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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안전성 검증’ 기업에 내맡긴 전기차 화재 대책

배터리 사전 인증한다면서 화재 발원지 ‘셀’ 검증은 배제…정부가 셀 정보 확보할 근거 마련해야

경찰과 소방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지난 8월 2일 오전 인천 서구 청라동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불이 난 차량을 감식 하고 있다. ⓒ제공 : 뉴시스
정부가 전기차 화재 대책을 내놨지만, 국민적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 대책을 재탕한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정부가 배터리 안전성 검증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채야 한다는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직무 유기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정부는 지난 6일 전기차 화재 대책을 발표했다. 지난달 1일 인천 청라 화재로 확산된 전기차 포비아 사태를 일단락 짓는 성격이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벤츠 EQE 차량에서 시작된 대규모 화재로 800대 이상의 차량이 전소되거나 그을렸고, 입주민들은 단전과 단수로 임시거주시설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번 대책에는 배터리 관리 강화 방안이 담겼다. 전기차 배터리 사전 인증 제도의 시행 시기를 당초 내년 2월에서 올해 10월로 앞당기는 내용이 핵심 대책으로 제시됐다. 해당 제도가 시행되면 정부가 배터리 안전성을 인증한 전기차만 출고가 가능하다.

현재 한국은 정부가 자동차 부품 안전성을 사전에 검증하지 않고, 완성차 업체가 자체적으로 검사하는 자기인증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자동차가 출시된 이후 국토부가 차량과 부품을 구매해 안전기준 적합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한국과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자동차를 판매하기 전에 정부가 안전기준 적합 여부를 확인하는 사전 인증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2019년 코나 EV를 비롯해 전기차 화재가 잇따르자, 배터리에 대해서는 사전 인증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번 대책은 기존에 예정된 배터리 사전 인증 제도의 시행 시기만 조정하는 수준에 그쳐, 보다 실효적인 제도 개선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최영석 원주한라대 미래모빌리티공학과 객원교수는 “당초 예정된 팩 단위 사전 인증 제도를 재탕하면서 생색내는 것에 불과하다”며 “의미 있는 정책적 변화는 없다”고 지적했다.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본관 합동브리핑실에서 전기차 화재 안전관리 대책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09.06. ⓒ뉴시스

팩 단위 물리 시험은 한계…핵심은 셀 검증

사전 인증 실효성의 핵심은 검증 대상과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배터리 사전 인증 제도의 시험 대상이 팩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의 총체를 이르는 단위가 팩이다. 팩은 수백 개의 셀로 구성된다.

한국교통안전공단 산하 자동차안전연구원이 팩에 대해 진동·열충격·과충전·침수·충격 등 항목을 시험한다. 물리적인 내구성을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팩 단위 사전 인증으로는 배터리 안전성을 보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위 단위인 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배터리 화재는 외부 충격에 기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셀 자체의 제조 불량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코나 EV 화재는 셀 내부의 단락(합선)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다.

정부는 셀 단위 사전 인증을 통해, 셀 전압의 적정성과 정상 작동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셀 업체로부터 자료 확보도 가능하다. 셀이 어떻게 설계됐는지, 셀 업체의 자체 검수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 정보를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다. 팩 단위 사전 인증 체계에서는 정부가 셀 안전성을 검증하지 못할뿐더러, 셀 업체에 자료를 요구할 권한도 없다.

사전 인증을 팩 단위에서 셀 단위로 세분화하는 건 정부의 전기차 안전성 관리 범위를 완성차 업체에서 배터리 업체로 확대한다는 의미가 있다. 완성차 업체는 배터리 업체에서 셀을 납품받아 팩을 만들고 전기차에 탑재한다. 사전 인증 대상을 팩으로 국한하면, 셀 업체에 대한 정부 관리가 제한된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부 교수는 “정부가 셀 단위 사전 인증을 하게 되면 테스트 방법과 기준 등 관련 표준이 정립될 것”이라면서 “모든 셀을 하나하나 시험하는 게 아니라 특정 셀에 대한 테스트를 거치는 것이기에 장비를 도입하면 무리 없이 인증 작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영석 교수는 “사전 인증은 정부가 직접 시험하는 것뿐 아니라 업체로부터 자료를 받아 검증하는 작업도 포괄한다”며 “정부가 셀 설계와 공정, 업체 자체 검수 작업 등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어야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부분이 잘못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에 검증 맡기고, 안전성은 소비자가 판단하라?…“정부 직무 유기”

주요국은 정부가 팩뿐 아니라 셀 단위로 배터리 안전성을 관리한다. 미국은 자기인증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나, 한국과 달리 정부가 셀 업체를 포함한 부품사를 직접 조사할 수 있다. 중국이 시행하고 있는 사전 인증 제도는 셀 단위 시험을 포함한다. 유럽도 사전 인증 체계 안에서 셀 업체 자료를 받아 검증하고 있다.

팩 단위가 아닌 셀 단위 사전 인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도 팩 단위를 고집했다. 정부가 배터리 안전성 관리 역할을 회피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호근 교수는 “정부가 관리해야 할 안전성 검증을 민간 업체에 맡겨 버리는 건 직무 유기나 다름없다”며 “전기차 화재에 있어서 원인 혹은 확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배터리 셀에 대한 관리를 정부가 못한다는 건 난센스”라고 말했다.

최영석 교수는 “셀 단위 사전 인증을 도입하면 주무 부처인 국토부와 산업부 책임이 강화되고, 업체 입장에서도 정부에 보고해야 하는 사항이 늘어나는 부담이 생기다 보니 적극적으로 추진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부는 셀 안전성 관리 책임을 외면한 채, 기초적인 수준의 셀 정보를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방안을 내놨다. 현재는 배터리 용량과 전압, 최고 출력을 공개하게 돼 있는데, 여기에 셀 제조사를 의무 공개 대상에 추가했다.

인천 청라 화재 시발점이 된 벤츠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가 당초 CATL로 알려졌으나 정부 조사 결과 파라시스 에너지였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혼란이 야기된 바 있다.

전기차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배터리 제조사를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건 알권리 보장 측면에서 합당하나, 전기차 화재 예방 효과는 미미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배터리 제조사는 안전성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척도로서 역할은 하지 못한다. 소비자가 배터리 제조사를 안다고 해서 전기차 화재 가능성이 줄어들진 않는다는 얘기다.

최 교수는 “배터리 제조사 공개는 필요한 조치지만, 전기차 화재 예방 차원에서의 대책이라기에는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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