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복역 장기수 양희철의 새해 소망
남도 북도 나의 조국
1934년생, 89세의 양희철은 새해에는 꼭 북녘땅을 밟으려 한다. 2차 송환을 바라는 이제는 딱 열 명뿐인 장기수들의 손을 잡고서 휴전선을 넘어가려 한다. 가서 106세이실 순길형님을, 돌아가셨다면 조카들이라도 만나고 싶다. 2000년 9월 1차 송환 때 북으로 먼저 갔던 63명의 동지들을 만나 부둥켜안고 싶다. 또 남녘 동포들의 따뜻한 인사를 북녘 땅 여기저기에 전하고 싶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인도적 차원에서 인민군이나 공작원으로 장기복역하고 출소한 이들을 북으로 돌려보낸다고 합의했다. 통일부는 후속조치로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한 강제전향공작을 인정하지 않고) 비전향자이어야 하고 본인에 한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양희철은 전주교도소와 광주교도소에서 거듭 된 강제 전향공작을 이겨냈기에 신청이 가능했지만 포기했다. 당시 그는 1999년 출소해서 막 가정을 꾸린 상태, 아내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지금은 딸 아이가 성인이 되었고 아내는 북으로 가겠다는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양희철은 이제 홀가분하게 2차 송환을 요구한다. 2022년에는 양희철과 미송환 장기수들의 바램은 이뤄질 수 있을까?
양희철 간첩단 사건으로 196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양희철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호송차에 올랐을 때 창문밖에는 경비교도대가 막아선 사이로 형수님이 겅중대며 얼굴을 내보였다. 아마도 늙으신 어머니를 대신해 어제 장수에서 올라와 면회를 신청했을 것이고 ‘면회금지’라는 말에 구치소 담장밑을 서성거리셨을 터인데 지난 밤은 어디서 보내셨을는지...
양희철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중앙정보부에선 학생들 앞에서 10분만 반공강연을 하면 곧 바로 석방해주겠다고 제안했었는데...형수님이 삶은 달걀 하나를 손끝으로 내밀면서 호송차로 다가오려 애쓰는 모습에 어머니의 얼굴이 포개지면서 양희철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양희철이 평양방문을 하게 된 건 61년 3월, 막 단국대에 들어갔을 때였다. 휘문중을 중퇴한 그는 독학으로 1956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헌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그는 사범대학이 아니어도 교과과목만 마치면 교원 자격이 부여되는 과정이 단국대에 개설되었기에 편입을 했다.
당시 대학가에는 4.19 이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처럼 통일의 열기가 넘쳐났었다. 양희철도 새학기 초 그 세례를 흠씬 받고 있을 때 열여덟살이나 많아 아버지 같았던 큰 형님 양순길,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 이후 헤어졌던 형이 돌연 나타났다. 양희철은 휘문중학교를 다닐 때 돈암동에서 형님과 자취를 했다. 와세대 대학을 다니며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형은 어린 동생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지만 해방 후 남로당에 들어가 서울시당에서 활동했었다.
그런 형이 10년 만에 찾아와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그간의 세월을 얼버무리고 몇몇 연락을 부탁했다. 양희철은 형이 북에서 내려온 것을 직감하고 “나를 평양으로 데려가달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남쪽 대학생들의 얘기를 전하고 싶다.‘며 형의 말을 무지르고 들어갔다.
형은 계속 일본얘기를 했지만 양희철은 “내 뜻대로 안 되면 차라리 신고하렵니다”하면서 고집을 부렸다. 결국 형은 양희철의 뜻을 받아들였고 형제는 충남 서산 바닷가에서 공작선을 타고 해주 용남포로 향했다. 그날 밤바다에는 3월의 검은 비가 장막처럼 펼쳐졌고 뱃머리에는 무쇠덩어리같은 어둠이 가득했다.
해주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간 양희철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평양순안통일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임춘추 총장의 배려 속에 유물변증법과 정치경제학, 특수과목으로서 정세분석을 배웠다. 주말에는 노동당의 지도원과 신의주와 회령 등 전국을 돌며 전후복구현장을 둘러보았다. 기업소나 협동조합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북녘의 청년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새나라 건설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흠씬 느꼈다 “남과 북의 청년들이 만나면 분단이라는 장벽이 솜사탕처럼 녹을거야, 통일조국은 멀지 않았어” 그렇게 양희철의 마음은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그 해 5월 17일 아침 당의 과장과 지도원이 양희철의 기숙사방으로 들어와 5.16 쿠테타 소식을 전했다. 양희철은 남쪽으로 내려가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의 과장은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그는 북에 올라올 때처럼 고집을 부렸다. “내려가서 친구들의 안전도 확인하고 여기서 만난 북쪽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모습을 전하겠습니다”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7월 그는 ”동무를 위해 체코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니 거기에 전념하라“는 과장의 말을 뒤로 하고 난수표책을 챙겨서 서천 바닷가로 내려왔다. 그날 여름 장대비가 채찍처럼 퍼부었고 어둠은 작은 공작선을 암초로 인도할 것처럼 짙었다. 3개월을 기약하고 올라가면 동유럽으로 떠나겠다고 작정했기에 평안북도 강계에서 근무중이던 순길형에게는 인사도 안하고 내려왔다.
양희철은 서울에 와 고려대와 단국대를 찾았다. 반공을 앞세운 5.16에 공기는 확실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평양방문 이야기를 꺼내며 남북대학생들이 힘을 합하자. 청년들이 다시 일어서야 한다며 대학로와 신촌을 부지런히 오갔다. 계획했던 3개월을 훌쩍 넘겨 2년이 가까워질 무렵 믿었던 동료 학생이 방첩대에 양희철을 신고했다. 그는 1963년 4월 12일 체포되었고 1심에서는 ’고려대 지하당사건‘이란 이름으로 기소되어 7년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그가 평양에 다녀온 사실이 부각된 ’양희철 간첩 사건‘으로 공소가 변경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이다.
쥐 잡아 먹으며 버틴 징역 37년
1965년 3월 16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최종 확정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대전교도소로 옮겨왔을 때 양희철의 나이는 서른. 여전히 쇠도 씹어먹을 나인데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적은 밥에 그의 몸은 오그라들었다. 장기수에게 징역은 배고픔과 싸우는 것이었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교도소의 누진처우규정에서 급외인 D급으로 분류되어 4등식 가다밥(1홉으로 약 180ml 수준)을 받았다. 1957년 8월부터 전구알 크기만한 5등식 잡곡에서 4등식으로 바뀌었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허기진 상태에서 떠먹는 한 줌 음식은 위를 헤집어놓아 더욱 고통스러웠다. 먹고 싶은 욕망은 온몸을 칭칭 감았다.
하루 20분간 주어지는 운동시간, 양희철은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대전교도소의 조그만 운동장에서 땅만 보고 걸었다. 봄철에 비 온 다음 날이면 담장밑으로 봉긋봉긋 풀들이 올라왔다. 크로바와 쑥은 물론 독성이 있다는 역귀풀까지 모아 손바닥이 퍼렇토록 짓이겼다. 그리고 털어넣으면 알싸하게 목구멍을 넘어가 허기진 속을 달래주었다.
풀이 동나면 양희철은 하늘을 바라봤다. 깨끔발로 안되면 제자리 뜀으로 솔잎과 고엽나무,감나무의 잎을 땄다. 대전교도소 1년 만에 양희철은 교도소 내 모든 나뭇잎과 풀잎을 맛봤다.
광주교도소로 옮겨간 1975년도부터 양희철은 식물을 넘어 고기 사냥에 나섰다. 당시 그는 전향공작반에게 당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영양부족까지 겹쳐 손발톱은 누렇게 변했고 장딴지는 푸르댕댕 부어올랐으며 어지럼증까지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던 어는 날, 양희철은 밥풀 몇 알로 쥐 한 마리를 방으로 유인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쥐가 마침내 사방 문짝 밑에 달린 배식구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녀석을 구석으로 몰았다. 천정의 희미한 형광등은 피내음의 기미를 느꼈는지 요동치듯 깜박거렸고 복도에서는 간수가 추위를 이기려고 제자리뜀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쥐는 찍찍거리며 빠져나갈 틈새를 엿봤지만 양희철은 앞발로 쿵 디디면서 빗자루로 내리쳤고 쥐는 널부러졌다.
그는 방안의 변소로 가서 통조림 뚜껑을 칼 삼아 머리부터 쥐 껍질을 벗겨냈다. 발목에 이르니 잿빛 가죽이 쏙 벗겨졌다. 배를 갈라 피와 내장을 빼내고 꼬리를 자른 다음 양희철은 머리부터 씹어먹었다. 불그스레한 살점은 고소하고 찰졌다. 핏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발목까지 오독오독 씹었다. 가물대던 눈이 번쩍 뜨이고 장딴지엔 근육이 불끈 솟았다. 아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덩어리인가?
광주교도소 5029번 양희철은 그날부터 쥐 사냥 선수가 되었다.
그는 동료 장기수들에게 삼백마리 넘게 잡아먹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오죽하면 광주교도소 내 그득했던 들고양이들이 다른 교도소로 살림을 옮겼을까?
전향공작고문을 이겨내고
장기수들에게 징역의 고통은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좌익사범들에게 수십년 혹은 무기징역을 살리면서도 내면의 양심까지 탄압했다. 73년 11월에 이어 74년 8월에 행해진 광주교도소의 전향공작은 잔인했다. 양희철의 광주교도소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새끼 묶어, 그냥 손도장만 찍으면 된다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
전향공작반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달려든 세 명은 양희철의 몸통을 포승줄로 감고 의자에 묶었다. 백열전구만 밝힌 지하방엔 곰팡이가 덕지덕지 앉았고 바닥에 고인 물구덩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반장은 양동이 물에 적신 밧줄로 양희철을 내리쳤다. 손가락 굵기의 동아줄은 얼굴을 찢고 허벅지와 장딴지의 살을 파고들었다.
네가 끝까지 버티나 보자하는 악다구니, 촤아악 밧줄 감기는 소리, 차라리 죽여라하는 양희철의 비명이 지하실의 축축함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1시간이나 지났을까 “이 새끼 똥 싼 것 같은데요” 뒤에서 쪼그려 앉아 의자를 잡고 있던 공작반원이 코를 움켜쥐었다. 반장은 동아줄을 물구덩이에 던지며 “방에 쳐 넣어”라고 소리쳤다.
72년 유신체제가 만들어지고 반공을 국시로 이데올로기 전쟁에 나선 박정희정권은 감옥안의 장기수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더더욱 한국전쟁이후 20년 정도 유기징역 선고를 받은 비전향수들의 출소시점이 임박했던 터라 박정권은 체계적인 전향공작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장기수들이 있는 감옥에는 중정은 물론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국의 담당관이 배정되어 있었다. 중앙정보부법는 ’조정권‘을 갖고 대공심리전국이 주도하여 광주, 전주, 대전, 대구 등 교도소별로 전향공작반을 만들었다.
전향공작은 초기에는 금지였던 가족면회와 편지를 허용하고 운동시간을 늘려준달지 빵이나 일용품을 나눠주는 회유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효과가 없자 끔찍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공작반 밑에 교도소내 폭력전과자들을 떡봉이라는 이름으로 동원,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장기수들이 수감되어 있던 네 군데 교도소의 고문 방법은 실로 다양했다. 웃통을 벗겨 바닥에 누인 다음 바늘로 등짝을 마구 찌르거나 방안 벽에도 성에가 끼어있는 추위에 찬물을 끼얹어 몸을 얼어붙게 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을 0.75평의 방에 몰아넣었다. 눕는 것은 물론 앉지도 못하게 했고 날씨가 더우니 서로가 내쉬는 숨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까무러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방안의 스피커를 가장 높게 틀어 귀청이 찢어지게끔 하고 심한 고혈압환자나 당뇨환자에게 약 지급마저 거부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장기수들이 강제 전향을 당했다. 전향을 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도장을 찍더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가?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수시로 답해야 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작성해 발표회에 나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고백과 참회를 낭독해야 한다. 전향수는 분류심사에서 C급에 속하게 되는데 C급은 전과 4범 이상이 포함되어 있는 구간이다. 결국 전향은 전과 4범의 잡범으로 전락하는 것이며 그 후부터 교도관들에게 일반수와 똑같은 모욕과 체벌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장기수들이 이에 도장을 찍은 것은 자살까지 할 정도로 그 고문이 가혹했기 때문이다.
양희철은 광주교도소로 오기 전인 68년 전주교도소에서도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이른바 헬리콥터고문. 팔을 뒤로 젖혀 수갑을 채우고 발목부터 어깨까지 누에고치처럼 밧줄로 온몸을 휘감은 다음 천정으로 끌어올려 팽글 팽글 돌린다. 밧줄의 압박으로 피는 통하지 않고 온 몸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정신은 멍해지고 공중에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거의 정신을 잃게 된다. 한시간 반 정도 헬리콥터 고문을 받고 사방에 돌아왔을 때 양희철의 몸에서는 오가는 길이 막혔던 피가 땀구멍마다 새어 올라왔다. 교도소에서 던져준 건 빨간 소독약 한 통뿐.
그래도 양희철은 버텨냈다. 그는 전향공작이 마지막으로 극성을 부리던 74년 8월 광주교도소에서 여덟 번이나 생똥을 싸면서 ‘사상의 자유’를 지켜냈다고 기억한다. 이 전향공작은 그가 99년 3.1절 특사로 가석방이 확정되었을 때도 고개를 내밀었다. 담당 공안검사는 석방되기 한 달전쯤부터 찾아와 ‘전향서’를 내밀었고 거부하자 ‘생활계획서’를 쓰라고 했다. 이 또한 외면하자 ‘준법서약서’에 사인만이라도 하라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물리쳤다. 어떤 경우에도 내 양심을 묶을 수 없다며 차라리 가석방을 취소하라고 외쳤다. 결국 그는 뜻을 관철했고 99년 2월 24일 37년의 징역생활을 마치고 장용주신부와 강신석목사의 신원보증으로 광주교도소 감옥문을 열어제쳤다.
우리 탕제원을 만들고
”불법 의료행위 중단하라. 중단하라“
양희철은 난감했다. 설마 했는데 한의사 조직에서 반대시위에 나설 줄이야... 손팻말과 구호소리가 요란하니 지나가던 사람들은 큰 구경이라도 난 듯 다들 발걸음을 멈췄다.
양희철은 출소해 장기수 임방규·권낙기·이두균이 운영하던 제기동 민중탕제원에 거처를 마련했다. 사실 그는 광주교도소의 이름난 침구사였다.
양희철이 침구에 관심을 가졌던 건 집안 내력이었다.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에서 큰 아버지가 한약방을 했고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밑에서 침을 놨다. 양희철은 그때 눈여겨보고 서울 휘문중으로 유학와서도 한의학 서적을 틈틈이 펼쳐봤다. 그가 평양에 갔을 때도 한 번의 계기가 있었다. 만경대유자녀학원을 견학갔을 때 눈에 들어온게 구리로 만든 사람 크기의 동인. 거기에는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을 포함한 인체전신경혈도가 그려져 있었고 침을 놓았을 때 반응과 효과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스치듯 접했지만 뇌리에 남아있었다.
광주교도소에서 전향공작의 파고가 지나가고 87년 6월 항쟁으로 교도소내에도 어느 정도 인권이 보호를 받게 되자 양희철은 한의학 공부로 마음을 달랬다. 교도소 도서관에서 황제내경과 침구경혈해설을 구해 공부했다. 침은 얇은 스프링을 구해 시멘트벽에 갈아서 만들었다. 때론 바늘을 구했고 소독은 머리칼 사이에 슥슥 문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그의 침을 청해 맞았다.
이를 눈여겨본 사람이 바로 광주교도소의 김병준 소장, 그는 광주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는 춘곡 김동원선생과 양희철을 교류하게 하면서 1990년에는 아예 양희철에게 재소자를 치료하는 두 평짜리 진료실을 만들어주었다.
감옥안에는 일반의사인 ‘감옥의‘가 있다. 그 밑으로는 교도관중에서 선발해 의무부장을 두고 여호와의 증인 같은 재소자를 간병부로 두어 의무과를 구성한다. 언뜻 그럴 듯 해보이지만 감옥내 진료는 그저 두통약이나 감기약 처방이 전부다. 감옥의는 교도소내 교무과장이나 보안과장과 같은 수준의 월급을 받지만 근무시간이 오전 나절에 불과하다. 그리고 감옥 안에 천국이라고 하는 병사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의의 판단에 달렸다. 기결수나 미결수가 건강이 나빠 병보석이나 형집행정지를 받을 때도 역시 감옥의의 보고서가 중요하다. 이를 토대로 검사가 결정하기에 감옥의가 버는 돈이 개업의나 대학병원의 과장보다 몇 배 좋다는 소문이 공공연하던 때였다.
광주교도소의 감옥의는 돈 없는 재소자들을 위한 양희철의 침구치료를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덕분에 양희철의 특별한 경력이 쌓여갔다. 재소자들은 아프면 감옥의에게 가지 않고 양희철에게 달려왔다. 양희철의 생일날에는 그의 진료실에 재소자들이 보낸 건빵, 사과, 담요, 내복이 수북했다. 양희철은 출소할 무렵인 1999년에는 이미 수많은 임상경험을 가진 노련한 침구사였다. 그는 자연스레 출소 후 민중탕제원에 합류한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사목위원회에서는 양희철의 특별한 이력을 듣고 1억 2천만 원을 지원 그가 ’탕제원‘을 별도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양희철은 봉천 7동의 자그마한 단독주택 2, 3층을 얻어 ’우리탕제원‘이라 이름짓고 진맥을 보고 침뜸을 놓았다. 동료 장기수 조창손·안학섭·유한욱·신인영을 불러들여 약재를 다듬고 탕을 끓였다. 천주교에서는 수녀 한 분을 파견해 도왔고 시민운동단체나 전교조관련 인사들이 환자로 찾아오고 수시로 탕약을 단체주문했다.
생활터전을 마련한 양희철과 무리들은 기쁜 나날을 보냈다.
탕제원을 운영한지 1년 만에 사목위원회에서 지원해준 돈을 모두 갚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런 소문이 나자 이들의 시술이 허가없는 의료행위라고 한의사협회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다행이 관악경찰서장과 보건소장까지 나서 중재를 한 끝에 시위는 잦아들었고 ’우리탕제원‘은 그후 서서히 침뜸봉사와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돈을 받지 않으면 의료법상으로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4년 ’우리 탕제원‘은 장기수들의 쉼터 낙성대 ’만남의 집‘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사 후에도 ’탕제원‘은 양희철과 동료장기수들에게 삶의 활력이 되었다. 양희철에겐 부부의 인연까지 맺어주었으니 탕제원은 이래저래 소중한 공간이었다.
전국묘소 답사를 하며
양희철은 2018년 팔십 후반이 되면서 힘에 부쳐 ’탕제원‘운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전국 묘지 순례를 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한 발길은 충청남도까지 올라왔다. 장기수로 복역중에 옥중에서 사망했거나 출소해서 힘겹게 살다 죽어간 동지들의 묘를 돌아보는 일이다. 묘소가 산중에 있으니 이를 찾아다니는 일은 숨도 차고 다리도 아프다. 그렇지만 이 순례는 2차 송환길이 열린다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대략 3~40기 묘소를 둘러봤다.
꼭 가고 싶었던 곳이 황필구의 묘소였다. 마을 이장이 가리킨 벌판 위에 봉긋 솟은 둔덕은 자그마한 대나무숲이었다. 그때가 85년이었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그 분이 돌아가셨네 그예, 고문을 못이겨서” 대전에서 이감 온 동지가 소식을 전했을때 양희철은 입을 쫙 벌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뭐라구요” 토하듯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광주교도소의 5029번 양희철은 소식을 들은 그날 밤을 지샜다.
황필구는 익산농고를 나와 일본 릿쿄대학을 다닌 인물이다. 해방후 북쪽으로 넘어가 상업성에서 근무하다가 공작원으로 내려와 잡힌 후 대전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중이었다. 그는 양희철이 1963년 대전교도소로 갔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양희철보다 열여덟인가 많았던 그는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다 견뎌낼 수 있다고 힘을 불어 넣어줬다. 그 말을 듣고 양희철은 안기듯 황필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68년 양희철이 전주교도소로 이감가며 헤어질 때도 “살아서 만나자”며 어깨를 두드려줬었는데,,,,
살아서 못 만나고 52년 만에 묘소에서 만나니 술잔을 올리는 양희철의 팔은 마구 떨렸다.
찾아봐야할 곳 둘러봐야 할 곳은 참으로 많다. 무연고 사체로 처리되어 화장터에서 한줌이 되었거나 출소 후 행방불명이 된 동지들이 많다. 그런 동지들을 모두 찾아내 제를 올리고 싶지만 힘에 부친다. 묘지가 온전히 있는 동지들만이라도 2차 송환 전에 모두 찾아가 술 한잔 올리고 동지의 삶을 기록하고픈 게 전국묘지순례를 하는 양희철의 뜻이다.
양희철과 함께 1차 송환에서 배제되거나 신청을 못했던 43명은 1차 송환 직후 2차 송환을 신청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숨을 거둬 이제 딱 열 명만 남았다. 1926년생 문일승·1928년생 이두화·1929년생 양원진·1929년생 최일헌·1930년생 박정덕·1930년생 박수분·1934년생 김영식 ·1935년생 박희성·1945년생 이광근. 적게는 77세부터 많게는 97세에 이르는 노인들이다.
양희철은 새해에는 이들과 함께 북으로 가는 길에 올라 끊어진 교류의 길에 다시 오솔길을 내려한다. 아내와 딸은 양희철의 뜻을 받아들여 생이별을 이겨내기로 했다. 문재인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위해 박근혜를 사면했고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고 국민에게 ’혜량‘을 요구했다. 늙고 병든 이들의 요구는 그리 많은 고뇌가 필요하지도 않을 터인데 끊어진 교류의 길에 다시 ’오솔길‘을 내겠다는 이들의 마음을 문재인대통령은 임기 내내 몰랐던 것일까? 외면했던 것일까?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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