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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용 흉기가 되어버린 한국 언론

'전과 25범' 최갑복 vs. '29만원' 전두환…누가 장발장인가?

[박동천 칼럼] 고문용 흉기가 되어버린 한국 언론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02 오전 11:54:15

 

중세 유럽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천하고 악하게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영원한 신의 나라에 비해 현재의 속세는 더럽고 추하고 죄악으로 가득하다는 식이었다. 신앙이라 불리는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와 욕망이라는 나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들은 평신도들에게 설교했다. 추악한 성욕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일부일처제를 도덕률로 강제하고, 심지어 동정의 삶을 이상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부자와 권력자들은 육욕, 물욕, 지배욕, 소유욕, 탐욕의 화신처럼 살았다.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연애와 정사가 일상적으로 성행했다. 배우자를 두고 다른 상대를 사귀는 경우, 교회의 허락을 받아 이혼하고 재혼하는 경우, 교회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배우자를 살해하고 재혼하는 경우 등도 빈번했다. 왕족과 귀족은 또한 재물과 권력과 지위를 획득하고 확장하기 위해 음모와 배신과 폭행을 일삼았다. 교회는 이들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사제나 신학자들 자신이 대개 왕족 또는 귀족 집안의 후예였다.

문란한 성생활과 그악스러운 탐욕은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교황이 공공연히 정부를 거느리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게 권력과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공작을 꾸미는 것도 모자라, 전쟁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르는 와중에서도 이들은 평신도들에게는 순결한 도덕률을 설교하면서, 티끌만큼이라도 위반이 있다면 가혹하게 처벌했다. 권력자가 누구를 처벌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상대가 도덕을 위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 죄나 뒤집어씌우고 고문으로 자백을 받든지, 조작된 증인을 세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이 이런 짓을 못하게 막으려고 여러 가지 장치들이 생겼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원리에 토대를 둔 사법제도, 인민 주권의 원리에 토대를 둔 대의 정치와 선거 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마련되기만 하면 권력의 몹쓸 버릇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중세 유럽에도 사법부나 대의 제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사법부나 대의제가 있어봤자 법관과 의원들이 권력과 이권에 휘둘리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은폐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허용되느냐에 있다. 강자가 가진 권력이란 단순히 약자를 괴롭힐 수 있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의 소행을 은폐할 권력까지 가진다. 그러므로 약자의 처지 역시 단순히 강자에게 육체적·재산적 괴롭힘을 당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소행이 낱낱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법 앞에 만인 평등이라는 원리 위에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른다는 혐의를 받는 경우, 소행이 낱낱이 공론의 도마 위에 노출되어야 하는 평등이 관건이 된다.

하지만 누구든지 공론의 도마 위에 불려 나와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특정인에게 범죄 의혹을 제기하는 행위에는 엄격한 제약이 첨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범죄로 처단해야 할 행위와 그럴 필요가 없는 행위를 구분하는 엄정한 분별이 이뤄져야 한다. 처벌할 필요가 없는 행위 중에는 조금이라도 잘못이기는 하지만 경미해서 처벌하기보다는 훈방하는 편이 사회적으로 나은 경우, 그리고 애당초 아무 잘못이 아닌 때가 있다.

무고한 사람을 범죄라고 걸어서 고발하는 행위는 자체로 범죄 행위이다. 명예 훼손 또는 무고라는 죄목은 이래서 정해졌다. 무고까지는 아니지만 경미한 사안일 때에는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길동이가 책상 위에 1000원짜리 한 장을 놓고 점심 먹으러 나간 사이에 직장 동료 매향이가 그 돈을 슬쩍 주머니에 담았다고 할 때, 이를 알게 된 길동이가 고발해야 하는가? 이런 절도가 단지 한 번에 그쳤다면 처벌할 가치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한 번에 그친 일을 가지고 고발하는 행위는 장려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1000원짜리 좀도둑이라도 지속해서 이뤄진다면 처벌해야 맞다. 법의 자비를 악용하여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갉아먹는 짓이기 때문이다.

한편, 매향이가 1000원을 슬쩍 집어넣은 행위를 길동이가 고발한 경우는 어떨까? 조금만 연장해서 생각해보자. 경찰이든 회사 내부의 감사 기관이든 또는 부서 구성원들이 모인 회의에서든, 이 일은 경미한 일이므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은 후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고 쳐보자. 그런데 길동이가 계속해서 그 일을 문제 삼는다면? 1000원짜리를 한 번 슬쩍한 불미스러운 전력이 있는 매향이와 불문에 부치기로 한 공동체의 결정에도 그 일을 가지고 계속 매향이를 공격해대는 길동이 중에서 어느 편이 공동체에 더 해로운 짓을 하고 있는가?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길동이의 그악스러운 행위가 해롭다는 결론을 당연히 내릴 것이다.

권력이 부패하게 되면 1000억 원을 훔친 자들이 팔팔하게 행세하면서 도리어 1000원을 훔친 사람에게 법과 정의를 내세우며 주먹을 휘두르게 된다. 기실, 단위가 요즘은 천문학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수십조 원을 훔친 도둑이 100만 원 훔친 도둑을 때려잡겠다고 설치는 셈이라 말해야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흉악범의 경우에도, 수백 명을 살해하고도 떵떵거리는 자에 관해서는 포기하고 지내던 사람들이 어디서 살인 사건이나 아동 성폭행범이 하나 나오면 마치 그 때문에 말세라도 되었다는 양 "사형 집행"이니 "물리적 거세" 따위를 부르짖는다.

주류 언론의 이와 같은 행태는 중세 유럽에서 행해지던 고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중세 유럽에서 큰 도둑놈들이 자신의 범죄 행각에 대한 공론의 관심을 따돌리기 위해 좀도둑 하나 잡아서 공개적으로 고문했던 수법을 정확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이 수법이 좀도둑이나 흉악범에 대해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 '안철수 불출마 협박 사건'을 폭로한 금태섭 변호사의 기자 회견 장면. ⓒ연합뉴스

노무현과 곽노현이 마치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다는 듯 떠들어댄 마녀 사냥이 바로 이와 같은 수법이었다. 공론 자체에 대해 고문이 행해졌던 것이다.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양심적인 시민에 대한 매카시즘도 공론에 대한 고문의 한 형태이다. 박원순에 대해 강용석이 떠벌인 헛소리를 마치 합당한 의혹인 양 대서특필했던 언론의 행태 역시 공론에 대한 고문이었다. 그리고 안철수에 대하여 지금 다시 사악하기 짝이 없는 고문이 시도되고 있다.

이런 고문에 시달리는 한국의 공론장에서, 금태섭에 대한 정준길의 '협박'은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도리어 금태섭의 폭로가 '네거티브'로 둔갑한다.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잡는다는 말이 이렇게 맞을 수가 없다. 표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복사해서 편집한 것을 논문이랍시고 제출해서 학위와 지위를 차지한 인종을 비호하는 자들이, 멀쩡한 안철수의 논문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있다.

강용석을 용서한 박원순의 행위는 한 개인의 포용력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강용석을 명예 훼손으로 걸어서 법정에 세웠더라도 무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강용석이 작년과 같은 행위를 또다시 저지른다면 박원순이 아니라 그보다 마음이 만 배쯤 넓은 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 용서하고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살인자를 보고도 고발하지 않고 넘어가 버린다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난 일들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공론장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랄한 행위들을 앞으로도 용서만 하고 넘어간다면, 이 사회에 법과 정의는 영원히 자리 잡을 수 없다.

문재인은 검찰 개혁을 말하고 있지만, 개혁된 검찰의 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단계를 밟아나갈지 등의 구체적인 구상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법원과 헌법재판소 그리고 경찰, 선거관리위원회, 인권위원회, 감사원, 저작권위원회, 언론중재위원회, 기타 등등 검찰 이외의 사법 기관들은 어떻게 개혁할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안철수는 이 방면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특히 최근 자신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언론의 공격을 선거판에서 으레 있기 마련인 공세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면, 마음이 넓은 것이 아니라 순진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큰 도둑이 권력과 지위를 차지하고서 작은 도둑을 때려잡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큰 도둑은 작은 도둑을 때려잡으면서 자신의 치부를 은폐한다. 이런 체제에서는 도둑이 아닌 사람도 큰 도둑의 필요에 따라 쉽게 도둑으로 둔갑해 버린다. 이렇게 도착(倒錯)된 구조를 정상화해내지 못한다면, 경제민주화도 복지 국가도 민주주의도 평화 체제도 모두 헛꿈으로 그친다.

궁극적으로 공론장의 건강을 회복하고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자들일수록 공론에 엄중하게 감시받고 조사받는 체제를 이룩해내야 한다. 정치인과 재벌은 물론이고, 법조계, 관료, 군대와 경찰, 기타 각종 공식 위원회에서 공적 판단을 내리는 자들의 직무 행위에 대해 해명을 받아내서 따질 수 있는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언론 종사자들이 공론을 빙자하면서 벌이는 영업 행위에 대해서도 공동체 차원의 규제가 있어야 한다.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은 장발장은 그 때문에 결국 전과 19범이 되고 말았다. 지난 9월 28일 자 <한겨레> 기사 "'배식구 탈출' 최갑복, 집주인에게 맞기만 했다"를 보면, 최갑복의 전과가 25개나 된 데에도 장발장처럼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곁에서 전두환은 "29만 원밖에 없다"고 능청을 떨면서 양주 파티를 벌인다. 증거가 없어서, 그리고 나 자신의 인격을 보전하기 위해서, 차마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는다만, 이 나라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오히려 몽둥이를 잡는 자가 전두환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대통령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야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과 안철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관해 "사과" 두 글자를 모처럼 입에 담은 박근혜도 이 문제를 생각할 수 있기를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 아울러 은근히 차기나 차차기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 모두의 주변에서 한 자리 해먹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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