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보통사람들 간의 소통의 창구라기보다는 이를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교묘히 선전해내는 거대한 괴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몇 개의 거대한 돈덩어리들이 자기몸집을 부풀려가는 순환과정(이를 요즘 사람들은 보통 자본의 순환운동이라고 부릅니다.)’을 본질로 하는 사회란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이니 문화니, 생명체들 간의 소통이니 하는 것들이 그 거대한 순환구조속에서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우리시대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는, 본인이 태어난 시대의 환경과 아름답게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집장만이라는 것입니다. 서울이라는 지역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평생동안 노동해봤자 절대 안 되고, 노동을 하는 대신에 집을 상징하는 딱지들을 절묘하게 사고 팔 때, 거주공간을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내가 살아갈 공간을 얻기위해 '일을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고, '집을 재산으로 여기면서, 돈 - 집-더 많아진 돈 - 집- 엄청커진 돈 - 이런 식으로 바꿔나가는 사람들만이 그나마 현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작은 공동체들은 수세기전에 소위 ‘국경’ 이란 경계 안에 포섭된 바가 있습니다. 이 국경, 혹은 국가란 것은 이전시대엔 ‘제국’이라 불리는 외부의 거대한 힘으로부터, 영내의 작은 공동체들의 특성과 자율성을 일정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적이란 것에 속박되지 않는 거대한 돈덩어리들과, 이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물리적 장치라 할 수 있는 제국주의 정치가의 연맹이 전지구 위를 날아다니며, 자본의 지배체제를 공격적으로 구축하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돈’이란 것이 어떻게 자기몸집을 부풀리기위해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것을 이해 못할 수도 있겠지요.

 이는 요상하게도 ‘신자유주의’ 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세계각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왔으며,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던 삶의 가치들과 작은 공동체들이 박살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4> 지금 이곳, 21세기 초, 이제 그 신자유주의 질서의 완성판이라 불리는 소위 ‘FTA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제국의 지배자들과 이런 제국의 편에 서있는 이 지역의 정치관료들 간의 협잡이 비밀리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몇몇의 사람들이 이것이 매우 위험하며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것의 음모를 분쇄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와 같은 흐름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는 단지 오늘의 우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당신들의 문제이고,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갈 모든 생명체들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점점 강화되는 제국의 질서에 지친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말입니다.


5> 그래서 참으로 궁금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


- 여전히 소수의 이익이 은밀하고 강고하게 보호되는 그런 사회입니까?

- 가난하기 때문에 병원치료가 불가능한 사회입니까?

- 제약회사들의 막대한 이윤을 위해 생명이 죽어가도 높은 약값을 유지하는 그런 사회입니까?


아니면

- 어쩐 종류의 것이든 차별을 하는 게 불가능한 사회입니까?

-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생산 단위들의 주인이 ‘돈덩어리들’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자율적인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

- 당신들은 물, 공기, 에너지를 ‘사고 판다’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까?


*  이런 질문내용들은 좀 사안별로 구체적인 모습을 띨 필요가 있겠죠..

*  그리고 각각의 사안들은 짧은 꼭지의 연속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  농부가 낫을 들고 이것저것 설명해가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6> 당신들에게 오늘, 이 시대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우리의 몸짓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개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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