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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적 대화와 제재 협상의 ‘병진노선’

탐색적 대화와 제재 협상의 ‘병진노선’

강태호 2014. 12. 17
조회수 14 추천수 0
 

  기존의 대북 정책이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음에도 제네바 합의 미국쪽 협상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차관보의 입장은 분명하다. “외교적 협상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적 준비태세도 유지해야 한다.  제재도 협상 과정의 일부가 돼야 하며, 북한의 도발행위는 협상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북한에 이해시켜야 한다.” 굳이 말한다면 북한의 핵 경제력 재건의 병진 노선에 대응해 “제재와 협상의 병진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강조점은 이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루치는 현실주의적 협상론자다. 그는 “북한 핵무기를 ‘되돌릴 수 없게’ 파괴할 수는 결코 없다”고 말했다. 협상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전제조건 없이 조용한 대화를 재개하려는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건 두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을 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과거에도 그랬듯이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이 남한을 향한 미사일 도발이나 핵실험을 자제하도록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다시 사지 않겠다’는 식의 협상 무용론만 외치는 것은 북한 핵 위협이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갈루치 외에 스티븐 보즈워스 전 대북정책 특별대표, 조엘 위트 전 국무부 북한담당관, 로버트 칼린 전 국무부 정보조사관 등은 한목소리로 임기 2년여를 앞두고 이제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시험해보는 탐색적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로버트 아인혼 전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까지도 가세했다. 그는 2014년 7월 “북한문제를 단순히 ‘관리’하려는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라며 “이제는 북한에 대한 능동적 대화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북한이 6자회담 재개에 앞서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제한할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며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과 ‘탐색적 대화’(exploratory discussions)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1기에서 대북제재 정책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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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리퍼트 신임 주한 미국대사(왼쪽)가 10월24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부인인 로빈 리퍼트

 

 오바마의 대북 정책 라인의 정비 및 개편

 

 그런 점에서  탐색적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시점에 오바마 행정부가 남은 2년을 끌어갈 한반도 정책의 진용을 개편한 것은 새로운 변화의 기대를 낳고 있다. 
 우선 2014년 9월 1년이 넘도록 공석으로 비워두었던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산하 6자회담 특사에 시드니 사일러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북한 담당관이 임명됐다. 6자회담 특사는 대북정책 특별 부대표 자리를 겸하면서 6자회담 재개 시 차석대표를 맡는 자리다. 2013년 6월 이후 1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공석으로 두자 ‘오바마에게 북한은 없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사일러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2012년 4월과 8월 디트라니와 함께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다.이어서 2014년 11월 6일엔 약 3년에 걸쳐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맡았던 글린 데이비스의 후임에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가 지명됐다. 성 김 전 대사는 국무부 한국 과장과 6자회담 특사를 역임한 한반도 전문가이며 2011년부터 지난달까지 한국계 미국인 중 처음으로 주한대사에 재임했다. 그는 일본・한국 담당 국무 부차관보도 겸임하게 된다. 성 김 전 대사의 특별대표 취임으로 오바마 정권의 남은 임기 2년간의 대북정책 팀 태세가 정비됐다. 사일러는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임명된 성김 전 주한 미 대사와 함께 6자회담 재개문제를 주도적으로 다루게 됐다. 사일러 담당관의 후임에도 오랫동안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다뤄온 앨리슨 후커가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성 김 대사의 후임으로 10월30일 부임한 마크 리퍼트 신임 주한 미국 대사가 부임 일성으로 내놓은 것 또한 북한 핵 문제였다. 올해 41살로 역대 주한 미국 대사 중 최연소로 부임한 리퍼트 대사는 2005년부터 외교안보 담당 보좌관으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오바마 대통령이 그를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다.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척 헤이글 국방장관 비서실장을 역임한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줄곧 외교안보 정책 입안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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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

 

 탐색적 예비적 대화의 가능성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의 이런 대북정책 진용의 개편과 함께 이뤄진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DNI)국장의 방북과 억류 미국인 3명의 석방은 북한과 미국이 탐색적 예비적 대화의 문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2014년 11월 8일 북한을 방문해 억류 미국인들을 귀환시킨 클래퍼 국장은 11월 16일 미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특사로 선정된 건 북한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일원인 현직 정부 당국자를 원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북한은 자신을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는 억류 미국인 석방으로 미-북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는 북한의 이번 조처가 미-북 양국 간 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이 케네스 배를 비롯한 미국인 세명을 장기 억류하면서 전직 대통령의 방북과 같은 '정치적 몸값'까지 요구하자 미국은 유엔 무대에서 ‘북한인권’ 이슈를 끄집어 내 맞대응했다.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2014년 9월 26일 뉴욕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인권 문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 주민의 인권과 민생 문제가 서로 연관돼 있는 한 묶음(twin set)이라고 강조했다. 미 정부는 북한의 미국인 억류에 맞서 북한 인권을 정면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핵과 똑같은 비중을 두는 문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클래퍼 방북은 인권 문제를 둘러싼 이런 대결구도를 완화하고 대화를 만들어가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미 전문가들의 이에 대한 전망은 엇갈리고 있다. 2014년 11월 11일 미국 워싱턴 DC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프랭크 자누지 맨스필드재단 대표는 북한이 억류 미국인을 석방한 배경은 국제사회의 인권 압박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 외에도 6자회담 재개 등 정치적 진전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미국이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을 완화할 가능성이 있고 북한이 이에 호응한다면 내년 초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미국이 북한이 호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6자회담 재개 전제조건을 완화할 수 있다.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영변의 핵 활동을 멈추고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를 중단하면 미국은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고 북한도 이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조엘 위트 국무부 전 북한담당관은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다. 간담회에 참석한 위트는 미국이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을 완화하거나 북한이 완화된 전제조건을 순순히 받아드릴 것이라는 전망은 “너무 낙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탐색적 대화가 시작된다해도 가야할 길은 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접근법-강한 외교와 강한 제재

 

 이제 북한 핵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된다는 게 조엘 위트의 생각이다. 갈루치 전 대표의 선임보좌관으로도 일한바 있는 조엘 위트는 앞서 미국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 4년간 이명박 대통령과 공조해서 펴온 정책을 ‘약한 제재’와 ‘약한 외교’ 접근법이라고 특징짓고, 이것은 작동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왔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북한이 나쁜 행동을 할 때 제재로 대응함으로써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북한의 능력을 키웠을 뿐이고 그들의 행동은 점점 더 나빠졌다”고 그는 지적했다. 
  위트는 이제 ‘강한 제재와 강한 외교를 결합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한 제재만으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증명됐다며 북한과의 직접 대화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식량이나 원유 지원으로 문제를 푸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건 통하지 않는다. 북한은 안보 문제 해결을 기대하고 있다. 북한과 직접 대면해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과 미국이 원하는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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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 모왓의 <울지않는 늑대>

 


  늑대와 양치기 소년-북핵 문제를 보는 시각의 전환

 

  그러기 위해선 북핵 문제를 보는 시각에서도 전환이 필요하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이솝우화에서 양들의 희생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가 왔다는 양치기 소년의 마지막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피해는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몫이거나 양들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양치기 소년만을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북한은 한때 핵이 있다고 말하는 양치기 소년으로 간주됐다. 한국과 미국 등 마을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솝우화처럼 양들은 생명의 위협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양치기 소년의 마지막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북핵 위기의 본질을 말해준다.
 또 다른 교훈은 이 우화가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팔리 모왓은 이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양과 늑대의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한다. 현존하는 캐나다 최고의 작가이자 자연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가 쓴 <울지 않는 늑대>를 보면 야생의 늑대는 이솝우화처럼 기존의 괴기와 공포 가득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는 이 야생 늑대를 오랜 시간 ‘늑대의 눈’으로 관찰했다. 거기서 늑대는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자신만의 생존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의 잔혹한 사냥으로 인해 제대로 항의 한번 못하고 절멸해가고 있다. 이솝우화가 상징화 한 그래서 상식이 된 인간의 곡물과 가축을 갈취하는 야수로서의 늑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늑대가 포악하며 무자비한 킬러라는 것은 가공의 이미지다. 모왓은 그것이 우리가 던진 우리 스스로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늑대 이미지 뒤집어 보기


  이솝우화가 고착화시킨 늑대의 이미지를 뒤집어 제대로 보는 것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북핵을 이솝 우화의 늑대로 보지 않고 현실의 야생의 늑대로 보는 것이다.  북핵 문제에서는 양치기 소년의 우화와 늑대의 이미지 둘다 뒤집어 보는게 필요하다. 현실은 거짓말 하는 양치기 소년과 착한 마을 사람들, 착한 양과 사악한 늑대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 대사와 제이슨 샤플린 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정책고문은 지난 2005년 4월 부시 1기 행정부가 취했던 정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북한은 2005년 2월 핵 보유국임을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이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을 세 ‘악의 축’ 국가 중 하나로 규정한다면? (다른 두 나라는 이라크와 이란이다) △당신에 대해 선제 공격을 허용하는 예방전쟁 전략을 추진한다면? △이같은 전략을 사용하여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이라크를 침략하고 그 지도자를 몰아낸다면? △(유럽 우방국들의 노력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핵 프로그램이 당신 보다 훨씬 못한 이란 -다른 ‘악의 축’ 국가- 을 포용하길 원하는 유럽 우방국들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답은 이렇다. “김정일은 무자비하고 비윤리적일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그는 여느 지도자가 자신과 국가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 할만한 그런 행동을 해왔다”.
 

 

  정권교체 대 핵 억지력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한 아시아 외교관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북핵 문제에서 쟁점은 미국이 그것을 주요 안보위협 -실제 그렇지만- 으로 부풀려 놓고 막상 그에 대해 어떻게 하겠다는 명확한 계획을 내놓지 않는 데 있다.”  또 다른 외교관은 “강제적인 정권교체가 목표가 아니라면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 즉 모종의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핵 위기는 악의 축에 이어 폭정의 전초기지를 내세운 부시 2기의 정권 교체 전략 등으로 대변돼 온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과 북한의 생존전략으로서의 핵무기 보유, 핵억지력 확보가 충돌하고 대립해 온데서 악화한 것이다. 선한 양과 사악한 늑대의 이분법은 이솝 우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아인혼 차관보가 오바마를 비판했듯이 2005년 당시 리처드 하스 외교협회 회장은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이란의 도전을 정권 교체를 통해 해결하기를 선호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부시의 비판자가 아니다. 그 역시 부시 1기 행정부에서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을 입안하는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20년의 핵협상을 최종적으로 종결짓는 마지막 협상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 성과를 모아 <코리안 엔드게임>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엔드게임'이란 서양 장기 체스에서 말이 거의 죽어 단 몇 수 만에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를 말한다. 
  2007년 북한 핵은 엔드게임 단계에 와 있었다. 큰 흐름에서 되돌아보면 남북은 2000년 두 정상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과 함께 9·19 공동성명으로 민족적·국제적 차원에서 한반도의 탈냉전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냈다. 남북, 그리고 주변 4강국이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바탕으로 2007년 2.13과 10·3 합의로 1단계의 폐쇄를 거쳐 2단계 북핵 불능화에 합의하고, 동시에 남북이 2차 정상회담으로 10·4 남북 정상선언을 이끌어낸 것은 한반도의 탈냉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관문에 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0·4 정상선언에서 합의한 종전 선언을 위한 4자(또는 3자) 정상회담은 비핵화 2단계인 불능화를 핵폐기 단계로 견인해내기 위한 정치적 합의이자 결단이었다.  2단계의 북핵 불능화는  3단계 핵폐기와 1단계 핵동결(폐쇄) 사이에서 그 경계가 모호한 시한부적인 불능화였다.그러기에 불완전했다. 폐기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면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3단계의 핵 폐기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3단계 폐기로의 이행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북 적대정책을 폐기하겠다는 미국의 결단 또는 보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지도자는 미-중이 참여하는 종전 선언이 이를 정치적으로 보장하는 담보가 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이다.

 

 반전을 통한 엔드게임은 가능한가

 

 1989년 미-소가 몰타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듯이, 종전 선언의 본질은 한반도에서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북한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미국이 이제 더 이상 적이 아니라는 걸 선언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비핵화 없이 한반도 평화가 불가능하듯이 북-미, 남-북 간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는 한반도 평화 없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비핵화는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적대관계 해소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다. 종전 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길을 여는 관문이자, 북한이 핵폐기라는 입구에 들어서도록 정치적 결단을 이끌어내는 견인차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부시 대통령이 불능화의 확실한 진전을 요구하며 핵 폐기 후 관계 정상화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종전 선언은 아예 실종되고 말았다. 
  2008년 이후 진행된 불능화 이행 과정은 핵폐기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한 위태로운 과정이었다. 결국 핵 프로그램 및 시설에 대한 신고를 둘러싼 논란과 그에 대한 검증 문제는 6자회담을 무력화시켰고, 2단계 북핵 불능화는 그 자체가 '불능화'되고 말았다.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9년 3월, 서울에 온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특사를 임명한 것은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북핵 협상의 리셋 버튼을 누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오바마 1기 행정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6자회담은 재개되지 못했다. 보즈워스 특사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2009년 12월 단 한 번뿐이었다. 2009년 4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뒤이은 2차 핵실험, 그리고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도발 등 대결과 갈등 속에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1차 핵위기 발발 20년을 맞은 2013년 봄 북한은 미국과의 전면 대결전을 선언하며 전쟁인지 평화인지의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지난 20년간 북-미가 합의한 것들을 이행하기 위한 결단을 요구한 것이었다. 북-미(더 정확하게는 남-북, 6자회담 참가국)는 이미 2007년 핵폐기의 3단계로 갈 수 있는 엔드게임 단계에 있었다. 북한의 이런 요구는 전쟁을 내건 협상이기에 위험한 도박일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북한 역시 20년간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는 협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협상은 없으며 이번이 지난 20년의 핵협상을 최종적으로 종결짓는 마지막 협상이라는 관점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탐색적 대화로서의 6자회담은 필요하며 지금 오바마 행정부는 그 마지막 기회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핵궤적 20년 심층분석과 전망

  <시리즈를 시작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킨 북미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것이 지난 94년 10월이었으니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려던 모든 대북 핵정책은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6자회담은 지난 6년 동안 열리지 못하고 있다. 6자회담은 죽었다고 할 수도,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는 빈사상태에 빠져있다. 
  무엇보다도 2015년을 코 앞에 두고 한반도는 다시 기로에 서 있다. 두가지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북한의 핵실험 등 미증유의 전면적 대결 가능성이다. 유엔 총회에서 인권문제를 담당하는 제3위원회가 지난 11월18일(현지시각) 북한 인권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틀 뒤인 11월 20일 성명을 통해 4차 핵실험을 경고하며 ‘전쟁억제력은 무제한 강화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유엔 총회는 12월 18일이나 19일께 이 북한 인권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때 안보리도 북한 인권 문제를 공식 의제로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북은 이에 맞서 11월 23일 국방위원회 성명에서 “미증유의 초강경 대응전에 진입할 것”이라고 밝혔듯이 미국 한국 등을 겨냥한 군사적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반대의 다른 흐름 또한 존재한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탐색적 대화의 가능성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지난 12월 10일 한미가 그동안 추진해온 북한의 변화를 위한 압박차원의 공조에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한미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촉구한 데 이어, 12월12일 성 김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베이징에서 중국 정부 고위당국자들과 이틀간에 걸쳐 협의를 마친 뒤 북핵관련 6자회담 재개 조건과 관련해 “북한과 직접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도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3주기(12월 17일)를 맞아 12월12일 발표된 외무성 명의의 장문의 보고서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앞으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한과 미국은 내년 1월 싱가포르에서 스티븐 보즈워스 전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비롯한 두나라의 전현직 당국자들이 참석하는 1.5 트랙(반관반민) 회의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반도 정세는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섣불리 예측할 수는 없고 어느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큰 흐름은 유엔총회 결의가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권 문제보다는 북핵 문제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세번에 걸쳐 지난 20년 협상과 대결을 거듭해 온 북핵 위기의 궤적을 살펴보고 탐색적 대화를 통한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1. 지난 20년 대북 핵 정책은 실패
 2. 협상 무용론과 군비증강의 안보 딜레마를 넘어
 3. 탐색적 대화와 제재 협상의 ‘병진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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