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찰스 헌트리 목사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며 부상당한 시민들의 참상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의료진과 시민들이 부상자를 옮기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1980년 5월21일 총에 맞고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진 김형관(1959년생·방위병)씨의 주검 사진은 처참한 형상 때문에 5·18 사진집에만 공개됐다. 고 찰스 베츠 헌틀리(1936~2017·한국 이름 허철선) 목사가 찍은 이 사진들은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 여러 사람들의 용기와 지혜가 모여 가까스로 광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차량. 멀리 조선대 본관과 광주 시가지 모습이 보인다.
16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설명을 종합하면, 기록관은 고 헌틀리 목사가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5·18 참상을 찍은 사진 186장과 필름 69컷, 슬라이드 필름 57컷을 기증받아 보관 중이다. 1965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입국한 헌틀리 목사는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일하며 호남신학대에서 상담학을 강의했다.그의 삶을 바꾼 것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다. 헌틀리 목사는 군인들 총에 맞거나 대검에 찔려 기독병원으로 실려 온 희생자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기록을 시작했다. 헌틀리 목사와 함께 당시 상황을 앵글에 담았던 이는 기독병원 의학 연구용 사진을 도맡아 찍던 양림사진관 대표이자 사진가인 고 김영복씨다. 헌틀리 목사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사택 지하실에 암실을 만들어 수백장을 인화했다고 한다. <한겨레>가 입수한 헌틀리 목사의 5·18 사진 인화지 뒷면엔 “비탄의 시간. 진실을 말하라”는 자필 문구가 검은색 볼펜으로 적혀 있다.
헌틀리 목사의 5·18 인화 사진 뒷면에 적힌 자필 문구. “비탄의 시간. 진실을 말하라!”
고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와 마사 헌틀리 부부. <한겨레> 자료사진
헌틀리 목사는 이 사진을 기독병원 간호과장이던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관장에게 전달했고,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태호(78) 작가와 가톨릭노동청년회 전국본부 전 미카엘 지도신부를 거쳐 미국으로 전달됐다. 헌틀리 목사는 1985년 미국 남장로교 철수정책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5·18 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해 무장한 시민군 청년이 카빈 소총을 들고 차량에 앉아 있다.
1987년 9월 천주교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낸 <1980년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에 헌틀리 목사가 찍은 처참한 주검 사진들이 실린 데는 작고한 사진가 김영복씨 역할이 컸다. 안성례 전 관장은 <한겨레>에 “김씨가 천주교광주대교구에서 5·18 사진집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그때 필름을 광주대교구에 슬그머니 놓고 나왔다”고 말했다. 헌틀리 목사는 2017년 미국에서 세상을 떴고, 2020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린 헌틀리 목사 사진전엔 그의 사진 10여점이 전시됐다.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관장은 “광주 참상의 결정적 증거를 담은 헌틀리 목사와 김영복씨의 사진들을 오롯이 공개할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 때 부상을 입고 기독병원으로 이송된 시민을 의료진이 치료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기독병원에 취재 온 외국 기자.
고 찰스 헌트리 목사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며 부상당한 시민들의 참상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헌혈하는 외국인.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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