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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자립형 소농 10만명을 기르자


농촌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구조적이며 복합적이다. 구조적인 문제들은 한결같이 본질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들은 틀림없이 현상적이다. 구조적 문제는 뿌리깊고 고질적이라 해법에 본질적 한계를 각오하고 있다. 복합적 문제는 복잡다단하고 다종다양해 다수의 공감대를 짚어내기 쉽지 않다.

농산업 본래의 태생적 저부가치성, 농산물 유통시스템의 전근대성, 비교열위의 대외경쟁력, 소농 중심 생계형 생산기반 구조, 가용 노동력 급감, 노령인구 점증, 전통 농경문화 훼손, 농민의 자구의지 상실 및 생존 무력감 만연 등으로 농촌공동체는 골다공증을 앓고 있다.

관료적이고 전근대적인 기존의 대책으로는 실패의 악순환 고리만 더 길어질 게 뻔하다. 정부는 오로지 가해자이고, 농민은 순전히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다. 무책임한 양비론으로 심판이나 보자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해보자는 진심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는 우리 농촌문제의 훌륭한 표본이다. 마을 주민 중 60% 이상이 65살 이상의 이른바 노인이다. 홀로 사는 독거노인도 적지 않다. 빈집은 이가 빠진 듯 거슬린다. 산골 다랭이논에 기대는 벼농사는 연간소득의 10분의 1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소득 절반 이상을 태풍피해복구 공사판에서 품을 팔아 충당했다. 농촌경제가 아니라 조경회사나 인력송출회사의 매출구조다. 전형적인 저부가가치 작물인 단감 농사는 하던 농사니 계속 하고 있다. 마을 뒷산을 타고 다니며 산나물이나 송이버섯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마을에 정부에서 농촌개발사업을 시범적으로 시행해보겠다고 나섰다. 수십억원의 사업비를 써야 하는 정부도, 개발의 마스터플랜을 그려내야 하는 개발사업자도 난제일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그저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비를 차라리 돈으로 나눠주면 어떤가. 다른 마을처럼 어설프게 개발하느니 그대로 놔두는 게, 더 농촌스럽고 친환경적일 게 아닌가” 하는 자조와 우려가 무성하다. 정부의 사업목적이나 개발업자의 자세가 틀렸다기보다, 농촌의 입장과 조건이 그만큼 어렵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촌과 농업의 처지를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어쨌든 농촌·농업지원책은 자꾸 기획되고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농촌은 국가공동체의 존립기반이고, 농업은 국가안보의 보루이자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문제의 핵심이 대개 사람이듯, 해법의 본질도 사람으로부터 찾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날 농촌의 문제나 현상을 웅변하는 가장 현저한 장면이 무엇인가. 농촌경제의 노동력, 농촌공동체에서 물심일체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책임져야 할 청장년층의 부재 아닌가.

‘자립형 10만 농군’을 길러내자. 대도시에 기형적으로 집중돼 결국 도시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청장년층을 농촌으로 이주, 분산시켜내자. 농촌에서, 농업을 생업현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자. 그들에게 천지사방에 놀리고 있는 농토를 경작하게 하자. 살 집도 빌려주고 영농·생계자금도 지원해주자. 농산물은 우선 정부에서 제값쳐서 팔아주자. 이른바 ‘자립형 소농 10만 농군’이 우리 농촌을 지탱하고 살아간다면, 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현재의 농촌마을 중심의 하드웨어’가 아닌 ‘미래의 자발적 농민 중심의 소프트웨어’로 틀을 새로 짜자. 그렇게 새로운 정책과 사업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해보자. 속도와 개발 일변도의 계량적 성장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선물한다는 착각에서 이제 깨어나자. 그래서 유기적이고 연기적인 생태공동체와 생명중시 이데올로기가 사람사는 세상을 보장한다는 제 정신으로 다투어 돌아가자. 스스로 먼저 마음을 놓치지 않으면, 세상에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은 없다.

(정기석 생태공동체마을 기획자 )

 

지구의 미래와 소농의 부활
현대사회가 농업중심의 자급적 생존방식을 버리고, 공업사회를 지향해오는 과정에서 농사마저도 화폐증식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실제로 진짜 농민이라고 할 수 있는 ‘소농’이 거의 소멸 직전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의 생태적 미래를 생각할 때, 공업화의 전략으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 즉 농업중심의 순환사회가 아니고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경작지를 근거로 기계화와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현대적 농법’으로는 이러한 순환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급속히 사라져가는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소농은 자연과 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자연의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여 왔으며, 다양성이 풍부한 농사체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 자급적 집약농업인 소농의 공적 가치는 제3세계는 물론, 미국 등 선진국에서조차 다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땅에 뿌리박은 지혜
그러나, 소농의 운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반드시 생태적 위기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쓰노 유킨도는 이 책에서 이와 관련해서 퍽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당시 그는 시골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서,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애국적인 감정에 꽉 찬 순진한 소년의 항의에,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면서, 자기가 지금 쓰고 있는 전정(剪定) 가위는 20년 전쯤에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데, 20년이나 사용한 가위가 아직도 새것이나 다름없이 말짱한데, 이 정도로 튼튼한 강철과 용수철을 이미 오래 전에 만들 수 있는 미국이 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리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
이 일화가 갖고 있는 함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사물의 핵심을 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소농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소농은 식량안보와 국토보존이라는 측면에서만 보호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소농을 살리는 문제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작은 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이웃들과의 연대와 협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존조건 때문에 소농은 거대자본과 국가기구에 예속된 지식인, 전문가, 관료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자주적 정신과 협동적 자치의 삶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땅에 뿌리박은 자주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진보라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서 지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농업의 영속성과 소농의 의의

제1장 '규모확대'라는 태풍 속의 소농
한 점을 응시하는 토착 소농민
대농을 지향하는 '국민적 농민'
토지이용형 농업은 왜 대농을 지향하는가 - 그 생물학적 근거
이농으로 성립된 규모확대
소농의 얼굴을 지워버린 농협
허언(虛言)의 시대에 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2장 소농은 풍토를 살린다
한줄기 강가의 논을 보면서
논과 농가의 인연을 끊는 것
'풍토'를 알고 '풍토'를 활용한다
소농을 망하게 하는 농업연구
'미자와 풍토학'의 본모습
적극적으로 풍토를 만든다
부적지(不適地)를 품종의 힘으로 극복한다
홋카이도의 벼농사를 개척한 '풍토에 적응하는 품종'
풍토품종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내 고장의 농업'이 아니라 '이 논의 농업'을
강과 물이 만든 다양한 논의 형태
사구(砂丘)의 풍토창조 원리
향토애가 경영을 지킨다

제3장 농경의 변천과 그 계기
인공자연, 농지에 대한 인간의 활동
전통농업의 농경과 지력 유지
화학비료로 볼 수 있는 근대농법의 구조
인구증가와 농경의 대응
식민지형 농법의 전개와 현대농업

제4장 소농의 의의를 탐색한다
현대사에서 소농의 의의
제4의 눈
농경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육체노동 - 관점의 전환
농업경관을 해독한다
농경에 의한 정념의 해방과 그 명암
자연권에서 자연신으로

후기
역자 후기|자연과 땅을 지켜온 소농
편집자 후기|땅에 뿌리박은 지혜

 

 

저자가 그냥 농업도 아닌 '소농'을 주장하는 이유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땅을 지켜온 소농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땅을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농은 이런 방식으로 농지의 영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잉여 노동력의 활용과 환경보전의 역할까...
동아일보 | 김형찬 기자 | 2003.10.25
이 책의 부제는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전 일본 돗토리(鳥取)대 농학부 교수로 스스로 농부이기도 한 저자의 답은 간명하다. 지금까지 지구를 지켜온 것은 소농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다는 것.

이것은 기계농법의 도입을 통해 농업을 대규모화하고 소수의 농민만을 농촌에 남긴 채 공장에 필요한 인력들을 도시로 빨아들이는 산업화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저자가 그냥 농업도 아닌 '소농'을 주장하는 이유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땅을 지켜온 소농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땅을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농은 이런 방식으로 농지의 영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잉여 노동력의 활용과 환경보전의 역할까지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농업정책은 전통적인 자급자족 소농을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기업농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 영남대 식품가공학과 교수인 옮긴이에 따르면 1960년에 총인구의 58%였던 농가 인구는 1980년 28%, 1990년 15.5%, 2000년 8.6%로 급격히 감소하며 그 '잉여인구'를 도시로 배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시는 인구를 수용할 만큼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식 기업화를 통한 농업근대화가 인류 생존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영속성과 생존을 위한 최소 공간의 사용이라는 면에서 동아시아의 소농 모델에 다시 주목할 것"을 역설한다. 나아가 농촌에 뿌리를 둔 농촌공업의 지원을 통한 인구의 분산, 주5일 근무제의 확대를 활용한 겸업농가의 육성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가 첫장에 앞세운 어린 시절 소농 노인들에 대한 경험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시사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 국가권력이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토착 소농들의 지혜와,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의연함을 말하고...
문화일보 | 엄주엽 기자 | 2003.10.23
저자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았고 저명한 농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책의 첫 장을 중학교 2학년이던 2차대전 종전 직전의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학교에서 '신풍(神風)으로 일본은 이긴다'는 교육을 받으며 애국심에 불타던 그에게 마을 농사꾼 노인들은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자주 해 속을 끓이게 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말인 즉, 예전에 선물로 받았다는, 20년전 미국농장에서 쓰던 가지치기 가위를 보여주며 "아직도 새 것 같은 이 가위를 만든 나라면 무기도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패전 후 마을에 미군이 진주한 뒤, 어느날 미군이 던져준 초콜릿과 담배를 가져간 그에게 할아버지는 "나라는 싸움에 졌어도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도대체 거지같이 던져준 것을 받다니…"라며 불속에 던져버린다.

저자가 첫장에 앞세운 어린 시절 소농 노인들에 대한 경험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시사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 국가권력이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토착 소농들의 지혜와,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의연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같은 지혜와 의연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땅과 밀착된 소농들의 건강한 삶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소농이야 말로 환경재앙을 막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유지시키고 생산효율도 뒤지지 않을 뿐더러 영성적인 삶까지 이끌 수 있다고, 저자는 구체적인 일본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 역시 국가권력이 농업근대화를 내세워 이농을 조장했고, 소농의 붕괴 위에 대규모 근대영농을 펼쳤지만 얼마 안가 그 결과는 농약과 비료의 다량살포로 인한 땅의 황폐화와 식량 자급률의 저하로 돌아왔다. 소농의 몰락에서 야기된 이같은 과정은 ‘생산성’만을 최고가치로 여기는 농법의 결말이며,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다를 게 없다. 한정된 면적의 농지에서 농업근대화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식량자급 문제만 해도, 현재 전체농지의 틀안에선 불가능하지만, 일본 열도와 같은 습곡산지가 많은 지형에선 골짜기를 이용한 소규모 농법을 통해 55만㏊의 농지를 개간해 식량자급을 꾀할 수 있으며, 이는 소농의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근본 생태주의자로 분류되는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식량자급을 위해선 공장·학교·병원 등을 지방으로 분산시켜 대도시의 인구가 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 뒤 이들이 '겸업농가'가 되도록 한다는 것. 곧 자신이 먹을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는 것인데, 주5일제의 확산으로 많은 사람들의 겸업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즐기면서 자급하는 농업'이 그 이상적 형태이다.

우선 비현실적이고 다소 과격하게까지 들리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일본농업을 어떻게 그 본래의 기능으로 부활시킬 것인가"라는 당면문제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대안'이 없다는 절박한 철학적 인식이 전제돼 있다.

그의 소농예찬은 생존의 기본조건에서만 그치지 않고 범신론적으로 확장된다. 인간은 땅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그를 통해 자신을 닦아가는 '수행'의 과정도 만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땅과 사귐(농사)으로써 동물적 욕망이 중화되고 생존투쟁이 완화돼 왔다"고 말한다. 손으로 풀을 뽑고 괭이로 흙을 돋워주면 작물이 좋아서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고도 한다.

"이같은 교류야말로 옛날 농사꾼들이 젊은 나이에 이미 도달했던 근본 마음이 아닐까. 무심히 하루하루의 농사일을 해온 것이 예기치 않게 농경을 도덕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다."

이같은 땅과의 교류도 땅과의 친화력을 보장하는 소농일 때만 가능하다.

저자는 점점 사라지는 소농을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며, 생태적 위기만이 아니라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름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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