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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자살 '클릭'하는 우리, 모두 "자살 생존자"

 

 

['지금-여기'를 성찰하는 '자살론'] 천정환에게서 듣다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교수,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10 오후 7:59:46

 

 

 

 

 

 

 

본능적으로 삶을 지속해가는 우리에게 예고 없이 끼어드는 '누군가의' 죽음은 심리를 동요시키는 사건이다. 그 중에서도 자살은, 죽은 사람이 기획하고 실행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남은 자들에게 더 심대한 충격과 불가해함을 안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충격과 행위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본 적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성찰은커녕,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만연하고 일상적인 사건이자 때때로 호사거리가 되곤 한다. 이번 주 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부모와 조부모가 동반 자살하자 역시나 많은 연예 매체가 빈소에서 플래시를 터트렸고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통해 비극을 실시간으로 소비했다. 고인들의 복잡했을 사정은 쉽게 한 가지 동기로 치환되었고, 죽음은 즉시 '치매가 불러온…' '치매 대책은 없나' '치매 정책 검토' 등 남은 자들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자살의 정황을 부정하려거나, 미디어 시대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해석과 표상의 메커니즘 자체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무거운 죽음이 인터넷 속에서 다른 검색어들과 뒹굴며 관음되는 상황, 너무 빨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의 율법으로 복귀하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 삼아볼 수 있다.

 

▲ <자살론>(천정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국문학자 천정환은 그러한 우리의 "불충분한 애도, 불충분한 성찰"을 돌아보기 위한 시도로써 지난해 말 <자살론>(문학동네 펴냄)을 펴냈다. 19세기 말 뒤르켐의 <자살론 Le Suicide> 이래 많은 학자, 작가들에 의해 자살론이 시도되었고 천정환 역시 그 대열에 서 있지만 그는 자살이 "어떤 접근법과 '과학'으로도 완벽히 재현되거나 '이론화'되기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책을 연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책을 쓴 동력이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자살의 근대'에 대한 문화론과 문화사적 접근이다. 근대 한국에서 일어난, 즉 우리의 '지금-여기'와 결부된 자살 사건과 그 '고통과 해석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탐구하여 자살의 문제성을 밝혀내고자 한다. 미디어와 국가기구의 문법인 개인 문제-사회 책임이라는 이분법의 유혹을 거부하며 그는 "'윤리적 개인-사적 관계-사회적 상황'"의 연쇄 고리와 이를 둘러싼 근대의 클라우드를 구축해 보인다.

다음은 저자가 <자살론>을 통해 전달한 이야기 중 일부를 지난해 말 출간 기념 강연과 책의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강연은 지난해 12월 16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개최되었다. <편집자>


① '자살생각'

<자살론>을 쓴 뒤 많은 자리에서 "어쩌다 이런 책을 썼는가"라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저를 잘 아는 분들도 '이런 주제에까지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시더군요. 자살이라는 주제가 그렇죠. 모두 중요한 줄은 알면서도 입에 올리는 것은 꺼리거나 부담스러워 합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그랬습니다.

책을 내고 인터뷰를 몇 번 했는데, 두 명의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머뭇거리면서 "죄송하지만 선생은 자살 충동을 느끼십니까"라는 질문을 하더군요. 약간 망설이다가 원론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자살 충동'이란 말은 잘 안 쓰고 '자살생각'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이라면 많이 한다고요.

자살이란 행동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여러 단계의 심리적 문턱이 있는데요. 가령 막연하게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구체적으로 방법을 기획하거나 고민하는 것까지 말이지요. 그것들을 포함해 자살과 관련한 생각 전부를 자살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의 상태, 자살 상황에 대해 이해해 보려 하고, 그 자살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고 언어화해보기 위한 생각, 즉 '자살생각'이라면 많이 해 봤다고 답했던 겁니다.

우리는 많은 자살 사건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루에 40여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는 직접 아는 사람이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혹은 유명인이라서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그 죽음에 대해 둔감한 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실감과 충격이 치유되는 것 자체가 삶의 경이로운 작용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지 못하고, 또 제대로 애도하거나 이야기해보지도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엔 쉬운 도덕적 평가 속에 안주해버리곤 하죠. 이게 <자살론>을 쓰던 저의 고민이고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제정된 '자살예방법'이 많은 허점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해서, 2000년대 이후 낮아진 적 없던 자살률이 최근 들어 약간이긴 하지만 낮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자살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살 동기에서부터 자살 유가족 상황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보건학·정신의학·사회학·복지학 등 많은 접근 방법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학위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제도적·학술적 노력이 자살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지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동시에 자살이란 말을 터부시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를 완화할 것으로도 기대되고요. 저 역시 마찬가지로, 자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는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자살을 학문적 틀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저뿐만이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전부 재현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이 책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시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 저자 천정환(국문학자, 성균관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② 자살의 '원인', 무엇일까?

이 책의 주요 관심사는 자살의 문화(사)입니다만, 그 문화는 사람들에게 자살이란 행위를 생각하게 하거나 실제로 하게끔 만드는 힘으로써의 고통의 내용과 성격이 변해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실제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의미화했는지, 이 역시 변화해 왔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을 '해석'이라 이름 붙인 거지요.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당장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며 '해석'을 시도하죠. 우리의 심리와 윤리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해석에 들어가는 것은 자동적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의식이고, 어떤 경우엔 죄의식의 정반대의 힘이지요. 그렇게 의미화하는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발전시키고 공유합니다. 그래서 사건들이 보도되고 '이런 원인이었다'라고 특정 지어져 전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살의 '원인(이유)'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저는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살행위는 하나의 인자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인이라 부르는 것들은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한 것뿐이지, 사실 거기에 이르는 고통은 누적되고 반복되고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책에서는 자살의 '문제 상황'이라고 썼습니다.

"자살한 사람들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모든 우리처럼 삶의 구체적인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며, 자살에 관련된 '객관적인' 상황과 맥락들을 갖고 있다. 그 상황과 맥락을 곧 '자살 이유'라 등치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즉 자살의 '이유'가 아니라 자살의 '문제 상황'이 있다. (…) '인과'와 '환원'의 유혹은 언제나 강력하지만 그것은 항상 오류와 오해의 결정적인 이유 아닌가." (<자살론> 46쪽)
 

ⓒ천정환


위의 도표는 각각 자살을 야기하는 복합적인 '문제 상황'과(그림1), 자살행동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그림2)으로, 다카하시 요시토모의 <고독의 병: 자살의 심리학>(변은숙 옮김, 알마 펴냄)과 박형민의 <자살, 차악의 선택>(이학사 펴냄)에 나오는 도표를 재구성하고 변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실제로 자살이 실행되는 데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일어납니다. 자살을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결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고, 그 사이에 여러 문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직장, 사회가 무엇을 해주느냐, 어떤 안전장치를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결과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유럽 국가들은 자살률이 높은 편인데, 자살을 유발하는 요인 중에 일조량 부족이 있습니다. 이것이 생리학적 요인으로서 우울증과 자살 유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던 것이죠. 이런 자연적인 한계를 복지 확충 등 사회적 노력으로 보완하려고 했던 거고요.

자살은 개인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극히 개인적인, 죽음의 일인칭성을 극대화하는 사건인 동시에 관계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말 그대로 자기-죽음(自殺)인데, '동반자살'이 매우 잦은 빈도로 일어나는 걸 보면 그 아이러니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어쨌든 자살의 문제 상황에서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살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살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그냥' 삶을 지속시켜주는 작은 장치들이었을 겁니다. 자살 직전에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 갑자기 느끼는 배고픔 등이 실제로 자살로 가는 문턱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거죠.

"자살은 특히 지지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자살생각을 할 때, 혹은 자살행동의 심리적 원인이 되는 '고립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것을 제어하고 '위로'해줄 타인과의 '관계'가 곧 지지다. 자살생각과 자살행동은 지지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어될 수 있으며, 반대로 자살행동에 이르게 하는 것도 곤경에 처한 관계와 그에 대한 주체의 평가다." (61쪽)

"자살은 '관계'의 사건이다. 이 '관계'에 개적 자아의 상황과 사회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이 결절·접합하는 지점이 있겠다. 개별 인간의 '자아'가 처한 아포리아들, 즉 해결하기 어려운 사적인 삶의 모순과 함께 사회적 삶의 질곡이 만나는 접점들의 '관계'가 있고, 그것이 모두 파탄에 이를 때 자살이라는 비극이 야기된다." (62쪽)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자살, 차악의 선택>(박형민 지음, 이학사 펴냄). ⓒ이학사
<자살, 차악의 선택>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인 박형민이 자신의 사회학 박사 논문을 쉽게 고쳐 쓴 것이다. 3개 경찰서 관할에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발생한 1321건의 자살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과 각 기록에 첨부되어 있는 405건의 유서를 분석하여 해당 자살자들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천정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많은 유서는 "자신이 처한 고통의 상태를 더 이상 끌고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즉 "삶이 최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자살을 '차악'으로 선택했다고 적고 있다. 책은 자살자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객관화시켜 자신의 문제 상황과 삶에 대한 평가를 하는 '성찰성', 이런 과정을 거쳐 도출된 '메시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인 '타자 지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살을 '소통적 자살'이라 개념화하며 그것을 8가지로 유형화한다. 즉 1300여 건 중 400여 건, 약 30%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기 위해" '차악의 선택'을 했고, 그것을 유서로 남겼다는 것이다.


③ 통계적 진실 : 지금 한국에서 자살 위험이 가장 높은 이들은?

한국의 자살과 관련된 몇 가지 통계를 보겠습니다. 그 전에, 자살을 '양적'으로 연구하는 통계학적 접근이 자살에 관한 인간적 진실을 전혀 못 보여준다는 공박을 짚고 넘어가 봅시다. 저는 자살의 통계학에도 분명 진실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인간-동물 '군락'의 진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유일한 '진리'인 야만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데, 양적 연구는 그 '진리'의 작용에 대한 대체적인 추세를 가시화하고 표상화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10년 한국의 자살 사망자는 1만 5566명으로, 하루 평균 42.6명이었습니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31.2명으로 OECD 가입국 중 1위입니다. (일본 19.7명, 프랑스 13.8명, 미국 10.5명으로 뒤를 이음) 이 세계 최고라는 자살률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시기의 기록적 증가와 2002년의 반등, 그리고 이후의 꾸준한 상승으로 달성된 것입니다.

1998년의 자살자는 1997년 대비 42.6%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기록적이지요. 이건 당시의 자살률과 경제적 문제가 커다란 상관관계를 가졌음을 나타내는데요. 이 시기 자살자의 구성을 보아도, 25세~44세 남성 자살자는 49.7%, 45~64세의 남성 자살자는 무려 67.8%나 증가했습니다. 이후 19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17.4%와 -8.3%로 낮아졌습니다. 이 기록적 변동 양상을 'IMF 극복·경기 활성화' 이외의 다른 이유로 설명할 길이 별로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자살 통계는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경제'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못합니다. 즉, 빈곤의 구체적 의미와 그것이 자아들에 미치는 상태를 전혀 말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박형민 박사의 말대로 자살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문제 상황'으로부터 "성찰"과 "의미 부여"를 거치고 난 뒤에만 일어납니다.

"경제적 곤란이나 신체적 고통 같은 외적인 문제 상황에 대한 자살자들의 평가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과정이, 외적 '고통'을 내면화된 주관적 고통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같은 주관적 상황이 자살이라는 실제 행위로 이어지기 위해서 주체는 자살행위가 가져올 효과를 다각도로 평가한다. '내가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고찰, 상상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통한 소통의 욕구를 충족하고 표현하려 한다. 이 '의미 부여'의 과정이 충족될 때 비로소 자살이라는 행위가 일어난다." (<자살론> 50쪽)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높은 자살률은 거의 노인 자살 때문입니다. 노인, 특히 남성 노인의 경우 자살률이 너무 높아서 전 세대 평균 자살률의 4배에 이릅니다. 지역적으로는 강원, 충청 등 소외된 지역이 특히 높습니다. 자살이 자살 방법·도구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농약 등 비교적 '쉬운' 선택지가 신변에 있는 것도 원인 중 하나 아닐까 합니다.

앞서 말했듯 최근 약간 자살률이 낮아지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은 적은데요. 바야흐로 노령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독일 의사가 남성 우울증에 관해서 쓴 책을 보니, 인류사 전체에서 남자들이 이렇게 오래 산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일반적인 기대수명이 80세가 넘는 것 자체가 미증유의 사태라 딱히 대책이 없다고 합니다. 여성들의 경우, 수다나 친밀한 감정 나눔 등 여성 특유의 생활양식 덕분에 우울증이 오더라도 강도는 약하다고 그 책은 설명합니다.

한국 노인뿐 아니라 전 세계, 전 세대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의 자살률이 평균 1.5배쯤 높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중독, 약물중독, 운동중독 등을 통해 우울증이 올만한 심리 상태나 스트레스를 잠시 밀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은퇴를 하거나 사회적 변동이 오거나 그로 인해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양상이 바뀔 때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그게 남성 우울증·자살을 불러오는 원인이라고 합니다.

한편 직업군을 다섯 개로 나눴을 때, 농림어업군, 단순노무직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관리직과 전문가 집단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출처 : '우리나라에서 직업군에 따른 자살의 표준화 사망비와 연령보정 비례사망비의 추세', 윤진하 외,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제23권 제2호, 2011년 6월, 173~182쪽))

지역으로 보면, 전국에서 서울의 자살률이 가장 낮습니다. 2013년, 6년 만에 감소한 서울시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3.8명으로 전국 최저입니다. 또한 도시 내부를 들여다보면, 서울의 경우 관악·용산의 자살률이 서초·종로보다 높고, 부산의 경우 "강서구(43.4)와 중구(34.7) 서구(31.4) 등 부산 외곽과 원도심 지역의 자살률이 크게 높"게 나타납니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학력이 높을수록 자살률이 낮으며 계층이 낮을수록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여성의 경우 이와 관련한 유의미한 통계는 없습니다. (출처 : '사회 계층이 자살 사망 위험도에 미치는 영향', 김문두 외, <보건과 사회과학>(제14집, 2003년 12월, 249~271쪽)) 그리고 소득은 자살생각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만, 취업 여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처 : '우리나라의 자살 급증 원인과 자살 예방을 위한 정책 과제', 노용환 외, <보건복지포럼>(제 200호, 2013년 6월, 7~18쪽))

지금까지 자살 관련 한국의 현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상당히 거칠고 거시적인 통계들인데요. 자살예방법 같은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마 이런 것들을 참고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떤 도움이 될까요? 그러니까 '40대/남성의 자살'을 둘러싼 숫자들을 살펴보는 게 그 사람의 자살을 막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이 통계들은 오늘날 한국 자살자 중 노인이 많다거나, 경기가 안 좋으면 중장년층의 자살률이 급등한다는 '현상'은 말해주지만, 자살에 이르게 하는 그들의 미시경제와 남성-자아의 드라마들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40대/남성/어떤 계층/어떤 원인(들)'까지 조사를 해야 자살의 진짜 문제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겠지요. 이와 관련한 보다 더 세밀한 역학조사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④ 자살학적 문화사 : 조선시대의 열녀

자살은 초시대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해, 인간은 심하게 모욕당했을 때, 감당하지 못할 곤경을 겪을 때, 우울이나 다른 신체적 질병 때문에 절망에 빠졌을 때, '자기보존'이라는 본능의 원칙을 거슬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절망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동 방식,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징죄와 선악 판단 시스템, 그리고 그 정신적 토대를 이루는 '마음의 구조'는, 자살의 사회·문화적 내용과 형태를 바꾸어 왔습니다. 즉 이 죽음 충동에도 모종의 '역사성'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바뀌어 왔으며, 진정한 개인이 성립한 '근대'로 이행해 왔을까요?

조선, 특히 조선 후기에는 먼저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들이 속출했고 국가적으로 그들의 사례를 기록, 보존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유서에 해당하는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외의 유서는 왕조의 몰락과 함께 순사한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이 남긴 것으로, 모두 성리학적 세계관을 따른 삶과 죽음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몽아비 보아라
내 집 가난하니 백사에 네 가슴 태우는 일 알겠고 네 머리 반백 되었으니 내 가슴 아프고 넉O지 못한 살림 살며 가슴 태우는 일 알겠고 [혈흔으로 해독 불가] 네 자식 된 지 해 [혈흔으로 해독 불가], 내 초년 일은 오히려 네 모를 듯하니 대강 이르노라. 슬프다, 네 아버지 초상에 함께 죽기가 무엇이 어려우리마난 팔십 시어머니 의지하실 데 없고, 가장의 후사를 잇지 못하고 두 딸이 어리니 차마 함께 죽지 못하고, 그 후 시어머니 삼년상 지내고, (…) 네 마음 이러하니 내 차마 일시에 속이지 못하여 내 죽기를 지금까지 슬퍼 머뭇거렸더니 [혈흔으로 해독 불가] 아마 남은 생애가 많지 아닐 듯하고, 병들어 죽고 싶지는 않고, 한날 죽기로 한 맹서는 고치기 어렵고 이 맹서를 바꾸면 지하에 가서 남편을 대할 낯이 없을 듯하여, 네 효심을 다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


숙종 42년(1716년) 이 씨라는 열녀가 자기 아들에게 남긴 유서를 현대어로 번역한 글입니다. (<자살론> 75~76쪽에 수록) 그녀 나이 43세 때였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남편은 27살에 죽었고, 그때 자기도 죽었어야 하는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키워야 해서 이제껏 살아남다가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하였으니 자살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엔 그 당시에 요구됐던 미망인의 의무, 순절의 의무를 이제야 수행한다는 정서가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두 가지 이유로 자살을 감행했습니다. 위의 이 씨처럼 남편을 따라 죽는 경우가 하나이고(바로 자결하는 경우에서부터 삼년 상 치른 후에, 혹은 시어머니 모시고 아들 키우다가 도덕적 의무가 완수되었다고 판단할 때에 죽은 경우까지 유형은 다양합니다.), 하나는 여성으로서 수절하고 순결을 지켜야 하는데 강간을 당하거나 당할 위험을 입었다는 이유로 자살한 경우입니다.

특히 병자호란(1636~7) 당시 자살한 여성들에 관한 기록이 정말 끔찍합니다. 그 당시 조선이 청에 패하고 30만 명 정도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할까봐 혹은 강간을 당해서 자살을 감행합니다. 오빠나 남편이 '명예자살'을 강요하는 경우도 많았고, 가부장이 자기 딸과 며느리와 함께 목숨을 끊어 몇 명이 한꺼번에 자살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그들이 유교 도덕 사회를 지키는 보루인 양 '열녀'라 칭송하고 기렸던 거죠. 한편, 그 와중에도 죽지 않고 끝내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환향(還鄕)녀'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사대부 사회가 골머리를 앓기도 했고요.

그로부터 한 세기 후,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1752~1800)조차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임금은 바쁜 와중에 지방 수령들에게 보고를 받아서 각 지역의 살인·강력계 사건들을 수집하고 그것에 일일이 해석적 코멘트를 달아 <심리록>이란 책으로 남겼는데요. 여기에 자살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어떤 젊은 도령이 여인의 옷을 잡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강간이라 볼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도령은 여인을 짝사랑했고, 이후에 그녀에게 청혼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 여인은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면서 자살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인데, 정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건 즉시 죽었어야 여인의 본심(제대로 된 도덕심)이 드러날 텐데 왜 뒤늦게 죽었냐고요.

이런 열녀/정절 이데올로기에 반감을 가진 이들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그랬습니다. 그는 '열녀 함양 박씨전'(1793?)이라는 소설인지 수필인지 살짝 모호한 글을 지어, 여인들이 남편을 따라 순사하는 일의 '과잉'을 비판했습니다.

작품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분량이 가장 긴 뒷부분의 내용은 전형적인 열녀 이야기입니다. 함양 박 씨라는 여인은 대대로 경남 함양 근처에서 현리를 지낸 '하찮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열아홉 나이에 시집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약간 사기결혼(?)을 당한 것 같습니다. 정혼한 이후에야 남편감의 병(아마도 폐병)이 깊어 얼마 못 산다는 걸 알게 되죠. ("비록 용모가 잘생겼으나 병이 깊고 기침을 자주 해, 버섯이 서 있는 듯, 그림자가 걸어다니는 듯") 남편은 결국 6개월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박 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며 삼년상을 다 치르고는 남편이 죽은 날 같은 시각에 맞춰 극약을 먹고 세상을 떠납니다.

작품의 두 번째 부분은 이 이야기와 사뭇 대조됩니다. 옛날 어느 형제가 관직에 있었는데, 그들의 하마평을 둘러싸고 여론이 시끄러워집니다. 그것은 형제가 과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고, 과부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형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놓고 너희 사내놈들이 규중의 깊은 사정을 어찌 아느냐고 오히려 아들들을 꾸짖으며 동전 하나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일찍이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 자신이 수십 년간 밤마다 외로움과 싸우며 굴리고 만지던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동전이 네 어미가 죽음을 참을 수 있었던 부적이란다. 십 년 동안 손으로 만졌더니 이렇게 닳고 말았지. 무릇 인간의 혈기는 음양에 그 근본이 있고, 정욕은 그 혈기에 심어진 것이야. 사상(思想)은 홀로된 설움에서 생기고 상심과 슬픔은 사상에서 비롯되며, 과부란 것은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니, 그 상심과 슬픔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지. 게다가 혈기란 것은 때에 따라 왕성해지기도 하니, 과부라고 해서 어찌 정욕이 일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 본능과 슬픔, 외로움을 다 견디고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야말로 '진정한 열녀'라는 것이 박지원의 입장입니다. 또한 작품의 서두에서는 "농가의 어린 부인네나 중인 계급의 청상과부의 경우"들까지 양반가에 강요되는 '열녀 되기'에 나서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합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사대부 가문이 누리는 특권만큼 유교적, 도덕적 의무도 무거웠고, 따라서 농민이나 상민 등 '무지렁이'들까지 그 의무를 질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박지원은 '사대부 지식인'이었지만, 상당히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녀 칭송의 문화는 근대 이행기와 초기에도 없지 않았습니다. 1899년에는 14세 된 어린 청상과부가 납치되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고, 1909년에도 강원도 철원에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젊은 여성이 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1917년)에서도 성폭행을 당해 정조를 잃은 주인공 박영채가 자살을 시도하지요.

그런데 이 당시 여성 자살의 표상에 이전과 구분되는 차이가 있다면, 정조를 유린당했다는 고난이 자살할 동기 전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10년대 후반 신 지식청년인 일본 유학파들이 쓴 근대적 단편소설을 보면 여성 자살은 매우 빈번하게 '성공'하는 사건이지만 그 주인공들이 동시에 주체적으로 처결할 '자신(自身)'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요컨대 과도기의 새로운 문학작품에서 자살은 구래의 표상과 전부 결별하지는 못했으면서도, 다른 차원의 자아의 고난이나 젠더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유력한 장치가 되었다. 이런 자살 서사를 통해 실제로 당시 조선 여성의 '마음'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이중구속의 상황으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110쪽)

또한 1910년대~30년대 여성 자살 사건을 보면,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혹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하여 함께 자살한다는 개념인 정사(情死)나 실연으로부터 오는 실연 자살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는 책의 3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실연 등은 지금이야 상당히 보편적인 경험이지만,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失戀'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감정의 교환이나 이성애의 상황이, 그러한 상황을 지칭하는 언어 표상이 없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젠더 문제와 결부된 자살의 양태를 통해, 우리가 아는 자살/자살생각이 '역사적'이고 '근대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자살학적 문화사 : '분(憤)'이라는 감수성/표상
 

ⓒ프레시안(최형락)

현대 사회에서 자살과 결부된 가장 강력한 담화소는 단연 '우울', '우울증'입니다. 조선시대에서 근대 이행 초기까지의 그것은, '분(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분'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화가 난다'고 할 때의 그 분노가 아니라, 수치·억울함·분노 등의 복합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하고 수치스러워서'라는 심리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자살 동기를 표시하는 말은, 조선 사람들의 충동적이고 즉자적인 감성을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유교 공동체인 조선을 떠받치던 주자학 이념과 깊이 연관된 정동이었습니다. 사단(四端) 중 하나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는 '수'는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리키고, 증오를 말하는 '오'는 타인의 부도덕에 대한 판단과 교정의 자세를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수와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오는 다르지 않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분과 즉통하는 이 수오는 공격적입니다. 의분은 자기 스스로나 타인에 의해 어떤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훼손되었을 때 마땅히 일으켜야 하는 감성으로, 의분 없는 인간은 윤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오와 의분의 논리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처벌과 타인에 대한 의로운 폭력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명예자살과 타인에 대한 의살(義殺)의 경계는, 조선 시대 세계관 안에서는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부연하자면, 1890년대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한 남자에게 모독을 당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아들이 어머니를 모독한 사람을 찾아가서 살인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살해당한 사람의 아버지가 '참 잘 했노라'고 오히려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불의의 상황에 처했을 때 도덕적 행위(폭력)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지 수치스러워하거나 화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응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한편 '분'은 자살을 야기한 심리적 정동의 표현이자, 당시 사람들의 자살에 관한 앎과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즉 자살자들이 정말로 분을 못 이겨 자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옛 문헌들이 독자들이 납득하게끔 '사실'로 쓸 때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라는 관용구를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근현대 한국인의 자살 유형 중 가장 일반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다음의 케이스를 통해 당시 조선인의 자살과 윤리에 대한 생각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1896년 6월 27일자 독립신문 기사는 (…) 인천 항구의 병막지기 김소성이라는 사람이 "생애(생계)가 없는 데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 집 건넌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김소성에게 품을 파는 칠십 된 노모와, 오십 된 병든 처가 있었다며 그의 어려운 형편을 '서사'하고 있다. 이른바 '생계형 자살'로 분류될 만한 사건이다. 신문은 김 씨 부부에게 자녀가 하나도 없었고, 김 씨의 네 형제도 모두 흩어져 살고 있었다는 점을 부기했다. 의지하거나 '지지받을' 가족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 씨의 고통이 인내될 수 없었다는 것으로 자살 '동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어쨌든 주목할 점은, 이런 나름의 복잡한 원인이 있는 '자살'도,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를 써서 표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79쪽)

한편 이 '분'의 코드 또는 분사의 자살 서사는 1910년대에 들어서 차차 사라지게 되고 대신 "세상을 비관하여"라든가 "세상에 살기 싫은 까닭"과 같은 새로운 화소가 해석의 틀로 자리하게 됩니다. 제 책에서는 당시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내놓게 된 통계를 통해 새롭게 제시된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관료적 서사와는 별도로 이광수의 소설 등 문예 장르에서 나타난 '우울한 주체'도 살펴보았는데요. 당시 일제 경찰이 자살 원인을 분류하면서 "염세에 의한 자살" "우울로 인해" 같은 항목을 추가했다는 점, 초기 근대소설의 '자아'가 우울과 허무한 자의식에 휩싸여 있었으며 자살생각에 대한 표백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 등을 통해 자살 표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의분의 이념적·문화적 기반이 해체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 타자와 자신에 대한 도덕적 처벌로서의 자결이나 의살의 주자학적 가치체계와 그 수행성이 무너져 간 것이지요. 이 이후부터 '자살의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⑥ 자살의 근대 : 미디어

1910~30년대 조선의 원인별 자살자 비율을 보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정신 착란'입니다. 거기서부터 생활 곤란, 병의 고통, 가정 또는 친족과의 불화, 지난 잘못을 후회하거나 뉘우침 등등이 있는데요. 일제가 조선의 사회와 형사(刑事)를 지배하면서 처음으로 나오게 된 자살 관련 통계이고, 그들이 임의로 만든 원인 구분입니다. 엉성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이 통계로 인해 '자살률이 얼마다'라든지, '우리 사회가 어떤 고통에 처해 있다'라든지 하는 자살의 담론도 시작되게 됩니다.

1920년대 신문을 보면 자살 사건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현상이 급격히 '사회 문제'로서 포착·인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보도에는 분명 선정주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오늘날 같은 자살에 대한 (자율적) 보도 규제도 전혀 없었고요. 특히 여성의 자살이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됐고,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식으로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기사도 많았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라는 부제를 달게 된 사료이기도 한데요. 1922년 5월 30일 한강 인도교 위에서 조순현이라는 배제고보 2학년생이 자기 교모와 교복을 벗어놓고 투신자살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실종자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고 유서도 없었으니 교복 주인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자살인지 아닌지도 왈가왈부가 있었겠지요.
 

ⓒ동아일보


어쨌든 <동아일보>는 그 주변을 추적해서 이틀에 걸친 상당히 긴 기사를 썼는데요. 처음 뽑은 큰 표제는 "낙제생의 투신자살"이었습니다. 즉 고등보통학생이 낙제를 했다는 사실, 그것을 자살의 원인으로 의미화한 것이지요. 그리고 중간 제목에 "자살이 분명"이라고 나와 있죠. "성명은 조순현", 또 "근인(近因)은 조혼의 죄악인가"라는 중제도 있습니다.

"금년 3학년 시험에 낙제를 하였으므로 항상 비관을 하였을 뿐 아니라…"라는 교사의 말을 인용해 '원인'을 추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주변인인 동급생의 말을 인용해 자살자가 "그전부터 신경쇠약이 있었으므로 정신에 이상이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도 썼습니다.

그가 낙제한 건 사실이고, 조사를 해보니 부모와의 갈등도 있더랍니다. 또 알고 보니까 1919년 3.1 운동에 학생으로 참가해 감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 후 자살자의 부모는 "자식의 행동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기 싫다는 결혼을 억지로 시켰습니다. 조순현이 "최근에 이르러 이혼을 하겠다 하였더니 그 부모는 학비도 아니 보"냈으며, "이와 같은 사정으로 그는 항상 세상을 비관하여왔"다는 건데요. '근인은 조혼의 죄악인가'라는 중제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비관이라는 결말은 같아도 '낙제'에서 출발한 자살 서사와는 인과관계의 연결이 상당히 다릅니다. 3.1 운동, 세대 갈등, 조혼 같은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차원의 문제가 결부되지요. 그리고 다음 날 이어진 후속 보도에서는 그의 친척이 전날 보도에서 말을 바꾸고 "원래 간질 증세를 가"졌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자살자를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실체적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둘러싼 '맥락'은 상당히 풍부합니다. 이 신문 기사는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탐구하고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인용된 자살자의 주변인들은 자살에 대한 인식과 '해석 갈등'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고요. 거꾸로 말해, 죽음을 둘러싼 해석 갈등이 신문의 언어를 통해 전 사회에 '중계'되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자살은 개인 탓 vs. 자살은 사회적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라는 논쟁의 씨앗이 보이기도 하고요.
 

ⓒ프레시안(최형락)


⑦ 자살의 후기 근대

미디어와 관련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자살을 둘러싼 해석과 담론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죠. 아니, 2013년 여름 성재기 씨의 죽음은 해석과 담론뿐만 아니라 죽음 예고와 상황까지도 중계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속에서 죽음은 대중문화의 현상 자체로서, 또는 인터넷 이념 대립이나 이야깃거리의 일부로 소비되었습니다. 물론 애도도 행해지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너무 쉽게 대상화되고 휘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지요.

이 책은 '자살의 근대'에 대해 문화론과 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한 것입니다. 근대 초기 한국에서의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당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처한 새로운 '문제 상황'과 고통 자체가 보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다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자본주의나 새로운 젠더 및 가족의 정황들이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고통들 가운데에서, 또는 고통에 대한 해석의 그늘에서 '자살의 문화'라는 것이 피어납니다.

그렇다면 '자살의 후기 근대'도 있을까요? 저는 '자살의 근대'가 지속되는 한편, 그 속에서 자살의 후기 근대라 부를 만한 상태가, 아직 막연하나마,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징후는 앞서 이야기한 상황, 인간의 삶/죽음이 미디어가 제공하는 환상과 실재의 틈바구니에서 진행되는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미디어 중에서도 돈은 제1의, 궁극의 미디어이고요.

덧붙여 자살의 후기 근대는,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의 정념이 바뀌어 '동정 없는 세상', 무관심과 비공감의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무관심과 비공감은 이 후기 근대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조직하고 몸과 정신을 근저에서 변화시킨 결과이고요.

마지막으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이자 활동가였던 고(故) 윤주형(1977~2013) 씨의 유서 일부분입니다. 제가 읽어 본 자살 유서 중 가장 슬프고 강렬한 것이었고, 굉장히 문학적인 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노동자로서 노동 운동에 참가하면서 겪은 일과,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썼는데요. 제겐 하나의 징후처럼 읽히더라고요.

"무엇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었답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하고 구구절절을 남깁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혹여, 다만, 어울리지 않는 열사의 칭호를 던지지 마세요.
잊혀지겠다는 사람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요.

(중략)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밸 것인데
한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후략)"


7~80년대 소위 '열사'라는 단어가 있었죠.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불러일으키는 심상, 실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들이 모이고, 아파하고 공감하면서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힘이 되곤 했던 일들. 그런데 이제 그런 일들이 이제 중단된 거죠.

물론 여전히 그 죽음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굉장히 일시적이거나 작은 규모이고, 오히려 미디어를 통해 쉽게 대상화됩니다.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의 죽음도 무려 스물 몇 사람이나 되었기 때문에 '겨우' 정치적 쟁점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무반응'이야말로 바로 그 잇단 죽음의 가장 유력한 사회적 원인이며, 결과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죽음 문화의 가장 선명한 형식이고요.

"인간 해방의 이념과 대서사가 실종되어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이 사라지자,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도 소진된다. '노동'에 대한 추방과 배제는 이러한 과정의 정치적·정서적 효과의 하나다. 노동에 대한 배제는 노동자들의 죽음도 배제시킨다. (…)

죽음에 대한 인식 능력과 표상을 배분하고 또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상황에 근거한다. 이제 우리는, 누가, 어떻게, 죽으면 충격을 받고, 또 그것을 인간다움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 실천하는 재료로 삼을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전반적으로 상태가 안 좋은' 것이다. 이런 점이 우리가 처한 '자살의 후기 근대'가 아닌가 싶다." (332~333쪽)

 

ⓒ프레시안(최형락)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교수,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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