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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뮌주의 대안 맞나

다양한 존재의 소통을 실험하라, 새 삶을 위해!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들이 재작년 경기 평택 시청 앞에서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계획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 대표는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로 가는 유효한 방도라고 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① 독점당한 삶 벗어나야 할 때

 

‘코뮨주의’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다. 현실 사회주의 패배 이후에도 마르크시즘을 고수하고 있는 좌파 진영 일군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이 용어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라고 옮겨 온 ‘코뮤니즘’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 표기를 할때 ‘Commun’(공동체란 뜻)과 ‘ism’ 사이에 하이픈(-)을 끼워 넣기도 한다. 코뮨주의를 통해 새 대안 체제를 구상해온 그룹 가운데 하나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쪽이 최근 한 권의 책을 내어 그 개념과 전략을 소상히 밝혔다. 이 논쟁을 통해 코뮨주의가 새로운 대안 체제 담론으로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본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이 글에서 자신들이 내세우는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존재들은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그 보기이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은 더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탈국가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다른 코뮨주의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국가의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의 발명”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다음 주에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그야말로 만연한 시대다. 지난 십여년간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부와 권력의 장에서 계속 배제되고 추방되었다.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이름으로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 나라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정도로 권력과 자본의 지구적 폭력에 난타당하고, 마치 이국인처럼 나라 안에서 거처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말 그대로 ‘홈리스’가 우리 사회 대중들의 보편 형상이 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추방과 배제가 노골화될수록 사람들은 그것들에 더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삶의 소속과 근거를 얻기 위해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감수한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반밖에 안 되는 임금에 고용 기간만 일정하게 보장하는 직군·직무군제도 감지덕지 받아들이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농민이나 어민은 적은 보상금이나마 더 받으려고 경쟁한다. 일자리만 늘어난다면 자연이 어찌되든 대운하라도 만들라 하고,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국가 지도자나 기업가의 부도덕성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삶의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본의 온정에 기대를 걸게 하고, 국가와 자본의 힘은 습한 환경의 곰팡이처럼 이런 불안 속에서 급속히 증대된다.

이제야말로 다른 삶의 방향을 발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좋은 정부와 좋은 기업에 대한 소속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삶을 시도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뮨주의는 이처럼 우리 삶을 보살핀다는 환상 속에서 사실상 우리 삶을 지배하고 한정짓던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이며,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다.




코뮨주의를 제창하면서 우리는 국민이나 시민,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진행된 과거 운동의 유산, 곧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1987년의 ‘국민운동본부’는 오늘날 더는 작동할 수 없다. 최근 민노당의 자주파 논란에서 학계의 민주주의 논쟁까지 ‘국민’의 표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국민이 아닌 자, 시민권이 없는 자, 가령 이주노동자 같은 존재들이 들어 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그들’이 새로운 ‘우리’임을 깨닫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대중들 삶 지배하고 불안 키워
사회운동도 자격·소속에 기반
이주민·실업자·비정규직 등 외면

 

노동 운동은 어떤가. 취업과 노조라는 자격과 소속을 기본으로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현재 민주노총이 자격과 소속이 불투명한 실업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실질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나 자본보다 먼저 대기업 노동조합들, 현장의 운동가들이 자격과 소속을 은연중에 문제삼기 때문이다. “우리도 힘든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단결시켰던 동일성의 표상이 이제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을 내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동원했던 방식이 그렇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를 늘리고 소속을 늘려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을 늘리고, 민주노총의 발언권을 키우고, 민노당의 국회의원을 늘리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확대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소속이나 자격, 근거의 공유 없이 서로의 자유와 해방, 삶의 행복을 위해 공통 작용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의 기예이다.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이 만나는 데 인간이라는 공통 근거가 필요하지 않고, 비정규 노동자가 농민회와 접속하는 데 생산자라는 공통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의 싸움이 이동권이라는 공통의 권리를 창안해낼 수 있을지, 홈에버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홈에버에 물건을 납품하던 농민과 함께 대형마트를 극복하는 농산물 유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이다. 상이한 존재들의 이러한 공통 운동은 서로의 삶에 절실한 상호협력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맞설 힘과 방향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상을 공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공상적인 것은 국가의 핵심을 장악한 후 그것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구체적 이미지도 없으면서 국가를 장악한 후 그런 삶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을 낳을 뿐이다. 대안적 삶을 꿈꾸었던 공산주의가 삶의 다양한 특이성을 상실하고 획일적 국가 독점 체제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도 국가권력만 확대
지식·정보 등의 독점 아닌 공유 바탕
각계각층 사람들의 공통 운동으로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길 찾아야

 

이런 면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좌파들의 갈망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복지국가 모델은 국가 권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보살핌을 확대하는 것이다. 국가는 복지제공을 명목으로 삼아 사람들을 분류 관리하고 서비스를 매개로 지배력을 키운다.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삶의 의존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 삶에 대한 보장이지 국가권력의 확대가 아니다. 우리는 소속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삶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하는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공공성 강화는 이 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코뮨주의자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진보진영에서 그동안 강조해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공공성의 강화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는 국가 독점과 사적 독점(계급 독점)이라는 나쁜 선택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교육을 국가가 독점해야 하느냐 민간이 독점해야 하느냐 하는 나쁜 선택지를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이든 사적이든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깨고 자유롭게 소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비국가적 공공성’인 소통과 협력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 에너지, 생명 자원, 그 무엇이든 함께 소통하고 생산하는 비국가적·비시장적 네트워크를 구축해가야 한다.

사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강할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해 보이고 안정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은 해법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그것들은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국가나 시장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 고병권 대표
 
단지 지금처럼 그것들에 대한 의존을 높여 놓고서는 결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것은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지형을 바꿀 힘과 방향을 알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

 


고병권 대표는 1971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가, 공저로는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습니다.

 

자본지배 ‘벗어남’ 넘어 ‘극복·대체’ 노력을
‘코뮌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 코뮌 운동의 구심점인 ‘민중의 집’의 활동 모습을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볼로냐 민중의 집 소개 책자에 실린 만화다. 이곳은 생활협동조합의 기능은 물론 문화 활동과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심광현 교수는 ‘민중의 집’이 생태적 문화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올 여름께 한국에도 ‘민중의 집’을 세울 계획이다. 심광현 교수 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생태문화적 혁명이다

 

 

지난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새로운 대안 체제 모델로 ‘코뮨주의’를 정립하면서 그 특징을 개괄적으로 밝혔다. 그는 우선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시각을 보였다. 탈국가적 태도도 눈에 띈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소통과 협력의 삶으로 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심광현 교수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우선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자칫 고립된 공동체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존재들의 공통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그는 새 대안 체제는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을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다음주에는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해 내내 20여 년 간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 민주주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후퇴로 귀착된 원인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무색하게 2007년 대선에서 투표자 다수는 양극화를 초래해온 신자유주의를 아예 전면화하려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다. 대단히 위험한 ‘이열치열’ 식의 논리인 셈이다.

이에 맞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투자국가, 사회적 공화주의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윤율 하락으로 일부 첨단산업과 투기금융에만 투자하는 신자유주의의 장기 하강 궤도에서 성장과 분배의 끊긴 고리는 다시 연결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성장의 떡고물이 언제 내게 떨어지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성장과 소비의 악순환에 중독된 탓이다.

민주주의란 본래 대중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자율·자립에 기반 한 자기-통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자기-통치의 권리를 오직 투표 때만 행사하면서 모든 책임을 자본·국가나 ‘진보개혁세력’에게 돌릴 경우 민주주의의 실종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새로운 진보정당을 구성해도 대중의 자기-통치가 부재할 경우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그동안 대의제에 넘겨줬던 정치적 자기결정력을 되찾고, 자본주의적 성장과 소비 논리에서 벗어나 호혜적 생활양식을 새롭게 꾸리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또 자기-조직적인 문화적 역능을 키워내어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하고 대체할, 자기-통치적인 대중적 네트워크(“민중의 집”)를 아래로부터 새롭게 구성해가야 한다. 이 새로운 운동을 우리는 ‘코뮌주의’라고 지칭한다.(※심광현 교수는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는 달리 코뮌주의라는 용어를 썼다. 고 대표는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개념은 공산주의 번역어인 ‘communism’에 하이픈을 넣은 ‘commun-ism’이라면서 ‘코뮨-주의’로 표기해야 한다는 견해다. 반면 심 교수는 주민 자치체를 뜻하는 프랑스어 commune의 우리말 표기인 ‘코뮌’을 따라 써야 한다는 견해다. 두 의견을 모두 존중해 필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기한다.)

 

성장·소비논리에 중독된 대중들
자기 통치력 상실로 민주주의 후퇴
자기 삶의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연대 구성해야

 

흔한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맞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의한 공동생산을 강조하는 번역어 ‘공산주의(共産主義)’와는 무관하다. 코뮈니즘을 ‘코뮌주의’로 재번역하려는 것은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 자유롭고 호혜적인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코뮌’의 새로운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에도 몇 가지 중요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고병권은 코뮌주의를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했다. 그러나 자본·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다. 노장 사상이나 간디의 운동, 모르몬교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 운동도 국가와 자본의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물론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나는” 실험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후자의 노력이 전자의 노력과 선순환 구조를 이루지 않는 한, 이는 자본·국가의 지배에 무해한 소수자들의 자족적인 유토피아적 실험에 머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고립된 기묘한 성을 세우는 데에 몰두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에 반대했던 오웬의 ‘홈-콜로니’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운동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많은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러하듯이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 없는 코뮌 운동은 고립된 공동체주의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제도 내 사회화 투쟁에만 매몰될 경우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에 실패하고, 이념적 전위주의로 고립되거나 개혁주의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대체할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자가 자기 혁신을 통해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정규-비정규·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의 호혜적 협동 필요
화폐적·상품적 생활양식 벗어나
생태적 문화사회에서 대안 찾아야

 

그동안의 국민운동, 민주노총 운동, 민주노동당 운동, 시민운동 등은 대의제 운동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에 비판받을 점이 많다. 또 공공성의 강화가 단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권력의 장악을 넘어 국가권력을 해체할 비국가적 공공성을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 운동들이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기 때문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공통작용”을 찾아야 한다는 고병권의 주장은 원인 분석과 대안으로 적절한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해고 노동자가, 정주노동자보다 이주노동자가,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자 대신에 후자만의 공통작용이 대안이라고 보는 것은 마치 남성보다 여성이 열악한 처지이므로 오직 여성들 간의 공통작용만이 대안이라는 기이한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들뢰즈·가타리도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소수자를 고정된 형태에 한정하지 않았다.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은 “목욕물 갈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 관념적 도식이다. 자본과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뿐만이 아니라” 이를 “극복·대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은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에 붙여진 이름인 까닭이다.

동시에 만연해 있는 화폐적·상품적·반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화폐적·비상품적·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로 대체해가는 연속적 노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구별해주는 생태문화적 특성이다. 호혜적 협동 속에서 지적·감성적·인성적·신체적 역능을 극대화하면서 타자와 적극 소통하는 다양한 문화적 실험들을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과거의 정치혁명과는 다른 자기조직적인 문화정치적 혁명으로 발전시켜줄 핵심이다.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는” 코뮌주의는 노동을 단지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양식을 변혁하여

 
»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노동의 폐지”와 더불어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각 개인들의 예술적·과학적 교양 등”을 통해-자연과 공생하는 한에서만- “생활과정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사회”, 곧 생태적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광현 교수는1956년생으로 서울대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생태문화사회 구성체와 코뮌주의 운동의 관계, 생산 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프랙탈〉 〈흥한민국〉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등이 있습니다.

 

코뮤니즘 ‘발견’하고 현실화를 ‘발명’하라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1968년 5월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학생 시위대. 프랑스 좌파는 ‘68혁명’을 계기로 ‘탈중앙·탈집중화’ 의제에 눈을 떴다. 조정환 강사는 이 운동이 학생이나 여성·동성애자 등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의해 전개되어 나갔다는 점에서 정치적 태도의 다양성과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 시기 대안체제 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이미 실재한다

 

 

지난 두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코뮨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두 가지 쟁점이 두드러졌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이에 대해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고 대표는 또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을 것이라며 탈국가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반면 심 교수는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은 다르다며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조정환 강사는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아이러니하게도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에 붙일 이름으로 코뮤니즘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라고 했다. 이런 노력들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으로 그는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을 들었다. 다음주에는 이 주제의 마지막 논자인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신자유주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삶의 곳곳에 깊숙이 도입되었고 이명박 후임정부에서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집중점이라고 주장해 왔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선거 패배와 혁신, 탈당, 분당, 창당 급물살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대응, 곧 복고적 대응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생태주의적 가치의 정치적 혼합 혹은 정치의 사회주의적 급진화 등의 주장이 새로운 대안처럼 제기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제국은 이러한 정치들에 대한 면역력과 포섭력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치적 균열과 다종적 분기의 이 현상들이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징후들임은 분명하다. 그 요구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유주의 및 신보수주의 우파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좌파들 모두가 한사코 억제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인바, 그것에 붙일 이름으로는 코뮤니즘(communism)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은 없다. 이것은 정확히 160년 전 마르크스가 불러내었으나 20세기의 각종 동구적·서구적·제3세계적 사회주의들이 먼 미래로 추방하거나 복지국가, 관료국가의 울타리 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던 바로 그 괴물의 이름이다. 코뮤니즘을 추방하고 가두었던 저 역사적 울타리들을 파내면서 지금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다.

코뮤니즘은 우리가 미래에서 현재 속으로 도입해야 할 어떤 이상적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으로 이미 실재한다. 자본은 사회 속에 협력관계를 도입하고 촉진함으로써만 축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착취는 인간들 사이의 협력과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에 대한 착취이기 때문이다. 착취가 노동시간에 대한 착취로 나타나는 순간에조차 그것은 ‘사회적인’ 노동시간, 곧 협력의 시간을 착취한다. 따라서 자본의 성장과 발전은 동시에 이 협력관계의 성장과 발전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코뮤니즘이라는 사람들간의 협력관계
착취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는
자본 등 세계화 속에서 이미 성장·발전
그 잠재된 실재의 발견이 최우선

 

마르크스는 착취관계의 발전을 규명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발전하는 협력관계를 밝힐 개념들을 발명했다. 생산 확대에 따른 욕망의 사회문화적 확대, 노동의 사회화, 일반지성의 형성 등이 그것이다. 아니 ‘추상노동’부터가 사회적 협력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비물질화와 혼종(뒤섞임)을 통한 노동의 공통되기, 금융화를 통한 자본의 공통되기, 네트워크적 제국화를 통한 주권의 공통되기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 공통되기는 적대적으로 발전한다. 점점 공통화하는 삶에 대한 공통적 식민화가, 다시 말해 공통된 것의 지구화에 대한 공통적 착취의 지구화가 진행된다. 주식회사가 자본의 사회주의였듯이 초국적 금융자본과 제국은 자본의 코뮤니즘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반혁명적 코뮤니즘이다. 우리는 자본의 코뮤니즘이라는 거울상을 통해 삶의 코뮤니즘의 실재성과 그 성숙을 엿볼 수 있다. 코뮤니즘은 발명되기에 앞서 우선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들은 당대의 협력관계와 공통된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자본주의적 추상 내부에서 주체화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관리하려 했다. 오늘날 사회주의 정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코뮤니즘의 현실화를 봉쇄하는 자본주의적 위기관리 방책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제는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즘이 현실화하고 활성화해야 할 ‘공통된 것(the common)’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해온 산물이라는 점에서 전자본주의적 공유지(commons)들과는 다르며 전자본주의의 지역적 소공동체들인 코뮌(commune)들과도 다르다. 파리 코뮌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전국적 정치공동체들도 오늘날의 ‘공통된 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든 공동체들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그 동력을 획득하지만 오늘날 공통된 것은 그 어떤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삶의 내재적 공통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이다. 특이적 공통으로서의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은 이러한 노력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들이다.

 

‘소공동체들의 소통 중시한 코뮨주의’와
‘국가를 정점에 둔 다층적 코뮌주의’는
새로운 발명 아닌 실험·관리에 그쳐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할 코뮤니즘 필요

 

고병권과 심광현은 기존의 자본주의 정치들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필자와 공통적이다. 고병권이 코뮤니즘을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으로 정의할 때 그것은 나의 코뮤니즘 개념의 뒷부분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코뮤니즘적 발명은 잠재적 코뮤니즘의 발견에 정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소속, 자격, 근거 등의 동일성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바로 그것들 속에서 잠재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까지 버려 버린다. 그래서 코뮤니즘의 발명은 발견된 실재 위에서의 그것의 발명적 현실화로서보다는 의지적 실험으로 축소된다. 그 실험의 정치는 지금 소공동체로서의 코뮨들을 도입하고 촉발하고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코뮨-주의’로 발전되고 있다.

심광현은 이것의 위험성을 ‘고립된 공동체주의’라는 말로 표현해 낸다. 이 위험을 벗어날 심광현의 ‘코뮌주의’적 묘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험적 코뮌들의 발명의 층위 위에 비국가적 공공성의 발명이라는 층위을 얹는 것이다. 이 두 발명의 층위들은 국가를 민주화할 층위들인데 국가는 이들의 상층에 놓인다. 그런데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이 삼층의 선순환 구조야말로 지금까지 자본이 협력을 흡혈하고자 사용한 바로 그 구조가 아닌가? 그리하여 심광현은 다중의 전 지구적 공통되기를 코뮌적 발명들로 환원한 후 그 위에 몇 겹의 중층적 구조물을 얹어 그것을 관리하는 정치를 ‘코뮌주의’적 정치라고 한다. 다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고병권의 실험적 위험보다 더 큰 구조적 위험을 삶에 도입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이 변형된 사회주의가 ‘호혜적 협동 속에서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문화적 실험’들의 성과까지 체계적으로 금력(金力)으로 전화시킬 연금술적 장치로 기능할 것임을 앞서 보여준다.


 
» 조정환 강사
 
이 위험들로부터 우리는, 코뮤니즘적 발명들이 실험이나 관리를 넘는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하려면 발견되는 코뮤니즘의 발명적 현실화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정환 강사는 195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탈근대적 사회운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등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자본주의 안의 코뮤니즘’ 아닌 반자본주의로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멕시코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가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 구조를 고발할 의도로 그린 1933년 벽화 <현대 산업>. 정성진 교수는 자본주의를 뛰어 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고전적 코뮤니즘과 접목해야

 

지난 세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가 논쟁을 펼쳤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독점만 강화할 것이라고도 했다. 심 교수는 고 대표 주장은 동질성 대 이질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지난 주, 조 강사는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이라면서 이는 “다중이나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했다.

정성진 교수는 코뮤니즘 담론의 난점으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뛴 데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의 ‘탈주’는 자본주의 영토를 더욱 넓힐 것이라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다음 주에는 논쟁의 새 주제인 ‘이명박 정부의 성격,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코뮨주의 혹은 코뮤니즘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코뮤니즘은 이전에는 ‘공산주의’라고 번역했던 ‘communism’이라는 영어 단어를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코뮨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코뮨’(commune)의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표기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뮤니즘 담론은 고병권과 이진경이 주로 주장하는데, 자율주의자 조정환과 생태적 문화사회론자 심광현도 이를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고병권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노력”으로서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되며, 실제로는 공동체주의로 구체화된다. 반면, 조정환은 코뮤니즘을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로 정의하고, 이는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 곧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의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 복원이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미지 쇄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 재건 길 마련한 것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유행은 옛 소련의 몰락 이후 득세했던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이나 ‘역사의 종언’이 퇴조하고 자본주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갈망이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뮤니즘 담론은 그 동안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 사민주의가 억압·왜곡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그 동안 국유화, 명령경제, 수용소군도의 음울한 세계로 그려졌던 코뮤니즘을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과 이진경)으로, 혹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기쁨”(네그리와 하트)으로 환골탈태한 것은 코뮤니즘 담론의 주요한 공헌이다.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의 실현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달성해야 할 과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개량화 경향에 제동을 걸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을 재건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으로서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을 그 뿌리인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와 난점이 드러난다. 우선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이 현재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미래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없다. 코뮤니즘의 잠재태가 자본주의 안에서도 “자본관계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서 형성·발전된다는 말은 맞다. 또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운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코뮨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안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반복한 것이다. 코뮤니즘 담론에서 새로운 점은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 이행의 주객관적 조건의 실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실의 지배적 체제로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 뛴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체제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지배적인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문제는 회피될 수 없다.

코뮤니즘 담론은 이행의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도정에서 정면 돌파해야 할 장애물들인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와 억압적 국가권력을 모두 회피하거나 무력한 것 혹은 무해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에 봉사한다. 단지 “탈주”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투쟁의 거대한 고양 없이 “비국가적 비시장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체제와 억압적 국가권력은 해체될 수 없다. 자본과 국가를 배경으로 한 시장의 논리,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 자체가 코뮨주의의 “잠재태의 현실화”에 근본적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이 이미 실재한다는 건 비약
자본주의 지배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비국가·비시장적 네트워크 실현 힘들어
대중투쟁 통해 자본주의 경계 넘어서야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대중들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대중의 갈망을 뭔가 문제 있는 “증상”이라고 탓하거나 무시하고, 이를 모종의 대안 공동체 실험들로 대신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대중들의 이와 같은 갈망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구명하고, 대중의 갈망과 분노, 투쟁과 결합하여, 이를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코뮨주의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조직노동운동처럼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한 운동이나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을 “복고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 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이 국가에서든 자본에서든 “자격이나, 소속,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판매에 성공할 때이다. 극소수 자산가를 제외한 대중은 이와 같은 노동력 상품의 판매에 실패할 경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에 의존하거나, 소상품생산자(자영업자)가 되는 도리 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지 중 노동력 상품 판매와 복지국가를 거부하므로, 결국 남는 대안은 소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주변부에 기생하는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처럼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장의 논리는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로 발전하여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이 애호하는 “비시장적 네트워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 자체가 거부되고 폐지되지 않는 한, 고립된 주변적 공동체들 간의 연계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이 탈주하고 난 다음 생겨난 국가와 자본의 빈 자리는 다시 시장에 의해 채워질 것이며, 그 결과 자본주의 영토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 정성진 경상대 교수
 
코뮨주의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퇴각하거나 시장으로 대체되기는커녕, 상품화의 확대와 경쟁력의 강화, 착취의 강화에 봉사하는 국가로서 그 역할이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본주의 국가 분쇄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역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이 진정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 동안 멀리했던 자신의 뿌리와 다시 접목할 필요가 있다.

정성진 경성대 교수·경제학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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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서구-과거와 같고도 다른 ‘한국형 신보수 정권’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지난달 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 모습. 조희연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한 뒤 이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규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변화·불변성 함께 판단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2주가 됐다. 갓 출범한 정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다소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 등을 통해 새 정부의 국정 목표와 정책 기조는 대략적으로 드러난 상태다.

‘10년 만의 보수파 정권’ 탄생으로 학계에서도 새 정부의 구조적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활발하다.

주요 논점은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다. 반면 박상훈 출판사 후마니타스 주간 등은 본질적으로 구보수와의 차별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신보수’라는 정의에 반대한다. 일부 논자들은 ‘신보수’ 규정이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흐려놓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선명하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조 교수 글에 이어 고세훈 고려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 홍성민 동아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새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도 구보수 정권과의 동질성이 존재함을 강조했다. 시장자율주의와 개방주의가 차별성이라면 개발과 성장주의는 동질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는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가끔 농담처럼 나는 ‘세상이 변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사물은 변화·발전한다’는 점에서 볼 때 부질없는 기대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면하고 변화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응하는 내 자신의 변화 자체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성립이라고 하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서 그 변화를 해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언제나 새 정권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 참여자들에게는 두 가지 시각이 교차했던 것 같다. 하나는 ‘불변론적’ 시각 혹은 정서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정권의 구조적·계급적 성격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엄청난 변화를 지적하는 ‘변화 강조론’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 ‘변화’의 측면과 ‘불변’의 측면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나는 이명박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당연히 60·70년대의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구보수 정권으로 규정될 수 있다. 구보수 정권과 신보수 정권은 차별성과 연속성을 갖는다. 먼저 차별성을 보자. 구보수가 초기 산업화 단계의 개발독재였다면, 신보수는 ‘포스트-개발’ 정부이고 ‘포스트-독재’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보수를 냉전적인 반북(反北)적 보수이자 ‘안보형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면, 신보수는 ‘시장형 보수’ 혹은 ‘신자유주의적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 특별히 보수세력 내부의 헤게모니 분파의 전환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했다면 이제 이명박 정부는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표방한다. 반대로 연속성을 보자. 무엇보다 과거 독재시대의 집권당이자 90년대 민주개혁 국면에서 반개혁에 섰던 보수정당이 집권당으로 복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나아가 신보수는 구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또한 신보수는 탈규제와 시장자율을 강조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보수의 ‘친기업주의’와 ‘친자본적 성격’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단지 그 형태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이 제 발로 서지 못하고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했던 ‘원시적 축적’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구보수가 구현했다면, 이제 자본이 제 발로 서서 자력으로 중소자본과 기타 사회영역을 통제하고자 하고 국가적 지원 없이도 글로벌 자본축적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신보수는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탈규제’ ‘자율경쟁’이 핵심 담론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보수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도 리버럴 친미 정부의 붕괴가 좌파 정권으로 이어진 남미와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이명박-박정희 신.구 정권은
개방주의-보호주의 차별성과 동시에
보수정당 재집권이란 연속성 지녀
개발성장-친기업.친자본 성격 계승도

 

 

앞서 ‘한국형’ 신보수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보수 정권 하면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 등 서유럽의 우파 정부를 연상한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한국적·동아시아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80년대 이후 유럽의 신보수 정권이 60·70년대 복지국가를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했다면,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포스트-복지국가적’ 신보수가 아니라 ‘전(前) 복지국가적 신보수’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신보수 정권은 사회민주당 정부 시대의 문제점을 ‘복지병’ ‘산업공동화’ ‘과부하 국가’ 등으로 진단·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사회민주당 정부 스스로도 ‘복지 요구의 확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조세 기반 간의 괴리’라고 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독재 중도 리버럴 정부(참여정부) 하에서 전면적인 복지국가로 이행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은 초보적인 복지 확대의 시도조차도 ‘좌파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가공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에 기초해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의 보수, 그 일부로서의 신보수가 경제적으로 배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에서 온건파가 리더십을 가져도 아무것도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수 없는 조건에 놓인다. 이는 신보수 정권하에서 이른바 ‘개량화’의 기반이 대단히 취약함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시장자율과 자율경쟁을 지배담론으로 하지만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신자유주의적 국가들의 현실 모습은 개별 국가 내의 계급적·사회적 역관계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크게 유형화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하더라도, 북구형의 ‘신조합주의적 유형’, 영미 식의 ‘순수 시장자유주의적 유형’,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개발독재적 국가개입주의의 관성, 국가의 정책수단을 친기업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공권력에 의해 배제적 노동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국가의 공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부운하와 같은 친자본적인 대규모 국가프로젝트의 개발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와 달리 복지국가 이행못한 현실 속
보수만이 아닌 진보적 기대 실리고
시장자율 구호 뒤 국가개입 관성도
‘민주화 퇴행’ 대신 ‘보수의 진화’로 봐야

 

셋째, 한국의 신보수 정권을 성립시킨 대중들의 요구가 단지 보수적 요구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하는 중도 리버럴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불신에는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의 극복, 사회복지 확대, 일자리의 확대 등 진보적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각종 진보적 요구들이 다 이명박 정부에 투사되어 있다. 또한 서구의 신보수 정권에서는, 국가 실패가 강조되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역할 확대와 가족의 강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복지가 발달되지 않은 조건에서※국가가 과부하가 아니라※가족이 ‘과부하’ 상태에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로 인하여 많은 중하층 가족은 사회의 부담을 이전보다 과도하게 떠안았고, 그 부담으로 더욱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할 정도다. 이는 한국의 신보수 정권이 서구와는 다른 사회적 요구와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신보수 정권 시대의 등장을 아시아 민주화의 일반적 경로에서 보면 ‘퇴행’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개발독재적 예외국가’를 벗어나서 “자본주의적 ‘정상’국가”로 변신해 가는 일종의 ‘보수의 진화’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진보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되면서 보수가 응전한 결과이다. 이제 ‘진화된 보수’에 영향을 받고 응전하면서 ‘진보의 진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 조희연 교수
 
조희연 교수는 1956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시아 민주화의 복합적 갈등’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의 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계급과 빈곤> 등의 저작이 있습니다.


 
기사등록 : 2008-03-07 오후 07:29:19 기사수정 : 2008-03-07 오후 08:58:14

 

한국형도 신보수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일 뿐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새로 출범한 이명박 대통령(왼쪽) 정부 성격을 ‘신보수’라고 규정하는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 체제와의 차별성에 그 근거를 둔다. 하지만 고세훈 교수는 박정희 체제가 ‘보수’의 가치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새 정부에 붙이는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불필요한 수식어는 왜곡 우려

 

지난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권의 성격을 ‘신보수’로 규정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개발과 성장주의라는 동질적 측면이 있음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봤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닌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한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이런 견해에 대해 고세훈 교수는 ‘보수가 의미하는 바’에 근거해 반론을 폈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전제하거나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보수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박 정권은 보수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도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고 교수는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다며, 새 정부를 신보수라고 일컫는 것은 진보정권으로 일컫는 것만큼 잘못된 규정이라고 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지식계가 소란하다. 세월의 변화와 연속성을 모두 담아내려니 성격 규정에 수식어가 복잡하게 달린다. 나름대로 서술적 의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 분류의 이론적 의의는 사라지고, 우선 너무 복잡해서 대중적 전달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가 있다면, 중국형·터키형·이탈리아형 신보수가 없으란 법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분류를 하는지, 그런 분류작업이 학문적·실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적 담론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등을 수식어 없이 갖다 대기도 껄끄럽다. 무릇 이념이나 개념들은 특정의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에서 태동하고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에 대해 성격 규정을 서두르는 것 또한 걸린다. 그러나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분류는 필요하고,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할 테니까. 그럼에도 현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국형’이란 수사가 주는 부담감도 문제지만, 그것이 이미 역사성을 내재한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개념적 근간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려면, ‘한국형’이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일정한 형용 모순이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외적으론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국가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전제하거나 추구하며, 대내적으론 유기체적 일체성을 역시 전제하거나 추구한다. 보수주의가 어떤 계급적 혹은 계층적 체제로 귀결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 개념과 불가분
개인 의무·책임 중시하고 복지 기여해
‘박정희 체제=구보수’라 말하지만
되레 공동체 허물고 새 기득권층 형성

 

이 점은 오늘날 신보수가 아무리 시장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왕왕 가장 국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시장이나 시민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한 개념이다. 오히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를 원자화된 개인들로 분해하는 시장체제보다는 관계적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다. 사실 보수주의 자체가 중세적 질서에 대한 일정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소유하다’(own)란 영어단어가 ‘빚진다’(owe)라는 중세적 어원을 가진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중세 계층간의 쌍무적 책무의식에서 연원한다는 점은 보수주의의 공동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주의가 사민주의 못지않게 서유럽 복지국가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국가복지는 취약하더라도 민간복지 혹은 자선의 전통이 굳건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선진국에 시장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듯이 보여도, 그 배후엔 구보수적 토대가 엄연하다. 이러한 연속성은 시장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과정이 늘 심각한 내적 갈등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영국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래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에 이르는 전통적 보수주의는 한때 에드워드 히스나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적 정치에 의해 뒷전에 밀리기도 했지만,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처주의가 당대적 힘으로 입증되려면 이른바 웨츠(wets)로 일컫던 구보수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보수’ 아닌 ‘청산’할 유산들만 떠안은
새 정권에 ‘신보수’란 수식어는 잘못
‘한국형’이란 말도 역사성 없이 혼선 불러
되레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빌미 줄 뿐

 

우리의 신보수주의는 과거 박정희 체제를 보수체제로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기실 어떤 적극적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그 동기·과정·결과가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국가자율성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유럽 보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대외적 의존을 근간으로 한 대내적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었다. 우리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은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만 기능해 왔다. 대내적으로도 국가는 수탈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복지 의식 저변에는 반국가·반정치 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미 와해된 공동체적 조건에다 신자유주의를 대세인 양 수용하면서 개인 중심의 극단적 혈연주의, 때론 가족조차 팽개치는 (이혼율, 해외입양률, 유아방기율, 낙태율, 출산율 등에서 나타난) 극단적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 와 있다. 요행과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정직한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고, ‘못사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변의 동족이나 북한을 경멸하는 저급한 의식상태가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는 것이다. 신보수나 신자유는 모두 중세라는 장구한 세월에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근대적 경험과 정치적 실험들이 농축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 정권에는 신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란 것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유용성 혹은 현실과의 거리 조율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건가. 우리의 실용주의도 실상은 성장주의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터잡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 이념, 내 이해관계가 마침내 지배적으로 됐다고 흡족해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릇, 음치가 합창단에 앉으면, 테너나 바리톤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동적으로 테너가 되고, 바리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치를 합창석에 앉히지 말라. 음치를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음치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렇다 치고, 이 정권에 신보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어떻든 그것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규정이다. 장관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투철한 국가의식은 애초에 언감생심이었고, 기형적인 한국적 시장체제에서 ‘성공한’ 몽롱한 얼굴들뿐, 진지하고 당당한 시장주의자의 모습조차 거기엔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별명을 그냥 ‘이명박 정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어떤 점에선 백번 옳고 또 잘한 일이다.

 
» 고세훈 고려대 교수
 
예명으로 언론이 갖다 붙인 고소영, 강부자 정부면 충분하다. 너무 냉소적이고 안이한가? 그래도 나는 이 정권에 신보수의 치장을 해 줌으로써 지레 면죄부를 주고, 그것이 역사에 무임승차하도록 빌미를 주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

고세훈/고려대 교수

 


고세훈 교수는 1955년생으로 미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 국가복지사상의 역사, 조지 오웰의 삶과 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영국노동당사>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페이비언 사회주의>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계급성 뚜렷한 경제·물질주의적 우파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이명박 정부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이 강한 경제적 우파에 물질주의의 이념이 결합되어 있다는 게 강원택 교수의 분석이다. 지난 1월 대운하 착공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왼쪽)과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도보 순례를 벌이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자기 변신한 보수

 

지난 두 주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 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국가개입 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신보수’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면서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관점을 보였다.

강원택 교수는 ‘신보수’ 논쟁에서 비켜나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형 분석에 치중했다. 그는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를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요약했다.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보수 세력의 경우 경제적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보수에서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또 다른 가치로 물질주의를 들었다. ‘물질주의적 우파’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보수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갈등 지형이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결 혹은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와 같은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질서나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치나 대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항상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보수라고 해도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보수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전의 보수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의 보수 역시 변했다는 인식이 이 논란 속에는 깔려 있다.

200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한 것은 보수파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구보수가 지녔던 지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유권자에게 제시했기 때문에 보수 세력은 승리했다. 구보수가 대표했던 가치는 냉전 시대의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었다. 과거 냉전 시대, 권위주의 체제의 이념적 유산이 우리나라 구보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이명박의 보수는 냉전적 보수에서 벗어나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냉전시대 반공이데올로기 기반으로
다양한 계층 속해 있던 구보수와 달리
이념 벗어나 경제적 우파 정책 강조
기득층 대변·친기업 등 계급속성 강화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이라는 용어는, 노무현 정부의 과도한 이념성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념성이 강조되었던 구보수로부터 거리두기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여기서 ‘실용’에 대비되는 ‘이념’은 서구 정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경제적 가치를 토대로 한 좌파 대 우파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북관계, 대미관계, 국가보안법 등 반공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강조하는 실용은 이런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 성장과 효율 추구라는 전통적인 우파 정책의 강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기변신으로 이명박의 보수는 더는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지키려는 ‘꼴통’ 보수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과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던 많은 ‘진보적’ 유권자들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를 우파로 지칭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구보수에 비해서 계급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보수 세력은 계급적 속성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는 개인의 경제적 지위나 계급과는 무관한 개인의 가치와 신념의 문제였다. 계급이나 소득과 무관하게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닌 이들이 과거의 보수 세력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 따라서 다양한 계급이 보수 세력 내에 공존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념의 문제는 계급보다 세대적 요인이 더 큰 차별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보수이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곧 과거 보수 세력은 경제적 의미의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는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보수 세력의 계급성이 강화되는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부자’ 내각, ‘고·소·영’과 같은 용어는 이명박 정부의 계급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재산과 학연·지연·종교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명박 정부는 조각 과정에서 이미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역시 계급적으로 노동보다 자본에 대한 강한 선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풍요 부르짓는 물질주의가
대중지지 이끌어내 대선 승리했지만
환경·노동·인권 등엔 소홀 드러나
경제가치 둘러싼 좌-우 대결 신호탄

 

이처럼 계급적으로 비교적 편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승을 거둔 이유를 단지 냉전적 보수로부터의 이탈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지닌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물질주의’이다. 물질주의는 인간 삶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질서의 유지와 같은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강조한다. 삶의 질의 추구에 앞서 생존을 위한 최소 요건의 충족을 선호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에서는 개발과 경제 논리가 우선시되며 법과 질서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과 같은 개발 논리, 노동쟁의에 대한 엄벌과 질서와 법치의 강조 등은 이명박의 보수가 담고 있는 물질주의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질주의적 호소의 위력이었다. 아파트 가진 이들은 부동산 재개발, 시장 상인들은 경기 회복, 젊은이들은 취업 등 물질주의적 메시지로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의 지지를 확보해 간 것이다.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강조는 커다란 정치적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대운하 논란에서 드러나는 환경 문제의 경시, 각료 임명 과정에서 본 대로 성 평등 문제에 대한 취약함, 노동이나 인권 문제에 대한 소홀함 등이 이명박의 물질주의적 편향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경제적 성취와 가시적인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물질주의는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중시하는 또 다른 가치인 것이다.

결국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향점은 물질주의적 우파의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정치적 변화의 특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과거 한국 정치의 균열이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에 기반해 있었다면 이제는 서구의 경험을 고려할 때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장·효율 대 분배·형평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이념 대결, 개발·안전 대 보존·자유라는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 이념의 대결이 한층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축 역시 지역이나 세대를 넘어서 사회경제적인 의미의 계층·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 강원택 숭실대 교수
 
과거 우리 사회의 진보가 권위주의 유산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자임하면서 정치적 신뢰를 확보해 왔다면, 이제 이명박의 보수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진보의 역할은 이미 그 소임을 다한 것 같다. 과연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구현하면서 좌파적 분배 정의를 강조할 우리 시대의 진보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변화된 시대에 걸맞은 진보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강원택/숭실대 교수

 


강원택 교수는 1961년생으로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한국의 선거정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보수’지만 ‘보수’일 수만은 없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홍성민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정치사회/시민사회 그리고 정치주체와 국제정치 등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예방을 받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변수에 따라 다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 그리고 강원택 숭실대 교수가 지난 세 주 이명박 정부의 ‘보수적 성격’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것이다. 반면 고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을 보였다. 강 교수는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우회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는 이 글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포섭되어 있는 점과 관료들의 정책 지향 등을 들어 현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199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계급적 대립 지점이 흐려지고 있다며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유권자들의 좋고 싫음이라는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결론적으로 새 정부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이런 4차원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다음주 조희연 교수가 그동안 제기된 반론들에 재반론을 펼친 뒤 이 주제의 논쟁을 마칠 계획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함에 있어서 지식인 사이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현실의 변화가 매우 급격하여 논의의 수준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한국 정치현장이 그런가 보다. 기초적인 정치학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차분히 따져보자.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네 가지 수준의 층위가 있다.

첫째는 정치 지도자의 개인적인 퍼스낼리티에 주목하는 방법이다. 개인의 성장배경, 사회적 경험, 인사운영의 스타일 등이 정치권력의 전반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추적하는 경우이다. 기업가 출신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노선을 앞장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있어, 그 결과가 사뭇 궁금하다. 그러나 과거 군부독재와 같이 권력이 개인에게 독점된 상태가 아니고 보면, 대통령의 특성만으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둘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의 관계 속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찾아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정권의 성격을 보수-진보로 구분하는 수준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분류가 매우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18세기의 진보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19세기의 진보는 국가개입을 요구한 바 있다.

 

정치가 시민사회에 끼치는 영향력
정권·관료들의 정책지향 볼 때
이명박 정부 보수라 부를 수 있지만
보수-진보 전통적 대립구도 무너져

 

또 정치권력을 보수-진보로 양분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에 대하여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직후에 정치권력을 진보/보수로 양분하는 관례가 생기는데, 이때 귀족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부르주아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이 사회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상황이 다르다. 우선 최근 10년 사이에 민주세력을 자임하고 등장한 행정부의 영향력이 시민사회의 보수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실질적’으로 포섭되었다. 현재 불거지고 있는 삼성의 로비의혹이 전형적인 사례다. 따라서 정치세력이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시민사회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현실적인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던 것이 노무현 정권의 특징적인 사례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이념적 기원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의 사회적 기원은 군부독재였지만, 당시에 실질적으로 전개된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성격이었다. 당시 경제운영을 전담했던 김재익은 미국에서 통화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민영화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관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외면만을 보게 되면, 실질적인 내용을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 취향·국제관계까지 고려할 때
정치권력 하나의 노선만 고집 못해
정치-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축 면밀히 주시하고 조율해야

 

이러한 세 가지 변수를 두고 볼 때 이명박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불러볼 만하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각을 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우경화된 노선을 주장하고 있고, 정권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정책지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일치도가 높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열려 있다. 대부분의 관료가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이고 그들의 친기업 정책은 정권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만큼 시장주의 논리에 더욱 철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변수에 변화가 생기면 정권의 성격도 지금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셋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로 확장하는 단계다. 보수-진보의 구분은 계급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18세기에는 귀족-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대립이 있었고, 19세기에는 이것이 자본가-노동자의 대립구도로 성격이 변화된다. 계급과 정치의 상응관계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1960년대에 서유럽이 이른바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보수-진보의 전통적인 대립구도가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보수-진보의 대립구도는 애초부터 계급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즉, 지식인 중심의 진보는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기초한 노동정치는 매우 취약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개인들의 소비취향이 그나마 남아 있던 계급적 기반을 흐려 놓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들이 자식들의 교육문제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선호하는 이중성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 사람처럼 살고 싶은 노동자들의 욕망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파편화된 욕망의 흐름을 이성정치의 언어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는 바로 이러한 감성의 정치와 깊숙이 맞물려 있다.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옳음/그름의 논리(이념)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좋음/싫음(취향)까지 고려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권력이 분명한 노선을 지킬 수가 없다.

넷째로 국제정치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미국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자율성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박정희 정권을 군부독재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가 추진했던 개발독재는 당시 세계은행이 제3세계에 강력히 추진했던 “발전국가모델”의 전형이다. 박 정권 말기에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했던 박정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음모설도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그만큼 한국 정치는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권 초기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보인 도전적인 태도는 사실 매우 어리숙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의 화해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경제회복을 외치며 정권을 획득했다. 현재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매우 높아져 있다. 그런데 이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경제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경우,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실용이라는 구호만으로 국내정치의 요구와 국제정치의 외압을 조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군부독재보다 더한 수준으로 공권력을 남용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 홍성민 동아대 교수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 축은 한국 정치를 떠받치는 높낮이가 서로 다른 기둥들이다. 이러한 4차원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면밀히 주시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는 예상보다 빨리 좌초할 수 있다. 그런데 5년 뒤를 준비해야 할 진보세력도 이러한 4차원의 구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스럽다. 홍성민/동아대 교수·정치학

 


홍성민 교수는 1963년생으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정치적 변동의 관계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문화와 아비투스> <지식과 국제정치> 등이 있습니다.

 

한국만의 보수’는 재구성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신보수정권에서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조희연 교수는 지적했다. 사진은 보수단체들의 북핵 반대 집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조희연 교수의 재반론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고세훈 고려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 그리고 홍성민 동아대 교수가 지난 4주 동안 이명박 정부 ‘보수성’의 실체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적 성격을 지닌 구보수와는 차별성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강 교수는 구보수 세력이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했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홍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한국의 보수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는 등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겪었음을 강조했다. 서구적 기준의 보수와는 달리,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보수 정권에서 생태주의적·신좌파적·신계급적·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라는 과제가 주어진다고 밝혔다.

다음 주제는 ‘고종은 개혁 군주인가’이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다음주 의견을 먼저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달 22일 대만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는 개발독재적 구(舊)지배와는 구별되는 ‘신보수정권’이 한국과 대만에서 출현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보수적 지배는, 필리핀이나 타이 등과 같이 과거 구독재세력이 강력한 제도적ㆍ비제도적인 영향력과 개입력을 보유하고 과거의 ‘정치적 독점’이 강고하게 유지되는 ‘신과두제’ 유형과 대비된다.

당연히 신보수정권은 개발독재적 구보수정권과 연속성 및 차별성을 갖는다. 내 글에 이어 실린 강원택 교수와 홍성민 교수의 글은 ‘차별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 논지와 크게 대립되지 않으면서 그 ‘차별성’의 복합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강원택 교수는 보수의 계급적 성격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과거 냉전형 보수와는 구별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특징화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이에 충분히 동의한다. 홍성민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복합적 성격을 논하였다. 네 가지 층위-정권 지도자의 퍼스낼리티, 정치사회ㆍ시민사회의 관계에 따른 정치권력의 성격, 정치 주체의 취향, 국제정치의 영향력-에서 보수정권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새로운 ‘감성의 정치’ 개념은 보수가 진보를 ‘추월’하고 있는 지점을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단지 고세훈 교수의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곧 보수의 일반적 성격과 한국 보수주의의 특수적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서구의 보수 개념을 근거로 하여, 보수를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율성을 추구하고 대내적으로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하는 지향”으로 규정하고 박정희 정권이나 이명박 정부를 보수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자신의 개념규정의 근거를 가지고 이명박 정부를 규정하는 것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서구 보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바로 그 측면이 오히려 한국 보수의 성격이고 현실적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곧 한국의 보수가 드러내는 극우적 반공주의, 일면적인 성장주의, 전통적인 보수의 국가자율적 배외주의와는 대립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 복지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동성애나 낙태 반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탈(脫)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ㆍ1절과 8ㆍ15에 친미 데모를 하는 것 그 자체가 한국 뉴라이트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서구적 잣대로
‘극단적 친미’ 특수성 부정하면 곤란
개발독재서 신자유주의적 성장으로
한국 신보수 헤게모니 전환 이뤄져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보수를 공동체 개념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라고 고 교수는 주장하는데, 이는 근대 초기에 서구 보수가 전근대적인 중세적 질서를 일정하게 이상화하면서 옹호하는 형태로 자신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이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보수는 자신들의 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불가피하게 겪었다. 전근대에서 근대식민지로 전환하는 과정, 나아가 해방 이후의 ‘내전적 과정’과 분단 및 60년대 군부독재의 출현 과정 등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 보수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보수는 역설적으로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여 존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냉전 시기의 한국 보수이다. 60년대 이후에는 개발독재 하에서 보수가 친기업적 성장주의와 반(反)노동자주의를 내면화한 근대화 추진세력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이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의 연합에 기초해 전개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억압했고 그래서 자유주의를 천명하지만 자유주의적 성격이 없다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성공’적 추진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보수는 60~70년대 ‘근대화적 성장주의’를 새롭게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로 전환하면서 스스로를 재구성해가고 있다.(박정희라고 하는 보수의 역사적 자원을 부각시키면서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보수 블록 내의 헤게모니 분파도 전환되어 왔다. 예컨대 개발독재적 보수 블록과 현재의 신보수 블록 안에서 헤게모니 분파는 명백히 다르다. 이러한 변화들을 ‘신보수’라는 개념을 통해서 포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에 대한 ‘선험적인’ 서구적 기준을 설정해 놓고 한국에서 그에 부응하는 ‘보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비자본주의 대중의 욕망 포획
생활세계 지배하려는 보수시도 맞서
이젠 진보의 재구성 고민할 때
생태평화적 ‘평등연합’ 구성해야

 

우리가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을 하는 데에는, 신보수정권 시대 ‘진보의 재구성’과 ‘진보의 풍부화’를 고민하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나는 신보수정권 하에서 진보는 대중들의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고통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을 재구성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사회)공공성 담론이나 ‘민주주의의 사회적ㆍ급진적 확장’ 같은 담론이 중요하다. 복합적 신평등연합은 70~80년대의 반독재연합이나 90년대 민주개혁연합과는 다른 다양한 대중적 동력을 수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신평등연합은 새로운 ‘의제연합’이자 대중들의 다종다양한 새로운 ‘요구연합’이 될 것이다. 물론 성공적인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은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진보그룹-그 일부인 급진적ㆍ좌파적 그룹을 포함하여-은 반독재적 진보성과 반미주의적 진보성, 초기 산업화 단계의 계급적 진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제 신보수정권 하에서 우리는 생태주의적 진보성, 신좌파적ㆍ신사회운동적 진보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성장드라이브가 촉발하는 신빈곤과 양극화에 대응하는 신계급적 진보성, 지구화가 촉발하는 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켜 낼 것인가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창당한 진보신당이 기존의 진보 이슈에 더하여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대중의 생활세계에 대한 신보수적 지배의 새로운 공세로 인해 분출되어 나오는 새로운 저항성들을 폭넓게 수렴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고도 대중 소비자본주의 시대 대중들의 신체와 욕망,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새로운 포획과 거기서 배태되어 나오는 저항적 주체성, 신보수적 지배의 ‘감성의 정치’에 포획되면서 동시에 그것에서 탈주해오는 대중들의 저항적 감수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도 있다. 물론 성공적인 ‘우파 경제포퓰리즘’, 새로운 ‘우파 국제주의’ 전략, 신보수정권의 ‘경제 실패’가 가져올 수 있는 파시즘적 사회심리의 부상과 같이 신보수정권 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진보에 대한 위협적 상황도 예기해볼 수 있다. 다행히 경부운하 반대투쟁과 같이 새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적 주체성들이 분출하고 있다.

 
» 조희연 교수
 
반독재 투쟁전선에서 이탈했던 대학생들이 등록금 투쟁으로 새롭게 정치화될 가능성도 나타난다. 암울했던 2007년 대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진보의 게토화’가 아니라 ‘진보의 풍부화’로 가는 새로운 희망의 근거들을 나는 발견해가고 있다.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조희연 교수는 1956년생으로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시아 민주화의 복합적 갈등’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적 ‘급진민주주의론’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계급과 빈곤> 등의 저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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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떻게 볼까

 

근대화 의지 투철…대한제국은 무능치 않았다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고종의 어진. 고종은 과연 개혁군주였는가, 개혁군주였다면 개혁의지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확고한 개혁·개화 의지를 지닌 군주였다고 역설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개혁군주다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에 이어 이번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펼쳐진다.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 문제다. 고종의 퍼스낼리티나 정책 방향, 시대인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으로 비로소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3의 대안세력이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느 정도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 따져보는 데도 고종은 하나의 준거가 된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이런 기존 인식이 고종의 개혁 의지와 개혁 방향을 과소평가한 데 따른 것이라며 ‘고종 재평가’를 가장 선도적으로 주장해 온 학자다. 이번 글에서도 이 교수는 고종이 “청년 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고종의 근대화 정책에 일본이 위협을 느낀 결과라고 해석한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논지다. 다음주에는 하원오 동국대 연구교수가 고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로 지칭되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사 서술에서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일본 의존의 갑신 ‘개화파’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론을 줄기로 삼은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를 근대 문명학습 또는 실천기로 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 것이 물의를 일으켰다. 이런 역사 서술로 과연 대한민국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자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마저 빚어졌다.

나는 2004년에 이미 이런 식의 역사인식과 반년에 걸친 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교수신문>을 통해 벌인 이 논쟁은 한국 논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 아래 <고종황제역사청문회>란 책자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백 번의 대결을 불사했던 나에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다시 논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순간, 뒤늦게 피로감을 느꼈다.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 첩첩인가. ‘대안교과서’는 4년 전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던가.

달포 전, 어느 일간지에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실효를 저지하고자 프랑스인 고문을 독일에 보내 우리 공사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지 말 것을 훈령하고 또 독일 황제에게 일본의 조약강제의 만행을 알리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보다 차라리 서구 열강국들의 시한부 공동보호를 받겠다고 제안하는 친서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의 절박성과 절절함이 국민적 감동을 자아냈는데 이번 ‘대안교과서’의 서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교과서’가 개화파 주도의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두 가지로 우리 근대사를 엮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극우 역사관과 너무 많이 닮았다.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노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총독부 지도 하의 ‘근대문명 학습’을 홍보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을사늑약부당” 독일에 보낸 친서
고종의 구국의지 여실히 드러내
뉴라이트, 자력 근대화 노력 폄하
시대적 분위기 감지 못한 것

 

 

1919년 3월1일에 만세 시위운동이 있은 뒤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조선공화국이란 새 국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에서 긴급동의가 나왔다. 곧 반 년 전 대한문 앞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요 충성의 소리인 만큼 그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인식은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종은 청년 시절 개방ㆍ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ㆍ미국ㆍ영국ㆍ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고자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하였다. 수교 조약을 맺은 뒤에 미국 정부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미국 회사들과 계약하여 왕궁에 먼저 전기를 시설하고, 통신과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광산 개발 준비도 하였다. 이런 개화 노선에 대해 아버지 대원군이 불필요하게 임오군란을 일으켜 이를 빌미로 청국이 개입하여 속방화정책을 폄으로써 군주의 개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근대화 정책은 그 뒤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아 청일전쟁 직전에 왕궁을 침범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만약 군주와 그의 정부가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했다면 일본이 왜 국제적 비난을 사기 마련인 이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고종의 개화정책은 왕비를 잃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에 탄탄대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일시 침략의 방향을 대만으로 돌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금광ㆍ석탄 개발을 중요 사안으로 한 국토개발 계획이 세워진 상태에서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에서는 워싱턴 디시를 모델로 한 도시 개조사업이 착수되었다. 오늘날 시청 앞 광장과 방사상 도로체계는 이때 처음 틀을 잡은 것이다. 곧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처럼 왕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짓고 대안문(대한문) 앞을 방사상 도로의 중심으로 삼고, 기존의 종로, 남대문로를 확장하여 연결시켜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고종 청년시절 서구와 수교 맺고
미국과 밀착외교로 문명수입 시도
일 ‘왕비 시해’ 위협 속에서도
개화·개방정책으로 근대화 밑그림

 

한편, 서울ㆍ개성ㆍ인천 등지의 자산가들 힘으로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국고 은행을 세우고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해 중앙은행 발족 준비를 마쳤을뿐더러 1899년 한청조약을 체결하여 청국과 대등한 독립국의 위상을 세우고, 바로 이어 헌법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두고 군주전제정치로의 회귀란 비판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역사다. 천황권의 신성성까지 표방한 명치 일본제국 헌법은 고대로의 회귀란 말인가. 근대국가 수립에서 군주권의 절대성 표방은 보편적 현상인데 굳이 대한제국만 예외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종이 청년 시절에 어떻게 해서 선진문명 수용의 개방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최근에서야 잡았다. 지난가을,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북경 북방 600여㎞ 지점)를 찾으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벽돌ㆍ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열하에 도착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우하는 광경을 목도한 부분이다. 청국은 몽고족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몽고족이 믿고 있는 라마불교의 지도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그런 우대 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바깥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은 대명의리의 북벌론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해 눈뜨기를 외친 역사 교훈서로 큰 의미가 있다.


 
»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나는 여기서 고종의 선진문명 수용 개방주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청년 군주의 곁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있기도 하였지만, 직접 정치를 선언하면서 새로 지은 집무실 겸 서재(집옥재ㆍ集玉齋)를 벽돌로 지은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아들 순종 황제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기 사흘 전 박지원을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일세에 탁월하였다”는 사유로 좌천성에 추증한 사실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순종 황제는 아버지ㆍ어머니가 연암 박지원을 높이 받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망의 순간에 이 사실을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북학파 실학은 개화 군주 고종의 자력 근대화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이제 우리 민족사의 본류로서 깊이 천착ㆍ음미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이태진 교수는 1943년 경북 영일 출생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 있다.

 

근대화 아닌 왕권 집착하다 국권 잃어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지나친 미화는 곤란

 

 

지난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됐다. 고종이 개혁군주였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준거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 필자로 참여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선두에 선 학자답게 고종의 개혁의지, 개혁실천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그는 고종이 “청년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달아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했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고종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개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주목했다. 고종이 진정한 근대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주에는 조선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규(도쿄대 박사)씨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동안 고종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인 민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 망해 먹은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고종이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고종의 평가도 많이 달라졌는데, 그동안의 대중적 이미지나 학계의 고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력히 비판하고 고종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국가를 지키려던 ‘우리의 황제’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치력이란 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종의 행위가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라는 것이 미화하는 쪽의 입장이다. 왕과 국가가 하나로 묶여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왕권이 곧 국권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어느 학자의 주장대로 고종이 아무리 18세기의 ‘영명한 영정조의 이념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다르다.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개항 이후 초기 개화정책을 수행한 쪽은 김옥균 등 개화파라는 것이 교과서적 상식이지만, 고종이나 민비도 개화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국강병하자는 데야 권력의 핵심들이 싫어할 리도 없었고 그래서 민씨 일족도 이에 가세하고 있었다. 근대화하자는 큰 논리에는 고종, 민비, 민씨 척족들도 다들 인정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행위는 오히려 대원군 이전 세도정권의 부패상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

 

근대화에 정치력 발휘했지만
개혁은 권력 강화의 도구였을 뿐
왕권-국권 혼동하며 부패 일삼아
‘구국의 인물’ 재해석은 시대착오적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민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민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민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

고종이 1893년 동학 농민군이 보은집회를 할 때부터 한 말이다. 외교정책의 반청적 성향과 국내에서의 민중봉기에 청군을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이중성의 배후에는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는 고종의 전근대적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 이중성도 왕권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농민전쟁 때 고종이 지키려던 것은 분명히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다. 덕분에 왕자리는 보존했지만 그 통에 국가는 결딴이 나고 식민지로의 길도 가속화되고 말았다.

 

대원군·민중 견제엔 청 군대 이용
청 견제엔 서구 끌어들이려는 시도
권력 지키려다 외세간섭 빌미 줘
개혁도 못한 채 패망·식민지 가속화

 

일본인들에게 민비가 죽고 난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했다가 환궁하고 나라 이름을 바꿔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독립협회도 만들어져서 활동하는데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고종도 호의적이었지만 의회개설운동을 벌이자 보부상을 동원해 해산하고 전제황권을 강화했다. 이 독립협회의 평가는 학자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어느 학자는 의회개설 운동이 “독립협회에 잠복한 친일분자들의 황제권 약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황제권의 강화가 이 시대의 대안이었다는 이야긴데 실제로 황실 중심으로 개혁을 시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그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인 광무양전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상회사, 은행, 근대적 생산공장의 설립과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곳은 군사력 강화다. 국가 재정의 40%가 이 비용이었다. 강병을 하지 못해 농민전쟁 때도 외국군을 끌어들인 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고종으로서 가장 공을 들일 것은 당연했다.

군사력 강화의 목적은 당연히 국가 주권의 수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군사력 강화로 지키려던 것은 왕권 쪽에 더 가까웠다. 이미 1880년대에 경기와 호서, 황해도 지역 연해를 방어해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던 기연해방연을 왕실 경호를 주임무로 하도록 바꾸어 농민군마저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을 약화시켰던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군사력 증강의 주목표를 왕실을 지키는 데 두었다.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다.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왕에게 충성하는 용병제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현실화되는 1903년께 가서야 비로소 고종은 징병제 실시를 위한 조칙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던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운동을 억누르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려 했던 고종으로서는 국민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인 징병제를 실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객관성을 잃은 역사의 미화는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일제의 강압이라는 외적 요인에만 두지 않고 우리 내부의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 쪽에서 쓴 ‘대안교과서’의 대한제국 평가는 대한제국의 전체상을 그리기보다 경제 쪽에 치중해 부정적 평가를 한다. 이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대한제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한계가 바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역사의 객관성을 잃은 평가다.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hwh2000@hitel.net

 


하원호 교수

1954년 생이며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는 ‘동아시아사와 한국근대 사회사상의 변동’입니다. 주요 저작으로 <한국근대경제사>(1997), <근대의 진통>(2006), <한말일제하 나주지역의 사회변동 연구>( 2008)가 있습니다.

 

근대화 의지,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서구식 제복을 입은 고종 황제와 고종이 1907년 이상설 등을 통해 헤이그평화회의에 보낸 밀서. 강상규 박사는 고종이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한겨레〉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당시 정세 복합적 고려를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진행중인 논쟁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보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주장이 대립하는 국면이다. 고종 재평가 작업을 선두에서 이끌어왔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첫 번째 필자로 나와 고종의 개혁의지가 충만했으며, 개혁실천에 힘썼음을 강조했다. 이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교수는 고종에게 개혁성이 있었음이 실증적으로 입증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더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논지였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논자로 참여한 강상규 박사는 이태진 교수의 견해에 더 가까운 입장에서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을 정확히 알려면 고종이라는 실존적 인물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그물을 아울러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강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강 박사는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었다는 하원호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를 밝힌다. 다음주에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고종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은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일컬을 만한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 시대는 동아시아가 막강한 물리력을 앞세운 서양 제국과 마주해야 했던 시기이며 아울러 고유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이질적인 패러다임과 전면적으로 부딪치는 과정이었다.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문명의 세계가 야만으로 전락하고 금수들의 세계가 문명세계로 둔갑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상이한 문명이 충돌하게 되면서 ‘문명기준’이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열두 살 소년이 왕위에 오른 것은 이러한 위기와 혼돈의 파고가 조선에 막 밀려들기 시작하는 상황에서였다.

왕위에 오른 뒤 유교적 민본의식을 몸에 익혀 나가던 고종은 신미양요(1871)를 치른 이후 대외 정세에 점차 눈을 뜨게 된다. 측근인 박규수를 비롯한 연행사절들을 통해 서양의 제국이 강력하며 서양화된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고 중국이 이를 맘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은 대원군이 주도하는 조선의 배외정책이 현실적으로 조선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친정선언으로 이어지고 조선의 대외정책을 전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고민을 정책으로 담아내는 데는 많은 정치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 세력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론적 명분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비전과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신미양요 뒤 개화·개방 눈떴지만
정책화까진 현실적 장벽 너무 높아
내부선 대원군·보수세력 부딪히고
외세 간섭으로 자주근대화 좌절

 

고종의 개혁이 현실화된 것은 1880년을 전후해서이다. 외교, 국방, 통상, 재정, 무기제조, 인재 선발 등을 담당하는 기구로서 기존의 의정부와 동급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일본과 중국에 대규모 시찰단을 비밀리에 보내 개방과 개혁의 추진을 위한 탐색과 함께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조약’관계를 추진해 나간다. “중국이 우리와 힘을 합하자고 하지만 이를 어찌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부강책을 시행해야만 한다”, “천하의 대세를 두고 볼 때 옛 도리만을 지킬 수 없다”는 고종의 지시나, 일본 쪽 외교관들이 “시찰단은 처음부터 국왕의 결단에서 나온 일”이며,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도록 국왕의 지시를 받은 이들 일행이 조선의 개화의 기본을 다지게 될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고종은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을 달래가면서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개혁모델을 비교하고 절충해 가면서 사대교린 질서를 청산하고 만국공법(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상에 주목하고 달라진 무대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모습은 국내외의 다양한 비판과 견제에 부딪히게 된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은 그중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두 사건은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는 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구(류큐·오키나와)병합(1879) 이후 ‘조선문제’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핵심이슈로 부상하던 민감한 상황에서 발생함으로써 주도세력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간섭과 갈등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두 사건은 고종이 주도하는 개화 자강정책을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층과 너무도 온건한 것이라고 생각한 세력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우리 손에 의한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은 사실상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권력정치의 현장인 제국의 시대는 조선을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후 갑신정변의 여파로 인한 강렬한 보수 회귀의 분위기 속에서 청국의 종주권 획책이 본격화하면서 청의 외압이 가중되었으며, 국왕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동학 농민봉기라는 아래로부터 개혁 요구와 이를 계기로 한 열강들 사이의 전쟁이 나타난 것은 이 와중에서였다.

 

고종의 왕권 집착은 사실과 달라
일 ‘황실 보호’회유에 목숨건 저항
외부 탓하며 내부비판 외면 안돼도
분리 생각땐 되레 역사왜곡 우려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라는 지적(하원호 교수)은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청의 외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이 자주의식에 잘못 빠져들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며,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키자”고 건의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한 상황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실을 특별히 보호해 주겠다고 하면서 고종을 회유하려 할 때 “죽을지언정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밀사외교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최근 신문지상에 고종이 친히 밀서를 작성해서 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국왕의 이러한 고뇌를 담은 흔적 중의 일부이다.

19세기 서구의 아시아 인식은 ‘동양적 전제주의론’과 ‘정체(停滯)사회론’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적 실증사학은 이를 토대로 조선의 ‘타율적이고 정체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사관 때문에 조선의 국왕 고종은 역사적으로 정체된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 후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고종은 시대착오적이고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외세의 압력만을 들먹이면서 우리 내부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식민사관이 저지른 역사 왜곡을 극복하려는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객관성을 상실하고 역사를 미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지적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내부와 외부의 문제가 긴밀히 맞물려 있어 형식상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서 이해해서는 오히려 구체적인 상황을 왜곡할 소지가 크다. 실증주의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사실과 가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구성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고종에 대한 논의 수준이 깊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지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당시 한반도 내부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였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고종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의 정치 공간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며 모색하던 인물들에게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및 사상사입니다.

 

근대화 내세워 백성 울린 ‘세도정권의 수장’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전차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8년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홍릉)에 자주 행차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전차 노선을 서대문~홍릉으로 택했다. 순종의 승용차로 쓰인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에서 제작한 캐딜락.(아래)
 
우리시대 지식논쟁 /

 

4 왕권 수호에 올인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삼아 진행 중인 지상논쟁이 지난 3주 동안 벌어졌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할 수 있느냐, 개혁군주라면 어느 정도의 개혁성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등판한 하원호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그 한계에 더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가 궁극적 목적이었을 뿐 진정한 근대화에 큰 관심은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주장이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쓴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더 주목했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의 개혁·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네 번째 논자로 나선 이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다. 박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견지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는 “고종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며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고 말한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주에는 김도형 연세대 교수가 다섯 번째 논자로 등장해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인간들이 그들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원하는 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 존재해 온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이 지적대로 역사에서 지도자 개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지도자 한 명이 역사의 대세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역사 대세를 수용하는 방법은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종이 혼자 힘으로 조선을 망칠 수도 살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일련의 전략적 선택들은 조선 독립 보존과 근대적 전환에 디딤돌보다 차라리 걸림돌이 됐다.




구한말 위기의 세계사적 본질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의 약화와 몰락이었다. 일본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과 달리 조선이 제국 일본의 피해자가 된 데 대해 얼마든지 한탄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 일본과 조선의 위치가 맞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선과 비교될 것 없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대륙적 질서와 매우 느슨한 관계에 있었으면서 네덜란드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폭은 넓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위시한 근대 일본의 1세대 계몽주의자들이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국내에서 네덜란드어를 익혀 ‘신세계’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개항이 조선에 비해 20여년 더 빨랐던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조선이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체결의 배경은 3만2777명의 장병과 군함 19척의 일본 육해군을 조선으로서 현실적으로 대항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힘의 열세였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비록 성인현철이 왕이 되더라도 국운의 융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해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적 활동을 파탄에 빠뜨렸던 고종의 측근인 민씨 족벌은 온 나라의 증오 대상이었다. ‘민족’(閔族)이라 불렀던 그들의 족벌에 대한 원한이 하도 높았기에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대원군마저도 ‘반민’(反閔)의 명분만으로 일부 개화파나 동학 농민 지도자 사이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정도였다. 민심 이반에다 불가항의 외적 위협까지 겹치니 고종의 고민이란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민씨 일종 부패로 민심 등돌리고
제국 일본 등 외적위협까지
구한말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고종 ‘나라’ 위한 개혁의지 안보여

 

고종에게 이와 같은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전략적 선택은 있었을까? 그가 만약 자신의 권력이 아닌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면 이 나라의 대다수 주민들이 바랐던 사항부터 이행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에서 잘 반영된 민중의 희망은 무명잡세 혁파와 징세 관련 비리 척결 등 조세 제도의 합리화와 관료들의 토색질을 낳는 매관매직의 엄금 등이었다. 거기에다가 해방적인 의미의 근대적 조처-예컨대 노비 해방과 비(非)양반 인재 등용, 근대 교육의 보급-등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국민 통합’ 효과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한말에 ‘나라’를 위한 개혁의 열매를 거둔 일이 언제 있었는가?

갑오경장 때 고질적인 지방관 세금 관련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때 징세 업무를 일반 행정과 분리시켜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징세서(세무서)를 전국에 설립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총괄케 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폐지하여 지방관이 징세 업무를 보는 옛날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옛 제도의 폐단들이 다 그대로 남은데다가 국가에서 지세를 계속 올리기만 했다. 1900년에 3분의 2나 인상하고 1902년에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는 조처들이 농민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 민란의 도화선이 됐다. 광업·홍삼 등 알짜 사업의 징세를 황실이 장악한데다 역둔토라는 이름의 26만 두락 이상의 광활한 관유지까지 소득원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악질화돼 갔다. 종전의 2~3할 정도의 도조율(소작료)이 1900년대 초기에 3~4할로 오른데다 1904년 이후로는 5할로 고착화돼 수많은 작인들의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의 재정 정책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국가의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이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이 임용을 따내고자 뇌물을 바치고, 임용된 뒤에 무자비한 가렴주구로 본전을 뽑고 이윤을 올리는 일도 고종이 실권을 내놓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종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영국 여성 탐험가 비숍마저도 그 당시 조선 국가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도적 약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던 혈세를 고종이 어떻게 썼던가? 진정 교육 보급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썼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았다. 1905년 정부 예산에서는 교육과 위생 관련 예산은 1.05%에 불과했던 반면, 황실비는 7.6%나 됐다. 고종은 말로는 ‘교육 입국’을 외쳤지만, 1906년에 이르러 전국의 57개의 근대식 소학교에 1924명의 아동만 다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외국 선교사들이 몇 배나 더 많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도일 유학생 파견, 원칙상 신분과 무관한 근대 교육 이수자의 관직 임명 등 혁신 조처들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수혜자는 대개 양반 출신들이나 소수의 부유한 중인 계층들이었다. 갑오경장 때 노비 제도가 형식적으로 혁파되고 그 뒤에 인신매매를 엄금하는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실존했던 노비 소유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세금으로
근대교육 보급·신분제 혁파 대신
‘민란 진압용’ 군 강화에만 골몰
조선 몰락에 대한 중대책임 물어야

 

민심을 무시하고 수탈의 강화에 혈안이 된 고종 시대 국가의 생존 방식은 외세 사이의 ‘줄타기’였다. 물론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대립을 벌였던 상황에서는 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따랐다. 예컨대 아관파천과 그 뒤 8년 동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노련한 외교로 고종 정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당분간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벌게 된 시간은 결국 허비되고 말았다. 교육 진흥이나 근대적 공업의 진흥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기 공장 하나 세우지도 못해 총탄 공급까지도 일본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호가 곧 침몰했다. 고종이 10여 차례에 걸쳐 밀사를 파견하여 열강에 호소도 다 해보고 의병장들에게 밀지를 주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은밀히 지원했지만 근대적 경제나 교육체계,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 허사였다. 조선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파구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겠지만, 고종은 그 해결에 거의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고종을 ‘계몽군주’라고 높여 일컫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그는 사실 차라리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요즘에는 19세기 말 이후의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나를 배반한 역사>(2003), 〈우승열패의 신화〉(2005), <박노자의 만감일기>(2008) 등이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 위한 ‘보수적’ 개혁 실패로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를 지낸 환구단(왼쪽)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옥호루.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황권 강화·근대화 동시에

 

‘고종은 개혁군주였다’는 주장과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지난 4주 동안 팽팽한 대치 전선을 이루었다. 첫 논자였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가장 선명하게 강조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보다는 한계에 더 주목했다. 세 번째 논자였던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음도 아울러 강조했다. 네 번째 논자 박노자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입장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고종이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다.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또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지막 논쟁이 될 다음주에는 강상규 박사가 고종을 둘러싼 엇갈린 평가에 대한 견해를 다시 밝힐 예정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명성황후’ 뮤지컬이나, 대원군과 명성왕후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한반도> 같은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 항상 등장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최근의 <대안교과서>처럼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부각시키게 되면 더없이 복잡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근대화 개혁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고종이 독일 정부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문서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 6) 이전에 이미 이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일부 학자가 언급하듯이, 이것을 고종의 능력과 개혁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의 태도는 애매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종은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원임대신의 의견을 들어야 하므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어전회의에는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을 강요하자 고종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여,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고종의 간접적 반대 의사를 인정하더라도, 고종은 ‘대한국국제’에 명시된 황제의 대외적 권한을 포기한 것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임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뒤에도 고종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활동을 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독려했다고 그의 유능과 개혁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종묘와 사직’을 책임지고 있던 군주로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모호한 태도 일관
일 위협 고려해도 분명한 책임 방기
밀서 등 뒤늦은 ‘무효화’ 시도
능력·개혁성의 증거라 볼 수 없어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대한제국 이전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친정(親政) 이후, 더러 고종의 정치적 의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치를 주도하던 민씨 세력에 비해 특별하게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 동일하였다. 모든 정책이 고종의 재가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고종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의사에 따라 정책이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 이후, 더 정확하게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상대적으로 정권에서 약해진 이후였다. 고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 대한제국기였다. 고종의 개혁성 여부는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곧 농민층의 항쟁을 해결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은 가장 먼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실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광범하게 추진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수용하여, 서울의 근대적 도시로의 정비, 전기의 보급, 철도 부설, 근대적 교육의 확산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만 본다면 고종은 매우 개혁적인 군주였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개항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전개하던 근대화 사업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킨 몇몇의 조처를 빼고는 나머지 많은 부분은 그 직전에 실시했던 갑오개혁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개혁의 원칙과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층,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광무개혁에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을 들였던 양전지계사업도 그런 원칙에서 추진하였다. 따라서 농민층의 요구는 외면하였다. 고종의 개혁사업을 이끌던 내장원의 운영도 이런 점을 잘 보여 주었다. 내장원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관리하면서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에 대한 소작료를 올리고, 소유권이 모호한 경우에는 소유권도 빼앗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농민층의 항쟁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내장원 중심의 정치는 국가재정의 부실화를 수반하였다. 홍삼, 어장 등 각종 전매권을 독점하면서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은 부족하게 되어, 탁지부가 내장원에 조세 수취권을 넘겨주고 돈을 차용하는 일도 일어났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행한 고종의 개혁은 정부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농민층을 수탈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황실·지배층 위한 ‘보수정치’ 틀에서
근대문물 수용 등 ‘개방외교’ 펼쳐
농민층 외면으로 국내 세력결집 실패
격변의 국제정세 속 나라도 못지켜

 

 

19세기 말은 격변의 시기였다. 고종은 이런 격변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혁 군주였는지 여부는 단편적인 몇 가지 사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를 고종이 어떤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전제적인 황권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점은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이 점은 전통적, 유교적 조선 왕조에 비해서 개혁적이었다. 고종을 ‘계몽군주’로 평가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농민층의 동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고, 또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


 
» 김도형 연세대 교수·국사학 교수
 
고종의 정치는 유교적 변통론에 따라 폐단을 고치되 이를 통해 체제의 안정을 꾀한 전통적인 조선 왕조의 대책과 노선이 다르지 않았다. 곧 ‘보수적 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고종이 보수적 차원에서 개혁을 전개한 것은 ‘종사’(宗社)로 대표되는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 아래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이 추진하던 다양한 개혁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근대사회로 변용되어 갔다. 김도형/연세대 교수·국사학

 


김도형 교수는 1953년생이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운동사가 관심 연구 분야입니다. 저서로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1994)가 있습니다.

 

 

개화의 주인’이고자 했던 ‘망국의 군주’
고종 어떻게 볼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 나라의 자주권을 추구하기 위해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 이상재(앞줄 왼쪽), 박정양(가운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⑥ 강상규씨의 재반론

 

고종은 개혁군주였나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지난 5주 동안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쪽 입장에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했다. 이어 강상규 박사가 고종의 개혁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개혁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적 상황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한계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박노자 교수도 “고종이 조선을 단독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낮게 평가했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마지막 여섯 번째 논자로 고종의 개혁성을 긍정하는 쪽에 선 강상규 박사가 다시 등판해 견해를 밝혔다. 강 박사는 앞선 논자들의 고종 비판이 구조적·역사적 요인들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져선 안 되며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의 검토가 동반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주부터는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 슬라보예 지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진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민심이 흉흉하다. 현 정부는 과연 ‘세계화’ 시대의 산적한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온 국민이 동의할 만한 비전의 제시를 통해 지혜롭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한반도 역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보다 훨씬 더 풀기 힘든 난제였다.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속한 문명세계 ‘내부’의 성격 변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반면, 19세기의 당면 과제는 ‘외부’의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충격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충격과 혼돈의 정도는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당대의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를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고종이 살았던 시기에 심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패러다임(뜨거운 불)과 새로운 서양의 패러다임(차디찬 물)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고종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만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손쉬운 것일 수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정치적 무능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책임’론은 현실정치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종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틀림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만 들어보자. 우선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고종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폭이 사실상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동화 속의 영웅이나 바보가 아닌 현실 정치가로서 고종을 고찰하려면, 그가 어떠한 현실 정치적인 제약 위에서 해법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

 

조선정치의 특징과 상황 고려 없이
고종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
지배층-피지배층·개화파-수구파 등
이분법적 사고로는 본질 접근 어려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500여년의 강고한 전통을 지닌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은 물론, 19세기의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 전통과의 단절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신간의 ‘상호의존적 긴장관계’와 공론(公論)에 의거한 역동적인 정치운영은 조선왕조 특유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500년을 지속하게 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힘이 19세기 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환의 시대에 오히려 변화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이 시대 정치사가 비로소 온전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것처럼, 조선의 생명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선의 사망에 관한 설명이란 공허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19세기를 둘러싼 논의가 지배세력 대 피지배 민중의 각축, 혹은 개화세력 대 수구세력의 갈등이라는 축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방식은 지배세력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간과되고 소위 지배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방식에 머무를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 역시 거대하게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위정자, 지식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를 개화 혹은 수구라는 어느 한쪽에 끼워 맞춤으로써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에 대한 도식화된 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이분법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번 글(4월25일치)을 통해, 고종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있음에도 1880년대 들어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주국가를 세우려고 서구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 경위들을 짚었다. 아울러 조선의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이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개혁을 원하던 개화세력의 정변으로 사실상 조선은 자기 손에 의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책의 속도와 범위, 방법과 아울러 개혁의 주도세력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민씨 세력’ 혹은 ‘개화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어정쩡한 개혁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면 조선 개화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당분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엇박자의 연속
군신간 공론 따르던 정치운영마저
개화 발목잡고 외세 위협 불러
고종의 선택 균형적 성찰 필요

 

미국 외교관의 통역관으로서 조선 왕실의 근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문명개화의 꿈을 키워가던 청년 윤치호는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자신의 일기(음력 1884년 12월30일자)에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조정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지혜를 가진 군주가 여러 나라의 문명과 기술을 살피려 노력함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옥균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청국의 억압은 과거의 배가 되었다. 개화를 일컫는 자는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며 개화에 관한 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간신배들이 밖으로 청의 세력을 끼고 군주를 위협하며 나라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 시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소통에 입각한 절충과 조정의 시도는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외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져 갔다. 한반도의 정치가 국제관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을 둘러싼 19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국내외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을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가가 개화를 지향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성숙한 ‘개화의 주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 강상규씨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종의 정치적 선택과 실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적인 엇박자에 대한 역사적 함의가 균형 있게 성찰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조선정치사가 다루는 내용들은 우리의 의식과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로 남아 있을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와 사상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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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 사회 지식논쟁]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사진 도서출판 b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 이현우 씨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이현우 씨는 1968년생이며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 논문에서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을 다뤘습니다. 현재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전공 외에도 현대 철학과 영화 이론에 두루 관심이 깊고, 최근에는 새로운 인문학의 변형을 학문적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누리꾼들에게는 ‘로쟈’라는 필명의 인터넷 서평꾼으로 더욱 친근할 것입니다.


 
기사등록 : 2008-05-23 오후 08:57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결산
 
 
한겨레 안수찬 기자
 
 
»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지난해 9월1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연재했던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식·담론·시사를 버무려 지상 논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는 노력이었다. 지금까지 37차례에 걸쳐 여러 지식인들의 글을 실었다. 모두 아홉 가지의 주제를 다뤘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1~3회),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4~6회),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7~9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10~16회),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17~21회), ‘코뮨주의 대안 맞나’ (22~25회), ‘이명박 정부의 성격’ (26~28회), ‘고종 어떻게 볼까’ (29~34회),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35~37회) 등이 우리 시대 지식논쟁의 화두로 다뤄졌다. 그 논쟁의 주요 장면을 톺아본다.

 

신자유주의… 민족주의…
9개 주제 37차례 걸쳐 실어

 

 

최첨단 서구 이론으로 지식논쟁의 첫 장을 열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창한 개념인 ‘제국’을 둘러싼 논쟁을 다뤘다.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고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상태를 일컫는 ‘제국’ 개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해하는 첨단의 이론틀이다. 국민국가 중심의 기존 이론틀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기도 한 이 주장을 놓고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정성진 경상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이 논쟁을 펼쳤다.




제국 논쟁이 다분히 이론적인 논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는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반미 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로 이름 높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이 ‘반신자유주의’ 진영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실험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됐다.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는 조금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 올렸다. 근대문학이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를 바탕에 두고 ‘리얼리즘’의 가치와 근대문학의 현재적 의미에 관한 논란의 자리를 만들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등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지지 또는 비판했다.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주목한 가장 큰 화두는 민족주의 문제였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는 무려 일곱차례에 걸쳐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지배, 분단, 산업화, 민주화 등을 가로지르는 핵심 쟁점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민족사학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수 이념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기존 진보학계 내부에서도 관성적인 민족주의를 성찰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이후 민족주의 논쟁은 복잡한 결을 가진 예민한 문제가 됐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권혁범 대전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치열한 논전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 등이 저항적 민족주의로부터 초국적 자본을 견제할 동력을 찾은 반면, 박노자 교수 등은 계급 모순을 호도하는 민족주의의 맹점을 비판했다.

 

지식·담론·시사 버무려
지지-비판 열띤 논쟁 벌여

 

다섯차례에 걸쳐 진행된 ‘고종 어떻게 볼까’ 논쟁도 민족주의 담론과 떼놓을 수 없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 시기에야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이는 다시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러 민주화와 산업화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 하원호 동국대 교수, 강상규 박사,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도형 연세대 교수 등이 고종을 평가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재해석을 둘러싼 개념들도 우리 시대 지식논쟁에서 자주 다뤄졌다. 다섯차례에 걸쳐 다룬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새로운 저항의 이념을 찾으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드러낸 논쟁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창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사유 방식이 과연 저항 또는 변혁의 기획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두고 홍윤기 동국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 이광래 강원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논쟁의 핵심은 노마디즘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영감을 던지는 실천적 기획인지, 아니면 급진적 언어를 빌린 상념의 소산인지에 있었다. ‘코뮨주의 대안 맞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등도 비슷한 맥락의 논쟁이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주창으로 국내에서도 하나의 대안 이념으로 자리잡은 ‘코뮨주의’와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각각 논했는데, 그때마다 이들 새로운 개념과 이념이 구체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두고 쟁점이 형성됐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이현우 박사, 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이성민 도서출판 b 기획위원 등이 글을 썼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정부 출범 2주 뒤부터 세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성격 규정이 달라지는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 홍성민 동아대 교수, 고세훈 고려대 교수 등이 글을 썼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수용하는 논자도 있었고, 구보수와 별 차이가 없다는 이도 있었다. 신보수냐 구보수냐를 넘어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선명히 규정해야 한다는 필자도 있었다. 당시 논쟁은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기원을 궁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조희연 교수는 글에서 “극단적 친미주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탈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고 썼는데, 그 정의는 촛불집회 길에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이명박 정부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주요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우리 시대 지식논쟁’과 비슷한 기획을 지면에 실을 계획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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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8-06-13 오후 07:56:21 기사수정 : 2008-06-16 오전 11: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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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레프트 리뷰’ 한국판 나온다

 

 

뉴 레프트 리뷰’ 한국판 나온다
진보 지성의 내비게이션
 
 
한겨레  
 
 
» 사진 탁기형 기자
 
블랙번·바디우…‘1급 필진’
서브프라임 사태 분석 등
창간호에 18편 논문 실어

 

영국에서 발행되는 진보 학술지 <뉴 레프트 리뷰>(<리뷰>) 한국어판이 올해 말 출간된다. 1960년 페리 앤더슨 등 런던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창간한 <리뷰>는 경제학자 폴 스위지가 1949년 창간한 미국의 <먼슬리 리뷰>, 프랑스 일간 <르몽드>의 자매지로 탄생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함께 ‘세계 3대 진보저널’로 꼽히지만, 지적 권위와 담론의 깊이, 지식인 사회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다른 두 저널을 앞선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어판 편집위원장을 맡은 백승욱 중앙대 교수는 22일 “다소 늦어진 감은 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리뷰>의 역할은 여전하다”며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진보담론의 폭이 확장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실천적 고민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편집위원회에는 백 교수를 포함해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등 4명이 참여하고 있다.

격월간인 <리뷰> 영문판과 달리 한국어판은 1년에 한 번 발간된다. 영국 국내정치에서 제3세계 지역문제를 아우르는 영문판의 모든 내용이 한국 독자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했다. 창간호에는 2002년 3·4월호(재창간 14호)부터 올해 3·4월호(50호) 사이에 실린 18편의 논문이 게재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 대한 로빈 블랙번의 분석과 사르코지 집권 뒤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분석한 알랭 바디유의 글,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떠오른 두바이에 대한 마이크 데이비스의 논문 등 시의성이 높고 <리뷰>의 편집 방향을 잘 드러내는 글을 엄선했다.

 
» 로빈 블랙번 / 마이크 데이비스 / 페리 앤더슨
 
출판을 담당하는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은 “현재 번역을 마치고 교정·감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12월 말쯤 550쪽 분량으로 1500~2000부 정도 찍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출판사 쪽이 예상하는 독자층은 서구 진보이론과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대학 고학년생과 대학원생,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다. 애초엔 국내 연구자의 글을 한국판에 함께 싣는 방안을 타진했지만, 현지 편집위원회가 “전례가 없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뷰>는 창간 초기부터 국제주의적·이론적 지향이 뚜렷했고, 보수화된 사민주의 정당이나 스탈린주의의 자장 안에 있던 공산당 모두에 냉소적이었다. 이런 연유로 초창기에는 그람시·루카치·코르쉬·알튀세르 등 ‘정통 마르크스주의’ 대열에서 비껴서 있던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일에 주력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에서 슬라보예 지젝에 이르는 필자 목록은 최근 50년의 세계 지성사를 압축한 ‘지식인 지도’로도 손색이 없다. 에릭 홉스봄, 테리 이글턴,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슨, 이매뉴얼 월러스틴, 피에르 부르디외, 에드워드 사이드 등 하나 같이 각 분야의 ‘1급’ 학자로 공인받은 거물들이다. 현재 편집위원은 페리 앤더슨과 로빈 블랙번, 마이크 데이비스 등이 맡고 있다.




2000년 ‘재창간’을 계기로 지적 관심을 세계 경제와 반체제 운동, 문학과 영화, 예술 영역으로 확장했다. 발행부수는 1만부, 온라인 구독자는 전 세계에 걸쳐 25만여 명에 이른다. <리뷰>는 현재 영문판 외에 스페인어·이탈리아어·그리스어·터키어판이 발간되고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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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유인촌, 전여옥식 재테크’ 언급 ‘화제’

 

 

미네르바의 ‘유인촌, 전여옥식 재테크’ 언급 ‘화제’
 
잠정적 절필 선언하면서 올린 글...양면성의 사례로 들어
 
입력 :2008-11-01 11:01:00   박성원 기자
 
 
[데일리서프 박성원 기자] 인터넷포털 다음의 토론광장 아고라에서 날카로운 경제분석으로 인기를 얻었던 아이디 '미네르바'가 31일 밤 잠정적인 '절필'을 선언하면서 올린 글에서 거론한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재테크'가 화제가 되고 있다.

미네르바는 우선 "이 나라는 극도의 양면성을 가진 나라로 겉과 속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일본인들 보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그런 가식적인 면을 보자면 우리도 그 이상이면 이상이지 절대 다르지가 않다는걸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100% 거짓말이지"라고 전제를 달았다.

이어 그는 "그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면서 "이 나라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치인들은 말로는 부동산 경기 부양에 집을 사라고 하지만, 실제로 개인들은 개인 포트 폴리오라는 이름 하에 자산 포지션을 바꾼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전여옥 의원을 들었다. 미네르바의 표현에 따르면 "이 아줌마의 경우는 올 클리어...주식→예금으로 갈아 탄 건 이제 새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눈치 깐 애들은 거의 다 조정 했다"면서 "심지어는 대통령 본인이 주식 사라고 펀드를 들 것이라고 하면서 주식 한 주 안 산 나라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면 추세 분석상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주식에서 현금으로 갈아 타는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오히려 칭찬을 해 줘야 할 일"이라면서도 "문제는 그 사람들의 신분이 지금 무엇이느냐가 문제다. 바로 정책 조정자와 정치인,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핸들링 하는 장본인들"이라고 꼬집었다.

미네르바는 "직간접적인 고급 정보 소스들을 이용해서,혹은 활용해서 빠져 나가는 애들이 한 둘이 아면서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반대의 것을 강요한다"면서 "이건 뭔가 웃기는 것 아니냐. 비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로 양면적인, 두 얼굴의 나라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중립적이고 극사실주의에 입각한 개인적 시각이란 걸 가지는 게 살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선동에 휩싸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그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거론했다. 미네르바는 "더 위험한 건 경제적인 양떼몰이"라고 전제한 뒤 "알면서도 애국한다고 손해볼 미친 X은 없다. 심지어는 유인촌 장관님도 '엔화 투기'로 단 1주일만에 30억 이상 버는 나라가 이 나라다"고 지적했다.

유 장관이 재산신고시 일본국채에 투자했던 것으로 신고했던 32억여원을 겨냥한 발언인 것으로 보인다. 유 전 장관이 일본국채에 투자했던 것은 2005년4월27일부터 2007년 7월19일까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채를 매각한 뒤 엔화를 계속 보유했다면 원화 대비 엔화 폭등으로 막대한 환차익을 봤을 수도 있다.

미네르바는 "이런 상황에서 경제 논리와 애국주의를 믹싱시켜서 정부 정책 기조에 반대 되는 행동은 곧 매국노라는 걸로 확대 재생산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서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보느냐"고 반문했다.

미네르바의 결론은 따라서 "깨닫고 배워야 산다"는 것이었다. 각성과 학습이 동반돼야만 이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충고다.

박성원 기자

▶ 강만수, ‘아고라 논객’ 미네르바 찾는다, 왜?
▶ “강만수가 고구마 할배는 왜 찾아?” 아고라 ‘시끌시끌’
▶ ‘아고라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직업이 밝혀지다?
▶ ‘아고라논객 살해협박’에 ‘미네르바 닉쓰기 운동’ 벌어져
▶ “미네르바가 혹시 유시민?” 쪽집게 논객 정체에 관심집중
▶ 아고라 논객 “오늘 환율 1500 찍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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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8.11.01 00:13

50대 남성, 경기지역 인기기사 자세히보기


ㆍ환란때 잇단 활성화 대책… 집값 폭등 부작용

ㆍ이명박정부도 규제풀기 주력 '거품'조장 우려

이명박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잇달아 내놓고 있는 부동산 규제완화 정책이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시행했던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는 내수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규제의 빗장을 모두 풀었지만 3년 만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상 최악의 부동산 버블(거품)로 이어졌다.

31일 국토해양부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5월 분양가 자율화, 양도소득세 한시 면제, 토지거래 허가신고제 폐지, 분양권 전매 한시 허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주택경기활성화대책'을 발표한 이후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잇달아 내놨다. 이듬해인 99년에는 아파트 분양권 전매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폐지 조치를 내놨고, 2001년에는 전용면적 85㎡ 이하 신규 주택 구입시 취·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의 부동산 취득시 취·등록세 감면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국민의 정부가 98년부터 2001년 5월까지 3년6개월간 내놓은 부동산 경기 부양대책은 모두 10차례로 평균 4개월에 한 번꼴이었다.

당시 건설업계는 "주택투기의 우려가 없는 만큼 규제를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의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민의 정부는 또 경기부양을 위해 2001년 한해 동안 콜 금리(현재 기준금리)를 4차례나 내려 사상최저치인 연 4%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2002년 집값이 16%나 폭등하자 정부는 서울지역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제한 조치를 시작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잇달아 내놨다. 규제 완화의 후유증으로 부동산 시장 불안이 지속되자 정권이 참여정부로 바뀐 2003년에도 정부는 분양권 전매제 부활, 수도권 투기과열지역 지정, 1가구 3주택자 양도세 중과, 종합부동산세 도입 등 집값 폭등을 막기 위한 대책을 쏟아냈다. 2005년에도 1가구 2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주택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원 초과로 강화하는 등의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했다.

경기대 엄길청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로 실물경기가 침체되고, 내수가 부진하자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서 집값 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출범이후부터 부동산 규제를 푸는 데 주력했다. 지난 6월 지방 아파트 미분양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8월에는 주택공급 기반 강화 및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발표했고, 9월에는 종부세를 대폭 완화키로 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한시 폐지,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 건축 규제 완화,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해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속도는 국민의 정부 때보다 빠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켰다"면서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 거품을 조장했다가 집값 폭등만을 부른 과거 정권의 실패사례를 답습하려 하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 박병률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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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부동산 부양’ 10년전 잘못 되풀이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8.11.01 00:13

50대 남성, 경기지역 인기기사 자세히보기


ㆍ환란때 잇단 활성화 대책… 집값 폭등 부작용

ㆍ이명박정부도 규제풀기 주력 '거품'조장 우려

이명박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잇달아 내놓고 있는 부동산 규제완화 정책이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시행했던 부동산 활성화 대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는 내수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규제의 빗장을 모두 풀었지만 3년 만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상 최악의 부동산 버블(거품)로 이어졌다.

31일 국토해양부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5월 분양가 자율화, 양도소득세 한시 면제, 토지거래 허가신고제 폐지, 분양권 전매 한시 허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주택경기활성화대책'을 발표한 이후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잇달아 내놨다. 이듬해인 99년에는 아파트 분양권 전매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폐지 조치를 내놨고, 2001년에는 전용면적 85㎡ 이하 신규 주택 구입시 취·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의 부동산 취득시 취·등록세 감면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국민의 정부가 98년부터 2001년 5월까지 3년6개월간 내놓은 부동산 경기 부양대책은 모두 10차례로 평균 4개월에 한 번꼴이었다.

당시 건설업계는 "주택투기의 우려가 없는 만큼 규제를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의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민의 정부는 또 경기부양을 위해 2001년 한해 동안 콜 금리(현재 기준금리)를 4차례나 내려 사상최저치인 연 4%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2002년 집값이 16%나 폭등하자 정부는 서울지역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제한 조치를 시작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잇달아 내놨다. 규제 완화의 후유증으로 부동산 시장 불안이 지속되자 정권이 참여정부로 바뀐 2003년에도 정부는 분양권 전매제 부활, 수도권 투기과열지역 지정, 1가구 3주택자 양도세 중과, 종합부동산세 도입 등 집값 폭등을 막기 위한 대책을 쏟아냈다. 2005년에도 1가구 2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주택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원 초과로 강화하는 등의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했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지 못했다.

경기대 엄길청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로 실물경기가 침체되고, 내수가 부진하자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서 집값 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출범이후부터 부동산 규제를 푸는 데 주력했다. 지난 6월 지방 아파트 미분양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8월에는 주택공급 기반 강화 및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발표했고, 9월에는 종부세를 대폭 완화키로 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한시 폐지,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 건축 규제 완화,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해제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속도는 국민의 정부 때보다 빠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대 이필상 교수는 "10년 전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켰다"면서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 거품을 조장했다가 집값 폭등만을 부른 과거 정권의 실패사례를 답습하려 하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 박병률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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