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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형 정경유착’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박정희, 신격호,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만주인맥
 
육근성 | 2015-09-22 14:07:2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경남 울주군 출신 청년 신격호. 그는 비누, 포마드, 껌을 만들어 번 돈으로 1948년 롯데를 설립했다. 이후 껌 사업이 대박이 나자, 1959년 롯데상사를 설립해 초콜릿 사업에도 뛰어든다.


박정희가 도와준 호텔사업으로 국내 기반 마련

한일 국교정상화로 국내 진출의 기회를 잡은 신격호는 롯제제과를 설립하고 사업영역을 확장해 갔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대기업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1970년 11월 박정희는 신격호를 청와대로 불러 호텔을 건설해 보라고 주문했다. 박정희의 한마디에 국무총리와 서울시장이 달라붙어 ‘신격호의 호텔사업’을 도왔다.

박정희 정부는 반도호텔 민영화 계획을 발표했고, 신격호는 이 호텔을 42억 원에 사들였다. 이어 반도호텔 옆 국립중앙도서관, 동국제강, 아서원 부지 등 7천여 평에 달하는 ‘금싸라기 땅’을 손에 넣었다. 다양한 특혜가 주어졌다. 취득세, 재산세 등 세금도 면제 받았다. 외자도입특례법 덕분이었다.

박정희가 신격호를 배려한 이유가 뭘까? 혹자는 롯데의 자본을 국내에 유입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박정희와 신격호 두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본 우익의 거물과 만주 관동군 인맥이 이들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매개체였다.


박정희, 신격호,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만주인맥

박정희와 신격호,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공통분모’는 아베의 외조부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총리였다. 그는 일본 우익의 거물이자 만주인맥의 좌장이었다. 만주국 산업부차관을 지냈던 기시의 눈에 박정희는 어떻게 비쳤을까? ‘만주인맥’으로 분류되는 새까만 후배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박정희가 어떻게 비쳐졌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1962년,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가 사절단을 이끌고 한국 방문길에 오른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아들(박정희를 가리킴)의 화려한 무대를 볼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아들 같은 후배’쯤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오노 반보쿠는 기시 노부스케의 측근이었다.

신격호는 기시 노부스케와 어떻게 가까워졌을까? 신격호의 일본인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결혼 전 다케모리 하쓰코)의 외심촌이 외무대신을 지낸 시게미쓰 마모루라는 설이 파다하다. 사실이라면 일본인 부인과 처 외삼촌이 교량 역할을 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왜냐면 기시 노부스케가 외무대신으로 임명됐을 때, 전임 대신이 바로 시게미쓰 마모루였기 때문이다. 당시 신격호의 나이는 30대 중반. 그들로부터 사업적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신격호의 일본식 이름도 처 외삼촌과 같은 ‘시게미쓰’다. 우연의 일치일까?

“만주국은 나의 작품”이라고 말했던 기시 노부스케. 그가 만주국 관리였을 때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여기에서 착안됐다는 주장도 있다. 5.16쿠데타 직후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박정희가 만난 인물들은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기시의 인맥’에 속한 이들이었다. 박정희-신격호 관계는 일본기업이었던 롯데가 국내에 진출해 대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전두환이 준 잠실 개발권으로 재벌 반열에

전두환 정권도 일제의 만주인맥과 가까웠다. 통로 역할을 한 이는 관동군 참모 출신 세지마 류조였다. 박정희의 자문역할을 했던 세지마는 정권이 바뀌자 전두환-노태우와 손을 잡아 신군부의 핵심들과 친분을 쌓았다. 한국 내 이권개입뿐 아니라, 국내정치에 대해 조언까지 했다. 올림픽과 엑스포 유치, 3당 합당도 그의 아이디어였다는 설이 있다. 세지마 역시 ‘기시 노부스케 인맥’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롯데는 전두환 정권과 친하게 지냈다. 정치자금과 찬조금도 사세에 비해 많이 냈다. 신군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대비해 잠실 개발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롯데가 뛰어들었다.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한양을 제친 것이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여러 재벌·대기업이 (사업 참여를) 희망했겠지만 결국 개발권을 따낸 것은 롯데그룹이었다… 모든 관련기관이 발 벗고 지원하고, 모든 문서가 초고속으로 처리됐다.”

이렇게 해서 들어 선 게 롯데월드다. 한 달 만에 영향평가, 측량, 지하수 조사 등을 마쳤고, 시청·구청·소방서·관세청·건설부·재무부 등 관계기관이 총출동해 지원했다. ‘롯데 신격호’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배려는 이토록 지극했다.


DJ-노무현 “제2롯데월드 안 돼”

그런데 잘 나가던 신격호가 악재를 만난다. 어느덧 고희를 넘긴 신격호는 자신의 숙원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롯데월드 옆 8만7182.80㎡ 부지에 112층짜리 제2롯데월드를 짓는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이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군 시설인 성남공항과 가까워 비행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2007년 7월 노무현 정부는 최종적으로 ‘불허’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MB가 뒤집기를 시도했다.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제2롯데월드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제2롯데월드 신축에 반대한 김은기 공군참모총장을 경질하고, 사업 허가를 내주기 위해 성남공항 활주로를 3도 틀었다. 민간기업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군 공항 활주로에 손을 대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2롯데월드 건설 허가는 2009년 초에 나왔다. 신격호의 숙원사업이 해결된 것이다. 왜 MB는 공군참모총장까지 경질하면서 롯데의 손을 들어 줬을까? 당시 롯데호텔 사장이었던 장경작이라는 인물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MB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롯데호텔 31층 로열스위트를 접견실 겸 집무실로 활용했다. 이 방은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캉드쉬 IMF총재, 나카소네 전 일본총리와 사우디 왕세자 등이 묵었던 방이다. MB는 당선 된 뒤에도 이방을 즐겨 애용했다. 여기에서 조각 작업과 정부개편안 마무리, 2008년 총선 공천작업까지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는 한국에 들어올 때면 이 호텔 37층에 묵었다.


MB 절친동기 발탁, 제2롯데월드 허가권 손에 넣어

그런데 이 호텔의 사장인 장경작은 MB와 고대 경영학과 61학번 동기다. 여기에 MB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 단행된 롯데그룹 인사를 투영해보면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신격호는 호텔사업부와 면세사업부, 월드사업부를 총괄하는 총괄사장에 장경작을 임명했다. 없었던 ‘총괄사장’ 자리까지 만들어 발탁한 이유가 뭘까? 쉽게 짐작이 간다.

MB의 대통령 취임과 장영작의 총괄사장 취임은 거의 동시에 이뤄진다.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MB의 입에서 추상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제2롯데월드 신축 불허방침 재검토하라’고 못청을 높였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MB 정권 내내 롯데그룹는 승승장구했다. 10대기업 매출평균 증가율(13%)보다 훨씬 높은 88.3%의 성장을 보이며 42조(2008년)이던 매출이 81조(2012년)으로 껑충 뛰었다. MB정권과 롯데의 밀월관계는 서울뿐 아니라 부산 등 지방에서도 많은 특혜논란을 빚고 있다. 이 부분은 다음 글(9월24일 발행 예정)을 통해 자세히 기술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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