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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11

혁명 지도자, ‘신화’가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김갑수 | 2017-11-03 13:44:4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천도(天道)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필부지용(匹夫之勇)’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사람의 용기, 즉 별것도 아닌 용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초나라 장군 한신이(韓信)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 앞에서 초패왕 항우(項羽, 기원전 232~202)를 낮추어 평가한 말이다.

“항왕이 노하여 꾸짖을 때는 천 명의 사람이 모두 꿇어 엎드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휘하의 어진 장수들을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것은 ‘필부의 용기’일 따름입니다. 항왕은 또한 사람을 인견할 때면 공손하고 인정이 넘치고 말씨도 부드럽습니다. 아픈 자가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하지만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내려야 할 때는 인수를 넘겨주기가 아까워 닳아 없어질 때까지 주무릅니다. 이는 ‘아낙네의 인정’일 뿐입니다.” (『사기열전』 , 서해클래식, 옌볜인민출판사, 362-363)

한신은 ‘필부의 용기’에 더하여 ‘아낙네의 인정’을 거론했다. 각각 ‘보잘 것 없는 용기’, ‘공사를 가리지 못하는 인정’을 뜻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흡족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좋게 생각하는 ‘필부지용’과 ‘필부지정’을 한신은 단칼에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다. 이것은 내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생기는 갈등의 항목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사사로운 용기나 인정을 내세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기열전』을 권한다. 이 책은 음미하면서 읽기에 제격이다. 여기서 음미라고 하는 것은 말뜻 그대로 ‘느끼거나 생각하며 읽는다’는 뜻이다. 나는 사기열전을 세 번쯤 읽은 것 같다. 소년 때의 ‘사기’와 청년 때의 ‘사기’에 비해 장년의 ‘사기’는 사뭇 다르게 읽힌다. 이것만으로도 사기는 ‘대단한 고전’임이 틀림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기』는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 이룬 노작이다. 사기 130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70편의 열전은 비범한 인간들의 언행을 다른 명편(名篇)이 많다. 그런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음미하며 읽도록 한다.

『사기』가 위대한 것은 열전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인물전은 ‘공자가 그리워 한 주나라’에서 시작하여 ‘힘으로 인(仁)을 가장한’ 춘추시대와 ‘칼로 천하를 다툰’ 전국시대를 거쳐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과 초·한의 쟁패전 그리고 재통일을 이룬 한 제국까지를 다룬 역사서 겸 문학서다.

사기열전의 강점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균형과 조화를 이룬 기술에 있다. 이 책에는 ‘객관적 주관’과 ‘주관적 객관’이 균등하게 나타난다. 이런 특성은 저자의 냉철한 공정성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30명의 ‘세가’ 편은 제후가 대부분이지만 여기에는 공자 같은 서생도 있고 진승 같은 반란자도 들어 있다. 열전 편에는 일자(점장이), 화식(부자), 영형(아양꾼), 골계(개그맨?) 등이 망라되어 있어 흥미를 배가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시하는 인물은 제자백가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6가’의 인물들인데, 6가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음양가, 명가(논리학)를 가리킨다. 글의 문맥으로 보아 사마천의 시대(기원전 145~86)에는 유가와 묵가가 가장 우대를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사마천이 가장 수준 높은 것으로 친 학파는 유가, 묵가가 아니다. 사마천은 내심 도가 즉 노자, 장자를 유가, 묵가보다 더 심오한 학파로 인식했다.

이 책에서 공자가 노자를 평가한 대목은 특히 유명하다.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고 하니, 나로서는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아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11쪽)

노자의 학문이 깊다고 평가하는 사마천은 도가에 대해, “음양가의 큰 법칙 속에서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채택하여 시간과 사물의 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게 한다”고 극찬했다.

『사기』는 유명한 고사성어의 산실이기도 하다. 曲學阿世(곡학아세), 兎死狗烹(토사구팽), 囊中之錐(낭중지추), 傍若無人(방약무인), 背水陣(배수진), 焚書坑儒(분서갱유), 四面楚歌(사면초가), 臥薪嘗膽(와신상담), 指鹿爲馬(지록위마), 千慮一失(천려일실), 口尙乳臭(구상유취), 多多益善(다다익선) 등 오늘날 한국인이 자주 사용되는 고사성어만 해도 50여 개가 넘게 나온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행복한 삶을 이룬 인물전(화식열전)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정신과 물질의 균형을 맞추어 놓았다. 흔히 『사기』는 도덕적 가치를 우선시한 책으로 인식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기열전에서 내 맘에 드는 문장을 지면상 둘만 소개한다.

“있을 자리가 아닌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탐위’라 하고, 받아야 할 명예가 아닌데도 받는 것을 탐명이라고 한다.”
“남의 말을 듣고 반성하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자기를 밝게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고 한다.” 탐위와 탐명 그리고 총, 명, 강… 참으로 음미할 게 많은 말들이다. 하지만 사기열전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첫머리에 있다.

저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네.
무왕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 우나라, 하나라의 시대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 나는 떠나련다. 운명이 쇠했으니.

‘백이열전’의 한 대목이다. 백이와 숙제는 상(商)나라 제후국의 왕자들로서 주(周) 무왕이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왕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자 ‘불충’이라는 명분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끝내 무왕이 상을 치자 백이와 숙제는 명분이 어지러워진 혼탁한 세상과 타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죽었다. 위 노래는 그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부른 것으로 도저한 결기의 정신세계를 표현한다.

이처럼 사기열전은 지고한 정신적 가치를 구현한 ‘백이·숙제 편’을 첫머리에 배치했다. 그리고는 이토록 높은 정신적 가치를 실천한 사람들의 삶이 비참하게 끝났음을 환기하면서, ‘과연 천도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절규하듯이 묻는다.


혁명 지도자, ‘신화’가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1975년 4월 30일 아침, 소련제 북베트남 탱크들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이공 북부 교외를 통과하여 도심의 대통령 관저를 향했다. 군용 작업복 차림에 황금별이 박힌 유별난 철모를 쓰고 탱크 위에 앉은 병사들은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통 누트가(街)를 일렬로 천천히 통과하던 탱크들은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나갔다. 불과 2시간 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미군 해병대원들이 대사관 지붕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떠났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미국인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북베트남의 선도 탱크는 대통령 관저의 주철 정문 앞에서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철문을 뭉개버리고 들어가 관저 현관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앞의 잔디밭에 멈췄다. 탱크에 타고 있던 젊은 지휘관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두옹 반 비그민 대통령과 잠깐 만났다. 이어 관저 지붕으로 올라가 깃대에서 베트남 공화국 기를 내리고 빨간색과 파란색이 어울린 임시혁명정부 기를 올렸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기술한 윗글을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대리만족을 얻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글 중에 있는 ‘베트남 대통령 관저’에 느닷없이 한국의 청와대를 대입해 보았고 이런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스스로 의문을 갖기도 했다. 평전 『호치민』(윌리엄 J 듀이커)에는 이렇게 벅찬 감동을 일으키는 대목이 많다.

베트남 통일혁명의 공로자는 셋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한 세대 이상 남베트남의 정글과 늪에서 혁명적 대의를 위하여 싸우다 죽어간 무명의 베트콩 전사들이고, 둘째는 뛰어난 결의에 노련한 능력까지 겸비한 베트남 노동당 지도자 레두안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며, 셋째는 베트남 공산당 창건자이자 혁명운동의 지도자였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주석 직을 종전 6년 전인 1969년까지 맡고 있다가 타계한 호치민이다.

호치민은 누구인가? 일찍이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요원이었고 국제공산주의운동 참여자이자 베트남 승전의 기획자 호치민, 사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들은 호치민의 위대함을 말하면서,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살다간 ‘호 아저씨’를 먼저 꼽는데 사실 이런 인물관은 대단히 순진하고 불성실한 역사인식이다. 예전에 남미 어느 나라 대통령 중에 경차를 타는 대통령을 침이 마르게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인이 가난하다거나 소박, 소탈하다는 이유 때문에 더 높이 평가해야 할 필요는 없다.

호치민의 소박한 이미지는 진짜인가 아니면 책략적인 연출이었나? 이런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국가지도자는 부정부패만 없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호치민이 국가 최고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인도주의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며, 서민적인 자세로 베트남 인민의 삶을 개선한다는 대의에 평생 헌신해 온 사심 없는 애국자였다는 사실이다.

1858년 늦여름,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는 가톨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베트남 영토를 침탈해 들어왔다. 베트남은 1885년 사이공을 점령당했고 1884년 우리의 을사늑약에 해당하는 ‘보호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3분할하여 통치했다. 북부의 통킹, 중부의 안남, 남부의 코친차이나인데, 프랑스는 이 셋을 합쳐서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했다.

베트남인은 식민지 통치 기간에 대 제국주의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했다. 베트남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로는 판보이쩌우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이상설 선생과 캐릭터가 비슷하다.

1927년 응우엔타이쿡은 베트남 국민당을 결성했다. 그리고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이 응우엔아이쿡의 지도 아래 창당되었는데 그가 바로 문제적 인물 호치민이었다.

호치민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융합하여 반제국주의 무력투쟁을 벌였다. 그는 인습 타파와 지식층 개혁을 내세우면서 베트남 인민해방을 세계혁명과 연계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어냈다. 호치민의 공산당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베트남과 한국의 차이점]

우리와 베트남은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흔히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와 비슷하다고들 한다. 문화적으로 중국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점, 고대로부터 정치적으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점, 근대에 들어 식민지를 체험했다는 점, 지리적으로 국토가 북에서 남으로 길게 늘어진 꼴이라는 점, 이데올로기 대립이 빚은 남과 북 분단국가였다는 점 등에서 두 나라는 흡사하다.

명 태조(홍무제, 1328~1398)는 유훈에서,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국이 있는데, 첫째가 고려(실은 조선)이고 그 다음이 안남(베트남)”이라고 했다. 나는 동아시아에서 한민족과 베트남 민족을 주체적 실체로서 최고 순위로 꼽은 명 태조의 평가는 탁견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관심을 둔 것은 두 나라의 유사점이 아니라 차이점이었다. 우리는 지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있는 반면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 그리고 미국을 차례로 몰아내고 1975년 자주통일국가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3~2세기부터 추적되는 베트남 역사의 연대는 우리와 비슷하다. 한 무제의 군현통치를 받았다는 점도 우리와 같다. 다만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거의 1,000년 가까이 받았고 프랑스의 지배를 80년이나 받았다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있다. 그런데 분명히 베트남은 한국보다 중국에 대해 자주적이었다. 이것은 베트남의 수많은 국왕들이 중국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칭제건원’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베트남 민족성이 한민족의 것보다 더 자주적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표면상으로 베트남이 한국보다 더 자주적인 외교를 구사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문화적, 지리적 이유 두 가지로 분석한다.

우선 중국은 베트남보다는 한국을 문화적으로 우대했기 때문에 그만큼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성이 적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지리적으로 두 나라가 길쭉한 형상이기는 하지만 베트남은 면적이 33만 제곱 킬로로 한반도의 1.5배이고 길이는 1,650킬로로서 한반도 길이의 2배나 된다.

그래서 남베트남의 경우 지리적이나 인종적으로 중국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에 따라 중국인과의 친밀감이 한국에 비해 적었다. 현대사에서는 베트남과 한반도 양자 모두 중국보다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오늘에 들어 베트남 민족은 적대국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남측은 친미적이고 북측은 반미적이다. 베트남 역시 통일 이전에는 지금의 우리와 같았다.

1975년에 종료된 베트남의 통일전쟁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분단 모순을 드러냈다. 베트남 전쟁에 이남은 남베트남을, 이북은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이남은 미국 다음의 대규모 지상군을 남베트남에 파견했으며 이북은 북베트남에 공군력을 지원했다. 우리의 분단 전쟁이 베트남으로 옮겨가 연장된 꼴이었다. 이것은 심각한 모순이자 보이지 않는 비극이었다.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과 호치민 통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그 군대인 인민해방군이 조직되면서 남베트남의 반정부 항전은 크게 확산되었다. 1961년 말 인민해방군은 1만 5.000명으로 늘어났는데, 이것은 1959년 규모의 5배였다. 증강된 베트콩군은 놀라운 기동력으로 남베트남의 군사시설, 수송차량, 행정사무소 등을 공격했다. 또한 중부 고원지대에 해방구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장차 인구밀도가 높은 저지대를 공략할 때 발판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호치민 통로는 베트콩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였다. 이 통로를 따라 인력과 물자가 끊임없이 남부로 보급될 수 있었다. 이것은 민족해방전선의 확대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70년 4월 30일, 미국 닉슨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했다. 이미 미국은 1969년 3월부터 캄보디아를 폭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경유해 남베트남으로 군대와 보급품을 보내오던 통로, 일명 호치민 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문제는 닉슨의 비정상적인 비밀주의에 있었다. 닉슨은 이 폭격을 은폐하기 위해 공군기록 날조를 포함한 온갖 기만적 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닉슨의 폭격 은폐 사실은 미국 내 반전여론을 폭발시켰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또 하나의 군사적 환상’이라며, “지루한 세월과 쓰라린 경험으로 미국 국민의 신뢰가 고갈되었다”고 비난했다.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의 대학생이 반전시위에 가담했다. 대학생들은 3 : 1의 비율로 반전에 찬성했고(1969, 갤럽 조사) 4분의 3이 자기를 스스로 ‘뉴 레프트’라고 간주했다.(1970, <포츈> 지 조사) 전 대학의 80% 이상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났고 대학생의 반수인 400만 명의 학생과 35만 명의 교수가 동맹휴학에 동참했다.

특히 오하이오 주의 켄트주립대학에는 주 방위군이 투입되어 무모하게 발포, 4명의 사망자(2명 여학생)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비화시켰다. 켄트대학 사건 5일 전 닉슨은 버클리, 예일, 스탠퍼드 대학의 방화에 가담한 학생들을 불량배에 비유했는데, 총에 맞아 사망한 여학생의 아버지는 “내 딸은 불량배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훗날 닉슨은 “켄트대학 사건 뒤 며칠 동안이 내 임기 중 최악의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디엔비엔푸의 병사들과 지압, 호치민]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서쪽 3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은 촌락으로, 불과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라오스와의 접경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투가 없었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을 일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작고 한가로운 마을이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출발점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쟁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또는 피하다가는 망해야 하는 한판승부가 있게 마련이다. 베트남군을 이끌고 있던 호치민과 보구엔지압 장군은 나라의 운명을 디엔비엔푸 전투에 걸기로 결단했다. 어차피 이기기 힘든 상대인 프랑스군이 한 곳에 결집해 있다면 그곳에서 운명을 결판내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기지를 한창 건설 중이던 1953년 겨울, 베트남군에게 이동명령이 내려졌다. 이때부터 베트남군의 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강력한 군사력보다 더욱 위대한 인간의 힘임을 입증해 주는 사례가 되었다.

베트남군은 길도 없는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1일 이동거리만도 80킬로미터에 달했다. 주간에는 프랑스 공군기의 시야를 피하기 위해 30킬로미터를 이동했고 야간에는 공군기의 위험 부담이 적었기 때문에 50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

마라톤 선수가 비무장으로 42킬로미터를 2시간여에 주파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완전군장을 한 병사들이 길도 없는 산악지형을 하루에 80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군은 베트남군의 디엔비엔푸 요새 공격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을 놀라게 한 건 이뿐이 아니었다. 베트남군의 모든 군수물자, 즉 화포와 식량, 탄약을 운반하는 임무는 베트남 주민들에게 맡겨졌는데, 민간인이자 조국 독립의 열망으로 가득 찬 이 투사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 이상을 발휘했다.

하노이에서 출발한 이들은 한 사람이 20킬로그램 내외의 식량을 운반했는데, 이들이 디엔비엔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봇짐에 남은 식량은 2킬로그램 내외였다. 나머지는 그들이 행군하는 도중 양식으로 썼으니, 이는 얼핏 보아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로 계산하지 않았고, 고작 한 병사의 3,4일치 식량을 위해 목숨을 걸고 천리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래도 식량을 지고 걸은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다. 말과 소, 산악지형에 어울리도록 개조된 자전거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운반도구가 군수물자 운반을 위해 동원되었다. 물론 도로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가는 곳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도로를 만들어야 했고, 이 모든 활동이 프랑스 공군기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엄폐되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1954년 3월 13일 밤, 베트남군이 디엔비엔푸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은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 3개월 20일 만이었다.

결과만 보자면 두 달여에 걸친 이 전투에서 베트남군 진영에는 8,000명이 넘는 전사자와 1만 5000여 명의 부상자가 났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이보다 다소 적어 전사 2,300여 명, 부상 5,100여 명이었다.

하지만 무려 1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포로로 생포되었다. 결국 전투는 사기의 싸움이었고 베트남군은 사기전에서 프랑스를 압도했던 것이다. 베트남군의 투지에 가위 눌린 프랑스군은 마침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상황은 매우 암담하다. 사방에서 혼란스러운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최후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다. 그러다 우리의 무기와 통신장비를 파괴하겠다. 모든 물자 역시 날려버릴 것이다. 탄약 창고는 이미 파괴되었다. 아듀 장군. 프랑스 만세.” (프랑스군 지휘관 가스뜨리가 인도차이나 부사령관 꼬니 소장에게 보낸 최후의 전통문)

이 신화적인 전투와 관련하여 두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먼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처음 공격에 나선 베트남군은 모든 화력을 병력 맨 앞에 배치했는데, 이는 화력이 병력 뒤에서 고지를 향해 공격에 나서는 병력을 지원한다는 기존의 전술과는 달랐다.

이는 화력을 맨 앞에 배치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경사면에 배치된 대포들이 갑자기 밀려나 뒤따라오던 병사들을 덮치기도 했다. 이때 한 병사가 밀려 내려오는 대포의 바퀴에 자신의 몸을 박아 장렬히 산화하면서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 병사는 지금 전사자 묘지에 안장되어, 그 위에 국가영웅의 칭호가 새겨진 채 참배객들을 맞고 있다.

다음으로 승리자 지압이 훗날 디엔비엔푸를 회상하며 전한 말이다. 지도자 호치민은 지압을 전장에 내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장군, 전장에서 장군은 어떤 결정이든지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소.”

전장의 지휘관에게는 모든 권한이 일임되어야 한다. 정부는 지휘관의 요청대로 최선의 지원만 하면 된다. 이것은 사실 불변의 진리지만 실제로 실천되기는 어렵다. 전장의 지휘관은 정부의 눈치를 보게 되고 정부의 많은 인사들은 간섭하고 싶어 안달을 한다. 현대전에서는 여기에 무식한 언론까지 한몫을 거든다.

하지만 호치민과 지압은 이 ‘불변의 진리’를 신봉하고 지켰다. 베트민이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하고, 베트남이 대 프랑스, 대 미국, 대 중국전에서 연이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통치수반과 전장 지휘관 사이의 깊은 신뢰, 이것은 베트남이 가진 특유의 무기였다

[호치민, ‘신화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공부가 된다]

호치민은 1969년 9월 3일 79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는 묘하게도 미군의 미라이 촌 양민학살사건이 세상에 공개된 날이었다. 베트남이 전쟁을 끝내고 통일을 이룬 것은 1975년이다 그러니까 호치민은 조국 통일 6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 독립을 선포했다. 결국 그는 독립 선포 24주년이 되는 날에 숨을 거둔 것이다. 호치민의 사망일을 하루 늦춘 것은 독립기념일과 호치민 서거일의 의미를 둘 다 살리기 위한 묘책이었다.

베트남 인민의 추모 열기는 엄청났고 세계 각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와 찬사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하노이는 세계 121개국으로부터 2만 2,000통의 조문 메시지를 받았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추모식을 열었으며 우호적인 논평들을 게재했다.

모스크바는 공식성명에서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고, 국제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 제3세계 국가들은 그를 ‘억압 받는 민족들의 옹호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의 백악관은 논평을 거부했으며, 당시 닉슨 행정부의 고위인사들도 침묵했다. 반면에 서구 언론들이 호치민의 죽음에 나타낸 관심은 특별했다. 특히 반전운동을 지지한 언론들의 찬사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호치민에 대한 전 세계의 찬사를 전하면서, “그와 가장 심하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조차 체구가 작고 허약한 ‘호 아저씨’에 대해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했다.

<타임>은 표지에 호치민의 얼굴과 함께 고별사를 담았는데, “호치민은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의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고통 받는 그의 조국 1,900만 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호 아저씨를 이해했다. 남베트남 인민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현재 살아 있는 민족 지도자 가운데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추모했다.

오늘날 호치민은 헌신적인 혁명가이자 노련한 공산주의 요원이라는 평가와 함께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여 현실적으로 행동한 실용주의자라는 평판도 동시에 얻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통일과업을 완수한 다른 베트남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면모가 없었다.

베트남의 대미전쟁을 실질적으로 이끈 레두안을 비롯한 후임 지도자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제공하는 한정된 불확실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사실 호치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최소 말년 5년 이상은 실권이 거의 없었다.

1932년 호치민은 소련에 가서 스탈린과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을 시작하면서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호치민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고 한다.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이 일화는 호치민이 민족주의자임을 알려준다. 대답은 “둘 다”라고 했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이 스탈린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스탈린은 호치민이 국제주의자이기를 요구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호치민이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강했다는 점은 도처에서 실증된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아니 이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는 유교적 캐릭터로서의 호치민을 인식해야 한다.

지도자에게 ‘소박, 소탈’은 하나의 이미지 조작에 불과하다. 이런 이미지 조작은 지도자 주변 사람들이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호치민의 주변인들은 그의 소박, 소탈을 끝까지 잘 지켜주었다.

호치민에게는 최소 3명의 여자가 있었다. 또한 호치민이 남긴 글들은 하나같이 쉽고 단순하다. 어느 저널리스트가 호치민에게 “당신은 이론이 빈약한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호치민은 “이론은 마오가 다 해 주고 있다”고 대답했다.


모양주의의 괴기스러움을 일깨우는 책

옛날 내가 다니던 대학원(국문과 박사과정)에 독일인 유학생이 하나 있었다. 한국 소설을 전공한다는 그에게 나는 일말의 의문을 품었다. 한국어 실력으로 보아 한국 단편소설 하나 읽는 데에만도 족히 2,3일은 걸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한국 소설을 전공하고 학위 논문까지 쓰겠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논문을 쓰게 되자 그는 전공을 축소했다. 그는 ‘한국 소설에 나타난 음식 연구’를 하겠다고 하더니, 한국 소설 중에 음식이 나오는 지문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도 벅찼던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논문 범위를 좁혔다. 그는 한국 음식 중에 독일 음식과 비슷한 것이 두부라고 했다. 그는 ‘한국 소설에 나타난 두부 연구’로 논문 주제를 최종 결정했다.

나는 그가 논문을 썼는지, 학위는 받았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가 먼 한국에까지 유학 와서 전공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두부’라는 생각이 들어서 픽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한국 여학생들에게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종강 모임에서 술 한 잔이 들어가자 그는 자기가 한국에서 여자들에게 이토록 인기가 있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는 외모도 시원찮은 그의 인기 비결은 두 가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독일 어느 대학 총장의 아들이었고 유럽인이었다. 나는 한국 여성들의 모양주의(慕洋主義)에 끌끌 혀를 찼던 기억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도서출판 창, 2015 개정판)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기억을 반추했다. 이 책은 사이드의 이전 역작 『오리엔탈리즘』의 보완, 후속편 성격을 띤다. 참고로 위에 소개한 일화는 이 진지한 책의 주제와 큰 관련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반대로 한국인이 외국 문학을 전공한다는 일이 얼마나 허망할 수 있겠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한때 한국 대학입시에서는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등의 커트라인이 국문과, 중문과보다 단연 높았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오로지 서양문학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현상 역시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한국적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우리가 선망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소설들이 얼마나 제국주의의 오리엔탈리즘을 담고 있는지를 말하는 책이다.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대표적인 사례로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 조셉 콘라드, 러드야드 키플링, 제인 오스틴 등의 소설들이 분석의 대상이며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에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까지 오리엔탈리즘 문학에 포함된다. 이뿐이 아니다. 인터넷에 보면 프랑스 르몽드 지가 선정한 ‘100권의 책’의 책이 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탈 서구 이론의 선구자라고 할 만하다.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우리가 모양주의를 극복하는 데 아주 긴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제국주의적인 문화와 관념이 당대의 문학과 예술작품들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논증한다. 저자에게 있어 문화란 순수하고 지고한 것이 전혀 아니다. 문화란 정치적 사회적 이념의 혼합체이다.

19세기~20세기 초의 서구 제국주의는 실로 광대하게 팽창하여 전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제국 형성의 정당화가 어떻게 문화적 상상력과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제국주의적 유산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정신적, 문화적 영역에 어떤 양상으로 침투해 있는지를 말한다. 저자는 제국주의의 문화와 정치가 알게 모르게 긴밀히 협력했으며 이를 통해 제국주의가 단순히 대포와 군인들뿐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상력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이 책은 서구 제국주의에 피해를 입고 있는 모든 동양인에게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특히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식민지 체험에다 그 후과로 빚어진 분단 상황에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두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90년대 우리 젊은 지성들에게도 새로운 인식의 혁명을 가져다주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1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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