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땅 처음 마을에서 출발하는 무작정 걷기 여행(2005년 6월 4일)

  

“땅끝입니다. 땅끝마을입니다. 물건 잘 챙기십시오”

  

어느새 잠에 빠졌었는지 기사분의 목소리에 놀라 깬다. 물건이라고 해봐야 각자 배낭 하나씩에 햇빛을 가려줄 모자가 다니 그리 법석을 떨지 않아도 될 듯 싶은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짐을 챙기느라, 또 내리느라 버스 안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여기가 땅끝마을 인가?’.

  

버스에서 내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무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보길도로 가는 첫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몰려가는데, 다른 한 무리들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눈치다. 우리 역시 어찌해야 하나 잠시 우왕좌왕하는 무리들 속에 끼어있다 아침이나 먹을 요량으로 선착장 매표소 옆 가게에 들어가 컵라면 두 개를 주문하고 나니 언제 들어왔는지 기사 분이 한마디하신다.

 

“에헤 사람들이 말야. ‘땅끝마을이다’하고 내렸는데 말야.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다들 우왕좌왕하네.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고. 하기야 서울에서 보면야 여기가 땅끝이지만 여기서보면 땅끝이 처음인데 뭐 그리 볼게 있다고 그렇게들 오는지”

 

맞다. 땅끝은 저쪽에서 봤을 때야 그렇지 이쪽에서 보면 땅 처음인 거고,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는 여기가 끝일런지는 모르지만 다시 돌아서는 사람들에게는 처음이 아닌가. 길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처음부터 무작정 땅끝부터 고성까지 걷자고 한 건 아니었다. 둘 다 원체 걷기를 좋아하기는 했어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작년 봄 월악산에서 제천까지를 2박 3일 동안 걸었었는데 그때 기억이 너무 좋았던 게 아마도 출발점이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그때만 해도 땅끝에서 고성까지 걷는 사람들이란 다들 한 달 이상의 긴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 그저 부러워만 했을 것이다. 그러다 ‘우리도 한 번 해볼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어느날 문득 접한, 백두대간을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몇 달에 걸쳐 종주를 한다는 이야기였을 거다. ‘그래, 한번에 못하면 나누어서 하는 거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우리의 계획은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계획이라고 해봐야 ‘1년에 두서너 번 있는 연휴와 6일간의 여름휴가를 적절히 이용하면 되겠다’ 정도지, 어떤 길로 걸을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경비는 얼마나 들지 등등의 계획까지 세운 것은 아니었기에 ‘일사천리’라는 말은 좀 그렇다.

  

77번 국도는 땅 처음 마을에서부터 첫 숙박지로 예정한 남창리까지 이어지며,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왼쪽으로는 산이 번갈아 가며 따라오는 걷기에는 아주 좋은 길이다. 게다가 차도 많이 다니지 않고 갓길도 충분하다. 또 길을 걷다보면 여러 곳에서 ‘전망 좋은 곳’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쉼터가 나오는데, 이 쉼터는 차를 타고 여행을 하더라도 꼭 놓치지 말고 쉬어가야 할 것이다. 멀리 수평선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넓고 파란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 위에는 작은 섬들이 점점이 줄을 서있고, ‘통통통’ 소리와 함께 고깃배들도 솔솔이 보이는 것이 남쪽 바다의 풍성함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햇빛에 적당한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마중 나오는 모든 마을들이 그렇듯이 너무나 예쁜 ‘통화마을’에서는 골목길까지 들어가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모래가 가늘고 곱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사구미해수욕장’에서는 모래사장을 거닐며 여유를 부려보기도 한다. 헌데 점심을 먹기로 예정했던 ‘남전리’라는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은 꽤 큰 편인데도 불구하고 식당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중간, 지나쳐왔던 마을들에서도 식사를 할 만한 곳을 보지는 못했다. 다만 주위 풍경이 좋다 싶은 곳이면 어김없이 들어서 있는 횟집과 가든만이 보였다. 어째 이리도 먹거리는 전국이 하나같을까?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무조건 쉬기로 했는데 첫날부터 어긋났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남전리에 도착했으니. 그래도 햇빛의 따가움이 한 숨 잦아들 때까지는 무조건 쉬기로 하고 마을 입구 슈퍼에서 빵과 우유로 점심을 때운 후 신발 끈까지 풀고 평상에 올라간다.

 

오후 2시. 다시 출발이다. 6월인데도 등뒤로 내리쬐는 햇빛이 어찌나 따가운지, 게다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힌다. 오늘은 남창리까지 가는 것이 목표다. 남전리에서 남창리로 가는 길은 오전에 걸은 길과는 달리 길 양옆으로 논과 밭 그리고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동무를 하는 길이다. 또 이름 모를 저수지들이 마을근처에 있어 쉬어가기 좋으며, ‘이진마을’에는 길손들을 위해 마을사람들이 심어놓은 느티나무가 있으니 땀도 식힐 겸 마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도 느낄 겸 평상에 누워 쪽잠을 자도 좋다.

 

첫날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당초 무작정 걷기 여행 첫날밤을 보낼 곳으로 정했던 남창리에 도착하니 5시가 조금 안됐다. 대략 23킬로미터 정도를 걸었으니 꽤 괜찮은 속도로 온 것 같다. 남창사거리 기사식당에서 무려 15가지 반찬이 나오는 5천 원짜리 백반으로 맛나게 저녁을 먹고 남창관광여관에 짐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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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18:54 2009/04/30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