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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명의 프리다(1)
    미갱
  2. 200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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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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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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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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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10/23
    사람만이 희망이다_최민식(2)
    미갱
  9. 2004/10/22
    2004년보도사진전(2)
    미갱
  10. 2004/10/20
    모내기_신학철
    미갱

두 명의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1939/Canvas oil painting/173.5*173cm

 

프리다칼로(Frida Kahlo)1907-1954

 

“칭찬을 들으려는게 아니에요. 진지한 비평을 듣고 싶습니다. 난 예술애호가도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라고 한다.
18세. 아직 피기도 전의 소녀 프리다는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는 교통사고로 인해 인생의 커다란 변혁기를 맞는다.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환상과 상상의 세계에 안착한 그녀에게 그림은 자아의 본질이었고, 내면을 키우고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그에 반해 디에고에게 그림은 세상을 정복하고, 여성을 유혹하는 권력이자, 보는 이를 감동시키고 장악하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흐흠..) 


<두명의 프리다>앞의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

그녀의 자화상은 자아를 꽤뚫어보려는 듯 깊이있게 그리고 냉정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두 개의 심장은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끝은 가위로 끊기어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새하얀 드레스를 시뻘겋게 적실만큼 붉은색은 강렬하나 불안하다.
맞잡은 두 손은 인생의 고독과 외로움에 서로가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듯 애처롭게 다잡았지만 때로는 사랑스럽듯 정겹게도 보인다. 배경의 하늘은 햇빛한점없이 먹구름으로 가득 드리워져 있다. 뭔가 불길한 징조처럼 말이다.
너무 처절해보여 슬픈 그림이다.
그녀들은 하나지만 둘인데 왜 슬퍼보이는 걸까? 왜?

내가 슬픈걸까?

 

살아가기 위해 붓을 잡았던 그녀에게 인생을 함께 한 디에고는 무슨의미였을까?

“디에고, 난 정말 말하고 싶지도 잠자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마법도 없이 바로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소리속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당신에게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그것이 당신의 침묵에서 나는 소리일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 광기가 당신에게 난폭함을 요구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에게 호의를, 빛과 온정을 주는군요."
<프리다 칼로의 일기 에서>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식

: 그림이 훨씬 좋은데 웹에 올라온 그림이 없다. 사진에는 디에고가 챙이 큰 멕시코 모자를

  들고 있지만 그림에서는 나무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림에서의 프리다의 얼굴표정은 정말 편안해 보인다.

  그림에서 인상적인건 또하나있는데 신발의 크기이다. 리베라의 신발은 이상할정도로

  크지만 프리다의 신발은 보일듯 말듯 작게 그려져 있다. 왜일까?

 

코끼리와 비둘기에 비유될만큼 둘의 외형적 어울림은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인생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여성이었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는 디에고와 프리다의 결혼식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어떤 자화상보다도 그녀의 얼굴이 환하고 다소곳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디에고의 지나친 여성편력이 결국엔 프리다에게 영혼의 상처가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게 예술과 세계관을 공유했던 인생의 동지였다.



버스/1929/Oil on canvas/25.5*55.5cm
: <버스>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표현한 그림이다.
  프리다의 그림중 보기드물게 인물들의 밝은 표정과 배경의 칼라가 안정적이며
  편안해 보이는 작품이다.

 

커튼 사이에서_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1937
Oil on canvas/87*70cm

: 1937년 멕시코로 피신해왔던 트로츠키가 프리다의 집에서 잠시 은신했던 시절
  그녀와의 염문설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프리다>에서는 둘의 관계를 확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나온다.


상처를 입은 사슴/Oil on canvas/1946/22.4*30cm

: 침상에서도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프리다는 1953년 개인전에서 침상에 누운 체로

  자신의 전시에 참여해 친구들의 축하와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그 당시 전시되었던 그림.

 

<프리다 칼로>Naver 지식검색

멕시코의 여류 화가.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인인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R.피카소(Pablo Ruizy Pacasso)·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다.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사회 관습에는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금속에 유채, 38×30.5㎝, 1932), <나의 탄생>(캔버스에 유채, 173.5×173㎝, 1932), <프리다와 유산>(종이에 리소그래피, 31.7×23.5㎝, 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친 사슴>(나무에 유채, 22.4×30㎝, 1946) 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사족
갠적으로 그림그리는 남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미술사적으로 유명하다는 남성화가들의 여성편력을 보면 더더..
대학시절 가까이서 접한 그림쟁이 남성들은 하나같이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이며 게다가…바람둥이들이 너무 많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애처롭고 신비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품기에 좋은 캐릭터들이지만 실상 남자로는 다들 별루다. 이건 철저히 갠적 취향일 뿐임을 밝힘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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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리베라

멕시코 천재벽화작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

벽화라는 미술장르를 새롭게 써내려간 1920년경 멕시코의 벽화주의운동을 주도했던 주인공.

 

디에고 리베라.

 

천재들의 재능이란 작품을 통해 그냥 느껴진다.

그냥...

 

디에고와 칼로의 예술세계를 담고 있는 서적을 탐독중인데 확실히 남성은 거시적 주제에

여성은 미시적 주제에 관심이 지대한 듯...

사회적으로 의식화된 이유인지 아니면 생물학적 차이인지는 좀더 연구해 보아야 겠지만

개인적 경험에서도 비슷한 듯...

규정짓기보다는 끊임없이 한계와 경계의 영역을 넓히는 작업이 나의 과제중 하나되다.


Mexico Today and Tomorrow/1934~1935/Fresco cycle

Palacio National, Mexico city_south wall

: 멕시코의 고대 원주민 문명과 스페인의 침략, 독립과 혁명을 다룬벽화

  쪼~기 보이나요? 상단중앙의 인물은 마르크스되겠어요^^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개혁을 상징하는 미래로 파업을 주동하는 노동자를 표현,

  왼쪽은 파괴로 기계에 갇힌 미국경제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의 탐욕스러운 얼굴의 미래를 상징.

  맨아래 왼쪽을 손짓하는 민중으로 마르크스의 손짓방향과 일치하고 하는데

  디에고 리베라의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Mexico Today and Tomorrow 부분

 

 


Detroit industry or Man and machine/1932~1933

The Detroit Institute of Art_West wall/Fresco


Detroit industry or Man and machine 상단부분

 

Detroit industry or Man and machine 하단 좌측부분


Detroit industry or Man and machine 하단 우측부분


Detroit industry or Man and machine 하단 중앙부분



토착문화와 산업사회가 조화된 리베라의 벽화

_디트로이트 산업 벽화 디트로이트 미술관 현지 취재

글 김의연 2001.4

1999년 연말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의 〈센세이션전〉의 파장 이후,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Detroit Institute of Art ; DIA)의 관장은 그가 재임하는 동안 "DIA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미술 작품의 전시를 금한다"고 밝힌 바 있다. DIA에서는 이미 1930년대 초반에 〈센세이션전〉에 못지않은 논란이 벌어졌으나, 미술관의 관점은 요즈음과는 사뭇 달랐다.
1933년 3월 13일, 미술관의 '가든 코트'에 그려진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의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The Detroit Industry Murals)〉가 대중에 공개되자, 종교계·언론계·시의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벽화를 지우라고 거세게 요구했다. 그 이유는 벽화의 누드가 선정적이고, 특정 패널이 신성 모독적이며, 노동자와 산업생산을 다룬 벽화의 주제가 미술관의 미적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자인 리베라의 정치적 견해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입김이 여기에 작용했다. 그러나 미술관 관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후원자의 노력, 그리고 시민들의 서명운동으로 인해 이 벽화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는 디트로이트 시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으며, 리베라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인 리베라는 1920년대 호세 클레멘트 오로츠코(Jose Clemente Orozco) 등과 함께 멕시코 정부의 예술정책에 힘입어 벽화의 황금시대를 연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 그는 멕시코에서 여덟 점의 주요 벽화를 완성한 후, 193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퍼시픽 증권거래소에 벽화를 의뢰받아 미국으로 옮겨 왔다. 이 무렵 DIA의 관장인 윌리엄 발렌티네(William Valentiner)는 그에게 미술관 내부의 벽화제작을 위임했다. 이에 따른 제반 비용은 당시 포드 자동차 회사의 사장이며, 디트로이트 예술위원회 회장인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지원했다. 1932년 4월 디트로이트에 도착한 리베라는 이곳의 산업과 자동차 공장에 매혹된 나머지, 처음에 약정한 '가든 코트'의 두 벽면뿐 아니라 네 벽면 전체를 벽화로 채울 것을 결정했다. 1932년 7월부터 1933년 3월까지 8개월에 걸쳐 제작된 이 벽화는 1930년대의 디트로이트 산업과 노동자들에 대한 찬사를 주제로 하여, 역동적인 이미지와 감각적인 형태로 산업현장을 시각화한 대작이다.
지금은 '리베라 코트'로 명명된 '가든 코트'에 들어서면,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자연광을 받아 빛나는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마주하게 된다. 벽화의 이야기는 동쪽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명과 기술의 기원이, 중앙 패널의 아기와 쟁기의 두 칼날로 시각화되어 있다. 아기의 형태는 인간의 생명이 대지로부터 비롯됨을 뜻할 뿐 아니라, 이 벽화를 품은 DIA가 지역문화의 본질적인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는 리베라의 소망을 담고 있다. 한편 농업과 기술과학의 시초를 상징하는 쟁기의 끝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안고 있는 누드의 여인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대한 의존과 기술과학에 대한 주제는 이어지는 다른 벽면의 그림을 통해 계속 전개된다.
서쪽 벽의 벽화에서는 전체적으로 삶과 죽음이 병존한다는 고대 인디언의 믿음과, 과학기술의 오용과 연결된 기독교적 최후의 심판 개념이 큰 축으로 작용한다. 벽면 중앙의 패널은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인디언의 마스크, 즉 인간의 얼굴과 두개골이 결합된 형상이 희망을 나타내는 별을 경계로 놓여 있다. 별을 기준으로 왼쪽엔 산업사회인 북미, 오른쪽엔 농업사회인 남미가 배치되어 두 지역간의 상호교류와 의존을 나타내는데, 이는 리베라가 염원한 범미주의(Pan-American Unity)를 상징한다. 위쪽의 패널들에는 좌우로 각각 수송여객기와 전쟁용 비행기가 배치되어, 과학기술의 긍정적인 측면과 더불어 부정적인 면을 보여 주고 묵시록의 종말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이원적인 주제는 하단의 수직 패널들의 좌우에 나타난 노동자와 경영자의 형상에도 적용된다. 노동자의 초상은 리베라 자신의 것이며, 경영자의 얼굴은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을 합성한 것이다. 이들의 배경인 기계장치는 동력을 생산하는 파워하우스로, 동쪽 벽의 쟁기나 북쪽과 남쪽 벽의 자동차 공장과 같이 벽화 전체를 아우르는 산업기술에 대한 주제와 연결된다.

북쪽 벽과 남쪽 벽에는 포드 회사의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디트로이트의 주요 산업인 화학·의학·약학 분야가 전개되어 있다. 이 두 패널에는 여러 인종의 다양한 계층이 등장한다. 패널 상단에는 마치 신과 같이 보이는 거대한 나체의 인간들이 대지의 산물을 끌어내고 있다. 북쪽 벽에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을 나타내는 홍색과 흑색의 인간들이 석탄과 철광을 쥐고 있으며, 남쪽 벽에는 백인과 아시아인을 의미하는 백색과 황색의 인간들이 석회석과 모래를 쥐고 있다. 이들이 들고 있는 요소들은 모두 강철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성분으로 자동차 생산을 비롯한 디트로이트의 산업과 관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사회주의적 인간상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쪽 벽 아래쪽에는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이 보인다.
리베라는 다인종으로 구성된 디트로이트의 노동력을 도시 산업문화의 토착 요소로 간주하고 그것이 미래의 문명과 연결될 것으로 여겼는데, 이 역시 그의 정치적 이념과 직결된다.
한편 그는 산업현장의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멕시코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뱀의 형태를 기계장치의 구성에 이용했다. 서쪽 벽 하단 중앙의 두 개의 축이나, 남쪽 벽 하단 우측의 거대한 기계장치는 아즈텍의 신상을 변형한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화와 현대의 기계문명을 결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디트로이트 산업벽화〉는 산업에 대한 그의 철학적인 시각이 기계공학에 대한 경애와 결합된 것으로, 아메리카의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남미와 북미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벽화의 시작점인 동쪽 벽화에서 태아 형상을 통해 그가 염원했듯이, 이 작품은 지역문화의 토양에 뿌리내린 미술관이란 조직체 속에서, 지역미술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정교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벽화는 1933년 처음 대중에 나타났을 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빛나는 색채와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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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노조로고_포트폴리오 7

부탁같은거 잘 못하는 지희가 어렵게 부탁해서

그리고 지희가 선택한 보육노조의 희망찬 활동을 위해

만들었다.

 

1. Keyword

로고디자인의 Keyword를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보육과 노조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형상화시키는게 쉽지 않더라.

방향이 풀리지 않으니 2주정도인가는 바쁘다는 핑계로...1~2주는 바빠서 좀쉰다고^^

제끼면서..겨우겨우 작업을 해버렸다.

 

"안는다" "따뜻하다"

 

2. main color

보육노조의 요청으로 주황, 연두, 핑크.

세가지중 하나를 잡았다. 주황.

톤은 부드러운 파스텔로 따뜻함과 귀여움을 강조.

 

힘들게 잡혔던 Keyword가 갠적으로 맘에 들어서인지 작업은 쉽게 풀렸다.

웃는입과 안는팔의 중의적 이미지와 귀여운 스타일의 폰트조합.

디자인스타일은 2종, 칼라는 두가지 조합색과 함께 3종.

 

그래서

4가지의 디자인sample이 나왔고 보육노조 회원들의 의견을 기다리고 있는중이다.

요기를 들르는 분들의 로고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주셔도 좋겠슴돠^^

반영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보육노조의 교육부장에게 귀뜸은 가능할 듯~

보육노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보육노조홈피로~

http://kcwu.nodong.org/


sample 1

: "전"과 "합"은 웃는 눈처럼 보였으면~ 눈과 입이 하나가 될때까지 웃는 아이들의 미래가 되길~


sample 2

: Point color는 부드러운 green으로~

 


sample 3

: Point color는 Blue. 지희는 이 Blue가 맘에 드나보다^^

sample 4

: "전국보육노조" 약어로 작업. 글수가 작아지면서 입을 살짝 기울였다~

 

>>사족

이제 블로그 질 좀 그만할라다가...또 이 짓을 하고 말았따...우잉~

1주일은 미련없이 떠나야지(과연@ @)...흠흠....ㅍ_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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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구본주를 기리며...

갑오농민전쟁/1994
500x1000x1400/동/금호 미술관

 

구본주.

 

흐흠..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얼마전 인터넷을 뒤지면서 자료를 모으다 구본주의 개인홈피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학재학시 미대생으로는 유일한 총학후보로 나와 미숙하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지지를

호소하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졸업후 몇년 뒤 그의 개인전에서의 기억...

그 당시만 해도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내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어

주던 오빠친구같은 친근감으로 와닿았던...

서양미술조각가로 로뎅이 있다면 한국에는 구본주다라고 비견될 만큼

역동적 에너지가 넘치는 형상과 운동권? 예술가다운 비판적이고

현실참여적 주제가 담긴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정통조소의 맛을 느끼게 하며

나를 매료시켰다.

2004년 오랜만에 그의 조각들을 훑어보며 최근작업들이 별로 없다는데 약간은 실망하며

사이트를 빠져나왔는데...그저께 과언니랑 통화하다 그의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어이없는 사고로 미술계의 거목을 잃어버린 듯한 설명할 길 없는 허전함으로

징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나이가 점점 다가온다는

현실적 중압감에 또 한번 고개를 떨구며...

한국적 정서가 흐르는 기운찬 그의 유작을 몇점 소개해본다.

흐흠...


갑오농민전쟁/1994
1500x3500x4000/폴리코트,철/작가


벅찬 출근/1991/2500x800x2000/동/작가


숨은그림찾기/1999/500x500x250/동,흙/작가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그림들을 가져옴.

나머지 작업들도 감상해 보고 싶으시면

http://www.kcaf.or.kr/art500/gubonju/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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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살리다_Dr.덴마

Dr.덴마/photoshop/20041027

 

흐흠...선을 살리기 위해 포토샵을 끄적여 보다.

페인터를 쓰지도 않았는데 포토샵만으로 선의 강약과 연필선의 느낌이 나올수

있다는데 감동하며..페인터는 종이의 재질과 재료의 종류까지 선택가능하여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이나 유화의 감각까지 낼 수 있는데 포토샵에도

이런 기능이 가능하다니 놀라고 또 놀랍다.

포토샵은 정말 환타스틱 매직쇼장이다. 하~

기회되면 이 프로그램을 만든 개발자들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지경~ (쪽쪽쪽! +o+)

 

그림의 완성도나 형태감은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의 재미"에

의미를 두며 올려본다.

 

몬스터는 1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읽고 있다.

원래 만화책 빨리 못읽는다...쩝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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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

 

 


 


 

막다른 길/photoshop/20041027

 

붉은 방

주위의 벽들로 꽉 막혀 어디로도 비상은 불가능하다

빛이 보인다 그곳으로 향한다 밝은 곳, 푸른 빛

..하지만 그건 또 다른 폐쇄공간으로의 폐쇄회로였다

추락한다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으로..

흔들린다

이젠 정상적으로 보이는 공간조차 없다

비뚫어 왜곡되어 있는 꽉 막힌

닫힌 공간

 

그곳으로부터...

 

>>사족

이노센스를 다운받아 보다가 뿌연 느낌의 배경과 며칠전 야경의 조명이 주는

"빛의 잔상"을 표현해보고 싶어 포토샵을 약간 끄적였다.

닫힌 구조(공간)에 대한 고민은 몇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계단효과가 보이는가?

저건 블러효과를 준것으로 안개낀 듯한 뿌연 느낌의 포토샵효과이다. 그런데...

블러효과를 웹에서는 자연스럽게 처리가 안된다..흐흠...

아쉽다.

 

지글지글한 선들이 보이는가?

타블렛으로 선을 긋는데 오랜만에 잡은 거라 덜덜덜....떨고 있더라.

언제나 선은 거짓이 없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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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의 그림들

갑돌이와 갑순이

Gapsoonyee and Gapdolyee, 1991, oil on canvas, 116.7x80.3cm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었던 <갑돌이와 갑순이>

전시장 한 공간의 세벽면을(입구를 제외하고) 하나의 작품으로 뒤덮여서

좋았다. 작품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신학철의 그림은 멀리서 보기보다는 가까이에서 보는 재미가 훨씬 좋다.

가까이에서 붓터치의 질감을 느끼고 이야기는 따로따로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이어진다. 역사의 흐름을 한공간에서 체험하는 기분으로 그림들을 읽어내는건

잼나는 경험이다.


갑돌이와 갑순이_부분


갑돌이와 갑순이_부분

 

<한국현대사_종합>의 전체와 부분을 감상해보세요~


한국근대사_종합

130*390cm/oil on canvas/1983


한국근대사_종합(부분)


한국근대사_종합(부분)


한국근대사_종합(부분)


한국근대사_종합(부분)

 

한국미술사에서 민중미술은 소중한 미술양식이다.

현실참여로서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뜨겁게 시대와 함께 한 민중미술가들에게

감사한다.

치열한 역사의 진정성을 담은 그의 그림은 즐기기보다는 끓어오르는 의식과 비판정신으로

좀더 무게중심이 움직인다.

최신작들이 기다려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거다.

꼴라쥬기법(사진이나 천 등의 재료등을 오리거나 찢어서 붙이는 미술기법)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불꽃같은 뜨거운 혼이 느껴진다...


한국현대사_초혼곡(동학)

Collage/1983/65*92cm

 

그의 그림은 모두 이 사이트에서 가져옴

http://www.kcaf.or.kr/artcenter/2003/11/shinhc/shin_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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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_최민식

1997 부산

 

"사람만이 희망이다"

최민식 사진을 보고오다.

다들 팔자폈다고 생각하겠다(조금은 조심스럽게 글을 올린다..사실...흐흠..)

...모 그렇기도 하지만 재생산기간중에 이런 과정들도 끊임없는 감각업그레이드&영감의 발흥을

위한 소중한 시간들임에 틀림없다..

 

대학시절 나의 그림 일부분으로 활용하곤 했었던 그의 사진을 사실 직접 접하게 된건 첨이라

상당한 기대를 가진 발걸음이었다.

생각이 많아진다.

작가의 치열한 현실성이 사진에서 보이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전투적이고

강한 무언가만을 원해서일까 끊임없이 되뇌어본다.

즉자적 평가 "관조"였다.

단어 하나로 최민식작가를 폄하하거나 간단하게 정리하면 안될 것같아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965 부산

 

인물사진은 대부분 정지화면에서 보는이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과 마주하면 그들의 삶이 보인다.

남루한 옷에, 주글주글 깊게 페인 주름들, 흑백이지만 햇빛에 노출이 자주된 듯 시커먼

피부색....머리는 한달정도 감지 않은 듯 덕지덕지 엉키고..다들 하나같이 무표정이다.

우리부모세대는 저렇게 살아왔을 것이라는 자각은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든 유형의 인간을 찍자. 특히 서민에게로 눈을 돌리자"

 

인간에게 다가가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약간은 멀리서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카메라앵글은 그래서 치열함보다는 관조적으로,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으로 보인다.

 

1961 부산

 

"결정적인 순간이란 말은 사진의 표현에서 꼭 있어야 될 요소다.

 순간을 고정시킨다는 것은 사진의 중요한 기능을 일치시킨다는 말이지만 물리적인

 순간만을 의도한 것은 아니고, 내용과 형식 그리고 감정이 일치된 순간을 말한다.

 현상과 자기의식이 스파크한 순간에 모든것은 결정지워진다.

 눈과 손가락을 연장으로 하여 자기의 의지에 의하여 비로소 자유롭게 실현되는 것이다."

  -- 작가노트

 

감정을 사진안에 개입시킨다는 건 다큐사진과 보도사진이 다른 맥락으로 분류되는 지점이다.

 

최근작업들보다는 대략 70~90년대의 작품들이라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칼라가 판을 치고 수동카메라보다는 디지털카메라로 기술적 변이가 형성된 지금..

흑백으로 그리고 촌스럽고 남루한 과거의 풍경을 자각하게 되는 시간은 왠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 기분이었달까?

왠지 어지럽다.

좋은 지 나쁜지 잘 모르겠는...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한길만을

평생 걸어온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존재의 깊이감을 느끼는 그런 자리였다.

 

1984 부산


1992 부산


1957 부산

-->갠적생각...이러나가 화낼지도몰겠는데..이 사진보자말자 '이건 이러난데..'였다.

     저 강렬한 여자아이의 눈빛은 이러나의 나이답지 않은 당참이 보이니까...조타..


1985 부산


1978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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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보도사진전

몇 주전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되었던 <2004 보도사진전>의 사진들입니다.

자연의 웅장함과 경이로움, 순간의 아름다움, 사회적쟁점에 대한 자각....

보도사진의 다양한 감동이 신선했었던 전시였다.

그런데...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보도사진작가의 사회적 역할은 이슈에 따라 파장의 크기가 막대할 수도 있겠지만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행위...도덕이라는 잣대를 함부로

들이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객관적 행위가 가능하겠는가..

대의냐 도덕이냐...우선순위를 매기는 자체가 문제일까?

 

>>사족

위의 생각을 불러일으킨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지 못함.

아래사진과 관련글은 인터넷에서 퍼옴.

관련글은 전시에서 사진설명으로 붙인 내용과 동일함.

 


어느 이라크포로의 아들사랑_Jeag Marc Bouju

 

수상부분

대상 / World Press Photo of the Year 2003/1st Prize People in the news Singles

작 가 명 Jean Marc Bouju

소 속 명 France, AP

작품소개
2003년 3월 31일 남부 이라크 나자프 시에 있는 美 101 공수사단 3여단 內의 포로수용소., 한 이라크 포로가 겁에 질린 4살난 자신의 아들을 안고서 달래는 모습. 이 사진을 찍은 부지 기자는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하기보다 전쟁속에서 피어난 부자간의 애뜻함과 그를 지켜보던 병사의 동정심 등을 한컷에 담았다. 사진 찍은 이후 이 두 부자의 거취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말이 없다.....전쟁은 어떤 이유에서건 반대다!

 

로켓포화로 몸의 일부가 잘린 소년_Yuri Kozyrev

 

수상부분 1st Prize Stories - General News

작 가 명 Yuri Kozyrev

소 속 명 Russia, Time Magazine

작품소개
Ali Ismail, 12살, 바그다드에 있는 Al Kindy 병원에서 가까운 친지에 의해서 간호 받는 모습. 이 소년은 예상치 못한 로켓포 공격으로 몸의 일부가 잘려나갔으며, 공격으로 부모와 형제, 그리고 11명의 친지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대폭발테러사건(9·11테러사건)이 일어난 뒤 2002년 1월 미국은 북한·이라크·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그 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외명분을 내세워 동맹국인 영국·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2003년 3월 17일 48시간의 최후통첩을 보낸 뒤,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바그다드 남동부 등에 미사일 폭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을 개시하였다. 작전명은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이다.
전쟁 개시와 함께 연합군은 이라크의 미사일기지와 포병기지, 방공시설·정보통신망 등에 대해 3회에 걸쳐 공습을 감행하고, 3월 22일에는 이라크 남동부의 바스라를 장악하였다. 이어 바그다드를 공습하고 대통령궁과 통신센터 등을 집중적으로 파괴하였다. 4월 4일 바그다드로 진격해 사담후세인 국제공항을 장악하고, 4월 7일에는 바그다드 중심가로 진입한 뒤, 이튿날 만수르 주거지역 안의 비밀벙커에 집중 포 격을 감행 하였다. 4월 9일 영국군이 바스라 임시지방행정부를 구성하고, 다음날 미국은 바그다드를 완 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면전은 막을 내리고, 4월 14일에는 미군이 이라크의 최후 보루이자 후세인의 고향인 북부 티크리트 중심부로 진입함으로써 발발 26일 만에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동원된 병력은 총 30만 명이며, 이 가운데 12만 5000여 명이 이라크 영토에서 직접 작전에 참가하였다. 인명피해는 미군 117명, 영국군 30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또 종군기자 10명 외에 민간인 1,253명 이상이 죽고, 부상자만도 5,100여 명에 달한다. 그 밖에 1만 3800여 명의 이라크군이 미군의 포로로 잡히고, 최소한 2,320명의 이라크군이 전사하였다.

-->사진을 보다 눈을 돌려버렸다. 그건 감정이입이 강했기 때문...으으.....정말 힘들다.

     이 작품은 공포와 더불어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전쟁전 바그다드의 어느 카페_Bruno Stevens

 

수상부분 1st Prize Singles - Daily Life

작 가 명 Bruno Stevens

소 속 명 Belgium, Cosmos for Stern / The N.Y Times Magazine

작품소개
전쟁이 나기 몇주전의 바그다드 시에 있는 Al Zahawi Cafe 의 모습.
이러한 카페 (유명한 시인이나 음악가의 이름을 붙힌) 는 바그다드에서 없어서는 안될 장소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고 도미노 나 백카몬같은 게임을 하기도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전시중에도 일상은 존재한다.

      잠깐이나마 평화로운 일상을 순간포착한 사진으로 기술적으로 민첩성과 순간판단력을

      요하는 작품이라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작품.

      일상의 평화로움뒤의 전쟁에 대한 긴장감과 불안함이 사진 곳곳에 내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오는데...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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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_신학철


모내기/1987/신학철

 

국보법7조로 기소된 신학철의 작품<모내기>.

"북한을 이상향으로 표현한 이적표현물"이라는 것이 검찰의 결론.

표현의 자유는 아직도 요원한 거다. 이념의 대립장 대한민국에서는...

아니.. 국보법이 완전폐지되면 가능한건가?

 

신학철씨가 얘기하는 국보법은?


 

국가보안법2/2003/모내기그림을 프린트한 다음 그위에 스프레이로 제작

 

 

UN국가인권위에서 모라고 하건 국제적으로 부끄러운건 어쩔 수 없지만

예술품을 국가에서 가지고 있음 제대로라도 보관하지는 못할망정(캔버스의 나무나 천은

숨을 쉬는지라 유화는 습도조절을 잘하지않으면 쉽게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펼쳐서는 가지고 계셔야 할 것 하닌가? 이찌나들 무식하신지...클클...

 

신학철, 박불똥, 홍성담.

이 세분은 한국 민중미술계의 거목들이다.

조만간에 좀더 다양한 작품을 소개해 볼까한다.

 

오마이뉴스에서 이적표현물로 기소된 작품을 한곳에서 모아서 보여준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no=169704&rel_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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