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공약이 비슷하다"라는 지적이 이번 6.1 지방선거에도 어김없이 나온다. 모든 정당이 중앙 정치 무대만 바라보는 현실에서 우리 동네와 관련한 현안에는 후보자도, 유권자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치의 풀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한 모습이다.
대안으로 지역정당(Local Party)의 필요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역정당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정당이다. 보통의 정당과는 달리 전국 단위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고 지방 선거에만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역정당의 개념조차 낯선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이미 많은 지역정당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지역정당은 지역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을 소통하며 공약으로 제시한다.
한국에서도 지역정당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역정당이 창당했고, 지역정당네트워크가 결성됐다. 무소속이지만 지방선거에 후보를 낸 정당도 나왔다. <프레시안>은 지방선거와 그 이후 한국 지역정당의 활동과 해외 지역정당의 모습을 직접 찾아가서 담을 예정이다. 지역을 살아가는 주민과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지역정당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지역소멸과 싸우는 자치분권과 지역정당의 모습을 담는다.
서울시 공유자전거 따릉이 8대가 영등포 곳곳을 누빈다. 주황색 점퍼를 입은 이들의 등에는 '자전거가 지구를 구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일렬로 서 당차게 출발했지만 자전거 도로는 곳곳에서 끊어진다. 쌩쌩 지나다니는 차들과 아찔한 동행이 반복된다.
▲서울시 영등포구 타임스퀘어 앞에서 출발한 자전거들은 골목골목을 지나다니며 영등포 구청 앞에서 멈췄다. ⓒ프레시안
영등포 타임스퀘어 앞 소녀상에서 출발한 자전거들은 성매매 집결지 골목, 도심 속 텃밭, 높은 건물이 건설 중인 지식산업센터 앞을 지나간다. 최종 목적지는 영등포구청. 구청 앞에 나란히 자전거를 세운 채 이들은 마이크를 잡았다.
"영등포는 평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전거 타기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 돌아다녀 보면 자전거를 타기 힘든 도로라는 사실을 주민분들도 느끼셨을 겁니다. 도로는 자동차 중심의 도로이고, 자전거 도로는 계속 끊깁니다. 자전거를 타는 주민들은 차도로 가야 할지, 인도로 가야 할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영등포에 자전거 도로를 더 만드는 것이 저희의 공약입니다."
발언이 시작되자 영등포구청 관계자가 나와 고개를 갸웃한다.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집회 신고가 되어있는 단체가 있는지 확인한다. 신고는 되어있지 않았다. 구청 관계자가 단체 쪽으로 와 집회 신고를 했는지 확인한다. 발언하던 영등포구 주민 이용희(47) 씨가 "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집회 신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정당 연설회를 진행 중입니다. "
오로지 '영등포'만을 이야기하는 영등포 지역정당
지역정당인 '직접행동영등포당'은 작년 10월 17일 창당했다. 창당대회 또한 영등포구에서 진행했다. 2008년부터 영등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던 이용희 씨가 대표를 맡았다. 영등포를 기점으로 살아가는 지역 주민 30여 명이 당원으로 가입했다. 창당 직후인 18일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에 지역 정당 등록 서류를 접수했다.
그러나 26일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는 직접행동영등포당 창당등록 신청을 반려했다.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은 결국 공식 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현행 정당법 체제에서 정당 설립을 위해서는 중앙당을 수도에 두고, 5개 이상의 시·도당이 필요하다. 또 시·도당별 1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 만들어진 정당법 체제다. 한 지역에 오랫동안 밀착해서 지역 의제를 발굴해내는 지역 정당(Local Party)의 출현은 현행법상 애초에 불가능했다.
정당 등록이 무산되었지만 직접행동영등포당은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 나가는 중이다. 헌법재판소에 "현행 정당법은 정당설립의 자유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 등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6.1 지방선거를 위해 영등포구의회(라 선거구)에 직접행동영등포당의 이름으로 후보 등록을 신청했다. 선관위는 직접행동영등포당의 후보 등록에 대해 "등록된 정당이 아니"라며 후보 등록 신청을 반려했다.
자전거로 유세하고,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내놓는 지역 정책
정당 등록과 지방선거 입후보에는 실패했지만 직접행동영등포당은 25일에는 자전거를 타고 당원들과 함께 영등포 지역을 돌아다녔다. 길바닥에서 열리는 정당 연설회다. 선거 때마다 들리는 시끄러운 선거송과 유세차는 없었다.
이들이 향한 곳 중 하나는 영등포 타임스퀘어 뒤쪽에 있는 성매매 집결지 앞이었다. 빨간색 커튼이 처진 유리창으로 가득한 골목 위에는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이라는 표지판이 걸려있었다. 골목에서는 이곳에 예정된 재개발을 위한 기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곳이 대규모 재개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결국 서울시와 영등포구는 이곳을 '자본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싹 쓸어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등포와 기존 정당들의 공약과 계획에는 성 착취와 인권유린을 당하신 분들에 대한 고려는 없습니다. 후보로 나온 이들은 서둘러 재개발하겠다는 약속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불법적으로 돈을 벌어온 포주는 건물주가 되고, 재개발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게 됩니다. 영등포에 나온 후보들은 말로만 여성 인권 신장을 말하기 전에 현장에 와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상생의 고민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연설이 끝나면 다시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지나 이동한다. 다음 장소는 문래동 공공부지 내 텃밭이다. 높게 설치된 펜스 안에는 영등포 구민들이 분양받은 텃밭이 있다. 상추, 가지 등 농작물이 심겨 있다.
이곳은 올해로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서울 서남권 내 공연장 역할을 하게 될 '제2세종문화회관'이 건설이 예정돼있기 때문이다. 2000석 규모의 대형공연장과 300석 규모 소공연장이 있는 지하 2층∼지상 5층의 대규모 건물이 들어선다. 이용희 대표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지난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공약집에는 항상 '제2세종문화회관' 내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문화예술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구에 많아지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구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텃밭이 들어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영등포가 계속 정주하고 싶은 살기 좋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 어떤 장소가 필요한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자전거와 함께 달려요', '성매매 집결지에 사람이 있다', '나도 농부가 되고 싶다' 등 직접행동영등포당의 모든 의제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타임스퀘어 앞에 세워진 소녀상 위치, 지식산업센터 건설에 따른 주변 주민들의 불편 등 직접행동영등포당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갈등 현장을 찾아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찬가지로 주민들인 당원들과 소통하며 공약을 만든다. 그 결과 기존 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공약들이 나왔다.
이 대표는 "지역 주민들의 말을 듣고,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공약을 만든다"라며 "기존 정당들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이고 삶과 괴리된 공약 말고 기후위기, 1인 가구, 자전거 등 지역 주민들의 삶과 밀착해있는 공약을 내놓기 위해 지역 주민들인 당원들과 항상 공부한다"라고 말했다.
차별성 없는 공약,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지방선거...지역정당이 보여주는 대안
이번 6.1 지방선거에서는 선거가 진행되기도 전에 당선이 확정된 무투표 당선자가 494명이 나왔다. 역대 최대다. 영등포구의회 선거에서도 7개 선거구 중 3개 선거구가 무투표 당선이 확정됐다. 모두 거대 양당 소속 후보들이다. 무투표 당선 사유가 확정되면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운동이 중단된다. 당선자들의 지역 공약은 주민들이 찾아보기 어렵다.
직접행동영등포당 이용희 대표는 자전거 정당 연설회 중간중간 주민들에게 지속해서 "지방선거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방향으로 영등포구를 이끌지 아는 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또한 지역정당의 창당이 현재의 지방선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정당이라고 하면 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노인분들도 만나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하고 싶은 말을 나눠야 합니다. 좋은 정책이 나오면 받아들이고,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좋은 정당과 좋은 민주주의라 생각합니다. 구민의 민의와 의견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구조에서 지역정당은 정치를 바꿀 기회입니다."
창당 때부터 당원으로 함께했고 영등포에서 10년 넘게 거주한 박진선(45) 씨도 "지역정당은 지역에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 강조했다. 박 씨는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도 지역 행정이나 의회에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라며 "지역 내 문제를 제대로 알고 소통하는 지역정당으로 함께 고민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정당은 영등포뿐만 아니라 타지역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서울시 은평구, 경기도 과천시 등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둔 지역 정당들이 창당했고 이들은 지역정당네트워크를 출범했다.
윤현식 지역정당네트워크 연구위원은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는 나라 중 지역정당을 막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라며 "정치적 활동 범위를 해당 지역으로 한정하고, 해당 지역의 주민 등 지역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주체들이 당원으로 참여하는 지역정당의 모습이 풀뿌리 민주주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정당 설립을 막고 있는 정당법 위헌소송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직접행동영등포당은 판결과 상관없이 계속 지역정당 활동을 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이 대표는 "주민의 민의와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구조라면 지역정당은 계속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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