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송환을 기다리던 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27일 향년 90세의 일기로 끝내 운명했다. 오후 6시경 낙성대 소재 ‘만남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시던 장기수 양희철 선생이 저녁식사로 죽을 끓여 고인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가 숨을 거둔 고인을 발견했다. 발견 당시 심정지 상태였고, 서울에 있는 (양)딸과 양심수 후원회 성원들이 도착해 임종을 확인했다. 사인은 백혈병 합병증으로 인한 부정맥.

전날 딸이 해준 밥으로 점심과 저녁을 기분 좋게 드셨고 같이 손잡고 북녘 구경 간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고인의 일대기는 민병래 작가의 도움으로 2020년 11월 본지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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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시 16세의 나이로 인민군에 자원입대해 양구전투와 원산전투에 투입됐으며, 1952년(당시 18세) 조선로동당에 화선(火線) 입당했다.

1953년 최현 군단장 산하 원산 재상륙방어전에 투입됐으며, 7월 27일 정전협정 후 흥남군관학교 입교했다가 1957년 제대 후 귀향했다. 이후 당선전부에서 영화 이동영사기사로 일했다.

1962년 6월 1일 공작선 기관사로 대남침투공작 중 화성에서 체포됐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7년 간 복역했다. 1988년 12월 21일 장기수 양원진, 강담 선생 등과 함께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전전했다.

 

2000년 9월 2일 63명의 장기수 1차 송환 후 2001년에 2차 송환을 신청해 북송을 기다려 왔다.

고인은 스물여덟 살에 남파됐을 때 갓 돌을 넘긴 아들이 있었다. 북에 가서 아들을 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소식하며 술은 입에 대지 않았고, 매일 운동했다. 특히 86살까지 6.15산악회와 함께 산행 하며 건강을 다졌다.

고인은 최근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고 외출 후에는 입술이 타는 등 식사를 제대로 못해왔다.

빈소는 서울 을지로 소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특실 207호에 마련됐다. 29일 오후 고인을 기리는 추모의 밤이 예정돼 있으며, 발인은 30일이다.

박희성 선생의 운명으로 한때 33명이었던 2차 송환 희망자는 현재 낙성대에 기거하는 양원진(96), 김영식(92), 양희철(91), 그리고 부산에 박수분(95), 대전에 이광근(80) 등 5명만 남았다.

아래는 기사 발췌본이다.

2016년 여름 어느 날, 길고 길었던 박희성의 하루

2000년 10월,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에서 제외된 그는 2차 송환을 손꼽아 기다렸다. 2016년 여름이 되었으니 벌써 15년이 넘게 기다린 세월이다.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귀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팔십이 넘고 2차 송환은 기약이 없으니 죽기 전에 가족들 얼굴이라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 되었다. 그래서 개별 상봉을 신청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광주교도소에서 출소, 교도소가 본적지가 되었다

박희성의 본적지는 광주시 북구 문흥동 88-1번지, 지금은 이전했지만 과거 광주교도소가 있던 자리다. 박희성은 이곳에서 만 27년을 복역하고 88년 12월 22일, 강담(2020년 8월 21일 작고)과 같이 출소했다. 그래서 광주교도소가 본적지가 되었고 출소하는 날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다음 일곱 자리 중 여섯 자리가 특별한 번호를 부여받았다.

 

잊을 수 없는 남양만에서의 전투

평양과는 오전 8시, 10시, 오후 2시 30분, 4시 30분, 6시 30분. 이렇게 다섯 차례 무전을 주고 받았다. 마지막 교신이었던 오후 6시 30분, 그대로 작전을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박희성이 탄 배는 국화도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멀리 행담도 쪽에서 민가의 불빛이 별빛처럼 가물거렸다. 남양만 깊이 들어가 평택방면으로 안내원을 내려주는 것이 그날의 임무였다. 전조등 없이 항해를 하려니 까막눈 신세였다. 평소 같으면 고깃배들이 한참 조업 중일 텐데 이날은 거의 볼 수가 없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한발 한발 들어갔다.

 

최현 2군단, 원산 배치

박희성은 52년 말 최현이 군단장인 2군단으로 옮겨져 13사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원산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원산이나 남포에 ‘인천상륙’같은 작전이 전개될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2사단은 안변, 27사단은 마식령, 13사단은 원산을 바라보는 내륙 안쪽에 배치되었다. 박희성은 낮에는 깊은 토굴 속에서 은신했다. 찐쌀을 보급 받아 이를 물에 불려서 먹었다. 우려했던 상륙작전은 없었고 이렇게 대치상태를 보내다가 휴전을 맞았다.

 

화선 입당, 당원번호 0466171

박희성은 화선 입당을 했다. 전선에서 불꽃이 튀는 가운데 입당했다는 말이다. 51년 양구군에서 공방전을 벌일 때 군공메달을 받았고 52년 원산방어작전 때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은 게 높이 평가되어 군대정치부 중대장(세포위원장)의 보증으로 입당했다. 52년 5월 24일 생일을 두 달 넘겨 가입했고 당원 번호는 0466171였다. 사단에 가서 당원증을 받았는데 물에 젖을까봐 기름종이에 싸서 품에 보관했다.

 

영화감독이 꿈이었습니다

57년에 제대한 그는 다시 구성으로 돌아갔다. 군당에서는 두 가지 직업을 권했다. 하나는 군의 경력을 살려 트럭운전수를 하는 일과, 다른 한 가지는 극장의 상영기사였다. 박희성은 운전이 군에서 오랫동안 해온 일이어서 내키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기에 그는 선뜻 촬영기사를 택했다.

고 박희성 선생 약력

-1935년 3월 24일 평안북도 박천군 출생

-1948년 구성군 관서국민학교 졸업, 관서중학교 입학

-1950년 조선인민군 자원입대, 길림에서 훈련, 양구/원산 전투 투입

-1952년 군공메달과 전사영예훈장, 화선입당

-1953년 최현 2군단장 산하 원산 재상륙방어전 투입, 정전 이후 흥남군관학교 입교

-1957년 제대 후 귀향, 트럭 운전, 선전부 영화 이동영사기사

-1959년 당 연락사업 소환, 해주 해상공작임무, 결혼 후 1961년 득남(동철)

-1962년 6월 1일 공작선 기관사로 대남침투공작 중 화성에서 피체

-1988년 12월 21일 양원진, 강담 선생 등과 광주교도소 출소, 막노동 전전

-2000년 9월 63명 장기수 1차 송환 후 2001년 2차 송환 신청(33명)

-2024년 10월 27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