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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에 설치한 부대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제정러시아를 이긴 후 관동주(러시아가 청나라에게 조차지(租借地)로 빼앗은 랴오둥 반도 남단 지역) 방위를 위해 배치했던 수비대가 그 시초입니다.
 
그 후 일본은 1918년에 이 수비대를 독립부대로 개편 증강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관동군입니다. 당시에는 독립수비대 6개 대대와 일본 본토에서 2년 단위로 교대 파견되는 1개 사단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관동군 병력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늘어갑니다. 특히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는 일본, 조선, 대만에서 병력을 동원해 75만 여명까지 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참전 후 본토와 동남아시아 방어를 위해 관동군 병력을 빼기 시작합니다.
 
결국 소련군 참전이 우려되던 1945년,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자 18세에서 45세까지 총 20만 명을 소집합니다. 한때 소련을 정복하기 위한 정예군대로까지 불렸던 관동군이 크게 약화된 겁니다.
 
2.
연합국이 반격을 해오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제는 1943년 징병제를 실시합니다. '성전(聖戰)'에 참여할 영광스런 기회라는 선전은 총알받이를 위한 강제 동원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944년과 45년 만 20세가 되는 조선 청년들이 징병으로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신체검사와 짧은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 장정들은 광활한 지역으로 배치됐습니다. '반소매 군복을 입으면 남방으로, 긴소매면 북방으로' 말입니다. 만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관동군에 편입됐던 겁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이던 8월 9일, 대일전(對日戰)에 뛰어든 소련군은 쿠릴열도, 사할린, 만주 등지에서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물론 그 포로들 속에는 관동군 소속 조선 청년들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 군인으로 간주됐습니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던 제국주의 군인들 말고, 징병으로 끌려온 청년들까지 말입니다. 시베리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3, 4년간에 걸친 중노동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
'포로'들은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각처로 흩어졌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있던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첫 희생자가 됐습니다. 수용소시설은 열악했으며 혹한, 기아, 중노동이라는 '시베리아 3중주'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 포로에 비해 더욱 고달픈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본군 계급 질서가 수용소 안에서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장교와 지원병을 제외하고 대부분 말단이었기에 온갖 궂은일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1948년 12월이 돼서야 조선인 '포로'들은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8월과 9월 남쪽과 북쪽에 각기 다른 정부가 차례로 수립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인 귀환자들이 자국선을 타고 돌아간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소련 화객선을 타야만 했습니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생존자들은 '시베리아 대지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베리아 에니세 물결아 잘 있거라 자작나무 숲아 네 품에 자란 어린이들은 내 본향 찾아 떠나련다 시베리아여 우리들의 자유와 청춘, 보람을 심어주던 정든 고향 시베리아".
 
4.
류학구는 일제 패망을 닷새 앞둔 1945년 8월 10일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소련군에 '포로'가 됐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한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소련 잔류를 택했습니다. 비록 고향에 있는 어머니 안부가 마음에 걸렸지만요.
 
오웅근은 1925년 젠다오間島 지방 쉬시엔石峴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8월 초 소집 영장을 받고 하이라얼로 갔던 그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됩니다. 시베리아 포로 생활이 끝난 후 북으로 돌아와 부친과 만났으나 모친이 남아 있는 쉬시엔으로 돌아갔습니다.
 
흥남여고에 임시 수용됐던 억류자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옌변延邊 등 만주 출신 수백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남쪽 출신 귀환자들은 거리에 따른 여비를 지급 받고 제일 마지막에 떠났습니다.
 
이창석은 1944년 1월 10일 만주에서 입대했다 '포로'가 됐습니다. 이후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15년 중노동형을 받았습니다. 8년간 억류생활을 마친 이창석이 도착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땅이었습니다.
 
5.
흥남여고에 머물러 있던 귀환자들은 곧 고향에 돌아가도록 허용됐습니다. 먼저 옌벤 등 만주 출신 수백여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친이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사람은 이보다 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임시 숙소를 떠난 사람들은 남쪽 출신들이었습니다. 신현택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으로 가는 거리에 따라 북쪽 정부로부터 여비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생존자들 말에 따르면 출신 지역별로 묶어 38선을 넘었다고 합니다.
 
정읍 출신 정용환은 포로용 방한복을 바꿔 입은 바람에 공작원 의심을 받게 되고 급기야 전기 고문까지 당했습니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이병주는 가족이 모두 포항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남으로 내려왔으나 특별한 지령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월경 후 연행된 사람들은 인천 귀환자들은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戰災民)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이때 귀환자들은 정용환과 이병주처럼 경찰서 혹은 미군 극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론 북쪽에서 받은 여비가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6.
소설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겁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삶. '파란만장', '격동', '비극'이란 말들이 결코 은유가 아닌 삶,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삶들이 말입니다.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들이나 북쪽에 남은 사람들. 혹은 남도 북도 아닌 일본, 만주, 소련으로 간 사람들. 이들은 귀환 이후에도 순탄한 삶을 살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일본, 소련 어느 곳에서 '배상'은커녕 '사고'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지도 65년이 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끝난 지 55년이 지났습니다. 반세기도 넘게, 세 세대가 돼서야 이들이 겪은 모진 삶들이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역사 연구자도 아닌 한 현직 기자로부터 말입니다.
 
일본에선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사람이 총리로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 한 관동군 출신 아버지 후광을 업은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입니다.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일본,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한국.
 
일본 탓만 하기에는 되레 '민족주의'라는 덫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후 천황제를 유지하면서까지 전범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미국 탓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본 침략 전쟁에 협력한 추축국 진영으로 치부해 조선인들을 억류한 소련 탓을 할까요.
 
맞습니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장교였던 이가 국군 원로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군함은 군국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버젓이 달고 우리 항구에 들어옵니다. 여태껏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을 안고 있는 우리 탓이 더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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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11:56 2016/06/28 11:56
1.
대세라던 인기 그룹 멤버들이 안중근 의사를 몰라본 일로 시끌벅적합니다. 급기야 SNS에 사과 글을 올린데 이어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하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는데요. 이번엔 앨범 발표회를 중계하던 포털 앱이 문제였습니다. '안중근'을 금칙어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미 찍힌 '낙인'에 겹쳐 반응이 싸늘하기만 합니다.
 
반면 늘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던 한 연예인은 어렸을 적 안중근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단번에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더구나 묘하게도 엇비슷한 때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요. 비교당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누군 역사의식 없는 요즘 아이돌로, 누군 '역사의 신'으로까지 등극하고 있는 겁니다.
 
그 밖에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를 묻는 질문에 안창호를 택했던 사람. 초대 대통령으로 이수만을 외쳤던 이. 급기야 주말 예능프로그램에서마저 '조선무역팀', '칠공주' 같은 답들을 써낸 아이돌들까지. 뭐, 이번 일이라고 안 그렇겠습니까마는. 한동안은 비슷한 일만 생기면 또 이러쿵저러쿵 꺼내질 게 뻔합니다.
 
2.
예전 이맘때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단골 뉴스였지요. 하지만 지금은요, 철 가리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인가요. 황사보다는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던 날씨가. 글쎄 미세먼지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정부가 갑작스레 미세먼지 대책으로 경유 값 인상을 솔솔 흘리고 있습니다. 물론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한 차량으로 '저공해차량인증제'를 통해서이긴 했지만요. 환경개선부담금 유예, 통행료 감면, 환승주차장 및 공영주차장 할인 등을 통해 디젤차 인기를 주도할 때는 언제더니 말입니다.
 
그러니 경유차 운전자들이 뿔날 수밖에요. 더구나 담배 값 인상 때 한 차례 경험도 했습니다. 값을 올려봐야 그때뿐, 결국 세금 더 걷으려는 꼼수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왜 그런지를 찾기보다는 말입니다. 없애버리거나 혹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아왔으니 더 그렇습니다.
 
3.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가가 발행하는 단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또 역사교육 강화라는 목적으로 한국사를 수능필수과목으로 지정했구요. 취임 때부터 단골로 등장했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역사교육에도 등장한 것인데요. ‘올바른 역사의식’과 ‘자랑스런 현대사’를 국정화와 수능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역사에서 ‘올바른’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생각부터 대단하다고 생각됐지만요. 그동안 교육부에서 검정해왔던 교과서를 이제와 '비정상'으로 내모는 지 당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또 ‘역사지식’말고도 외워야할 게 많은 아이들에게 뭘 더 외우라고 하는 건가요.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아버지가 ‘자랑스런 현대사’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닌 건가요.
 
'안중근'이 어떻게 생겼고 어렸을 적 이름이 '안응칠'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역사의식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아니 너도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 그걸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구요. 역사적 사실을 줄줄 꿰어 차고 있다고, 수능 '1등급'이 수능 '6등급'보다 역사의식이 반드시 높은 것 또한 아닙니다.
 
4.
하다하다 이젠 식당에서 구어 주는 고등어에 돼지고기까지 미세먼지 주범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기야 정부로서는 공장과 화력발전소로 불똥이 튀는 걸 막아야 하니 무슨 얘긴들 못하겠습니까. 이쪽에서 때리고 저쪽에서 또 때리고. 기업 눈치 보랴 여론 눈치 보랴 방향을 잃는 건 당연합니다.
 
또 생색내기 대책입니다. 노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거나 LNG로 대체하겠다는데, 지금 만들고 있거나 만들 예정인 석탄발전소 설비용량만 그것에 6배에 달하니 그렇습니다. 또 중국발 미세먼지 탓은 하면서도 함께 대책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는 없고, 나머지 미세먼지 절반을 뿜어내는 국내 기업과 공장에 대해서는 아예 무대책이니 말입니다.
 
분명 화력발전소보다야 못하겠지요. 또 공장 굴뚝보다야 낮을 겁니다. 하지만 경유차 역시 미세먼지를 내뿜으며 질주합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요. 그러니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말입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과시욕에 경쟁하듯 굳이 그렇게 큰 차들을 끌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5.
오래 전, 한 사람은 월남 파병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갈비에 기름덩어리가 나왔다고 '분개'하는 옹졸한 자신을 시로 옮겼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몰라봤다고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지구를 먹고 자라는 자본주의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세금 못 내겠다,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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