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베트남이 아니라 비엣남이다. 베트남전쟁이 아니라 해방전쟁 또는 항미전쟁이다.

9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4/14
    25년 지난 중고 전동차를 1억 받는다고?
    조지콩
  2. 2008/04/06
    베트남.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조지콩
  3. 2008/04/04
    베트남에선?ㅋ(4)
    조지콩
  4. 2008/03/29
    이.렇게. 하라는 건가?
    조지콩
  5. 2008/03/29
    베.트.남 영화.특별전.(전주국제영화제)
    조지콩
  6. 2008/03/24
    잊혀져가는것.
    조지콩
  7. 2008/03/20
    호이안.(2)
    조지콩
  8. 2008/02/24
    베트남.(2)
    조지콩
  9. 2008/01/30
    오랜만의 베트남 나들이.
    조지콩
  10. 2007/12/09
    12월19일투표일.(1)
    조지콩

25년 지난 중고 전동차를 1억 받는다고?

2008년 3월 19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뉴스다.

베트남에 한글 로고 전차가 달린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는 한글이 적혀 있는 버스를 손쉽게 볼 수 있다. 한국산에 대한 인기가 높다 보니 한국에서 중고 버스를 수입하면서 겉면의 글자를 굳이 지우지 않기 때문이다. 올 여름부터는 버스뿐만 아니라 한글이 적혀 있는 중고 전동차도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는 “법정 내구연한(25년)을 넘긴 중고 전동차 7량을 수출하기로 베트남 국영철도회사와 협약을 맺었다”고 18일 밝혔다. 베트남 국영철도회사는 올해 하노이 정도(定都) 1000년을 기념해 7월부터 하노이∼하롱베이 구간의 지상 철도 노선에서 이 전동차를 여객 차량으로 쓸 계획이다. 현재 이 구간에서는 디젤 엔진을 장착한 낡은 전동차가 운행되고 있다.

베트남 국철은 전동차 안팎의 한글 문구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넘겨 달라고 서울메트로 측에 요청했다. 한국산의 인기를 그대로 살리려는 생각이다. 그동안 서울메트로는 내구연한을 넘긴 중고 전동차의 경우 1량에 450만원 정도를 받고 국내에서 고철로 팔았다. 메트로는 베트남 국철과 가격을 협상 중이나 1량에 1억원 정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한국의 중고버스......베트남이 좋아서 수입했을까? 수입하다보니까 좋아졌을까? 의문이지만
난 이 의견에 이의제기!. 물론 많다. 한국에서 쓰다만 중고버스. 과거 셔틀버스들 다 모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한글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쓴다고 해서. 인기가 좋다고 판단해도 되는 걸까?
뭐 그냥 일단 넘어가고.

한국에서 법정 내구연한을 그것도 25년을 넘긴 중!고!전!동!차를 1억에? 뭐 것도 운행? 골동품, 전시품이 아니고? 허허 참.
참! 독한건지.돈에 눈이먼건지.
뭐 2mb뽑아논거면.뭐.전혀.죄책감도 없겠지..

왜냐면. 그들은 돈이 없는 못 사는 나라 사람들이니까.
돈이 없는 못 사는 사람들이 이용하기엔 딱 적당하니까. 그렇지? 근데 왜 돈 없는 그들한테 1억이나 받냐!
어차피 또 그들한테 돈 뜯어낼꺼면서. 나.중.에.

서울매트로한테.
우리집에 25년 된 물건이 아직 없긴 한데, 그래도 니가 필요로 하니까.줄께.
뭐 쓸만한지는 잘 몰라. 안정성도 잘 모르겠고. 사실 뭐 그런거 따졌으면 그냥 버렸지 뭐.고철.로.
암튼 내가 고향집가서 찾아 찾아서 줄테니까. 꼭 써! 그리고 그냥 주는 건 아니고. 원래 내가 450원 받기로 했는데..그냥 주기는 그러니까. 10만원만 줘. 알았지?
잘쓰고. 사고나고 뭐 그런건 다 니 책임이다. 알았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베트남.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쌀국수?
아오자이?
오토바이?
베트남전쟁?
사이공?
굿모닝 베트남?
프랑스 지배?
호치민?
달라이 라마?
부동산?
주식?

-----------------------
베트남.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는 거.

처음 방문한 그 나라에서 처음 만난 베트남 학생에게.베트남에 대한.선입견.을 받았다.너무 좋게.
결국.삶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 친구를 얼마 전 베트남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때. 처음의 그 느낌은 온데 간데 없었다.아무것도 모르고 만났던 그 친구가. 베트남에 대해 깔짝거린 후 만났던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아니었다.아니 그 친구는 그 친구 그대로였고. 내가 내가 아니었던게지.

암튼.지금 베트남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삶이다. 아.직.은.


얼마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을 면담할 일이 있어. 다른 나라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면담자에게 주거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나는 집이 어떻게 생겼냐? 단독주택형태냐? 아파트형태냐? 동네는 어떠냐? 그런 류의 질문을 던졌는데, 다른 한사람은 중심가의 주택은 얼마냐? 변두리는 얼마냐? 라고 물었다.

순간. 한국 사람들에게 너는 어떤 집에 사니? 라고 묻고 싶어졌다.
뭐라고 대답할까? 온통 얼마짜리 집으로 도배질이 되는 세상인데, 그곳에서 우리집은 마당이 있고 대문은 무슨 색이고. 등등.따위의 이야기를 기대하기란 글러먹은게지?


이게 내 삶인거 같다.
내게 베트남은. 얼마짜리 주택이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 생겨먹은 주택인지가 중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베트남에선?ㅋ

도끼장이님의 ["오빠"를 자칭하는 남자] 에 관련된 글.


예전에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한 남학생이. 한국의 한 여학생에게 자주 쓰던 말이라는.
그 여학생에 의하면, 그 베트남 남학생의 '오빠가 밥 사줄께', '오빠가 00에게 전화할께', '오빠'가......느끼하다고 말했던 기억. 그렇지만. 한국사람이 아니라는 것.그것으로 용서한다고.했던 말.

자! 여기서. 1. 한국에서는 말을 할 때, 또는 글을 쓸 때, 주어가 종종 자주 생략된다.
2. 베트남어는 인칭과 관련한 주어와 목적어가 없어지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못 알아듣는다.(아무리 친한 사이일지라도, 주어와 목적어가 꼭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밥 먹으로 연상의 남자와 연하의 여자, 두명이 갔다.
한국 "뭐 먹을래?" 면 끝이다.
베트남 "동생은 뭐 먹을래?", "오빠는 뭐 먹을래?" 그냥 "뭐 먹을래?"라고 하면 당황해 한다.

한국, 헤어지면서,"전화할께" 끝.
베트남, "오빠가 동생에게 전화할께", "동생이 오빠에게 전화할께" 등...
그냥 전화할게 그러면 당황해한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기도.

언어 구조가 그렇다는 거. 결국 베트남 학생이 한국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이에겐 "오빠가 밥 사줄께",
"오빠가 전화할께" 등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다라는 거.

가끔 베트남 친구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도 인칭과 관려한 주어와 목적어를 넣는다. "내가" (보통 난 내가 라는 말과 나에게 라는 말을 쓴다. 다른 말 쓰기 참 거북스럽기도 하고 해서) 그런데 베트남 친구들은 별로 안 좋아한다.




베트남에서는 호칭이 참 중요하다.

anh(안) = 형/오빠 등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chi(찌) = 언니/누나 등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em(엠)= 남녀불문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toi(또이) = 나
그 외 아버지, 어머니, 삼촌, 아저씨 등등의 호칭이 있으나 일단 생략.

보통 난 toi 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다들 그 toi 라는 말은 정내미 떨어지는 말이란다.
그냥 anh 또는 em 이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한다.(조금 친해지면 거의 다 이말을 해준다)
결국 베트남 사람들은 '나' 또는 '너'라는 표현보다는 '형/오빠', '언니/누나', '동생', 등의 호칭을 주어로 주로 사용한다는 거.

한국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베트남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느끼함을 느끼거나, 무진장 좋아서 쓰러지거나(?) 라는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렇게. 하라는 건가?



기호 13번

진보신당, 서민을 위한 정성스런 밥상을 차렸습니다.

------------------------------------------------------------------------------------------
메일이 왔다.
이렇게 해야한다고 한다. 뭐.딱히 아직은.갈.길을 정하진 못했지만.
내게 메일이 오는 곳 중.
나더러 이래라.저래라.하는데는 첨이다.당.황.스럽기도하고.
하란다고.하는것도.당.황.스럽기도하고.

참! 생각해보니. 내가 메일링에 가입했군. 진보신당.온라인.향해단?이었던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베.트.남 영화.특별전.(전주국제영화제)

아~ 5월에는 전주에 가고 싶다........ㅠㅠ

 

브레이크뉴스~

원문: http://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9083&section=

 

2008 "애환의 베트남영화 특별전"
 
잊혀진 베트남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부활하다
 
 
전주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 민병록) 조직위는 2008년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 특별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영화 특별전’을 발표했다. 
 
오는 5월 1일 ~ 9일까지 개최될 제9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선보일 작품들은 1960년대 베트남전 기간 및 전후 그리고 최근 베트남 영화의 대표작들로서 베트남의 역사와 현실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할리우드산(産) 베트남전 영화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베트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戰時) 영화 2편, 통일(1975) 후 영화 2편 및 ‘도이모이’(Doi Moi) - ‘쇄신’을 뜻하는 베트남어로 1986년 12월 이후 베트남 공산당이 취한 개혁·개방 정책을 일컬음 - 이후의 영화 3편으로 구성된 본 특별전은 베트남의 역사는 물론 베트남 영화사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응우옌 홍센’의 <와일드 필드> 및 ‘당 낫민’의 <10월이 오면>을 포함한 장편 5작품과 베트남의 대표적 다큐멘터리스트 ‘라이 반신’의 단편 2작품 등 특별전의 작품들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상처받은 베트남 민중들의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더불어, 오는 5월 1일 ~ 9일까지 개최되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될 베트남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베트남 영화 전문가이자 베트남영화에 대한 최초의 영문연구서를 펴낸 ‘응오 푸옹란’ 교수가 직접 참석하여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베트남 영화에 대한 감춰진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또한 상영작 중 하나인 <하노이에서 온 소녀>를 연출한 ‘응우옌 하이닌’ 감독, <미세스 남>과 <정의의 길>을 연출한 ‘라이 반신’ 감독이 방한, 관객과의 대화를 가질 예정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미지의 영화들을 발굴, 소개하는데 주력해 왔던 전주국제영화제가 올해 ‘중앙아시아영화 특별전’, ‘알렉산더 클루게 특별전’, ‘벨라 타르 회고전’ 등에 이어 우리에게 미지의 땅으로 남아있던 베트남 영화에 관한 특별전을 기획함으로써 문화 다양성을 실천하고 그 의미를 강화하고자 했다.”고 그 의미를 전했다. 

 


 초청 게스트

‘응우옌 하이닌’ Nguyen Tranh Van (영화감독)
1932년 베트남 출생. 1956년에 베트남 영화국의 1기 촬영 과정을 이수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하노이 영화 학교에서 1기 연출과정을 이수, 베트남 영화의 1섦諛鳧?감독이다. 70년대에는 모스크바에서 영화 유학을 하였으며, 본 영화제 상영 예정인 <하노이에서 온 소녀>는 1975년 제9회 모스크바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10편 이상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으며, 민중의 예술가라는 칭호가 어울리게 민중의 삶에 천착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라이 반신’ LAI Van Sinh (영화감독 / 베트남 영화국 국장)
1954년 베트남 출생. 하노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1980년부터 다큐멘터리와 SF 영화를 주로 제작하던 영화사에서 각본과 편집을 하다가, 하노이 소재 드라마 영화 스쿨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감독한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 될 <미세스 남>의 경우 아·태영화제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베트남영화국의 국장으로 베트남 영화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응오 푸옹란’ Ngo Phuong Lan (영화학자)
영화학자. 모스크바국립영화학교(VGIK) 영화이론과 졸업. 베트남 영화국(Vietnam Cinema Department) 연구원. 2005년부터 베트남영화협회의 이론 및 비평 분과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논문 및 저서로 「개혁·개방 시기(1986~1996) 베트남 영화의 변화양상」 및 『베트남 영화에서의 모더니티와 내셔널리티』(2005) 등이 있다.



상영작 정보


▪ 전시(戰時) 영화 (2편)

1. 미세스 투 하우 Mrs. Tu Hau

베트남 | 1963 | 90min | 35mm | B&W | Feature

Dir. 팜 키남 PHAM Ky Nam

1950년대 초반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전쟁 드라마로 남부 베트남 여인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던 ‘투 하우’는 마을을 급습한 프랑스 군인에게 강간당한 후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자신의 딸마저 유괴당하는 상황에 처한다. 수줍음 많던 젊은 여성이 반복되는 고난 속에서 투사로 변해가는 모습에는 1950년대 베트남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힘겨운 삶이 반영되어 있다. 전쟁의 상처와 자국민에 대한 연민이 담긴 작품.

* 1963년 모스크바영화제 ‘은상’


2. 하노이에서 온 소녀 The Little Girl from Hanoi

베트남 | 1975 | 60min | 35mm | B&W | Feature

Dir. 응우옌 하이닌 NGUYEN Hai Ninh

전쟁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 집마저 폭탄에 맞아 파괴된 후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는 어린 소녀 ‘응옥 하’의 이야기. 사실적인 전쟁 장면과 미사일 포격 장면 등을 위해 당시 베트남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기술들이 도입되었으며, 화염에 휩싸인 하노이와 전쟁 전 평화롭던 ‘응옥 하’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펼쳐져 전쟁의 참상이 부각된다.

* 1975년 모스크바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 통일(1975) 후 영화 (2편)

1. 와일드 필드 The Wild Field

베트남 | 1979 | 90min | 35mm | B&W | Feature

Dir. 응우옌 홍센 NGUYEN Hong Sen

베트남 영화사를 대표하는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자 통일 이후에 나온 최고의 베트남 영화. 게릴라 전사인 ‘바두’는 그의 아내, 그리고 아기와 함께 거대한 습지에 숨어살며 베트남 혁명세력의 교신자로 활동한다. 미군 헬리콥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가족을 위협하지만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바두’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전쟁과 일상이 수시로 교차되는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당대 베트남 민중들의 현실을 놀라울 만큼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연상케 할 만큼 빼어난 야외촬영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 1981년 모스크바영화제 ‘대상’


2. 10월이 오면 When the Tenth Month Comes

베트남 | 1984 | 90min | 35mm | B&W | Feature

Dir. 당 낫민 DANG Nhat Minh

북쪽의 한 마을에서 시아버지와 아들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두옌’은 참전한 남편을 기다린다. 수소문 끝에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두옌’은 늙고 병든 시아버지를 걱정해 마을 교사인 ‘캉’에게 남편의 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한다. 현세적 삶과 영적 삶의 융합이라고 하는 베트남 특유의 정서가 가장 잘 묘사되어 있는 한편, 이전 시기 베트남 영화들과 달리 전쟁이라는 테마를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어 1980년대를 대표하는 베트남 영화로 손꼽히는 작품.

* 1985년 하와이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 ‘도이모이(Doi Moi)’ 이후 영화 (3편)

1. 모래 위의 삶 Sand Life

베트남 | 1999 | 90min | 35mm | Color | Feature

Dir. 응우옌 탄반 NGUYEN Thanh Van

『플랫폼의 세 사람 Three People in the Platform』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20년간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베트남이 통일되며 삼각관계에 빠지게 된 세 남녀를 다룬 작품. ‘토아’는 북베트남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20년간 기다렸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젊고 예쁜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쟁이 끝났으나 행복할 수 없는 이들의 인간적인 갈등과 용서, 이해의 모습이 담겨있다.

* 2000년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작품상’


2. 미세스 남 Mrs. Nam 'The Mad'

베트남 | 2000 | 20min | 35mm | Color | Documentary

Dir. 라이 반신  LAI Van Sinh

베트남 사람들은 죽고 나서 태어난 땅에 묻혀야만 영혼이 온전히 쉴 수 있다고 믿는다. 전쟁기간 동안 불구가 된 여 간호사 ‘도 김홍’은 안락한 가정을 떠나 베트남전 당시에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발굴, 그들의 고향땅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의 헌신은 모두로 하여금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만들었다.


3. 정의의 길 Path to Justice

베트남 | 2004 | 30min | 35mm | Color | Documentary

Dir. 라이 반신  LAI Van Sinh

고엽제에 들어있는 다이옥신으로 인해 고통받아온 사람들의 정의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베트남전 당시 미군은 베트콩 소탕을 위해 수백만 갤런의 고엽제를 전국 숲에 뿌렸고, 참전자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잊혀져가는것.




자전거의 물결이던. 베트남이. 어느새. 오토바이 물결이.이제는. 자동차의 물결이.
하지만 여전히 도시가 아닌 곳엔 자전거가.하지만.서서히.사라져가는.자전거.

웬지.자전거가.그리워질듯.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호이안.

 

<사진출처: 아는 누나가 찍음> 

 

동네 전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호이안.

 

몇 차례 들렸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이 전부였었던 곳. 그곳을.

베트남을 떠나기 전.에. 갔다.

 

사람들은 하루 정도면 다 볼 수 있을꺼라고 했는데, 난 그냥 3일을 있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단지. 사진기만 들고.여행책에 나온 곳은 그냥 무시해주고.

 

지나는 길. 아무데나 사진기를 들이밀어도. 아름다운 거리. 걷다 지치면.

길거리 아무곳에서나 앉아. 찐한.커피.한잔 마시며 관광객을 관광하고.

그렇게. 보낸 3일.이 머리속에.아직.

 

오늘 호이안을 다녀온 다른 분.의 사진을 보다가. 문뜩.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베트남.

 

요즘 베트남과 관련된 뉴스 중 하나가.

파업의 증가란다. 그래서 투자기업에게 조심하란다.

파업의 이유는 단순히 임금인상이란다.

물론 임금인상이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아니 잘은 모르지만. 임금인상일뿐일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보자.

 

#1. 베트남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얼마인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도시 노동자의 경우 국내기업은 300만동 정도, 외국기업은 600만동 정도라고 보면된다고 한다.(실제 사실인지는 확인불가, 베트남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 한국돈으로 계산하면 20만원과 40만원 가량된다. 참고로 한국기업은 다른 외국기업보다 조금 더 임금을 주고 있다고 한다.

 

#2. 도시의 물가는 이미 많이 올랐다. 인플레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3. 정부는 외국기업의 유치를 위해, 임금인상을 최대한 억제해왔다.

 

#4. 거의 완벽한 정부 통제사회인 베트남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한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요구할까? 물가 인상률에나 미칠까?

 

#5. 베트남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거 같다. 그냥 느낌이.

 

휴.....



웃스게소리.

 

아는 친구 중 한명은 실제 200만동 정도를 받고 있다. 그 친구는 영어도 못하고 한국어도 못하고. 단지 베트남어만 할 줄 아는 대학을 졸업한 친구다.

 

아는 친구 중 한명은 실제 600만동 정도를 받고 있다. 그 친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대학을 졸업한 친구다.

 

아는 친구 중 한명은 실제 1,200만동 정도를 받고 있다. 그 친구는 영어도 하고 한국어도 할 줄 아는 대학원을 졸업한 친구다.

 

웃기지 않나?

 

베트남어는 200만동

베트남어+영어는 600만동

베트남어+영어+한국어는 1,200만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명박이 꿈꾸는 사횐가?ㅋㅋㅋㅋㅋㅋㅋ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랜만의 베트남 나들이.

아주 짧은. 베트남. 나들이.를 다녀왔다.

 

2박3일. 혼자 갔다면 충분히 긴 시간이었을지도. 한 무리를 데리고. 간. 2박 3일은. 약간은 혼란. 약간은 불안. 약간은 곤란. 만나고 싶은 이들도 많고. 만나야할 이들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결국 몇 몇에게 너무 미.안.한. 나들이.가 되어 버렸다.

 

모든 사람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단. 물론 다음에 가서 보면 되는 거지만. 그래도 아쉬웠단. 하지만 다른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단.

 

변했다. 공항이. 길거리를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모습이.말로만 들리던. 헬멧 착용의 의무화.가. 난 적어도 2년 정도는 걸릴꺼라고 생각했는데. 그 더운 나라에서 헬멧을 써야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주변인들도 안될꺼라고 했는데. 정확히 2007년 12월 15일부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헬멧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는.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마저도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약간의 불만은 있겠지만.

 

거의 완.벽.한. 통.제.가 가능한 나라. 베.트.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왔다.

 

베트남에서. 개인에게 어느 정도 자유(그 자유가 도대체 뭔지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가 주어질 수 있는 때가 그 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어질 꺼 같다는 느낌.을 받고 왔단. 왜 일까? 분명 베트남은 독재국가다. 일.당.독.재. 역사적 상황만을 고려한다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해야하는데.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강해야하는데. 왜?

 

아마도. 일당독재지만 9명이 수장인. 다인지도체제가 그 한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9인의 정파적? 또는 지역적? 배분.비록 일당독재지만. 일정 수준의 독주는 막아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은 절대 빈곤 상태가 해결되지 않아서 일까?.....그럼 절대 빈곤이 해결되면? 해결되나?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아.

 

오랜만의 베트남. 나들이.에서 난. 약간 당황.을 가지고 와버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2월19일투표일.

얼마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언제가 선거냐고. '투표할라고?'라고 물어봤더니, 아니란다. 그 전날 회식을 할려고 한단다. 어쨌건 다음날 푹 쉴수 있는 쉬는 날이니까.

뭐라 표현해야할까? 투표장 가서 명박이 찍는거보다 낫다?.......솔직히 자신없다. 그 친구를 투표장으로 보낼 자신이 없다. 나 스스로도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니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니 곰곰히는 아니고 살짝.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찍어야한다는 말. 그래서 사표를 줄이자는 말. 어쩌면 공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때.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안다.

조금 더 뒤로.
투표 자체에 대한 고민. 현재의 '선거제도'는 분명 형식적 절차적 민주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와 같은 부정비리는 많이 없어졌으니까. 형식적으론 절차적으론. 표를 돈 주고 사는 행위가 있다 없다는 논외다. 돈 들여 하는 선거에서 돈 많은 놈이 더 많은 표를 얻을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지금 현실이니까. 그렇다고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선거제도 자체에 불만이 있다. 선거후부자를 보자. 너도 나도 할 수 있나? 아니 못한다. 5억이 있는 놈만 할 수 있다. 일단 재산으로 돈으로 피선거권을 제한 했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그런데, 그 자격제한이 왜? 돈이어야 하는가가 나의 의문이다. 자세한 건 생략. 어쨌건 선거제도 자체를 일단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상황. 그렇다고 대안이 있나? 언젠가 어느 한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난다. 누가 되던 상관없어야 한다고. 그래서 제비뽑기를 하던 돌아가면서 하던 해도 상관없다고.

다시 앞으로.그렇다고 투표자체를 안한다? 그래서 얻어지는 건 뭔데? 그냥 그들이 바라는 무관심으로 얻어지는 건 지금과 같은 아주 최악의 상황. 그래서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그래서 투표는 한다. 그러다 보니 가능성이 높은 곳에 자꾸 손이 갈려고 한다. 그랬더니 결국 이모양이되고 있다.

그래서. 난 잘 모르겠다. 아직은. 하지만 지금 조금씩 맘이 정해지고 있다.
가능성이 하나도 없어도. 용기내어 나선 이에게.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고자 하는 이에게. 맘을 전하기로.
그냥 그게 맞는거 같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냥 가능성이 있다 없다는 솔직히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냥 내 의지. 내 뜻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선택하는게 맞는거 같다. 내가 속한 어떤 조직이 아니고.ㅠ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