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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의 해발 2640m 고원 위에 있는 이 도시의 도로는 일요일마다 7시간 동안 자동차 아닌 사람 천국이 된다. 간선도로의 자동차 통행은 금지되고 온통 걷고 달리는 사람들, 자전거 이용자와 롤러스케이트·인라인스케이트 이용자들이 그곳에 넘쳐난다. 이때마다 150만명의 시민이 몰려나와 ‘속도’가 사라진 텅빈 공간을 느릿한 산책과 달리기로 채운다고 한다. 이름하여 1982년부터 내려온 ‘사이클로비아’란 도시 전통이다.
보고타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도시’
‘사람이 1순위, 자동차는 2순위’를 꾀하려는 교통정책들은 보고타에서 자주 눈에 띈다. 가장 붐비는 평일 출퇴근 시간대엔 시 전체 자동차의 40% 가량이 달릴 수 없다. ‘피코 이 플라카’라는 강력한 부제운행 체제가 모든 개인 자동차 소유자에게 월~금요일 중 이틀씩 차를 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차 없는 날’ 풍경은 또 얼마나 색다른 감동을 세계인들에게 전해주었던가. 2000년부터 보고타에선 한해 중에 하루를 잡아 ‘차 없는 날’을 선포하고 거의 모든 시민이 이날 자동차를 집에 두고 걷거나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또는 시가 공식 허가한 일부 버스와 택시를 타고 직장과 학교를 오가거나 쇼핑을 하러 다닌다. 2000년 2월24일 첫 행사의 참여율은 무려 98%였다. 이날은 ‘교통사고 사망자 없는 날’이기도 했다.
박용남(52)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이 최근 낸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시울 펴냄)는 자동차 우선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쉽게 상상하기도 힘든 색다른 세계 도시들의 풍경을 보여준다. 보고타 외에, 지난 2000년 <꿈의 도시 꾸리찌바>(녹색평론사)에 소개된 브라질의 녹색도시 꾸리찌바와 핀란드 헬싱키, 일본 오이타현 등이 이 책에서 다뤄진 녹색교통의 도시들이다. 신행정수도와 여러 도시 개발계획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는 요즘의 이 땅에서도 한번쯤 제대로 보고싶은 녹색 사례들이기도 하다.
지은이의 관심은 도시 개발과 계획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교통정책에 쏠려 있다. 그리고 자동차를 우선하는 지금의 우리 문화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같은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대전환’이라 함은 낡은 생각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확 바꾸라는 건데, 낡은 것이란 도로만 더 많이 더 넓게 건설하면 교통혼잡이 해결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고(허리띠를 늘린다고 비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것이란 인간 존엄성이 살아 있는 녹색도시가 지속가능한 살 길이라는 얘기로 요약될 만하다.
자동차 문화는 도시 자체를 퇴행시키고 빈부에 따른 삶의 양극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도시의 자동차들이 계속 늘어나면 길을 넓히고 주차장을 세우느라 대규모 공공투자를 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통행은 더 어려워지고 교통혼잡과 대기오염은 가중한다. 다시 더 많은 도로와 시설이 필요하다. 간선도로, 주차장, 고속도로, 육교, 지하도…. 불법주차는 불가피해지고 쾌적하게 걷기는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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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소유 않고 빌려쓰기 제안
자동차 문화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은 매우 강하다. 그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동차를 일러 “자동차는 도시의 암세포다”(136쪽)라고 비판하며, “자동차에 중독된 사회”(160쪽)에서 벗어나고 “자동차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다.
그가 오랜 동안 살펴온 세계의 여러 녹색도시 사례들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이 책의 또다른 중심인 제2부에서 ‘작은 행성을 위한 교통모델 찾기’에 나선다. 무엇보다 차량 통행과 도로를 줄여나가는 도시개발, 대중교통을 우선하고 걷기를 장려하는 도시개발, 걷기나 자전거 타기만으로 웬만한 도시 생활을 다 할 수 있게 주요 공간을 모으는 고밀도의 도시개발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 개인별로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협회(협동조합)에서 자동차를 빌려 쓰는 ‘자동차 공동이용’(카 셰어링)의 작은 실천들도 제안한다. 1987년 처음 시작된 자동차 공동이용은 현재 유럽과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도 자세히 다뤄
지은이는 준공영제를 포함한 버스체계 개편사업을 펼친 서울시 정책과 관련해선 “서울시의 간선급행버스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 대중교통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아주 의미있는 사례”라고 평가하면서도 “아직 국제사회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을 결코 아니다”라며 지속적인 개선을 촉구했다.
이 책은 거창한 세계 차원에서 일어나야 할 녹색 프로젝트를 주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에서 이뤄지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꾸리찌바 전 시장 레르네르가 했다는 말은 지은이에게 큰 울림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우주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마을을 노래하십시오. 이것은 문학에서 진리이고, 음악에서도 진리입니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역시 진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을을 알아야만 하고 사랑해야만 합니다.”(73쪽) 세계 각지에 흩어져 이뤄지는 작은 실천들이 거대 도시, 그리고 우리 지구호의 운명을 조금씩, 그리고 끝내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
자동차 의존형 도시문화에 대한 경고와 대안 찾기를 시도하는 이 책은, 일그러진 우리 공동체의 삶을 회복할 만한 또다른 작은 실천들의 사례로서, 시민 기금을 모아 자연과 역사유물을 보존하자는 운동인 ‘내셔널트러스트’와 공동체가 통화의 통제권을 갖게 하자는 ‘지역화폐’ 운동에 관해서도 자세히 다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자립형 소농 10만명을 기르자
농산업 본래의 태생적 저부가치성, 농산물 유통시스템의 전근대성, 비교열위의 대외경쟁력, 소농 중심 생계형 생산기반 구조, 가용 노동력 급감, 노령인구 점증, 전통 농경문화 훼손, 농민의 자구의지 상실 및 생존 무력감 만연 등으로 농촌공동체는 골다공증을 앓고 있다.
관료적이고 전근대적인 기존의 대책으로는 실패의 악순환 고리만 더 길어질 게 뻔하다. 정부는 오로지 가해자이고, 농민은 순전히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다. 무책임한 양비론으로 심판이나 보자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해보자는 진심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는 우리 농촌문제의 훌륭한 표본이다. 마을 주민 중 60% 이상이 65살 이상의 이른바 노인이다. 홀로 사는 독거노인도 적지 않다. 빈집은 이가 빠진 듯 거슬린다. 산골 다랭이논에 기대는 벼농사는 연간소득의 10분의 1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소득 절반 이상을 태풍피해복구 공사판에서 품을 팔아 충당했다. 농촌경제가 아니라 조경회사나 인력송출회사의 매출구조다. 전형적인 저부가가치 작물인 단감 농사는 하던 농사니 계속 하고 있다. 마을 뒷산을 타고 다니며 산나물이나 송이버섯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마을에 정부에서 농촌개발사업을 시범적으로 시행해보겠다고 나섰다. 수십억원의 사업비를 써야 하는 정부도, 개발의 마스터플랜을 그려내야 하는 개발사업자도 난제일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그저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비를 차라리 돈으로 나눠주면 어떤가. 다른 마을처럼 어설프게 개발하느니 그대로 놔두는 게, 더 농촌스럽고 친환경적일 게 아닌가” 하는 자조와 우려가 무성하다. 정부의 사업목적이나 개발업자의 자세가 틀렸다기보다, 농촌의 입장과 조건이 그만큼 어렵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촌과 농업의 처지를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어쨌든 농촌·농업지원책은 자꾸 기획되고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농촌은 국가공동체의 존립기반이고, 농업은 국가안보의 보루이자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문제의 핵심이 대개 사람이듯, 해법의 본질도 사람으로부터 찾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날 농촌의 문제나 현상을 웅변하는 가장 현저한 장면이 무엇인가. 농촌경제의 노동력, 농촌공동체에서 물심일체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책임져야 할 청장년층의 부재 아닌가.
‘자립형 10만 농군’을 길러내자. 대도시에 기형적으로 집중돼 결국 도시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청장년층을 농촌으로 이주, 분산시켜내자. 농촌에서, 농업을 생업현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자. 그들에게 천지사방에 놀리고 있는 농토를 경작하게 하자. 살 집도 빌려주고 영농·생계자금도 지원해주자. 농산물은 우선 정부에서 제값쳐서 팔아주자. 이른바 ‘자립형 소농 10만 농군’이 우리 농촌을 지탱하고 살아간다면, 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현재의 농촌마을 중심의 하드웨어’가 아닌 ‘미래의 자발적 농민 중심의 소프트웨어’로 틀을 새로 짜자. 그렇게 새로운 정책과 사업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해보자. 속도와 개발 일변도의 계량적 성장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선물한다는 착각에서 이제 깨어나자. 그래서 유기적이고 연기적인 생태공동체와 생명중시 이데올로기가 사람사는 세상을 보장한다는 제 정신으로 다투어 돌아가자. 스스로 먼저 마음을 놓치지 않으면, 세상에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은 없다.
(정기석 생태공동체마을 기획자 )
지구의 미래와 소농의 부활
현대사회가 농업중심의 자급적 생존방식을 버리고, 공업사회를 지향해오는 과정에서 농사마저도 화폐증식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실제로 진짜 농민이라고 할 수 있는 ‘소농’이 거의 소멸 직전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의 생태적 미래를 생각할 때, 공업화의 전략으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 즉 농업중심의 순환사회가 아니고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경작지를 근거로 기계화와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현대적 농법’으로는 이러한 순환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급속히 사라져가는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소농은 자연과 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자연의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여 왔으며, 다양성이 풍부한 농사체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 자급적 집약농업인 소농의 공적 가치는 제3세계는 물론, 미국 등 선진국에서조차 다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땅에 뿌리박은 지혜
그러나, 소농의 운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반드시 생태적 위기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쓰노 유킨도는 이 책에서 이와 관련해서 퍽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당시 그는 시골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서,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애국적인 감정에 꽉 찬 순진한 소년의 항의에,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면서, 자기가 지금 쓰고 있는 전정(剪定) 가위는 20년 전쯤에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데, 20년이나 사용한 가위가 아직도 새것이나 다름없이 말짱한데, 이 정도로 튼튼한 강철과 용수철을 이미 오래 전에 만들 수 있는 미국이 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리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
이 일화가 갖고 있는 함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사물의 핵심을 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소농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소농은 식량안보와 국토보존이라는 측면에서만 보호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소농을 살리는 문제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작은 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이웃들과의 연대와 협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존조건 때문에 소농은 거대자본과 국가기구에 예속된 지식인, 전문가, 관료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자주적 정신과 협동적 자치의 삶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땅에 뿌리박은 자주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진보라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서 지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차 | |||||||||
머리말|농업의 영속성과 소농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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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옥 |
갈취경제, 폭력적인 사회, 약육강식 적자생존 너 죽고 나 살자의 야만 사회에서 그나마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선 '이타적인 놈'이 되는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돕기 위해 산다>라는 말을.
?? = 밥그릇 사수자.
??? = 올곧은 이 땅의 시대정신 구현자. 혹은 그러려고 고민하는 사람.
밥그릇 사수자는 때론 입바른 소리가 거슬릴때도 있는법. 왜냐 그들은 타협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므로...
그럼 우리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참 어려운 문제다 뜨거운 가슴으론 밥그릇 사수자 같은 천박한 사람이 되어선 곤란하다고 하지만 차가운 머리는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며 어차피 살자고 하는건데 경제인, 생활인으로서의 현실은 무시할 수 없는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 없으며 그런 자신더러 뭐라 할 사람 없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러는 사람이 문제이며 이기적이기 까지 하다고....???
이기적 인간 이긴 이타적 인간
△ 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1만28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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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경제학은 매마름의 세계다. 경제학이 가정하는 인간은 ‘합리적 경제인’인데, 그 ‘합리’란 자신의 이익은 최대로 늘리고 손해는 최소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행위가 타인의 손해를 최대로 늘리고 이익은 최소로 줄이더라도 그 행위는 바람직하거나 최소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행위들이 모여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를 통해 사회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것이다. 합리적 경제인은 말하자면, 이기적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이기적 행위는 자주 근시안적 행위로, 나아가 자기파괴적 행위로 귀결되기도 한다. 합리적 인간이 불합리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제학자 최정규씨가 쓴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경제학을 지배해온 ‘이기적인 합리적 개인’ 가설을 ‘게임 이론’의 분석을 통해 반박하고 ‘이타적 개인’의 이론을 구축해보려는 시도다. ‘게임 이론’으로 포괄되는 여러 이론들을 하나씩 검토한 뒤 ‘이타적 인간’이 왜 출현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현실에서 널리 존재하는 이타적 인간들의 이타적 행위를 경제행위의 불가결한 요소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지은이는 먼저 ‘이기적인 합리적 인간’을 전형적 모델로 삼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죄수의 딜레마’ 모형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죄수가 따로 신문을 받고 있는데, 둘 다 범죄를 끝까지 부인하면, (다른 사소한 범죄 대가로) 1년씩의 형을 받는다. 반면 한쪽이 자백을 하고 다른 한쪽이 부인하면, 자백한 쪽은 바로 석방되고, 다른 쪽은 7년형의 가중처벌을 받는다. 만약 둘 다 자백하면, 5년씩의 형을 받는다. 이 경우, 두 죄수가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이라면, 둘 다 자백을 택하게 되고, 그 결과로 최악의 상황(두 사람의 형량을 합쳐 10년)에 처하게 된다. 자기 처지에서 합리적인 행위가 전체로 보면 가장 불합리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공유지의 비극’로 다시 설명할 수 있다. 공동 목축장에 저마다 무제한으로 소를 방목함으로써 불모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구라는 생태계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모든 나라들이 지구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절제를 약속하더라도 어느 한 나라가 그것을 파기해버린다면, 다른 나라들도 약속을 파기하고 생태계 파괴는 가속화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가설들을 동원해 이론적 공백을 메워보려 한다. 어떻게 인간은 ‘이타적 행위’를 하는가?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동종의 유전자가 번식할 수 있도록 한 개체가 혈연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돕는 ‘이타적 행위’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매트 리들리가 쓴 <이타적 유전자>는 ‘반복 호혜성’ 가설을 내놓는다. 친족관계가 아니더라도 반복해서 서로 혜택을 베풀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은이는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위하는 근거를 여러 다른 가설을 통해 설명해 들어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집단선택’이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가 많은 집단일수록 생존율과 번식률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이타적 행위자가 많은 집단이 살아남아 지배적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집단 차원에서 이타성이 강하다 해도 이기적 개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기적 개체가 지배적 힘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제도’의 구실이다. 제도의 뒷받침을 받는 이타적 인간은 이기적 인간으로만 구성된 사회가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될 ‘시장의 실패’를 방지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경제학적 결론이다.
지식, 경험은 나누는 것이다
예로부터 그래왔다 가진 자가 그러지 못한 자 아니 전체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서양에서 흔히들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거 별거있나? 이게 바로 그거지!! 나누는 대신 존경과 권위라는 명예를 갖게 되는 것 그러나 요즘 자본주의체제를 도입한 지금의 현대 사회는 어떤가?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서 그것을 자신의 출세수단이자 부를 거머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그들끼리 조직화 해서 법이라는 이름을 빌려 철저하게 기득권을 확대재생산시키려고만 드니........과연 이런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무슨 살맛을 느낄까??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밟히지 않기 위해 죽자살자 그들의 블럭 안에 편입되기 위해 오늘날 망국적인 사교육열풍이 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뒤틀어지니....이러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설령 느끼더라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회. 그 사회는 죽은 사회가 아니라고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누구나 똑같이 사회적 가치 있는 노동을 하며 교양과 지식을 쌓아 사회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삶, 그런 사회? 과연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걸까????
자본이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그렇게 좋던 사람 사이가 돈 때문에 많이 깨지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돈이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없어지는 형국이 되고 있다. 강제로 퍼다 주거나 빼앗지는 않지만 현실 사회가 꼭 그렇게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자본이 인류에게 그 모든 것이요, 만사가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 초등학생들도 이미 물들어 있다. 많은 대학이 철학을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꾼 지는 이미 오래다. 대학생들에게 쓸데 있는 것은 정신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직 경쟁력 있는 경제력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이 사람을 주물러대고,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에 희망이 있겠는가?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가는 열 사람 보다 혼자서 한 사람만 앞서 나가는 그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보통 사람 열 사람이 아닌 똑똑한 지도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일등이 되기 위해 미쳐 있는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경제적 가치만을 우선시할 뿐 생명이나 환경 따위는 뒷전인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희망, 그 자체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어떤 희망을 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희망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인간의 삶을 황폐케 하는 것이면 그것이야말로 없애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가 그렇다면 어떤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할지,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우리 시대 여덟 명의 영적 스승들이 들려주는 <희망의 숲>(김성수 외· 예담)은 그래서 소중한 책이다.
"세상은 힘센 사람들이 앞에서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힘없고 가녀린 사람들이 손을 맞잡아 옳은 길로 밀고 가는 힘이 더욱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스승들이 민초들과 직접 만나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은 시민교육의 첫걸음일 수밖에 없다." (머리말에서)
그렇다. 이 책은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했던 강의들을 한데 묶어 종이에 옮긴 것이다. 시민교육의 장을 지면에 옮긴 것에 불과하지만, 책에 쓰인 내용들은 결코 그 테두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학습장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이 시대 모든 시민들을 위한 지침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 시민들이 어떤 사회를 그리며 나아가야 할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주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토록 해 주는 책이다.
그 속에서도 가장 중심을 잡고 있는 초점은 바로 '더불어 숲'을 이루며 사는 일에 맞춰 있다. 이를 위해 각 연사들이 나서 하나하나 연설을 해 나가고 있는데, 모든 나무들이 곧게만 자라지 않고 옆의 나무와 서로 기대며 자라듯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시민시회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옆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시민, 이른바 열린 마음을 갖고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곧 많이 가진 자이든 적게 가진 자이든, 한국 노동자이든 외국인 노동자이든, 모든 사람이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사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온 몸에 전신 3도 화상을 입었지만 신념과 신앙으로 절망을 이겨낸,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인 채규철 씨는 인간에게는 적어도 네 가지 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시간이고, 둘은 죽음이고, 셋은 책이고, 그리고 넷은 친구라는 것이다. 시간 앞에 평등하고, 죽음 앞에 모두 평등하며, 책 앞에 노숙자나 대통령도 다름없이 평등하며, 그리고 어떤 친구를 사귈지도 평등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 평등의 요소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꿀지, 그것은 철저히 자기 몫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대신하여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남길 수 있는 것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바로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보람 있는 이야기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신념으로 이겨낸, 겨울을 견디는 나무 같은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몸으로 써내려가야 할 몫이다."(53쪽)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이건용 씨도 "작곡하고 연주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거나, 그것으로 더 많은 인기를 유지하고 확보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란다. 그가 곡을 쓰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오로지 청중들, 다시 말해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과 민중들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건용 씨처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자기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진정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세상은 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세상이 진정 살맛나는 세상이 되고, 그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희망의 삶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외형적 소유의 양이나 거창하고 화려한 것에서 기쁨을 찾기보다는 내면적 체험의 깊이를 추구하며 공동체적 협동과 조화로운 유연성을 지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살맛나는 세상이고 바로 서는 세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살림과 나눔의 생활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163쪽)
▲ 작가 김곰치 르포 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 | |
ⓒ2005 녹색평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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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현대 생리·생물학 연구의 기초가 돼온 동물실험의 전통에 대해 일부 과학자들이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나섰다. 미국인 의사 레이 그릭과 수의사 진 스윙글 그릭 부부가 함께 쓴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다른세상 펴냄)은 “동물모델은 부정확하고 불필요하며 인간에게 위험부담을 가중시킬 뿐이다”라는 도발적 주장을 내세운다. “동물실험은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동물실험은 제약회사에 법적인 성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물실험은 그 자체가 근본적인 의료사고이다. 동물실험을 거친 의약품이 인간에게 동일한 결과를 제공할 가능성은 언제나 50대 50보다 적다. 통상적으로 훨씬 더 적다. 동물실험은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위험천만한 도박인 것이다”(73쪽). 동물실험이 과학이 아니라니!
이들의 목소리는 ‘동물 복지’를 내건 동물보호주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 만한 이 책의 강렬함은 그런 주장이 도덕과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동물실험에 관한 여러 과학적 근거의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동물 연구에서 나온 지식을 인간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역사상 대형 약물사고의 사례들이 ‘잘못된 믿음’과 ‘신념 비약’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동물실험이 신약 개발과정에서 필수적 관례가 된 것은, 근래의 역사적 사건을 거치며 이뤄진 일이라고 지적한다. 1937년 사건은 그 계기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항생제 설파닐 아미디라는 특효약을 복용했는데, 이로 인해 107명이 숨졌다. 곧이어 과학자들은 이 약물을 동물에 시험했고 동물 역시 죽었다. “이 단 한번의 사례로 과학계는 이후 모든 약물검사에 동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으로 약물 수요가 급증하면서 제약사들은 실험동물이 부작용을 나타내지 않거나 죽지 않으면, 사람의 임상실험을 통해 그 약물의 사용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1950년대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은 “모든 비극적인 부작용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1956년 이후 이 약물 사용으로 기형아 출산이 속출하자 과학자들은 다양한 동물을 대상으로 기형 발생을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은 동물에서 확인되지 않았고 약물 사용은 허용됐다. 정상 분량의 수십~수백 배를 토끼·침팬지 등에 투여하고서야 부작용을 뒤늦게 확신한 제약사는 1962년에야 이 약물을 리콜했다. 1만명 이상의 신생아들이 불구로 태어난 이후였다. 국내에서도 몇 해 전부터 ‘실험동물의 복지’에 관한 논의가 과학계 안팎에서 일고 있으며, 불필요한 동물실험의 횟수를 줄이고, 동물실험은 되도록 다른 실험으로 대체하며, 실험방식을 세련화해 동물의 고통을 줄인다는 동물실험의 3원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그 도발적 주장에 다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을지라도 ‘실험실의 동물들’에 진지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될 만하다. 또 신약 개발과정에 대한 맹신의 허상을 깨고, ‘모든’ 동물실험이 ‘모두’ 불가피한 선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상 한겨레)
언론에서 새로운 약이 개발됐다고 하는 소식을 전할 때 대부분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동물실험’이다. 즉 대부분의 경우 동물실험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기에 이제 임상관찰만 거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식이 들려오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환자들의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병이 치료됐다는 다음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제 곧 병을 정복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차후의 경과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의학계에 몸을 두고 있는 레이 그릭과 진 스윙글 그릭은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간단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동물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인간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애당초 동물실험은 ‘쓸모없는’ 것이기에 당연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더불어 그들은 동물실험이 몇몇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도모하고 유지하기 위한 재원낭비이기에 동물실험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자체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껏 동물실험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어야만 인간에게 실험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기에 근본적인 것을 비판하는 그들의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그들도 이러한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실험의 무익성과 동물실험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인간들의 수많은 악의 행위를 거리낌 없이 폭로하고 있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무엇을 폭로하고 있는가? 첫 번째는 이제껏 믿고 있던 동물실험이 연구자들만의 복지이자 인간을 배제한 어처구니 없는 자원낭비라는 것이 그것이다. 지은이들은 동물실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인간과 다른 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뒤에 인간에게 그 효과를 얻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이것은 인간을 위한 과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은이들은 종이 다른 인간으로 실험을 한 뒤에 결과를 얻고 그것을 인간에게 실험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에서도 병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종이 다른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양이의 병에 효과적인 치료약이 있어 그것을 동일 병을 앓고 있는 인간에게 실험했을 때 인간은 치료는커녕 더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
관절염 치료제, 플로신트는 쥐, 원숭이 몇 개를 대상으로 실험하였다. 실험동물들은 플로신트를 잘 견뎠다. 그러나 글 인해 인간은 8명이 사망했다. 이와 같은 사건의 영향으로, 알버트 세인빈 박사의 전직 동료였던 길리오 타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궁극적으로 진통제 연구에서 어떠한 동물실험도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물실험의 결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신성하고 고귀한 직업이 사실은 인간의 건강을 돈내기하듯, 동물을 화폐 다루듯이 하는 거대한 규모의 도박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팅턴 연구 센터 책임자인 랄프 헤이우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독성 자료에서 역반응의 상호 관련성은 아마도 5~25퍼센트 사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불과 5~2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비율로 보면 동물실험이 동전 던지기보다 더 마구잡이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본문’ 중에서
마찬가지로 쥐에게 효과가 있다고 하여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태에 초래할 수 있다. 이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탈리도마이드나 인슐린 등 이미 역사는 숱하게 그것들을 증명해왔다고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치료약의 발견들은 동물실험이 아니라 임상관찰과 연구, 약물역학, 유전학 등으로 얻어냈다고 말하면서 가장 많은 재원을 투입했던 동물실험은 효과는커녕 병에 대항하는 인류의 발걸음을 퇴보시켰다고 덧붙이고 있다.
지은이들은 동물실험의 그 같은 무익성과 유해성은 의학자들도 알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게 무익한 것을 알았다면 왜 이제껏 아주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것인가? 여기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이 두 번째로 놀라운 사실로 폭로하고 있다. 바로 인간이 아닌 돈을 신봉하는 세력들의 로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동물실험에 투자되는 국가 예산과 기부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약 회사들과 동물실험을 위한 동물을 제공하고 장비를 제공하는 업체들에게는 이것은 ‘생명줄’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니 모든 능력을 동원해 동물실험을 계속하게 만든다. 인간을 위한 약을 개발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은 의아스럽게 여길 수 있겠지만 군수업체들이나 담배회사들이 벌인 유명한 로비들을 생각해본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어떤 기업들이 동물실험에서 이익을 얻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비스트들을 지지하고 있을까? 동물 사육업자들과 판매업자들 외에도 우리, 격리 우리, 주사기와 주사 바늘, 저울, 전문화된 수술 장비, 동물 조직, 기관 및 혈액, 동물 사료, 살수장치, 특수한 방식으로 동물을 죽이는 장비, 화학약품, 현미경, 미세수술용 확대 장치, 외과용 수술 칼, 전기 장치, 혈액 검사 장비, 입체배열 장비 등등을 제조하는 사람들과 판매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록은 거의 끝이 없으며, 각각의 품목은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로 판매된다. ‘본문’ 중에서
또한 과거부터 내려온 관습도 한 몫 한다. 오랜 역사 덕분에 동물실험에서 인정되지 않은 약은 아예 인간에게 실험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지은이들이 우려한 대로 인간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을지 모르는 약들도 동물실험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지만 많은 이들이 관습에 얽매여 이대로 행동하고 있다.
더불어 지은이들은 안이함을 추구하는 의사들의 태도 또한 문제로 지적한다. 특히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상아탑에 있는 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에 대한 실험 보고서를 하나 쓰는 동안 동물에 대한 실험 보고서를 다섯 개는 쓸 수 있다. 인간은 까다롭지만 동물은 실험실에 가두어 두고 편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누가 편하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위한 이력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동물실험을 외면하겠는가?
이러한 지은이들의 폭로와 비판은 놀랍다. 너무 놀라워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숱한 예산과 의사들의 손끝에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절박함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로 존재한다. 인간의 에이즈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에이즈로 죽지 않는 동물들을 실험한다며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낭비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이 동물은 에이즈로 죽지 않는다’는 것임에도 아직도 동물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엄청난 재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암과의 전쟁이 가진 문제점을 단지 과학의 신빙성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매년 암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아래 수십억 달러의 연구비가 동물실험에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 연구 분야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다른 항암 연구자로 갈 수 있는 이러한 자산이 완전히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에 따르는 인간의 희생은 수치화할 수조차 없다.‘본문’ 중에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지은이들은 과학적으로 동물실험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당장 때려 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그 많은 자원들을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들, 예컨대 병리학이나 역학, 임상관찰이나 사람의 조직을 이용한 ‘시험한’ 연구 등에 사용하고 국가적으로 병을 ‘예방’하도록 조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만과 탐욕의 동물실험>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득권 세력이 순순히 자신들의 것을 포기할리는 만무하기에 개인이 진실을 알고 지역사회와 시민단체들이 진실을 알아서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오만과 탐욕의 동물실험>에서 밝힌 내용들을 상기한다면 그것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목 그대로 너무나 오만하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에, 병에 걸린 사람들과 앞으로 병에 걸릴지 모르는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숭이에게 무엇이 좋은 백신인가를 테스트해 보았는가? 원숭이에게 어떤 물질이 효과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데는 5~6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그 후에야 그것이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가를 테스트해 볼 수 있다. 그때서야 당신은 인간이 원숭이와는 전혀 다른 방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5년의 시간이 허비되었음을 깨닫는다. ‘본문’ 중에서 (이상 오마이뉴스)
"비정규직 노동자의 내면을 알고 싶다면…" [화제의 신간]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 800만 비정규직 시대. '한 집 건너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더 이상 빈말이 아니다.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때 예외적으로 허용되던 비정규직은 불과 수년 만에 일상적인 근무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절반의 임금', '4대보험 미적용' 등은 비정규직 차별의 한 예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신분적 차별, 문화적 차별 현상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말 민주노총에서 제작한 한 포스터 제목은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였다. 정부도 나섰다. 지난해 비정규 관련 법안을 내놓았다. 당시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법률안"이라고 주장했다. 입법예고 8개월 만에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 정부를 쑥스럽게 한 이 법안은 이유야 어떻든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계만의 고민거리가 아님을 보여줬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된 데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의 투쟁이 큰 몫을 담당했다. '투쟁'마저도 차별받았다. 노조 설립 자체가 쉽지 않았다. 자기 권리를 찾아보겠다는 순간 징계·해고는 물론 구속 수감생활을 각오해야 했다. 이 모든 사항은 현재진행형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사람의 고민과 고통을 알기 쉽지 않다. 단편적으로 나오는 언론 보도나 연구보고서는 일면만 드러낸다. 더구나 건조한 문체 속에 '인간' 비정규직의 모습을 짐작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적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시집 한 권이 최근 출판됐다.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출판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지은이 주봉희씨는 해고 노동자다. 주씨는 1998년 6월30일 KBS에 파견직 방송차량 운전기사로 입사했다가 2000년 7월1일 해고됐다. 98년 도입된 파견법이 파견근로를 2년 이상 제공받은 사용자는 해당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주씨는 방송사 비정규노조를 결성해 5년간 전국 비정규투쟁 사업장을 돌아다니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현재 주씨는 노동계에서 '비정규 노동운동의 산 증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5년간 투쟁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복직투쟁 과정에서 겪은 말 못할 인간적 고뇌, 투쟁 속에서 깨달은 희망의 존재를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았다. 비정규관련 각종 통계 그래프, 보도기사, 연구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특히 비정규 근로를 '정상'적 근로형태로 규정한 법률안을 제출한 정부 당국자에게도 추천한다.
동지들의 함성이, 외침이 없었다면 십수년 이중파견, 이중착취를 방조하고 방관한 방송사들이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KBS, MBC, SBS, YTN … 주 60시간이 넘는 강제노동, 24시간 야간 맞교대에 월차가 있었는지, 연차가 있었는지, 산재라니 무슨 화산재인 줄만 알았던 지난 세월과 지금도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3년 전쯤 한 동지가 운행 중 사고를 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차량 기사실로 들어온 그 동지는 그래도 먹물 좀 먹었다고 항상 으스대던 옆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형님, 근무 중에 다치면 산재 된다는데 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야! 너, 산재 안돼! 임마, 산재는 말야, 집에 불이 나든지, 불에 데어야 산재가 되능겨, 너 집에 불났냐? 책임보험은 되겠다." 그 선배는 웃지 못할 엉터리 해답을, 시원시원 내놓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정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파견노동자의 편지> 중에서 파견 노동자는 6월 30일생 신자유 광풍이 춤을 춘다 시퍼런 칼날이 날을 세우고 여의도 광장에 춤을 춘다 두 번의 겨울을 지나 여름이 오면 축 늘어진 버들가지 하늘거리고 살랑대는 바람결에 나를 묻는다 동쪽에서 울음소린 MBC라네 서쪽에서 통곡소리는 SBS 북쪽에서 우는 소리 KBS라네 방송사 파견노동자 피울음소리 파견노동자 보호한다더니 이중착취 중간착취 오늘이 이 년이니 나가달란다 누구를 보호했나 말 좀 하거라 반팔 입고 왔다가 반팔 입고 쫒겨가는 나 유월 노동자 30일이 생일이라네 - <파견 노동자는 앵벌이> 중에서 그 옛날 그 사랑은 온데 간데 없고 아스팔트 덩어리에 묻혀버리고 육중한 도너츠가 나를 갈기고 가도 시골 아낙네의 싸리바구니 한웅큼 담겨 있지요 어쩌다 찾아오는 할멈 손이 그리워 태양이 내리쬐는 한 귀퉁이에 꽃을 피우면 왜 이리 못 생겼냐 지나는 길손 차 버리고 미안타 사과하면 아가리 찢어지나 나는야 파견 나온 비정규 나물인가베 그래도 나는 질기고 질긴 질경이인 것을 -<밟히고 밟히어도 나는 질긴 질경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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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도시의 암세포이자 지구 전체에 퍼진 암세포라고 생각해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