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이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양영길시인의 <애기 돌무덤 앞에서> 중 일부다. 제주특별자치도 조천읍 북촌리… 별나게 파랗게 보이는 함덕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새 건축물이 마치 손님처럼 앉아 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이다. 그 앞마당을 걸어 나오면 ‘너븐숭이 4·3위령성지라는 돌비석이 있고 그 앞에 흩어진 돌무더기 위에 애기들 장남감이 하나 둘 흩어져 있었다. 마치 무덤 속에 애기들의 울음을 그치게라도 하려는 듯…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 돌무더기가 애기들을 묻어놓은 무덤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미군정시대 군정경찰과 서북청년단들이 한 짓이라니…
“<한라산>은 내 비명이자 통곡이다/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시인 이산하는 제주 4·3사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던 1987년 녹두서평에 장편 서사시 ‘한라산’( 한라산.hwp 을 싣는다.) 한라산을 읽지 않고 제주를 말하지 말라. 한의 땅, 통곡의 땅 제주는 폭동이 항쟁으로 바뀌고 조천읍 북촌리에 4·3 기념관이 들어섰지만 이산하가 절규한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악할 수 있나”는 여전히 그대로요, 숫자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희생자들의 이름만 너븐숭이 4·3 기념관 속에 갇혀 있다.
권력과 폭력은 어떻게 다른가? 칼이나 총은 폭력의 도구다. 같은 칼이라도 주부가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쥐고 있다면 요리를 하는 도구지만 강도가 쥐고 휘두르면 폭력도구다. 같은 총이라도 경찰이 강도를 잡기 위해 차고 있으면 국민을 보호하는 무기이지만 폭도가 쥐고 휘두르는 총은 살인도구다. 국가의 손에 들려진 총. 그 총은 적어도 1947년 3월 1일부터 한국정쟁이 끝난 1954년 9월 21일까지는 폭력의 도구, 학살의 도구였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해병대, 제주 경찰, 국방경비대, 미합중국 육군, 미합중국 공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제주 도민의 10분의 1… 젖먹이 어린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학살한 폭력의 도구였다.
아무리 감추고 덮으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 제주 4·3항쟁, 발발 73년이 지난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해마다 4월 3일이 되면 정부요인이 찾아와 기념식 하나로 끝이다. 노무현정부 이전만 하더라도 4·3은 빨갱이들이 저지른 폭동이요, 4·3사건이었다. 당시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5천∼3만 명에 달하는 주민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희생자 중에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78.1%(1만 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2.6%(1천764명), 가해자 구분 불명 9%로, 전체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중 어린아이들의 시신이 임시 생매장한 상태로 남아 있는 곳이 너븐숭이 애기 돌무덤이다.
전 국민이 헌법을 읽어 주권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앞당기자고 전국을 다니다 마지막으로 찾아 간 제주. “제주에 왔는데 4·3 기념관은 꼭 가봐야지요.”라는 일행의 간곡한 요구로 바쁜 일정을 쪼개 찾아간 곳. 우리 국민들 중에 제주를 다녀가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없을 정도지만 4·3위령지를 다녀간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지금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수학여행지의 필수코스가 되어버린 제주. 수학여행을 다녀 온 학생들 붙잡고 4·3항쟁에 대해, 정방폭포나 4·3 너븐숭이 애기무덤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아니 43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한다.
고려시대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 4·3항쟁이다. 지금도 여순을 비롯한 참사를 ‘사건’이나 ‘폭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4·3항쟁도 노무현대통령 전까지는 제주폭동, 4·3반란사건으로 불리어 졌다.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나 되는 3만여 명이 학살당한 죽음의 땅, 제주는 방언이 사라져 버렸을 정도로 외면당하며 살아왔던 제주는 학살의 땅, 통곡의 땅 분노의 땅이었다. 다만 그 분노의 땅 통곡의 땅이 관광지로 바뀌고 기념관 하나 들어 섰을 뿐…
너븐숭이 4·3위령지라는 안내표지석이 없으면 누가 이곳이 말도 배우기 전 젖먹이 애기들이 숨져간 애기들의 주검이 묻힌 곳이라고 누가 알 수 있을까? 등산길에 등산객이 만들어놓은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 같은 돌무지가 여기저기 곳곳에 보인다. 다르다면 그 돌무더기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애기들의 장난감이 마치 칭얼대는 애기들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몇 개가 던져 저 있다. 엄마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20여기의 애기무덤 중에 8기는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애기라는 말만 구전되어 올뿐 정확한 사실조차 알 수 없는 그것도 흙이 아닌 돌에 묻혀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목이 메게 한다. 누가 올려 놓았을까? 미쳐 엄마의 젖을 빨기도 전에 숨져 간 애기에게 누가 올려 놓았는지 모르지만 우유 몇 통과 동전 몇 개가 찾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미군은 즉시 철수 하라!”,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투옥 중인 애국인사 석방하라!” 당시 제주도 3.1절 기념행사에서 나온 구호들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하겠다던 3·8이북의 소군정하의 북한과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며 친일청산을 반대하고 소작제도를 강행하려는 이승만 정부 중 35년간 왜놈들의 종살이를 하던 국민들은 어느 쪽을 지지했을까? 여순항쟁, 4·3비극의 이면에는 단정수립과 남북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과 이승만이 있다. 일본이나 미국을 비판하면 벌떼처럼 덤벼들어 그들을 비호하는 친일세력이 누군가? 서북청년단이 학살의 공범자들이 나라의 주권을 쥐고 정의를 요리하고 있다. 이름도 짓기 전 애기들, 노약자, 임산부를 무차별 학살한 학살자들은 왜 아직도 혈맹이요 국부인가? 제주와 여순을 외면하고 정의를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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