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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택배노동자의 삶과 죽음

  • 김명환 택배노동자
  •  
  •  승인 2023.07.17 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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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노동자, 고 김태완 형을 추모하며

-오전 하차 종료, 그 게 우리가 살 길이다

-대리점 강제 폐쇄로 인한 해고

-투쟁이 있는 택배현장은 어디든

-극적이었던 노동조합 설립필증 쟁취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대책위 활동과 사회적 합의 쟁취

-택배노동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던 미래

“19세기 노예 노동을 20세기 노동환경에서 21세기에 강요받는 사람들”

택배노조 건설을 위해 함께 일하기 시작하던 무렵 태완이 형은 택배 노동자를 이렇게 정의하곤 했다.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거나 못하면 가차 없이 잘리고, 땡볕과 폭우와 한파에서도 가림막 하나 없는 작업 공간에서 2016년을 사는 택배노동자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016년 CJ대한통운 관악 행운대리점에서 월급 기사로 일하던 나는 형이 있는 용산터미널 보광대리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용산 보광동은 택배 기사들 사이에서는 소문난 난 배달 지역이었고 김태완 동지가 처음 택배 기사 일을 시작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불과 1년 남짓이지만 택배 배송 경험이 있던 터라 처음에는 만만하게 여겼다. 하지만 담당 배송구역의 절반을 익히는 데도 두 달이 넘게 걸렸고 전체 구역을 배송하게 되면서 크게 착각했음을 알았다.

제법 익숙해질 만한 시간인 4개월이 지났는 데도 새벽 5시에 일과를 시작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새벽 2시를 넘겨 잠드는 일이 2주 동안 지속됐다. 비교적 좋은 구역으로 바뀐 형도 가끔 자정 가까이 일이 끝났고, 그 새벽에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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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하차 종료, 그 게 우리가 살 길이다

‘이러다 사람이 일하다 죽기도 한다’는 걸 몸으로 깨닫게 되면서 김태완 동지에게 힘듦을 호소했다.

“처음엔 분류작업(속칭 까대기)이 길어야 한두 시간이었어. 그런데 물량이 늘어나면서 세네 시간은 기본이고 대여섯 시간을 넘기기도 하면서 장시간 노동은 피할 수 없게 됐어. 오전 하차 종료만이 택배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야.”

“맞아요 어제도 중계차가 늦게 오면서 4시나 되어서 첫발(첫 배달)을 찍었어요. 한 시간 40개만 배달한다 쳐도 400개를 배달하려면 10시간이 걸리는데 4시라뇨?”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면 찍어 누를까봐 형은 되도록 회사 측에 모범 배달기사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들의 평가 기준에서 우수 사원으로 뽑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면 대리점장들이나 터미널의 분위기를 만드는 기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좋은 인상을 주고 관계를 맺고 ‘오전 하차 종료’에 대한 의사를 묻기도 하면서 형은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한 활동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 나같은 동료들은 형의 배송을 일부 대신하기도 하면서.

오전 하차 종료에 대한 터미날 기사들의 반응은 대환영이었다. 일반 기사들 말고도 몇몇 큰 대리점 사장들도 적극 호응하고 나서며 D데이를 정해 진짜 실행에 옮기자는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12시가 되면 하차 중이든 말든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고 일제히 물건을 정리해서 배달을 시작하자.’ 그것이 D-데이의 행동 지침이었다. 그런데 D-데이 하루 전 용산지점에서 이러한 논의를 알아채고 협의된 대리점장들을 따로 면담하며 회유했다. 그들 대리점장은 소속 기사들에게 불참할 것을 지시하고 결국 태완이 형과 함께 하기로 한 네 명만이 선택을 해야 했다. 강행할 것인가? 다음으로 미룰 것인가?

 

어차피 모두 다같이 시작할 수는 없다

“세명만 모이면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고 뜻을 이룰 수 있다.”

태완이형은 전국에서 일하는 택배노동자가 6만이 넘는다면 그 중에서 반드시 우리와 뜻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을 찾는 게 급선무라는 것을 늘 머리맡에 두었던 것이다. 형과 함께 일이 없는 날에는 그렇게 동지들 찾기에 나섰다. 박종태 열사가 죽음으로 지켜낸 광주의 택배노동자들을 만났다. 특고 신분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삼킨 울산의 택배노동자들을 만났다.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내고 그 사람들의 소개로 또 사람들을 만나고 결국 인터넷 상에서 택배노동자들의 권리를 생각하고 논의하는 ‘전국택배노동자권리찾기모임’이라는 밴드를 개설했다.

그런 인터넷상의 공간이 생겼다는 소식이 택배 기사들에게 돌면서 삽시간에 수천명의 가입자가 생겼다.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택배노동자들의 소통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론은 언제나 택배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창립이었다.

택배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용산터미널 우리 네 명은 고심을 거듭하다가 결국 형의 이 말에 강행을 결심했다.

“처음부터 조금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시작하면 좋겠지만, 그걸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지금도 택배 노동자들은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죽어간다. 어차피 모두 다 같이 시작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내겠다는 결심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다음날 네 명의 기사들이 자기 차량에 A4 용지에 “오전 하차 종료 약속을 이행하라”라고 써서 붙였다. 코빼기도 안 보이던 지점장과 주재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내려왔다.

“저게 뭡니까? 당장 떼세요.”

“내 차에 나의 요구를 써 붙였는데 뭐가 문제예요? 나는 뗄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식이면 김태완 님과 같이 갈 수 없어요.”

고성이 오가고 죽어라 까대기만 하던 레일이 멈춰지고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춤하며 지점장과 주재원들이 물러가고 “속이 시원하다.”, “잘했다 태완아”

A4용지 한 장이 분위기를 바꾸고 그 후로는 지점장과 면담도 신청하고 오전 하차 종료의 정당성을 계속 알려 나갔다. 그러나 지점의 면담도 거부하는 식으로 대응하자 결국 네 명은 12시가 되자마자 곧바로 출차 하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차들이 가로막아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아예 터미널 내로 진입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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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점 강제 폐쇄로 인한 해고

처음 회사는 오전 하차를 되도록 맞춰주는 방식으로 나왔다. 콧대 높던 지점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까대기에 나서고, 기사들 눈치도 봤다. 택배 기사들이 투쟁에 호응하리라는 기대감도 높아갔다. 하지만 회사에 압박을 받던 지점장은 결국 대리점 폐쇄라는 방식으로 계약 해지, 즉 해고를 단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멀쩡하게 실적을 내고 영업을 하던 대리점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리점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택배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건설을 지원하던 동지들의 연대를 요청했고 사실상의 계약종료 다음날 출근을 강행했다.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들까지 우리의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막아섰다. 2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택배기사들도 그 살벌함에 우리를 외면했다. 경찰을 부르고 직영과의 마찰도 있었으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리는 출근을 시도했다. 그 후로 6개월 동안이나 이어졌다.

 

뭉치면 주인되고 흩어지면 노예된다

해고 당일 형은 대치 하던 감시가 약간 소홀한 틈을 타서 바리케이트를 뚫고 터미널에 진입해서 레일 위로 그리고 탑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외쳤다.

여러분, 택배노동자인 우리에게는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탄압이 있더라도 반드시 노동조합을 건설합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뭉치면 주인되고 흩어지면 노예된다.”

2017년 1월 8일 택배노동조합 창립식이 국회 내에서 있었다. 노조 탄압과 사찰로 악명이 높은 CJ대한통운의 감시를 효과적으로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00여 명이 모두 가면을 쓰고 창립식을 가졌다. 그 100여 명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다 잃더라도 반드시 택배노조를 건설하겠다. 택배노동자의 삶을 바꾸겠다.”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전국택배노동조합의 전신)의 깃발을 힘차게 나부끼는 초대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위원장 김태완의 얼굴은 한 명의 살인적인 노동을 하던 택배 기사 태완이 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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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있는 택배현장은 어디든

산별노조라는 개념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비롯한 많은 동지에게 왜 택배노조는 산별노조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던 김태완 위원장의 말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택배사들은 서로 이익 다툼을 하는 경쟁 관계에 있지만, 택배노동자는 일하는 회사나 일의 성격과 유형이 달라도 같은 공동 운명체여야 한다. 저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는 방법으로 착취하지만, 우리는 하나로 단결하는 방식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가 건설할 조합은 CJ대한통운 택배노동조합이 아니라 택배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택배노동자를 위한 산별노조여야 한다.

1호 지회는 CJ대한통운 광주지회였다. 택배노동조합의 첫 지회의 창립선언과 함께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탄압에 맞선 첫 투쟁은 경주지회에서 벌어졌다. 김태완 위원장은 경주로 내려가 조합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도에 나섰고 결국 승리했다. CJ대한통운 분당터미널의 집단 해고 통보를 듣고 달려가 분당지회를 건설했다. 당시 원영부 지회장(현 택배노동조합 경기지부장) 이하 조합원 전원의 원직복직을 쟁취하는 투쟁 성과도 올렸다.

박근혜 탄핵촛불도 택배노동자의 이름으로 참가해서 귀중한 발언 기회를 얻어 택배노동조합의 창립 취지와 목표를 국민에게 설득하고 주변 택배기사에게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며 스티커 2만 장을 제작해 촛불시민에게 나눠주었다. 그 촛불시민 중에 한 택배기사의 따님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가입을 신청했다는 소식에 아기처럼 즐거워하던 김태완 위원장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극적이었던 노동조합 설립필증 쟁취

택배연대노동조합의 출범은 여러 차원에서 순탄치 않았다.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의 협회일 뿐 노동조합이 아니라는 게 정부와 사측의 논리였다.

합법적인 노동조합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으려면 노동조합 설립을 신고하고 설립신고필증을 받아야만 했는데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대체로 노동조합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한번 설립신고가 반려되면 장기간 설립신고가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섣부른 설립신고를 망설이게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한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가속화하려면 설립필증의 쟁취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김태완 위원장을 위시한 지도부들은 숙고하고 주변 여러 창구들을 통해 가능성을 타진했다. 택배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은 충분히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유사직군의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례도 검토하며 오히려 택배노동자의 노동자성은 더 높다라는 판단도 갖게 됐다.

김태완 위원장은 결국 설립신고를 내게 됐다.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응원과 격려가 있었지만 정부는 필증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결국 김태완 위원장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리고 단식 12일, 신청 후 두 달여 만에 설립 필증이 발급되었다.

이 설립필증은 한국노동운동사에서도 큰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 한 것이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첫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택배연대노조 김태완 위원장은 임기를 마친 뒤엔 "택배노동자들의 '절친'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 참여와혁신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대책위 활동과 사회적 합의 쟁취

택배연대노동조합은 우체국 택배위탁협회 등의 가입 결정 등으로 조직화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택배현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살인적 노동강도를 낮추기 위한 다양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 중에서도 사실상 ‘택배법’이라 할 수 있는 ‘생활물류서비스법’을 입법하고 발효시키는 과정에서도 택배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이자 정치위원장 김태완의 역할은 컸다.

공짜노동 분류작업 거부 투쟁, 스물 일곱명의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를 끝장내고 택배사들을 끌어내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도 언제나 그는 가장 앞장에 있었다.

사회적합의의 또 다른 큰 의미는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같은 것이 되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완이형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재벌기업들은 노동자를 무시하고 끝까지 직접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죠. CJ대한통운이 저렇게 교섭을 안하고 버티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라는 우회적 대화창구를 만들면 CJ입장에서도 그 합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죠.”

택배노동자 과로사 근절을 위한 사회적합의는 전적으로 국민의 지지와 택배노동조합에 대한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사회적 합의는 전태일열사 50주기 전태일노동자상의 수상의 영광을 우리 조합에 안겼다.

 

택배노동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던 미래

 

어느새 택배노동조합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형은 쓰러지기 전 날까지도 누군가와 토론하고 제안하고 설득하고 납득시켜야 했다. 엇나가는 사람들을 돌려세워야 했고,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했다. 택배노동자들의 막내격이라 할 수 있는 쿠팡CLS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또 쪽잠을 자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급성 뇌출혈은 바로 그런 일들이 형에게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뜻이 다르고 어차피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인연을 끊는 게 안 좋을까요.”

형의 진심은 모른 채 하고 단결의 정신을 저해하며 엇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속상하겠다 싶어 내가 물었을 때 형은 살짝 화를 내며 말했다.

“야, 너 어떻게 무서운 생각을 하냐?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마라. 그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야.”

2013년 용산터미널에 입사해서 택배일을 배우기 시작한 택배 기사 김태완을 생각해 본다. 당시 형이 꿈꾸던 미래를 형은 몇 퍼센트나 이루고 떠난 것일까?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거듭난 택배노동자들과 끝내 만들고 싶었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오직 택배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한 마지막 10년을 그렇게 택배노동자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김태완 수석부위원장이 벌써부터 몹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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