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언론이 고려대 교수 ‘성명서’ 외면한 까닭

 

언론이 고려대 교수 ‘성명서’ 외면한 까닭
 
[보도비평] 언론계의 ‘동업자 봐주기’인가, ‘광고’ 의식한 탓인가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0-29 10:00:36 | 최종:2012-10-29 10:01: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16일 고려대 평교수 140명이 서명한 '성명서'

지난 16일, 고려대 평교수 140명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의 김재호 이사장과 김병철 고려대 총장을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이날 저녁 고려대 내부 포털사이트에 전격 공개됐는데, 1000여 명의 고려대 교수 가운데 140명이 실명으로 서명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고려대 교수들이 실명으로 재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이 대학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유력 대학에서, 그것도 재단 이사장과 총장을 겨냥한 ‘거사’이니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언론들이 어떤 논조로, 얼마나 비중 있게 보도했는지가 궁금해 네이버에 해당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조중동, MBC-KBS 등 유력 매체들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신생 통신사인 <뉴스1>과 <한겨레> <한국경제>가 17일자에서 다룬 것이 전부였다. 대신 <교수신문>(22일자)과 <한국대학신문>(24일자), 그리고 <데일리메디>(25일자) 등 전문지 세 곳에서 이를 다뤘다. 보건의료 전문지인 <데일리메디>가 이 내용을 다룬 것은 ‘성명서’에서 제기된 의혹 중에 고대의료원과 직영 도매업체인 ‘수창양행’에 관한 문제도 포함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종합지인 <뉴스1>과 <한겨레>의 보도는 대단히 피상적이었다. 둘 다 변변한 해설이나 분석기사 없이 스트레이트로 간단히 처리했을 뿐이다. <한국경제>는 네 문단짜리 기사였다. 반면 전문지들은 달랐다. ‘전문지’여서 달랐을 수도 있고, 또 해당 업계로선 큰 뉴스여서 비중 있게 다뤘을 순 있다. 그러나 평소 내로라는 이른바 유력 신문, 방송사들이 이를 다루지 않은 데는 모르긴 해도 다른 사정이 있지 싶다. 그 가운데 한 이유는 대학은 ‘큰 광고주’다. 또 하나는 ‘동업자 봐주기’가 아닌가 싶다. 고려중앙학원의 김재호 이사장은 <동아일보> 사장이기도 하다.

그러면 고려대 평교수들이 이번에 ‘실명 성명서’를 낸 까닭은 무엇일까? ‘성명서’ 말미에서 서명교수들은 “지금 고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 사학에서 삼류 족벌 사학으로 전락할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며 “이사장과 총장의 냉철한 현실 인식과 통렬한 자기반성을 요구한다”고 밝힌 대목이 사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고려대 교수의회(의장 김인묵)는 지난 8일 법인의 비민주적인 운영, 재정손실, 비정상적인 회계처리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면서 “비합리적이고 투명성 없는 지금의 법인은 오히려 학교 발전의 장애물로 전락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이번 ‘성명’은 그 후속타인 셈이다.

이번에 고려대 평교수 140인이 실명으로 낸 ‘성명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은 대략 네 가지의 학내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해결책 제시를 촉구하고 있다. 첫 번째는 김재호 이사장의 선임이 적절했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물었다. 이들은 “김재호 이사장은 취임 이래 지금까지 우리 대학의 발전 방향과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는 “단지 그가 인촌 선생 가문의 장손이라는 이유로 이사장이 되었다면, 법인 이사들은 우리 대학을 그 가문의 상속 재산으로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김재호 이사장
김재호 이사장(동아일보 사장)은 인촌의 증손자로 인촌 김성수-일민 김상만-김병관에 이어 4대째 이사장직을 세습하고 있다. 금년 5월 김 이사장이 재단 이사장에 선출될 당시 대학 내에서조차 “김재호 이사가 아직 나이도 적은데다(48세) 뚜렷한 공로도 없지 않느냐”며 부적정인 의견이 개진된 바 있다. 게다가 김 이사장과 김병철 현 고대 총장과는 5촌간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 이사장이 사장으로 있는 <동아일보> 일가가 재단과 대학 전면에 나서면서 ‘고대-동아일보 사유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서명 교수들은 “고대는 결코 어느 한 가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민족의 대학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 되었기에, 인촌 선생의 후손이라고 해서 능력과 자질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이사장직을 계승하는 관행은 용인되기 어렵다.”며 “김 이사장이 고대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청사진과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제시함으로써 명문 사학의 법인 이사장이 되기에 부족함 없는 경륜과 식견을 갖추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재벌과 대형교회의 세습에 이어 사학도 이미 세습 체제가 된지 오래다.

두 번째는 법인의 불투명한 운영을 지적한 것. 서명 교수들은 “고대의료원에 의약품을 독점 납품했던 (주)수창양행과 관련된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며 “수창양행이 2011년 3월 이후로 김 이사장 가족 구성원들이 소유하는 족벌체제로 변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지, 그리고 이 업체의 수익금전액이 과거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밝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비록 수익금 일부가 대학발전기금 명목으로 법인에 전입되었더라도 의료원의 독점적인 납품권을 가진 업체의 지분 전부를 김 이사장 가족이 소유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라는 것.

이른바 ‘의료원 수익사업 건’은 김 이사장의 부친 고 김병관 이사장이 당시 김 씨 일가친척과 나눠 가졌던 (주)수창양행의 소유 지분 이전과 관련된 것으로, 지난해 3월 김 이사장 가족의 소유로 변경된 이후 수익금을 의료원에 재투자하지 않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서명 교수들은 이와 함께 최근 설립된 의료원 납품업체 (주)수창양행과 스마트엠매니지먼트(주)의 지배구조와 수익금 처리 내역, 안암 및 안산 장례식장의 식당·구로병원 주차장 업체·법인 관리 수탁업체 등의 운영현황 등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그간 의료원 수익사업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투명하게 밝혀진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명 교수들은 의료원 및 관련시설과 업체에서 나오는 수익은 전적으로 법인에 귀속돼 학교나 의료원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의대 학장 선거에 나섰던 후보들은 “의료원 부대사업을 재단에서 의료원으로 가져오겠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했으나 실현된 적은 없다. 고대의료원 측은 소위 ‘빅5’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재정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 <데일리매드>는 고대의료원의 한 교수가 “부대사업을 제쳐두고서라도 의료 수익만이라도 재투자된다면 의료원이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고려대병원(안암동) 입구

 

셋째는 총장 선출을 둘러싼 불공정 시비. 서명 교수들은 “우리는 법인이 그동안 총장 선출 과정에서 공명정대하게 처신해 왔는지 묻고 싶다.”고 말문을 열고는 “법인이 최종 선임한 총장이 재임기간 동안 고대를 세계의 명문 사학으로 발전시키기는커녕 지금까지 쌓아 온 명성마저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때 그를 총장으로 선임한 법인은 이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법인이 총장 후보자들의 자질과 능력, 리더십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끝으로, 김병철 총장의 ‘발전기금 내역 공개’ 건. 서명 교수들은 김 총장이 공약했던 학교발전계획의 실현상태와 지금까지의 순수 모금액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김 총장이 남은 임기 동안 실천할 연차별 학교발전계획과 연도별 순수모금 목표액을 제시하고 퇴임 직전에는 공약사항의 실천 결과를 담은 ‘백서’ 발간도 요청했다. 특히 이들은 최근 김 총장이 교수들의 연구실적 평가기준을 대폭 강화한 것을 두고 총장으로서 교수들의 연구환경 개선을 위해 그간 뭘 했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도 밝히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지난해 고려대는 순수 기부금 458억원을 모아 전국 1위를 했으며, 올해는 5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한편, 서명 교수들의 주장대로라면 고려대는 현재 적잖은 문젯점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사학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주의 후손이 법인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그 일가친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 의약품을 독점 납품하는 회사의 지분을 전부 소유한 채 수익금도 챙기고 있다면 말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에다 요즘 사회적으로 말썽이 된 재벌기업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에 다름 아니다. 서명교수 들이 김 총장을 향해 “단과대학-학과의 자율권을 무시한 일방적인 교무행정을 시정하고 대학의 공공성과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을 기용하라”고 요구한 걸로 보면 김 총장의 독단성도 읽히는 대목이다.

물론 국내 대학(특히 사학) 가운데 이런 문젯점을 가진 대학이 고려대만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학 재단이 세습되고 있는 현실에서 후세 경영자들의 능력 검증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그러다보니 친인척이 대거 재단에 몸담으면서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들은 사학비리가 꼭 ‘사건화’ 됐을 때 검찰발 기사로 다뤄온 것이 그간의 방식이었다. 유력 신문인 ‘조중동’ 3사 모두 서울시내 주요 대학의 재단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있으며, 특히 광고 건 등과도 맞물려 사태가 터져도 대개 ‘눈감고 아웅’ 하는 식이다. 건전한 사학 육성을 위해 언론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건 현재로선 과연 ‘기대난망’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