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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정치인의 '샌더스 팔이'를 보면서
<경제를 점령하라>(한상연 옮김, 돌베개 펴냄)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자 리처드 울프는 매달 뉴욕 저드슨 메모리얼 교회에서 '세계 자본주의'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다. 2월 특강에서 그는 지난 2월 1일 버니 샌더스가 보여준 선전을 '놀라운 성과'라고 높이 평가했다.
울프는 이를 두고 미국 사회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곰처럼 65년에 걸친 금기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당의 존재가 자연스러운 유럽과 달리 반공 콤플렉스에 시달려 온 미국에서 '사회주의자' 샌더스가 아이오와 코커스(당원 대회)에서 절반의 지지를 얻은 사건은 믿기 어려운 쾌거라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가 매력을 발산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겼기 때문이고, 2011년의 월가 점령 시위는 그 전조였다고 그는 보았다.
울프는 특히 샌더스가 17~29세의 젊은 층으로부터 84%(클린턴은 14%)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은 사실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자신이 민주당 지도부라면 이런 현상을 보고 덜덜 떨었을 거라고도 했다. 미국의 미래 세대가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라는 말에 겁먹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울프의 강의를 듣다가 국내 정치인들의 반응을 보면 누구 말마따나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 주먹을 쥔 샌더스의 모습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안철수나 경제 민주화 코드와 70대의 고령에서 샌더스와 김종인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더불어민주당이나 '사회주의'라는 말은 하려고도 않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비판하는 '진보' 지식인도 그 말만은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란 곰은 동면에서 벗어나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미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 놈 촘스키는 샌더스가 말은 사회주의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뉴딜주의자(Newdealer)', 즉 대공황기 루스벨트의 수정 자본주의 노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처럼 샌더스가 사회주의자를 자칭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자처하는 북한이 엄존하는 분단 현실에서 이 땅의 정치인이나 젊은이들이 '사회주의'를 기피하는 현상을 경직되게 평가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미국 못지않게 자본주의가 절망을 안겨주고 있는 한국에서 사회주의자가 됐든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됐든 샌더스 같은 정치인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나아가 '깜도 안 되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의 샌더스를 참칭한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때가 때인지라 아이오와 코커스를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의 온갖 문제점을 비판하다가도 선거철에 들려오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면 넋을 잃고 구경에 몰두하곤 한다. 특히 예비 선거 가운데서도 코커스, 그 가운데서도 민주당의 코커스를 보는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코커스는 일종의 당원 대회이다. 즉, 민주당 코커스는 민주당원, 공화당 코커스는 공화당원만 참여해 자기 당의 대선 후보를 뽑는다. 따라서 코커스를 주관하는 것도 주 정부가 아니라 그 주의 정당위원회이다. 반면 프라이머리는 주 정부가 주관하고 당원이 아닌 일반인도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등록된 당원만 참가하는 폐쇄형 프라이머리, 당적에 상관없이 주민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개방형 프라이머리 등으로 나뉜다. 얼마 전 국내 정가의 화두가 되었던 오픈프라이머리가 바로 이 '개방형 프라이머리'이다.
코커스의 진행 방식은 당에 따라 다르다. 공화당은 당원들이 기표 용지를 받아서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따른다. 반면 민주당의 코커스는 매우 복잡하고 흥미롭다. 여기서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 당원들은 저녁 일곱 시 무렵 마을회관, 학교 체육관, 교회 등 정해진 장소에 모여 토론을 벌인다. 아이오와 주 전역의 1681개 기초선거구(precinct)에서 이런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 30분 정도 토론을 마치면 참가자들은 흩어져 각자 지지하는 후보 쪽에 모인다. 그때 일정한 지지를 받지 못한 후보는 자격을 잃는다. 4명 이상의 대의원이 배정된 기초선거구에서는 그 기준이 참가자의 15퍼센트이다.
탈락 후보를 거른 뒤에는 다시 토론 시간이 주어지고 각 후보의 지지자들은 탈락 후보의 지지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밥을 사겠다는 둥,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겠다는 둥 온갖 방법으로 설득 공세를 편다. 지지 후보를 잃은 참가자는 다른 후보 진영에 가담해도 되고 그냥 집으로 가도 된다. 물론 다른 이들도 후보를 바꾸거나 퇴장할 수 있다.
30분 정도가 지나면 다시 후보별로 집합하고, 그때 모인 숫자의 비율에 따라 각 후보 진영에 대의원을 배당한다. 그런데 남은 사람들이 최초의 참가자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때는, 그만큼에 해당하는 대의원을 배정하기 위해 각 후보 진영끼리 동전 던지기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일어난다. 2월 1일의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는 최소 여섯 차례의 동전 던지기가 있었는데, 모두 힐러리 클린턴이 이겼다고 한다.
이렇게 각 후보에게 배정된 기초선거구의 대의원들은 주내 99개 군에서 군 대의원을 선출하고, 군 대의원들은 다시 주 전당 대회에서 주 대의원을 선출한다. 그러니까 2월 1일의 코커스는 이렇게 긴 과정의 첫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언론과 각 정당이 2월 1일의 결과에 집중하는 것은 그것이 민심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예비 선거이기 때문이다. 그 후 대중의 관심은 이어지는 다른 주의 예비 선거로 쏠리고 아이오와 주는 잊혀가지만, 향후 판도에 따라 아이오와 주 대의원의 최종 구성도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코커스는 흥미롭고 역동적이지만 문제점도 많이 제기된다. 지지자 집계 과정도 혼란스럽고 동전 던지기처럼 비합리적 방식도 동원되기 때문에 정작 미국에서는 이를 부끄러워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커스 방식이 살아 있는 것은 그것이 미국적 토양에 뿌리박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코커스의 어원에 관한 설명 중 하나는 원주민 부족인 알공퀸 족이 '회의'라는 뜻으로 쓰던 '카우카우아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원주민의 공동체에서 열리던 부족 회의나 추장 회의가 이주민들에게 영향을 준 셈이다. 또 하나는 술잔을 가리키는 중세 라틴어 '카우쿠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초기 코커스의 참가자들이 들던 술잔을 가리키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코커스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미국이 독립하기도 전인 1763년이다. 정치 서클에 속한 사람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방에 모여 혼합주를 마시며 토론을 벌여 공직 선거에 내보낼 후보를 정하곤 했다. 이렇게 밀실 담합의 느낌을 주던 코커스는 그 후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모든 정당원이 참여하는 미국 특유의 선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코커스의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는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독특한 역사적 조건 아래 민초들이 만들어 가는 것 같다. 그러한 풀뿌리 전통이 미국 정치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슈퍼팩이니 슈퍼대의원이니 하는 기득권 세력의 횡포 속에서도 샌더스 같은 돌풍의 주역이 배출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에는 왜 코커스 같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통이 보이지 않을까? 왜 모든 것이 중앙의 소수 '내부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까? 누구 말마따나 우리는 미국에게 선물 받은 민주주의를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의 민중적 전통이라면 우리도 꿀리지 않는 민족이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농민 조직, 1898년 만민 공동회에 참여하던 시민 조직 등은 동시대 어디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민주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발적 조직들은 일제 침략으로 사라졌지만, 그 뿌리는 각지에 남아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 등으로 분출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 각지에는 민중 스스로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치안대, 인민위원회 등 자치 조직이 생겨났다. 몇 주 만에 전국 13개 도에 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145개 지역에 시-군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들 자치 조직은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 조직으로 편제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각지 민중의 손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나 자발적으로 운영되었다.
인민위원회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지역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지역민의 보통-직접 선거에 의해 간부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비교적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대체로 비슷한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일본의 재산은 한국인에게 돌려준다는 것, 모든 토지와 공장은 노동자·농민에게 속한다는 것, 모든 남녀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 지극히 올바르고 민주적이지 않은가? 그밖에도 각종 센서스를 실시하는 일, 면마다 국민학교, 중학교 등을 설립하는 일, 주민의 보건 후생을 관리하는 일, 귀환 동포를 정착시키는 일 등 산적한 과제를 감당해 나갔다.
그러나 인민위원회의 활동 기간은 매우 짧았다. 1945년 9월 9일 서울에 들어와 12일 군정을 선포한 미군이 인민위원회를 전면 부정하고 강제 해산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그렇게 자생적인 자치 기구들을 불법화하고 나서 고른 파트너는 놀랍게도 일본의 식민 통치 기구와 그곳의 한국인 관리들이었다. 그들의 경험이 군정을 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친일 경찰, 지주 등 인민위원회에서 배제되었던 인사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었다.
한국의 '코커스'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인민위원회 등의 활동은 코커스의 본고장에서 온 군인들에 의해 싹이 잘리고 말았다. 더욱이 그 후 진행된 남북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더 심한 반공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사회주의'는 물론 '인민'이라는 말조차 북한에서 쓰인다는 이유만으로 금기가 되어 버렸다. 인민위원회는 그 이름만으로도 거론하기 거북한 존재로 잊혀 갔다. 사실 '인민'은 왕조 시대에 피치자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던 말이고, 해방 직후만 해도 새로운 민주 정치의 주체를 가리키는 말로 국민보다 더 많이 쓰이던 말이다.
분단 이후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한국민이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를 보면, 개화기와 해방 전후에 싹텄던 민주주의의 전통이 단절 없이 이어져 왔더라면 얼마나 더 대단했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다. 그런데 잊히고 단절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전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뚱맞은 '샌더스 팔이'나 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노라니, 그 같은 단절에 책임 있는 미국이 샌더스 같은 사회주의자의 권력마저 허용해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운다면 정말 배가 많이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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