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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코뮌

 

 오랜만에 연극을 봤다. 코뮌. 포스터만큼이나 제목도 빨간 이 연극은 80년대 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80년의 그 엄혹했던 시절도,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96년 학생운동 탄압도, 노동악법 날치기도. 직접 경험하고 고민하지 못한 2000년의 대학시절을 보낸 나에게 연극은 과거의 경험을 이양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양이고 나에겐 운동의 역사와 함께 내가 이어나가야할 운동의 일상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에 대해 숙제를 남겼다.

 나에게 작가는 계속 물어보는 것 같았다. 너의 꿈, 너의 코뮌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그려나갈 것이냐고.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여린 불꽃을 품은 너를 처음 봤어"

   연극은 기영의 기억을 통해 83년 인선과 기영의 만남을 시작으로 한다. 기영은 위장취업한 대학생이고, 인선은 14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 온 말 그대로 '공순이'이다. 이 둘이 처음 만났던 날은 어느 봄날, 비가 내려 정전이 된 작업장에서였다. 암울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 시절만큼 천둥과 번개가 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어둠 속에서 기영은 디디디를 외치며 인선에게 다가간다. 전두환 대머리 돌대가리.

  그리고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켠다. 처음에 불은 인선이 아니라 기영에게 있었다. 작은 불꽃으로 밝혀진 테이블 위에는 인선과 기영의 꿈이 드러난다. 기영이 드러낸 건 '공산당선언'이었고, 인선이 드러낸 건 21세기에 나타날 디자인이었다. 작가가 교묘하게 나눠놓은 꿈.  그들은 꿈에 대해 대화한다. 꿈은 실현될 때 아름다운 것일까, 비록 고통스럽긴 하지만 꿈을 품고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울까. 기영은 전자를, 인선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건 그와 그녀의 삶의 대응방식과 연결된다.

   이미 공산당 선언을 줄줄 외고 있는 인선은 기영에게 묻는다.

 "읽으니까 어때?"

 "읽고 있으면 심장이 뛰는 것 같아요"

 "뛰긴, 어디에서 뛰는데?"

  기영이 대답한다. "심장이 붉은 광장에서 뛰는 것 같다"라고.

 

 

"움추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거야"

   그렇게 만남을 시작으로 둘은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개인과 개인의 삶은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연극엔 남녀 주인공만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등장하지 않는 중요한 인물 하나가 더 있다. 기영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나눠 준 사람. 바로 영진이라는 인물이다. 영진이 잡혀들어가 녹화사업으로 군대에 끌려가고, 인선도 감옥에서 숱한 고문을 받을 때, 기영은 인선에게 면회를 와선 "미안하다"라는 말을 되뇌인다. 그건 살아남은 자의 온전하지 못한 삶의 무게감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기영도 군대에 입대하고, 군 생활을 마치기까지 인선과 기영의 관계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서로 주고 받으며 생활하는 관계로 지속된다.

   엄혹한 시대의 폭력은 인선에게 커다란 불꽃을 일게 하고, 그녀는 투사가 되었다. 그건 그녀가 처한 환경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녀의 삶의 선언은 책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했다. 연극이 시작할 때 산울림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는 이제 불나비와 바위처럼을 부르며 크게 노래한다. 그런 그녀와 달리 기영은 술과 동맹을 맺고 일상성과 역사성을 파괴한다. 그건 89년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영진의 분신 때문이다. 

  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던 신념이 현실 앞에서 한 순간에 허물어지던 순간을 작가는 기영, 영진, 인선의 삶의 방식을 통해 말해주고 있었다.

영진은 분신을 했고, 기영은 이제 끝이라며 술을 마시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죄의식에 허덕이고 있었고, 인선은 이제 시작이라며 생활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흐른 뒤 유학을 준비하는 기영에게 인선은 말한다.

넌 도망가는게 아냐. 어깨펴고 움츠리지 말고, 앞을 향해 가는 거야.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대로, 들리는 대로... 외면하지는 말고. 네 길을 가는거라고.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른 뒤, 세상은 여전히 급변하고, 꿈을 빼앗으려는 자들로 가득하지만, 기영은 소시민이 되어 있다. 그는 말한다. 아침이면 전철에 일벌레처럼 꾸역꾸역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합류하는 소시민이 되어버렸다고. 그런 그가 인선과의 짧은 재회와 편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주체로 일어서려고 한다.

  그는 말한다.프로메테우스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묻는다. 내 길에서 앞으로 나가다보면 언젠가 너와 마주할 그 날이 올까.

 

 

"내 심장은 어디에서 뛰고 있는걸까?"

  기영의 기억을 통해 진행되는 연극을 보면서, 나는 기영에게 주목했다. 기영의 기억속에서 인선은 투사였고, 그건 그녀가 위치한 노동의 현장이라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주목한 건 기영과 인선의 관계와 그 관계 속 기영의 선택과 행동이었다.

  

 기영과 인선의 관계는 단지 연인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오묘한 관계였다. 동지라는 이 짧으면서도 어려운 단어는 그와 그녀에게도 적용된다. 기영과 인선은 서로에게 불을 나누어주고 또 받는 관계이다. 소시민이 되어버린 기영에게 인선은 불씨를 다시 되살릴 수 있는 까닭이 되어주었고, 세월과 현실의 무기력함에 천착해가는 인선에게 기영의 다시섬은 또 다른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주었다. 민가의 노래가사처럼 그들은 함께 할 때 꿈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면으로는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선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것이 단적으로는 아련한 추억으로 존재할 수 있기도 한 반면 내 의지에 따라 내 길에 마주서고자 지향하는 인물이다. 적어도 80년의 사회주의에 대한 꿈과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면에서 기영과 인선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조직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거야"

"아니야, 조직의 주체는 나고 무슨 일인지 나도 알아야만 해"

주체는 나라는 기영의 말은 내가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하려했던 때 했던 말이었다. 이건 80년의 투쟁적인 운동의 경험도, 90년의 운동권의 몰락도 경험하지 못한 2000년의 나에게 있었던 일이다. 어쩌면 더더욱 현실의 무기력함을 몸으로 체득할 것을 강요받는 지금의 시기에 세상과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내 열망은 무모함이나 철없음이 아닐까라는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엄혹한 현실의 폭력은 사회에서도 학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현실. 그 때 내 심장도 붉은 광장에서 뛰기를 희망했다.

 

그랬던 기영이, 그랬던 내가 소시민이라고 말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다시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기영은 힘없이 넘어지는 사람이기를 선택했다. 고통과 죄의식을 자양분으로 삼고, 넘어지면 일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길을 가기로. 일어나기 위해 넘어지는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젠 내 길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내 심장은 아직도 붉은 광장에서 뛰기를 희망하고 있는 걸까?

그저 인선의 대사를 기억하기로 했다.  "어깨를 펴고 앞을 보면서 전진하라고."

 

 

 

"심장은 차가워져도, 뜨거웠던 그 순간을 놓치지 마"

 연극을 많이 본 경험이 없으므로 연극에 대한 추억도 별로 없다. 뭐,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을테니 쌓아가면 그만 아닌가. 내가 본 몇 편 되지 않는 연극에 대한 추억 가운데,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좋았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연극이 하나 있었다. 그건 대학교 1학년 때 동기들과 함께 본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연극을 선택했던 선배에게 왜 이걸 봐야하냐고 못마땅해했던 나는 연극이 끝나고 내 동기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울었을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전태일열사가 고뇌하고 갈등하던 그 모습의 아련함이 내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 같이 연극을 본 동기에게 그 때의 연극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감동받았던거지?라고 덧붙여서. 친구가 말했다.

  "그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서 그랬다"고.

  "그랬지"라고 난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지금은?"

 

 지금은 내 심장의 온도가 어느 정도일까? 너무 식어 얼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간혹 한다. 예전에 활동을 잠시 접고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주변의 시선과 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던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심장은 식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심장이 뜨거웠던 때를 잊지 말라고.

그럼 차가워진 심장은 언제든 다시 뜨거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때 당시에는 참 멋부린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이 말이 진실이길 바란다.

 

 

 

 내 이전의 활동가 선배들은 이 연극을 보면 과연 어떤 기분을 느낄까? 내 후배들은 또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연극을 보며 궁금해졌고, 내가 그 경험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음이 연극을 50%밖에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나머지 50%는 이전의 선배들이 느끼지 못한 2000년을 20대로 보낸 나의 경험이자 일상성으로 자리한다. 그건 그들이 꿈꾸는 꼬뮌과는 다르거나 어쩌면 마찬가지인 나의 꼬뮌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내가 또 다른 인선과 마주하게 될 그 길은 무엇일까? 같이 연극을 본 친구들. 현장을 고민하는 또 다른 인선이 될 친구와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친구. 그들과 함께 나눌 프로메테우스의 꺼지지 않는 불씨를 난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지. 난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대답하기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비록 고통스럽지만.

연극을 보고 난 후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간만에 본 친구들의 이야기도 하고, 과거를 들추어내기도 하고,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는 좋은 이들과 함께한 좋은 연극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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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이슬아~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나와 술의 인연을 당분간 끊기로 했다. ㅠ.ㅠ

어지러움과 온 몸이 쑤시는 것을 술로 달래보려고 했던 내 노력은

위염과 알코올 지방간과 빈혈과 감기몸살이 겹쳐 한꺼번에 찾아오게 만들다.

 

아...지금도 토할 것 같아.

그래도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감사.

 

사진 속의 나는 아픈 것도 모르고 이슬이와 함께 행복해하고 있는데...

오, 주여. 진정 제가 저 날 먹은 샐러드와 회가

제 인생의 마지막 알코올 한방울과 함께한 동반자였더니이까!!!!

큭  제기랄...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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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 할머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공지영의 소설을 오랜만에 손에 집었다. 난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공지영 뿐 아니라 은희경, 신경숙, 하성란 등으로 이어지는 90년대를 풍미한 여류 작가들의 소설을 그닥 즐겨읽지 않는 편이라 해두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진보의 물결에 잠깐 발을 담갔던 것 처럼 묘사되는 공지영의 글이나, 중년 여성의 사랑과 삶을 그려내 읽는 이로 하여금 허무를 느끼게 하는 은희경이나, 따라 잡을 수 없는 생각의 묘사로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고의 간격을 허벌나게 따라 잡아야 하는 신경숙도 싫었다.

 

 더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들이 그려내는 자신의 일부인 그녀들의 삶이 싫었던 것 같다.

그녀들의 모습은 내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미래의 나의 모습인 것도 같았으며,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나 역시 그녀들의 삶이 그려진 소설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동조하는 남성이 있으면 이상하게 벨이 꼴렸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해가 가는 표현들이 생기는 것이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이상한 심보다.

 

 

[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는 소설은 내게는 너무나도 공지영스러운 소설이었다. 짧은 단편 소설이라 내용의 긴밀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략 말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골똘히 생각했다. 과연 죽지 않는 할머니를 위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완벽한 살해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이 할머니를 과연 죽여야 할까?

나는 이 할머니를 과연 죽일 수 있을까?

 

 

  주인공 '나'는 현재의 나에게 짧은 편지 형식으로 조언을 구하고 있다. 나는 17세의 소녀인데,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강남에서 좀 놀았다는 정도로 순순한 성격은 아니다. 나에게는 몇 해 전부터 죽을 것 처럼 앓고 있으면서 죽지 않는 할머니가 있다. 가족 모두는 할머니의 유산을 탐내며 할머니를 정성껏 간호하는 척 나서지만, 나는 할머니를 증오한다.

  나에겐 할머니를 증오할만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건 내가 지켜야만 하는 존재인 -어린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어리둥절하다고 말하는데- 장애를 가진 동생이 할머니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우리집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이상하게 누군가가 죽어나간다. 처음엔 갓 결혼한 막내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이 죽자 식도암 말기로 죽어가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미음을 가져오라고 소리친다. 그걸로 성이 차지 않는 할머니는 비쩍마른 손마디로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갈비살을 뜯어먹는다.

 

 그 다음 해 되찾은 할머니의 건강이 다시 시들해질 무렵, 큰 외숙모가 죽자 할머니는 다시 일어난다. 그 다음 차례는 우리집에서 10년간 일하신 불쌍한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죽자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그녀가 그렇게 죽은 건 지탓이라며 보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 모두 할머니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탐욕과 몰인정함에 치를 떤다.

 

  죽을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으면서 이젠 내 생명과 내가 지켜야할 동생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할머니. 사실 할머니에게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뱃속에 아이를 가졌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지경을 넘어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던 과거가 있다. 그래서 부뚜막에서 발견한 새끼를 배고 있는 고양이를 삶아 먹었던 이야기를 우연히 털어놓는다.

어쨌든 지금의 할머니가 죽어갈 때마다 이웃집 개, 쥐, 참새들 무언가가 죽어나가는 것을 발견한 나는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가르쳐 달라며 끝을 맺는다.

 

 

 

할머니는 누구일까? 작가는 끝끝내 밝히지 않고, 이상한 분위기만 풍긴 채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보다 정확하게는 할머니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할머니가 보이는 행동과 이것을 막을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할머니가 죽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의 원인을 따라가면 그건 환경에 따른 것이었다. 악착같이 보존하려는 재물에 대한 탐욕 이전에 살기 위한 본능을 따랐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고민이 들었다. 할머니는 죽어야만 할까.

 

처음엔 할머니의 존재를 자본가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하는게 늘 이런식이라, 바라보는 시각도 한정되어 있다. 본질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과 편협한 생각으로 다양하게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요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서 느끼는 건 내가 후자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대한 평론을 잠깐 읽어보니, 그 평론가는 할머니의 존재를 탐욕이라고 해석했다. 틀린 해석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는 죽을 것 같으면서도 식지 않는 탐욕스러운 모습이니까 말이다. 탐욕은 과연 죽어야만 하는 존재일까? 내가 지켜야할 그 무언가의 존재를 위해서?

그렇다면 과연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이 없는 것 같은 소설하나를 읽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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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06 안티성폭력 페스티벌

06 안티성폭력페스티벌 프로그램 소개 | 페미니즘의 도전


 

 

본행사: 홍대체육관 19:00~21:30 (사회자 : 홍석천, 김현숙)

공개 모집을 통한 일반 참가자와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 중인 아티스트들이 함께 어우러져 연극, 복합극, 꽁트, 개그, 패로디, 미니콘서트, 춤,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상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반성폭력의 의미를 홍대 체육관 특설무대에서 150분에 걸쳐 풀어낸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성적소수자이자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홍석천 그리고 '출산드라'로 알려져 있는 신랄한 개그우먼 김현숙이 사회자로 나서 폭력적인 성을 거부하고 우리 내면에 억눌렸던 성적 자아를 찾아가는 본 축제를 이끌어 간다.


거리행사: 본 행사 후 21:30~22:00 홍대 놀이터까지 행진

무대 공연 중심의 본 행사가 끝나면 전 출연자와 관객들이 4미터의 여신상을 앞세우고 홍대 앞거리를 행진한다. 성폭력 근절의 의지를 다지고 여성들에게 환한 밤길을 밝혀주는 축제의 실제적 하이라이트로 안티 성폭력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거리 퍼포먼스이다.


위 웹자보를 다운받으셔서 헤푸게 뿌려주세요^^

안티성폭력페스티벌 더 자세한 내용은 ☞antifestival.co.kr

 

 

행사명 | 2006 안티성폭력페스티벌
행사일 | 2006년 6월 2일 (금) 해지고 7시부터
장소 | 홍익대학교 체육관
주관 | (주)도서출판 이프, 홍익대학교 총여학생회
홈페이지 | http://www.onlineif.com || http://www.antifestival.co.kr
공동주관 |

꿈꾸는지렁이들의모임, 늘푸른여성지원센터,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또하나의문화, 사이버문화연구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제주여민회, 피자매연대,
한국성폭력위기센터,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장애여성문화공동체, 새움터, 여성문화예술기획, 장애여성공감

협찬 | SK텔레콤 | 포스코 | 두산중공업 | 국민은행 | 신한은행 | 삼성전자
서울증권 | 쎌 인터네셔널 | 한국마사회 |
담당 | 이프 기획팀 임우정 (festival@onlineif.com)
(☏ 02-3676-3301, FAX 02-3676-3308)

 

 

 

밥 먹고 도서관 오르는 길에 벽에 포스터가 붙어있길래 뭔가 찾아봤다.

안티 미스코리아 후속으로 열리는 행사라는데, 난 처음 들어봤다.

뭐, 돈 주고 함께할 생각까지는 없고, 저녁에 거리행진한다고 할때

밥먹고 배 식힐겸 구경이나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본 행사에서 하는 걸 그냥 공개적인 공간에서 하면 안될까란 생각도 잠시

이상하게 본 행사보다 거리행사가 더 땡긴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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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26

 

 

#1.

술이 웬수.

그래도 미친듯이 마시고 싶을 땐 마셔주는 것이 인/지/상/정

참이슬 20도는 별로다.

주량이 늘은 것 같잖아.

 

#2.

요즘에 느끼는 것이지만,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말이 좀 많아졌다는 생각이다.

나름의 추구하는 이미지는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였는데.

요즘엔 내 말만만 하는 나를 느낀다.

 

"나는~""나는~`""나는~"

개인주의적이고 무미건조한 현대인의 일상에 적절하게 적응하고 사는 길이다.

나도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 삼십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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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짤렸어요.

학원 일을 그만뒀어요. 정확하게는 시험 후 학원 재정비와 함께 정리됐습니다.

이상하죠? 왜 전 메이데이가 지나면 늘 사교육과 인연이 끊기는 것일까요?ㅋㅋㅋ

 

 

작년엔 너무 호되게 당하면서도 결정된 비정규직의 말로에 한동안 화가 삭을 줄 모르더니

이번엔 한번 당해봐서 그런가, 작년만큼은 아니네요.

사람의 감정이란게 반복되면 점점 무뎌지는건가 봅니다.

사실 이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긴 하는데 말이죠..

암튼 다시 고시생으로 돌아가야 하는 생활에 솟아오르는 화를 누르고 그냥 곱게 나왔습니다.

 

원래는 6월까지만 일을 하려고 했었는데, 예상보다 한달먼저 공부를 시작하게 된 셈이예요

솔직히 다른 한편으로는 학원에서 먼저 말해줘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어요.

 

근데 자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두달정도 만나서 정이 붙기 시작한 애들 때문에요.

4월부터 얼렁뚱땅 맡겨진 고1내신 수업에 솔직히 화가 났지만, 그냥 돈의 노예로 살기로 한거 어디까지 가나보자 하고 시작했습니다. 애들한테 정이 붙을까 두려워서 이름도 말 안하고 그냥 내신준비만 했었어요. 막판엔 학원에서 요구하는 노동강도가 너무 세서 애들한테 짜증도 냈었거든요.

 

  스승의 날이라고 생각지도 못하게 선물을 준비한 애들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조금씩 풋돈을 모아서 마련한 장미꽃 두 송이와 목캔디, 음료수보다 더 감동받았던 건 학원 교무실에서 들은 스승의 노래와 애들의 마음 씀씀이였어요, 전 솔직히 아이들에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보다 일찍 퇴근하는 저를 챙겨주려고, 수업시간에  "공부하다가 질문이 생겼는데. 언제 집에 가세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속 뜻도 모르고 차갑게 말했거든요. 물어볼 게 있으면 지금하든가 아님 다음주 화요일에 하도록하고.  난 퇴근시간을 꼭 맞춰서 나갈거라구요.

결국 애들은 제가 퇴근하기 전에 쉬는시간에 달려가서 꽃이며 선물을 사들고 들어왔어요.

 

 

오늘은 마지막 수업을 하는데,

정을 주는 것도, 어느새 붙어버린 정을 떼 버리는 일도 자신이 없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하고 나왔거든요. '안녕'이라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냥 당장 다가오는 시험이 걱정되고 안쓰러워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야기와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만 강조하고 수업을 끝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어떻게 알고 아이가 울먹이다가 끝내 눈물을 보이는데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줬습니다.

그 아이가 다음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쪽지 한 장을 건네줬는데,

아이들도 저도 이별할 준비가 안된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것들이 어찌 알았는지, 집으로 가는 학원차를 타기 전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와서

울먹이고 또 눈물을 흘리는데 전 감히 다독여 주지를 못했습니다.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쪽지를 읽으면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과연 이런 관심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은가 하구요.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욕심이 나더라구요.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 될 기회를 갖고 싶다는.

 

스승의 날 때 선물해주고 싶은 학교 선생님이 하나도 없다는 아이들에게

그래서 스스로 삶의 태도가 염세주의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엔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분명히 존재하고, 너희에게도 분명히 만날 수 있는 언제가 있으니, 염세적 태도는 아직 갖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 났습니다.

 

근데 그걸 못해서 아쉽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앞으로가 중요하겠죠.

작년처럼 다시 공부를 시작하지만, 작년과는 분명 상황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년엔 혼자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밤에 이불을 덮고 잠을 잘 때면 이대로 눈을 뜨지 말고 관속에 들어간 것 처럼 편안하게 갔으면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은 좀 다를 것 같습니다. 달라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언젠가 이 관심을 줄지 않는 화수분처럼 넉넉하게 돌려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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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와 소울메이트

 요즘 관심을 가지고 보는 드라마가 몇 개 있습니다. 연애시대, 소울메이트.

이 둘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또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구성의 참신함때문입니다.

기존의 삼각 또는 사각 구도에서 약간은 벗어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앞선 드라마는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이 교체되는 형식을 통해 캐스팅된 배우 만큼이나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고, 뒤에 있는 드라마는 인물이 변함은 없는데, 두 개의 에피소드가 오버랩되는 형식입니다.

  둘 다 연애에 대한 단상을 중심으로 그려나간다는 점이나, 넓게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약간의 미묘한 차이는 소울메이트가 20대 초,중반을 주요 시청층으로 말 그대로의 true love, 즉, 소울메이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것이라면, 연애시대는 그보다는 좀 높은 연령층으로 사랑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연애시대는 사랑에 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차분하게 조금은 우울하게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꿈, 현모양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드라마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꿈과 모습입니다. 어제 방송된 연애시대의 마지막부분은 전남편인 동진(감우성)이 그의 첫사랑 유경과 재혼하는 결혼식장. 그곳에 참석한 은호(손예진)의 독백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녀의 독백은 그녀가 어릴 적 자신의 꿈을 적은 일기 속에서 상상했던 멋진 왕자님과의 만남으로 은호가 동진과 만났던 첫만남을 회상하는 장면과 맞물립니다. 작가의 의도야 이제는 깨져버린 돌이킬 수 없는 듯한 꿈을 강조하고 싶었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어릴 적 꿈이 현모양처였다는 말이 많이 거슬렸습니다. 현모양처라... 

 이런 현모양처의 꿈은 연애시대의 어릴 적 은호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소울메이트에서는 유진(사강)도 꿈꾸는 삶이기도 합니다.

  현모양처, 생각해보니, 옛날 제 친구 중에도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친구가 있긴 했습니다.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들었던 저는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이런 희망사항이 참 별로라고 생각했었죠. 자신의 장래 희망이 직업으로 표현되는 것이나 어머니,아내로만 점철되는 현모양처나 참 재미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여전히 유효한데, 사람이 못되서 그런가...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꿈들이 철저히 깨져가기를 바라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드라마를 제대로 챙겨보지를 못해서 내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긴 하는데,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보다 사랑을 잃어가는 과정이 더 맘에 드는건 왜 인가 모르겠습니다.

곧 끝나가는 연애시대에 주목하면서, 지금은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들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동진과 결혼하는 유경을 제외하면 연애시대의 대부분의 여성의 모습은 이혼을 경험했고, 출산과 양육을 고민하기도 하고, 사산을 경험한 아픔을 가진 여성입니다. 어쩌면 이 캐릭터들은 은호의 동생인 지호(갠적으론 이 캐릭터가 젤 맘에 듭니다)나  현모양처의 대표적인 이상적이고 완벽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유경보다 더 현실적인 여성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혼한 부부의 삶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는가의 문제들은 다르다고 생각하구요.)

 

 드라마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전 이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에 뭇 드라마가 선택했던 사랑대신 일을 선택하는 여성의 모습이나, 상상이었다느니 식의 결말을 기대하진 않구요. 그저 사랑이 끝나고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그 과정이 사산의 아픔이나 실연의 아픔에서 치유되는 과정임을 담담하게 그려나갔으면 합니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제목처럼 연/애/시/데 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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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곰 세마리


 

 

"곰 세마리가 머리위에 있어,

 엄마곰, 아빠곰,애기 피로 곰

엄마곰은 왼쪽 머리 위,

 아빠 곰은 오른쪽 머리 위,

애기 곰은 정수리 위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써야 할 글과, 쓰고 싶은 글이 몇 가지 있는데,

넘 피곤해서 못 쓰겠어요.ㅜ.ㅜ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이상하게 피곤한 요즘이예요.

내 머리 위

애기 피로곰만이라도 누가 좀 치워 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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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지은이 존 쿳시 지음  | 왕은철 옮김
출판사 들녘
책 소개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쿳시의 2003년 작품. 기존에 국내에 소개된 『야만인을 기다리며』『철의 시대』『마이클 K』와 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안고 있는 문제, 즉 흑백 갈등을 그 모티브로 삼고 있는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그의 작품의 중심 배경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했다. 또한 작품은 기존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즉, ‘여덟 가지 강연’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덟 가지 주제를 담은 강연 내용이 큰 기둥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비록 형식과 내용에서 어떤 변화가 있든지 간에, 여전히 강렬한 이미지의 표상과 노련한 글솜씨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소설과 비소설(강연, 에세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포스트모던한 기법의 작품

(하략)

 

 

<목차>

Lesson 1. 리얼리즘
Lesson 2.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Lesson 3. 동물들의 삶 I - 철학자들과 동물들
Lesson 4. 동물들의 삶 II - 시인들과 동물들
Lesson 5.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
Lesson 6. 악의 문제
Lesson 7. 에로스
Lesson 8. 문에서
후기 - 레이디 찬도스, 엘리자베스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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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핑하다가 궁금해진 질문.

"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이타적인 행동을 할까. "

이에 대한 생각을 써놨다길래,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 읽을 여유도 없고-책 읽으러 갈 시간이 없고, 책 사볼 돈도 없다 ㅠ.ㅠ-

읽고 싶은 책만 쌓여간다.

8월부터는 좀 가능해지려나? ㅜ.ㅜ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라 대단히 관념적일 것 같긴 한데,

언제 시간내서 읽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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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한다.

달군님의 [[트랙백릴레이선언]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한다] 에 관련된 글.

트랙백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트랙백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어서...

 

아침에 뉴스속보에 잠이 깨서 가족들이랑 한참 동안 뉴스를 함께 봤습니다.

ytn속보입니다. 화면에서는 강경진압 장면이 보도되고, 누군가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국민들에게 상황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브리핑을 해줍니다.

앵커가 말하기를 지역 주민들과의 문제해결이 아직 덜되었고, 여기에 이념문제까지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곧이어 국방부의 발표가 이어집니다. 전원연행이라고요.

덧붙이기로는 보상금을 꽤 지불했고, 미군기지가 들어서도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일이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답니다.  그리고 화면은 군대에서 논과 밭 이랑을 경계로 둘둘말린 철책을 피는 모습이 나옵니다.(군대용어는 잘 몰라서 뭐하는 시츄인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순간 이해하기는 철책을 치니까 주민들과의 접촉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나 싶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려서 부랴부랴 인터넷 속보창을 찾았습니다. 언론에서 지역이기주의 문제로, 단지 미국에 대한 반발심으로만 평택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했구요. 

네이버나 다음 같은 경우엔 속보가 빨리빨리 올라오니까,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하고 강경진압에 대한 규탄글도 남길 겸 해서 말입니다.

 

 

근데 순간 더 화가 치밀어 올랐던 건 속보 기사에 누군가가 남긴 댓글 때문에요.

수고하는 전경을 위해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하자는 글을 보고 피가 솟아올랐습니다.

그 시간에 ytn을 제외하고 다른 방송사에서는 속보 자막조차 나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어디선가 인터넷 여론 작업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감정상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혼자서 세상 개같단 생각을 한참 했어요.

한참 글을 막 썼다가, 너무 오버된 감정이 드러나서 삭제해버렸습니다.

 

정신을 좀 차리고 달군의 프로젝트를 다시 읽고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열심히 새로고침을 눌러댔으나, 효용성이 있나 싶기도 하더라구요

각 게시판에 항의글 짤막하기 남기는 수준으로만 하고

자괴감에 빠져서는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계속 기분도 안 좋고, 그러다보니 헛구역질을 자꾸 하더라구요.

 

 

아...진짜 화납니다.

개같은 세상에 화가나고,

문제 본질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또 폭력시위에만 초점이 나오는 게

상황이 또 오도되서 나타나는 모습에 화가 나고,

몸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화가 나구요.

 

혼자 삭일까 하다가 침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트랙백에 참여해봅니다.

 

 

정말 언어순화하고 살려고 노력중인데, 목 안에서 자꾸 ㅆ소리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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