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합리주의’ 또는 ‘합리성’이라는 말을 쓸 때 아주 당연하다는 듯 ‘서구’, ‘서구적’, ‘서양’과 연관 짓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동양’, ‘동양적’이라는 말을 쓸 때는 ‘지혜’이니 ‘정신’이니, ‘도덕주의’를 떠올리는데요. 이런 생각들은 한편으론 ‘합리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그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론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측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말이 갖는 이분법도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이런 방식으로 나눈 다는 것이 정말 맞기는 한 건가요. 
 
그럼에도 학문적, 지적 세계에서나 전통, 혹은 문화의 측면에서나. 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이분법 또는 서양의 ‘합리주의’에 대응한 동양의 ‘지혜’ 혹은 ‘도덕주의’는, 생각보다 꽤나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환경위기를 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지요. 물론 이런 생각들이 우연치 않게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진짜 속마음이 이런 ‘정신’들로 나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환경위기를 바라보는 두 시각. 참 많이도 다르면서 같다는 걸 보여줍니다.
 
2.
<원은 닫혀야 한다: 자연과 인간과 기술 The Closing Circle: Nature, Man, and Techonlogy>을 쓴 카머너 B.Commoner 는 생물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 CHIKYU WO KOWASANAI IKIKATANO HON>를 쓴 쓰치다 다카시槌田劭 는 공학부를 나왔구요. 전공 분야는 생물학과 금속물리학으로 다르지만 둘 다 현대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데 가장 큰 밑바탕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한 사람이 ‘시험관 속에 격리된 분자를 연구해서 현대생물학의 방대하고도 상세한 문헌들을 축적해 왔다. 그러나 이런 분리된 자료로는, 예컨대 호수의 생태나 그 취약성을 설명할 어떤 종합적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원은 닫혀야 한다> p.24), 또 한 사람은 ‘지하자원에 빌붙어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게 한마디로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고 그 체내에서 피를 훑어 내가며 사는 듯한 일’(<자연과 더불어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 p.129)이라며 현대 과학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끊긴 생명의 ‘원’을 다시 닫자, ‘순환’의 삶을 살자, 합니다. 어째, 이만하면 과학계에 이단아들 같지 않나요.
 
하지만 이 두 사람. 카머너가 이리호, 일리노이주, 로스앤젤리스를 돌며 생태계를 파괴하는 원인, 본질을 파헤치듯. 다카시 역시 아시오足尾 동(銅)광산, 도쿄, 말레이시아 사라와그나 사바주를 얘기하며 푸른 지구를 위협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는 데에서는 과학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카시가
 
주스를 마시면 빈 깡통이 남지요. 슛 - 하고 쓰레기통에 던집니다. 이 쓰레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처분될지 모르면서도. 우리가 학교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내놓는 쓰레기는 누군가가 어딘가로 가져가 줍니다.
p.41
 
와 같이 쉽게 읽을 수 있게 글을 쓰는 데 반해 카머너는 좀 딱딱하지요.
 
생태학의 제2법칙:
모든 것은 어디엔가로 가야 한다
이 법칙은 물론 물질은 파괴될 수 없다는 물리학의 기본법칙을 딱딱하지 않게 다시 써 본 것이다. 이 법칙은 생태학에 적용하면 자연에는 <쓰레기>라는 것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p.42
 
또 카머너가 ‘환경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공업화된 나라들의 사람들이 <풍요한> 생활방식을 포기할 필요가 있으리라는 것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다.’(p.293)고도 말하고, ‘다분히 인간 개인의 사실상의 복지보다는 생태학적으로 잘못되고 사회적으로 낭비적인 생산유형을 반영한다.’(같은 쪽)고도 하며, ‘기술의 목적이 어떤 외견상 접근하기 쉬운 부분에로가 아니라 생태계 전체로 방향지어진다면 적절한 과학지식으로 잘 인도될 때 기술은 생태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음’(p.188)을 얘기합니다.
 
반면 다카시는 ‘공해문제의 기본은 오염원 대책(汚染源 對策)입니다. 쓰레기 공해문제의 오염원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상품생산을 규제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p.48), ‘그러므로 용기와 지성을 가지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찰나주의, 눈앞의 것과 자기의 일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p.85)라고 말하지요.
 
3.
중세 서양,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 ‘정신’은 베버((Max Weber)가 말한 “근대 서양의 독특한 합리주의라는 세계사적 현상”으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 원동력은 자연에 대한 지배 질서까지도 창조해내지요. 결국 인간 ‘정신’은 ‘진보’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채 지구별을 망가뜨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동양의 ‘정신’은 ‘이성’과는 매우 다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나 합리화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활동보다는 전통 속에,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질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본주의’가 갖는 한계 역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두 책, 그리 꼭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어울리며 대화를 하다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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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21:21 2010/08/1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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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02/1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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