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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보 어제 오늘과 내일

자주민보 어제 오늘과 내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1/05 [01:0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자주민보를 창간한 다음달 즉, 2호 표지, 창간하자마자 6.15남북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진행되어 자주민보 기자들은 긴급하게 이를 특집으로 보도하느라 숱한 밤을 세워야 했다. 생에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 자주민보

 

 

지하사무실 습기만큼이나 열기 가득했던 월간 자주민보 창간 시절

 

96년 연대항쟁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도 당시 야당 최고지도자로서 연대인문대를 방문하면서 한총련을 비판하고 진보정치인들이라는 사람들도 청년학생들 비판에만 열을 올리고 ‘한겨레신문’은 물론 ‘말’지와 같은 진보적 언론에서마저 한총련 학생들의 입장은 거의 보도해주지 않고 친북좌익세력으로 매도하는 극우 흐름에 동조해가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전국대학생기자연합회 출신 젊은 기자들이 모여 ‘월간 자주민보’의 기치를 들게 되었습니다.


이창기, 장동욱, 백운종, 박준영, 황혁, 나풍자, 이소영, 이철웅, 손지은 등의 젊은 양심가들, 애국의 열혈청춘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99년 8.15 창간준비1호 시작으로 몇 차례 창간준비호를 발간한 후 2000년 5월 창간호를 발간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청년학생들의 입장을 많이 취재 보도하였고 주된 애독자층도 청년학생들이었습니다.

 

10여명의 기자와 편집위원들 모두 거의 교통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면서도 지하 사무실에서 마감기사와 거듭하는 퇴고, 편집디자인과 반복 수정,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최종편집본을 인쇄소로 넘기느라 얼마나 많은 밤을 세웠는지 모릅니다.


여름 장마철엔 지하 사무실 장판위로 스며올라오는 물을 닦아내야 했고 곰팡이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했습니다. 그때 하도 습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이후 사무실을 얻을 때 비용이 들더라도 지하나 반지하는 적극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창간하자마자 6.15남북공동선언이 나오게 되어 얼마나 신명이 났는지 모릅니다. 청년학생 중심 편집에서 민족문제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무게중심이 이동했고 발빠른 보도를 위해 2001년부터는 인터넷 자주민보까지 창간하여 월간지와 병행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황선 방북기 ‘어머니 여기도 조국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쏴라’, ‘통일 참 쉽다.’ 등 10여권의 단행본도 발간하여 많은 청년학생과 독자들에게 북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어떤 책들은 수만권씩 팔리기도 하는 등 그 반향도 뜨거웠습니다.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 자주민보 1차 구속 사건 때 대책위에서 대응방향을 논의하는 모습     © 통일뉴스 펌

 


1차 구속과 ‘월간 우리’

 

2001년 10월 21일 국정원은 자주민보 발행인과 편집장, 전 편집장 3인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과 체포를 단행했습니다.
결국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지만 3개월만에 모두 보석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국정원에서는 북과 연결된 무슨 대단한 배후 조직의 지휘를 받는 언론사로 추정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사무실과 기자들의 주택과 차 안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되자 결국 법원에서 보석으로 내보내주었고 재판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하였습니다.


2002년 9월 자주민보 1차 구속 사건을 계기로 좀 더 대중적인 언론사로 거듭나기 위해 판형을 ‘말’지 크기로 확대하고 이름도 ‘월간 우리’로 바꾸어 재창간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책 크기로 자주민보를 제작하다보니 사진 등을 큼직큼직 시원시원하게 편집할 수 없었던 아쉬움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시사종합지로 거듭나기 위해 더 많은 제작비용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과감히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생계 등의 여러 이유로 그만 둔 기자들도 있었고 이미경, 김영준, 이명승, 이종출, 박현선, 신형석, 김은숙, 심현실, 정유진, 박미설 등의 기자, 편집인 등이 새로 들어와서 애국의 필봉을 틀어쥐었습니다.


황선 방북기 세번째 책인 ‘서울동무 평양친구’, 시집 ‘일편단심’ ‘칡꽃이 필 때 만난 사람’ 등 단행본도 계속 발간하였습니다.
조직체계도 정비하여 발행인이 전체 자주민보의 대표가 되고 박준영 편집국장, 이명승 재정국장이 각 국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자주민보로 전환

 

원래 구독료만으로는 기자들 교통비도 지급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인쇄비는 따로 재정사업단을 꾸려 금강산관광 대학생모집사업, 대학생기념품사업 등을 통해 급한불을 꺼가는 식으로 유지하다보니 월간지 제작에 따른 인쇄관련 빚이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늘어감에 따라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국 2005년 월간 자주민보는 접고 보조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인터넷 자주민보로 중심을 이동하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마침 인터넷신문 등록법도 만들어져서 인터넷 신문도 언론사로 등록하고 활동할 수 있게 되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국의 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하는 언론사”라는 창간목적으로 등록신청하여 “서울, 아00132”이라는 등록번호를 부여받아 인터넷을 통한 언론활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해오게 된 것입니다.

 

인터넷 자주민보로 전환하면서 월간지 편집디자인을 담당했던 성원들 등은 다른 일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인터넷을 강화하기 위해 전문회사에 시스템관리를 맡기게 되면서 시스템을 담당했던 엔지니어도 민주노총 등으로 직장을 옮겼으며 그간 마감 기사 쓰느라 진이 빠지곤 했던 여러 기자들도 기자보다는 단체활동을 해보고 싶다며 정당이나 노조 상근 간사 등으로 많이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장기간 무보수에 따른 어려움도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이 모두 기자들을 필력을 높여주고 재정도 확충해서 기자들에게 최소한의 활동비라도 지급했어야 했던 이창기 대표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탓이었습니다. 
돌이켜 가장 후회스런 시기가 바로 이 시점입니다. 그때 끝까지 함께 하자고 기자들을 왜 붙잡지 못했을까. 왜 그 시기만 넘기면 다들 훌륭한 기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뼈아픈 후회가 듭니다.


당시엔 자신도 기사 쓰는 일이 너무 힘든 일이어서 그 힘든 일을 계속 하자고 붙잡을 용기가 없었다고 말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심한 변명임은 아프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 동지는 죽어도 살아도 영원한 동지라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 즉, 동지애만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얼마든지 붙잡을 수 있는 동지들이었습니다. 이창기 대표는 결정적으로 그것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이창기, 박준영 기자 둘이서 인터넷 자주민보를 운영해오다가 박준영 기자도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아기르는 과정에 여러 차례 육아휴직을 하는 등 실질적으로 2009년까지 이창기 대표는 홀로 인터넷 자주민보를 운영해오면서도 개인적으로 가게를 운영하여 그간 쌓인 인쇄소 빚은 다 갚았습니다.

 

이때 자주민보에서 가장 집중했던 기사가 정세분석기사였습니다. 2006년 단행된 북의 1차 핵시험 이후 한반도 정세는 긴박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는데 자주민보는 사건이 터진 당일, 늦어도 다음날 오전까지 관련 심층분석기사를 올리는 것을 목표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황우석사태, 광우병사태 때는 이틀 동안 한 숨도 못자기도 하면서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창기 대표는 인쇄소 빚을 갚기 위해 돈도 벌면서 자주민보 글을 전담해서 쓰느라 수면 부족 등간에 무리를 주었던지 그때 활동성 간염이 발병하여 지금도 계속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을 키우지 못한 덜 떨어진 대표가 바보같이 제 몸 관리마저 실패한 것입니다.

 

당시에 글을 쓰는 기자가 이렇듯 혼자였지만 대신 여러 외부 기고가와 필진을 확보하여 월간 자주민보보다 더욱 다채로운 기사를 올릴 수 있었으며 특히, 매년 진행했던 만주항일유적지 취재도 꾸준히 진행하여 자주민보만의 색깔과 특색을 구축해왔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자주민보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갔고 2010년 한성 기자를 필두로, 정설교 객원 만평가, 권말선 시인, 이정섭 기자, 이용섭 전 후원회장 등이 이후 자주민보에 결합하여 더욱 탄력을 받게 되어 점차 조회수와 영향력도 커져갔습니다.


특히 2012년 한호석 소장이 자주민보에 정기적인 연재글을 올리게 되는 등 다른 언론사에서 접하기 힘든 한반도문제 관련 심층기사들이 많이 늘어 국민들뿐만 아니라 증권전문가, 다른 언론사 정세전문 기자, 정치경제연구원 등 여러 전문가들도 한반도 정세를 진단하고 예측하는데 자주민보를 많이 참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정섭 기자(현 자주민보 대표)가 그 어떤 언론사보다도 북에 대한 속보를 발빠르게 보도하면서 한반도 문제 관련 속보경쟁에서 자주민보가 단연 독보적인 언론사로 부각되게 되었습니다.

 


2차 구속과 자주민보 폐간 소송

 

자주민보의 하루 평균 페이지뷰가 평균 2만건, 접속 아이피가 3000건을 안정적으로 넘어서게 되었던 2012년 2월 공안기관에서 전격적으로 이창기 대표를 구속하고 이후 한성 기자, 정설교 객원만평가를 구속하고, 권말선 시인, 이정섭 현 대표, 이용섭 전 후원회장 등도 기소 불구속 재판에 넘기는 등 모든 자주민보 성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진행된 전격적인 탄압으로 자주민보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내몰렸지만 수많은 애독자들의 지지 격려와 이정섭 현 대표의 눈부신 활략으로 오히려 자주민보의 접속자 수는 배로 폭증하였으며 이창기, 한성 기자 등이 구속된 상황에서도 중단 없이 옥중에서 계속 원고를 써내어 감옥 안에서까지 다시 한 번 압수수색을 당하고 그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자주민보에 올리는 일을 진행한 권말선 시인 집마저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사상 초유의 공안탄압이 자행되었습니다.

공안탄압이 자행되는 동안, 구속된 정설교 만평가도 옥중에서 계속 만평을 그려 보내오고 있고  정찬희 객원기자, 이성원 후원회장이 새로 결합하여 자주민보의 가시 수가 어느때보다 다채롭고 많아졌으며 접속자 수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새누리당 심재철 최고위원이 새누리당 회의와 국회 등에서 마이크 앞에 설 때마다 목에 핏대를 세워 자주민보 폐간을 선동하고 블루투데이 인터넷 뉴스 등 보수 언론에서 대대대적 이를 보도하자, 블루유니온이라는 극우보수단체에서 이에 호응하여 자주민보를 폐간시키라는 시위를 연일 박원순 시장이 근무하고 있는 서울 시청 앞에서 벌이며 압박을 가하자 결국 서울시에서 ‘그러면 법원의 판결을 받아보자’며 자주민보 등록취소 소송을 걸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1심, 2심에서 자주민보 등록취소 결정이 났고 현재 자주민보에서는 이에 불복하여 즉각 상고장을 대법원에 제출한 상황입니다.

자주민보측 변호인단에서는 서류만으로 재판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는 대법원에서 이 1, 2심 판결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해서 자주민보 성원들은 현재 즉각 제2의 자주민보 창간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마을 아이들이 놀기 좋게 구불구불, 천방지축 송아지 망아지 고삐 기둥으로 튼실하게, 소금땀죽 농부들 선선달콤한 낮잠 위해 너실너실, 마을로 불어닥치는 바람에 강잉하게 맞서는 아! 언제봐도 더없이 정겨우면서도 강인한 마을숲 소나무, 자주민보도 늘 애독자들 곁에서 마을숲 소나무처럼 함께 하겠습니다.     © 자주민보

 

제2 자주민보 창간을 위하여

 

변호인단과 상의한 결과 자주민보 이름을 이어서 쓰는 것과 현재 기사를 다 옮겨가는 것은 또 다른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새로운 자주민보2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자주민보는 늘 화를 복으로 만들어내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이번 탄압으로 이미 자주민보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으며 후원인도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이번 제2의 자주민보 창간으로 더 참신하고 대중적이며 다채로운 자주민보2를 만들어낸다면 이번 탄압은 자주언론 건설에 있어 정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주민보 애독자 여러분들의 지지와 동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좋은 제안, 좋은 자료, 좋은 글도 많이 보내주시고 무엇보다 우리 자주민보 필진들이 언론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후원을 더욱 확대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이대로 가면 멀지 않아 자주민보도 광고수익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광고주들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광고영업에 치중하기보다는 십시일반 작은 돈이지만 여러 후원인들이 모아주신 후원금을 기본 운영자금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현재 자주민보를 운영하는데 기자 취재지원비와 객원필진 원고료, 서버 임대료 등으로 나가는 비용이 매달 3백만원쯤 됩니다. 여기에다가 기자 중 한 사람이라도 재판에 회부되면 변호사비 등으로 목돈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해외 취재나 지방 순회취재를 나갈 경우엔 훨씬 더 많은 금액이 들어갑니다.


현재 정기 후원금은 2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이창기 전 대표가 따로 직장생활을 해서 받은 월급으로 메꾸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까지 후원금으로 메꿔질 수 있다면 이창기 기자도 좀더 자주민보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더 많은 객원필진과 기자를 충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 독자 여러분께 이런 부탁드리는 것이 마음 아프긴 하지만 우리 모두 사생결단으로 독한 마음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이 살풍경한 박근혜 정부 공안정국을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자주민보 애독자 여러분들게 이렇게 간곡히 호소드리는 것입니다.

 

새해엔 자주민보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홀로 바쁘게 돌아치다보니 10주년 기념식도 치르지 못해서 올 15주년은 애독자들도 모시고 성대하게 치러보려했는데 아쉽게 되었지만 새로운 자주민보2 창간식을 더 멋지게 치르리라 다짐하니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솟습니다.

정말 만 15년의 시간은 자주민보 성원들에게는 더없이 보람넘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나날이 늘고 뜨거워져 왔던 애독자 여러분들의 사랑과 함께 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주민보 애독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어 늘 행복이 가득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4년 12월 31일 내곡동에서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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