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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도시의 암세포다"

▲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
박용남 지음. 시울 펴냄. 1마6000원
‘엘도라도의 땅’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거리엔 초록빛 활기가 넘친다.

안데스 산맥의 해발 2640m 고원 위에 있는 이 도시의 도로는 일요일마다 7시간 동안 자동차 아닌 사람 천국이 된다. 간선도로의 자동차 통행은 금지되고 온통 걷고 달리는 사람들, 자전거 이용자와 롤러스케이트·인라인스케이트 이용자들이 그곳에 넘쳐난다. 이때마다 150만명의 시민이 몰려나와 ‘속도’가 사라진 텅빈 공간을 느릿한 산책과 달리기로 채운다고 한다. 이름하여 1982년부터 내려온 ‘사이클로비아’란 도시 전통이다.

보고타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도시’

‘사람이 1순위, 자동차는 2순위’를 꾀하려는 교통정책들은 보고타에서 자주 눈에 띈다. 가장 붐비는 평일 출퇴근 시간대엔 시 전체 자동차의 40% 가량이 달릴 수 없다. ‘피코 이 플라카’라는 강력한 부제운행 체제가 모든 개인 자동차 소유자에게 월~금요일 중 이틀씩 차를 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차 없는 날’ 풍경은 또 얼마나 색다른 감동을 세계인들에게 전해주었던가. 2000년부터 보고타에선 한해 중에 하루를 잡아 ‘차 없는 날’을 선포하고 거의 모든 시민이 이날 자동차를 집에 두고 걷거나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또는 시가 공식 허가한 일부 버스와 택시를 타고 직장과 학교를 오가거나 쇼핑을 하러 다닌다. 2000년 2월24일 첫 행사의 참여율은 무려 98%였다. 이날은 ‘교통사고 사망자 없는 날’이기도 했다.

박용남(52)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이 최근 낸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시울 펴냄)는 자동차 우선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쉽게 상상하기도 힘든 색다른 세계 도시들의 풍경을 보여준다. 보고타 외에, 지난 2000년 <꿈의 도시 꾸리찌바>(녹색평론사)에 소개된 브라질의 녹색도시 꾸리찌바와 핀란드 헬싱키, 일본 오이타현 등이 이 책에서 다뤄진 녹색교통의 도시들이다. 신행정수도와 여러 도시 개발계획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는 요즘의 이 땅에서도 한번쯤 제대로 보고싶은 녹색 사례들이기도 하다.


지은이의 관심은 도시 개발과 계획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교통정책에 쏠려 있다. 그리고 자동차를 우선하는 지금의 우리 문화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같은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대전환’이라 함은 낡은 생각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확 바꾸라는 건데, 낡은 것이란 도로만 더 많이 더 넓게 건설하면 교통혼잡이 해결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고(허리띠를 늘린다고 비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것이란 인간 존엄성이 살아 있는 녹색도시가 지속가능한 살 길이라는 얘기로 요약될 만하다.

자동차 문화는 도시 자체를 퇴행시키고 빈부에 따른 삶의 양극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도시의 자동차들이 계속 늘어나면 길을 넓히고 주차장을 세우느라 대규모 공공투자를 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통행은 더 어려워지고 교통혼잡과 대기오염은 가중한다. 다시 더 많은 도로와 시설이 필요하다. 간선도로, 주차장, 고속도로, 육교, 지하도…. 불법주차는 불가피해지고 쾌적하게 걷기는 힘들어진다.

▲ 세계 여러 도시들은 지금 자동차나 건물들보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인본주의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과 환경, 생태, 공간의 조화를 이루려는 녹색도시 실험들은 미래 도시의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사진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일요일마다 ‘자동차 없는 도로’에 쏟아져나와 걷고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 중에서.
이건 ‘자동차와 인간 사이의 모순 관계’ 때문이다. “거기에는 분명 자동차와 인간 사이의 모순적인 이해가 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 도시가 자동차에 더 편의를 제공하면 할수록 인간의 존엄성은 덜 존중받게 되고, 상류와 하류계급 사이의 삶의 질 차이 또한 더욱 격심하게 된다. 게다가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자동차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22쪽)

자동차 소유 않고 빌려쓰기 제안

자동차 문화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은 매우 강하다. 그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동차를 일러 “자동차는 도시의 암세포다”(136쪽)라고 비판하며, “자동차에 중독된 사회”(160쪽)에서 벗어나고 “자동차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다.

그가 오랜 동안 살펴온 세계의 여러 녹색도시 사례들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이 책의 또다른 중심인 제2부에서 ‘작은 행성을 위한 교통모델 찾기’에 나선다. 무엇보다 차량 통행과 도로를 줄여나가는 도시개발, 대중교통을 우선하고 걷기를 장려하는 도시개발, 걷기나 자전거 타기만으로 웬만한 도시 생활을 다 할 수 있게 주요 공간을 모으는 고밀도의 도시개발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 개인별로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협회(협동조합)에서 자동차를 빌려 쓰는 ‘자동차 공동이용’(카 셰어링)의 작은 실천들도 제안한다. 1987년 처음 시작된 자동차 공동이용은 현재 유럽과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도 자세히 다뤄

지은이는 준공영제를 포함한 버스체계 개편사업을 펼친 서울시 정책과 관련해선 “서울시의 간선급행버스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 대중교통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아주 의미있는 사례”라고 평가하면서도 “아직 국제사회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을 결코 아니다”라며 지속적인 개선을 촉구했다.

이 책은 거창한 세계 차원에서 일어나야 할 녹색 프로젝트를 주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에서 이뤄지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꾸리찌바 전 시장 레르네르가 했다는 말은 지은이에게 큰 울림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우주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마을을 노래하십시오. 이것은 문학에서 진리이고, 음악에서도 진리입니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역시 진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을을 알아야만 하고 사랑해야만 합니다.”(73쪽) 세계 각지에 흩어져 이뤄지는 작은 실천들이 거대 도시, 그리고 우리 지구호의 운명을 조금씩, 그리고 끝내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

자동차 의존형 도시문화에 대한 경고와 대안 찾기를 시도하는 이 책은, 일그러진 우리 공동체의 삶을 회복할 만한 또다른 작은 실천들의 사례로서, 시민 기금을 모아 자연과 역사유물을 보존하자는 운동인 ‘내셔널트러스트’와 공동체가 통화의 통제권을 갖게 하자는 ‘지역화폐’ 운동에 관해서도 자세히 다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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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쓰는 인생이란..

빌려 쓰는 인생이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정말 내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잠시빌려 쓸 뿐입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나라고 하는 이 몸도 내 몸이 아닙니다.
이승을 하직할 때는 버리고 떠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영혼과 업보뿐입니다.
영원히 가지고 가는 유일한 나의 재산입니다.
부귀와 권세와 명예도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합니다.

빌려 쓰는 것이니 언젠가는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빌려 쓰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가지려고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많이 가지려고 욕심 부리다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모두가 내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베풀면 오히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던 것들을 모두 놓아버립시다.
나 자신마저도 놓아버립시다.

모두 놓아버리고 나면 마음은 비워질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고 나면 이 세상 모두가

나의 빈 마음속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제 모두 내 것입니다.

-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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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자립형 소농 10만명을 기르자


농촌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구조적이며 복합적이다. 구조적인 문제들은 한결같이 본질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들은 틀림없이 현상적이다. 구조적 문제는 뿌리깊고 고질적이라 해법에 본질적 한계를 각오하고 있다. 복합적 문제는 복잡다단하고 다종다양해 다수의 공감대를 짚어내기 쉽지 않다.

농산업 본래의 태생적 저부가치성, 농산물 유통시스템의 전근대성, 비교열위의 대외경쟁력, 소농 중심 생계형 생산기반 구조, 가용 노동력 급감, 노령인구 점증, 전통 농경문화 훼손, 농민의 자구의지 상실 및 생존 무력감 만연 등으로 농촌공동체는 골다공증을 앓고 있다.

관료적이고 전근대적인 기존의 대책으로는 실패의 악순환 고리만 더 길어질 게 뻔하다. 정부는 오로지 가해자이고, 농민은 순전히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다. 무책임한 양비론으로 심판이나 보자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해보자는 진심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는 우리 농촌문제의 훌륭한 표본이다. 마을 주민 중 60% 이상이 65살 이상의 이른바 노인이다. 홀로 사는 독거노인도 적지 않다. 빈집은 이가 빠진 듯 거슬린다. 산골 다랭이논에 기대는 벼농사는 연간소득의 10분의 1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소득 절반 이상을 태풍피해복구 공사판에서 품을 팔아 충당했다. 농촌경제가 아니라 조경회사나 인력송출회사의 매출구조다. 전형적인 저부가가치 작물인 단감 농사는 하던 농사니 계속 하고 있다. 마을 뒷산을 타고 다니며 산나물이나 송이버섯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마을에 정부에서 농촌개발사업을 시범적으로 시행해보겠다고 나섰다. 수십억원의 사업비를 써야 하는 정부도, 개발의 마스터플랜을 그려내야 하는 개발사업자도 난제일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그저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비를 차라리 돈으로 나눠주면 어떤가. 다른 마을처럼 어설프게 개발하느니 그대로 놔두는 게, 더 농촌스럽고 친환경적일 게 아닌가” 하는 자조와 우려가 무성하다. 정부의 사업목적이나 개발업자의 자세가 틀렸다기보다, 농촌의 입장과 조건이 그만큼 어렵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촌과 농업의 처지를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어쨌든 농촌·농업지원책은 자꾸 기획되고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농촌은 국가공동체의 존립기반이고, 농업은 국가안보의 보루이자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문제의 핵심이 대개 사람이듯, 해법의 본질도 사람으로부터 찾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날 농촌의 문제나 현상을 웅변하는 가장 현저한 장면이 무엇인가. 농촌경제의 노동력, 농촌공동체에서 물심일체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책임져야 할 청장년층의 부재 아닌가.

‘자립형 10만 농군’을 길러내자. 대도시에 기형적으로 집중돼 결국 도시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청장년층을 농촌으로 이주, 분산시켜내자. 농촌에서, 농업을 생업현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자. 그들에게 천지사방에 놀리고 있는 농토를 경작하게 하자. 살 집도 빌려주고 영농·생계자금도 지원해주자. 농산물은 우선 정부에서 제값쳐서 팔아주자. 이른바 ‘자립형 소농 10만 농군’이 우리 농촌을 지탱하고 살아간다면, 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현재의 농촌마을 중심의 하드웨어’가 아닌 ‘미래의 자발적 농민 중심의 소프트웨어’로 틀을 새로 짜자. 그렇게 새로운 정책과 사업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해보자. 속도와 개발 일변도의 계량적 성장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선물한다는 착각에서 이제 깨어나자. 그래서 유기적이고 연기적인 생태공동체와 생명중시 이데올로기가 사람사는 세상을 보장한다는 제 정신으로 다투어 돌아가자. 스스로 먼저 마음을 놓치지 않으면, 세상에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은 없다.

(정기석 생태공동체마을 기획자 )

 

지구의 미래와 소농의 부활
현대사회가 농업중심의 자급적 생존방식을 버리고, 공업사회를 지향해오는 과정에서 농사마저도 화폐증식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실제로 진짜 농민이라고 할 수 있는 ‘소농’이 거의 소멸 직전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의 생태적 미래를 생각할 때, 공업화의 전략으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 즉 농업중심의 순환사회가 아니고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경작지를 근거로 기계화와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현대적 농법’으로는 이러한 순환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급속히 사라져가는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소농은 자연과 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자연의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여 왔으며, 다양성이 풍부한 농사체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 자급적 집약농업인 소농의 공적 가치는 제3세계는 물론, 미국 등 선진국에서조차 다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땅에 뿌리박은 지혜
그러나, 소농의 운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반드시 생태적 위기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쓰노 유킨도는 이 책에서 이와 관련해서 퍽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당시 그는 시골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서,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애국적인 감정에 꽉 찬 순진한 소년의 항의에,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면서, 자기가 지금 쓰고 있는 전정(剪定) 가위는 20년 전쯤에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데, 20년이나 사용한 가위가 아직도 새것이나 다름없이 말짱한데, 이 정도로 튼튼한 강철과 용수철을 이미 오래 전에 만들 수 있는 미국이 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리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
이 일화가 갖고 있는 함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사물의 핵심을 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소농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소농은 식량안보와 국토보존이라는 측면에서만 보호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소농을 살리는 문제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작은 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이웃들과의 연대와 협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존조건 때문에 소농은 거대자본과 국가기구에 예속된 지식인, 전문가, 관료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자주적 정신과 협동적 자치의 삶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땅에 뿌리박은 자주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진보라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서 지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농업의 영속성과 소농의 의의

제1장 '규모확대'라는 태풍 속의 소농
한 점을 응시하는 토착 소농민
대농을 지향하는 '국민적 농민'
토지이용형 농업은 왜 대농을 지향하는가 - 그 생물학적 근거
이농으로 성립된 규모확대
소농의 얼굴을 지워버린 농협
허언(虛言)의 시대에 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2장 소농은 풍토를 살린다
한줄기 강가의 논을 보면서
논과 농가의 인연을 끊는 것
'풍토'를 알고 '풍토'를 활용한다
소농을 망하게 하는 농업연구
'미자와 풍토학'의 본모습
적극적으로 풍토를 만든다
부적지(不適地)를 품종의 힘으로 극복한다
홋카이도의 벼농사를 개척한 '풍토에 적응하는 품종'
풍토품종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내 고장의 농업'이 아니라 '이 논의 농업'을
강과 물이 만든 다양한 논의 형태
사구(砂丘)의 풍토창조 원리
향토애가 경영을 지킨다

제3장 농경의 변천과 그 계기
인공자연, 농지에 대한 인간의 활동
전통농업의 농경과 지력 유지
화학비료로 볼 수 있는 근대농법의 구조
인구증가와 농경의 대응
식민지형 농법의 전개와 현대농업

제4장 소농의 의의를 탐색한다
현대사에서 소농의 의의
제4의 눈
농경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육체노동 - 관점의 전환
농업경관을 해독한다
농경에 의한 정념의 해방과 그 명암
자연권에서 자연신으로

후기
역자 후기|자연과 땅을 지켜온 소농
편집자 후기|땅에 뿌리박은 지혜

 

 

저자가 그냥 농업도 아닌 '소농'을 주장하는 이유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땅을 지켜온 소농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땅을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농은 이런 방식으로 농지의 영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잉여 노동력의 활용과 환경보전의 역할까...
동아일보 | 김형찬 기자 | 2003.10.25
이 책의 부제는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전 일본 돗토리(鳥取)대 농학부 교수로 스스로 농부이기도 한 저자의 답은 간명하다. 지금까지 지구를 지켜온 것은 소농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다는 것.

이것은 기계농법의 도입을 통해 농업을 대규모화하고 소수의 농민만을 농촌에 남긴 채 공장에 필요한 인력들을 도시로 빨아들이는 산업화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저자가 그냥 농업도 아닌 '소농'을 주장하는 이유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땅을 지켜온 소농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땅을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농은 이런 방식으로 농지의 영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잉여 노동력의 활용과 환경보전의 역할까지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농업정책은 전통적인 자급자족 소농을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기업농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 영남대 식품가공학과 교수인 옮긴이에 따르면 1960년에 총인구의 58%였던 농가 인구는 1980년 28%, 1990년 15.5%, 2000년 8.6%로 급격히 감소하며 그 '잉여인구'를 도시로 배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시는 인구를 수용할 만큼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식 기업화를 통한 농업근대화가 인류 생존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영속성과 생존을 위한 최소 공간의 사용이라는 면에서 동아시아의 소농 모델에 다시 주목할 것"을 역설한다. 나아가 농촌에 뿌리를 둔 농촌공업의 지원을 통한 인구의 분산, 주5일 근무제의 확대를 활용한 겸업농가의 육성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가 첫장에 앞세운 어린 시절 소농 노인들에 대한 경험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시사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 국가권력이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토착 소농들의 지혜와,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의연함을 말하고...
문화일보 | 엄주엽 기자 | 2003.10.23
저자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았고 저명한 농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책의 첫 장을 중학교 2학년이던 2차대전 종전 직전의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학교에서 '신풍(神風)으로 일본은 이긴다'는 교육을 받으며 애국심에 불타던 그에게 마을 농사꾼 노인들은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자주 해 속을 끓이게 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말인 즉, 예전에 선물로 받았다는, 20년전 미국농장에서 쓰던 가지치기 가위를 보여주며 "아직도 새 것 같은 이 가위를 만든 나라면 무기도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패전 후 마을에 미군이 진주한 뒤, 어느날 미군이 던져준 초콜릿과 담배를 가져간 그에게 할아버지는 "나라는 싸움에 졌어도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도대체 거지같이 던져준 것을 받다니…"라며 불속에 던져버린다.

저자가 첫장에 앞세운 어린 시절 소농 노인들에 대한 경험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시사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 국가권력이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토착 소농들의 지혜와,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의연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같은 지혜와 의연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땅과 밀착된 소농들의 건강한 삶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소농이야 말로 환경재앙을 막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유지시키고 생산효율도 뒤지지 않을 뿐더러 영성적인 삶까지 이끌 수 있다고, 저자는 구체적인 일본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 역시 국가권력이 농업근대화를 내세워 이농을 조장했고, 소농의 붕괴 위에 대규모 근대영농을 펼쳤지만 얼마 안가 그 결과는 농약과 비료의 다량살포로 인한 땅의 황폐화와 식량 자급률의 저하로 돌아왔다. 소농의 몰락에서 야기된 이같은 과정은 ‘생산성’만을 최고가치로 여기는 농법의 결말이며,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다를 게 없다. 한정된 면적의 농지에서 농업근대화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식량자급 문제만 해도, 현재 전체농지의 틀안에선 불가능하지만, 일본 열도와 같은 습곡산지가 많은 지형에선 골짜기를 이용한 소규모 농법을 통해 55만㏊의 농지를 개간해 식량자급을 꾀할 수 있으며, 이는 소농의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근본 생태주의자로 분류되는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식량자급을 위해선 공장·학교·병원 등을 지방으로 분산시켜 대도시의 인구가 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 뒤 이들이 '겸업농가'가 되도록 한다는 것. 곧 자신이 먹을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는 것인데, 주5일제의 확산으로 많은 사람들의 겸업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즐기면서 자급하는 농업'이 그 이상적 형태이다.

우선 비현실적이고 다소 과격하게까지 들리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일본농업을 어떻게 그 본래의 기능으로 부활시킬 것인가"라는 당면문제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대안'이 없다는 절박한 철학적 인식이 전제돼 있다.

그의 소농예찬은 생존의 기본조건에서만 그치지 않고 범신론적으로 확장된다. 인간은 땅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그를 통해 자신을 닦아가는 '수행'의 과정도 만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땅과 사귐(농사)으로써 동물적 욕망이 중화되고 생존투쟁이 완화돼 왔다"고 말한다. 손으로 풀을 뽑고 괭이로 흙을 돋워주면 작물이 좋아서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고도 한다.

"이같은 교류야말로 옛날 농사꾼들이 젊은 나이에 이미 도달했던 근본 마음이 아닐까. 무심히 하루하루의 농사일을 해온 것이 예기치 않게 농경을 도덕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다."

이같은 땅과의 교류도 땅과의 친화력을 보장하는 소농일 때만 가능하다.

저자는 점점 사라지는 소농을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며, 생태적 위기만이 아니라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름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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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항로를 잃은 이들에게...

ⓒ 이명옥
인생길은 흔히 항해나 여행에 비견된다. 패키지 여행상품이나 가이드를 따라 정해진 코스를 자동인형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 개척자처럼 미지의 장소를 향해 자기 혼자 떠나는 그런 여행 말이다.

길떠남엔 항상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따를 것이다. 나름대로 이정표와 지표가 될 만한 것들을 참고하겠지만 때론 길을 잃고 막막한 심정으로 헤매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여행길에 길을 잘못 들었다면 재빨리 수정하여 바른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그것이 단 한 번뿐인 외줄타기 우리 인생 항로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책 <희망 나침판>은 이제 막 인생의 새 비전을 꿈꾸는 청소년과 생의 중기에 삶의 의욕을 잃고 소년기의 기억을 더듬어 길을 떠난 한 남자가 공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현자를 만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 14살 소년 사이드와 의미 없는 삶의 벼랑 끝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사춘기를 보냈던 장소를 찾아온 중년 남자 알렉스.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살고, 생의 내리막길에 서 있는 남자와 삶의 바다에 뛰어들어 꿈과 비전을 실현하려 미지의 문에 막 들어선 사춘기 소년 사이드는 같은 벤치에서 <현자의 서>라는 책을 완성시킬 9번째 현자를 기다리게 된다.

행복한 삶을 이룰 최고의 현자가 되기 위해 여행길에 나선 사이드는 <현자의 서>라는 책을 들고 있다. 그 책은 9명의 현자를 만나 각각의 현자에게 지혜를 배우고 깨우침을 얻어 현자들에게 9개의 퍼즐 조각을 얻어야 완전한 책이 된다. 사이드는 8명의 현자를 만나 8가지 지혜와 8개의 퍼즐 조각을 얻었고, 알렉스가 마지막 현자가 아닌 것을 알고 마지막 현자를 만나기 위해 그를 기다린다.

사이드가 건넨 8개의 퍼즐 조각을 맞추자 거기엔 8명의 현자의 가르침이 나타나 있다.

첫 번째 현자, 액트(Act)는 행동만이 완전한 그림을 위한 시작이며 행동에 앞선 지나친 기대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라고 조언한다. 실패건 성공이건 행동에 따른 대가는 확실하게 있으며 과정에서 얻은 어떤 경험도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 그러니 경험을 중시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 번째 현자, 유니버스(Universe)는 우주를 창조한 위대한 힘은 오직 인간에게만 '마음'이란 위대한 힘을 주었다. 그 힘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했다.
인간 마음에 자리한 무한한 힘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현자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라 말한다.

세 번째 현자, 리스펙트(Respect)는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는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와 더불어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타존심도 높여야 진정 행복한 현자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지적한다.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타인을 존경하는 타존심이 높아질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지적이다.

네 번째 현자, 고울(Goal)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를 진지하게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고 가르친다. 자신이 정한 삶을 행해 매일 성실하게 한 걸음씩 나갈 때 그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진정한 승자가 된다.

다섯 번째 현자, 데일리(Daily)는 생애 단 하루뿐인 현재를 낭비하지 말고 살라고 가르친다. 이미 지난 과거에 대한 집착과 후회, 아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을 오늘답게 살아야 현명한 것이다.

여섯 번째 현자, 타임(Time)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즉 시간을 원대한 비전을 완성시키는데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신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 똑같이 허락하셨다. 현자란 재물이 아닌 시간을 바르게 투자하는 사람이다.

일곱 번째 현자, 서쳐(Searcher)는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삶은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참 힘이라 말한다.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은 권태롭고, 불평과 모자람이 가득한 목마른 삶이 된다. 그러나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사막의 오마시스처럼 자신과 남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샘물이 된다.

여덟 번째 현자, 워즈워드(Wordsworth)는 자신의 마음 속의 언어 코드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으로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마음 속 자기 암시 언어가 성공, 행복, 기쁨을 약속할 때 생은 그대로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은 좋은 열매로 보답을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늘 행복한 언어를 들려주는 습관을 들여라.

최후의 현자는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인생의 절망 끝에 서 있던 무능한 남자 알렉스였다. 그는 사이드가 맡긴 8개의 퍼즐 조각과 현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자신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 자연과의 만남 속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이며, 상대가 어떠하든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고마운 존재라는 것을 깨우친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던가. 감사를 느꼈으면 그 감사의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라. 하루 동안 받은 모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감동과 은혜를 입었으면 베품으로 되갚아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성구가 아니더라도 타인을 인정하고, 용기를 주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베품을 통해 희열을 만끽하라.

자, 이제 당신은 현자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바로 이 순간을 새로운 탄생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인간은 마음 안에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 가능성을 끄집어 내는 것이 사람일 수도, 책과의 만남일 수도, 자연을 통한 자각일 수도 있다. 계기가 무엇이든 오늘은 다른 내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당신은 이미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혹 인생 항로에서 알렉스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 이정표를 바로 세우고 8명의 현자와 더불어 감사와 베품으로 새로운 인생 여정을 시작하라.
당신이 새롭게 결심한 순간 이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 아닌 것이다.

보라, 이제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고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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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여행

위대한 여행

일상은 위대하다.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일상은 아무리 귀찮아도 버릴 수 없는
여행가방과 같은 것. 여행을 계속하려면
가방을 버려선 안 되듯, 삶은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로
나날이 새로 채워져야 한다.


- 최영미의《시대의 우울》중에서 -


* 나날이 새로이
채워져야 할 '소소한 품목' 중에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믿음과 사랑이 그 첫째이고,
어떤 경우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그 둘째이며.
아무리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셋째입니다.
이 세 가지 화두를 인생의 여행 가방에 꼭 지참하시면
하루하루의 삶이 위대한 여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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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

갈취경제, 폭력적인 사회, 약육강식 적자생존 너 죽고 나 살자의 야만 사회에서 그나마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선 '이타적인 놈'이 되는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돕기 위해 산다>라는 말을.

 

 

?? = 밥그릇 사수자.
??? = 올곧은 이 땅의 시대정신 구현자. 혹은 그러려고 고민하는 사람.

밥그릇 사수자는 때론 입바른 소리가 거슬릴때도 있는법. 왜냐 그들은 타협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므로...

 

그럼 우리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참 어려운 문제다 뜨거운 가슴으론 밥그릇 사수자 같은 천박한 사람이 되어선 곤란하다고 하지만 차가운 머리는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며 어차피 살자고 하는건데 경제인, 생활인으로서의 현실은 무시할 수 없는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 없으며 그런 자신더러 뭐라 할 사람 없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러는 사람이 문제이며 이기적이기 까지 하다고....???

 

 

 

이기적 인간 이긴 이타적 인간


△ 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1만2800원

기존가설 한계 뛰어넘어
진화적 게임이론 최전선에서
이타적 인간의 출현·승리 그려내
이타적 개체 많은 집단일수록
생존율·번식률 더 높아

근대 경제학은 매마름의 세계다. 경제학이 가정하는 인간은 ‘합리적 경제인’인데, 그 ‘합리’란 자신의 이익은 최대로 늘리고 손해는 최소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행위가 타인의 손해를 최대로 늘리고 이익은 최소로 줄이더라도 그 행위는 바람직하거나 최소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행위들이 모여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를 통해 사회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것이다. 합리적 경제인은 말하자면, 이기적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이기적 행위는 자주 근시안적 행위로, 나아가 자기파괴적 행위로 귀결되기도 한다. 합리적 인간이 불합리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제학자 최정규씨가 쓴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경제학을 지배해온 ‘이기적인 합리적 개인’ 가설을 ‘게임 이론’의 분석을 통해 반박하고 ‘이타적 개인’의 이론을 구축해보려는 시도다. ‘게임 이론’으로 포괄되는 여러 이론들을 하나씩 검토한 뒤 ‘이타적 인간’이 왜 출현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현실에서 널리 존재하는 이타적 인간들의 이타적 행위를 경제행위의 불가결한 요소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지은이는 먼저 ‘이기적인 합리적 인간’을 전형적 모델로 삼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죄수의 딜레마’ 모형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죄수가 따로 신문을 받고 있는데, 둘 다 범죄를 끝까지 부인하면, (다른 사소한 범죄 대가로) 1년씩의 형을 받는다. 반면 한쪽이 자백을 하고 다른 한쪽이 부인하면, 자백한 쪽은 바로 석방되고, 다른 쪽은 7년형의 가중처벌을 받는다. 만약 둘 다 자백하면, 5년씩의 형을 받는다. 이 경우, 두 죄수가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이라면, 둘 다 자백을 택하게 되고, 그 결과로 최악의 상황(두 사람의 형량을 합쳐 10년)에 처하게 된다. 자기 처지에서 합리적인 행위가 전체로 보면 가장 불합리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공유지의 비극’로 다시 설명할 수 있다. 공동 목축장에 저마다 무제한으로 소를 방목함으로써 불모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구라는 생태계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모든 나라들이 지구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절제를 약속하더라도 어느 한 나라가 그것을 파기해버린다면, 다른 나라들도 약속을 파기하고 생태계 파괴는 가속화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가설들을 동원해 이론적 공백을 메워보려 한다. 어떻게 인간은 ‘이타적 행위’를 하는가?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동종의 유전자가 번식할 수 있도록 한 개체가 혈연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돕는 ‘이타적 행위’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매트 리들리가 쓴 <이타적 유전자>는 ‘반복 호혜성’ 가설을 내놓는다. 친족관계가 아니더라도 반복해서 서로 혜택을 베풀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은이는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위하는 근거를 여러 다른 가설을 통해 설명해 들어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집단선택’이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가 많은 집단일수록 생존율과 번식률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이타적 행위자가 많은 집단이 살아남아 지배적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집단 차원에서 이타성이 강하다 해도 이기적 개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기적 개체가 지배적 힘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제도’의 구실이다. 제도의 뒷받침을 받는 이타적 인간은 이기적 인간으로만 구성된 사회가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될 ‘시장의 실패’를 방지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경제학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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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협동과 조화로운 유연성 속에 희망이 있다

지식, 경험은 나누는 것이다

예로부터 그래왔다 가진 자가 그러지 못한 자 아니 전체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서양에서 흔히들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거 별거있나? 이게 바로 그거지!! 나누는 대신 존경과 권위라는 명예를 갖게 되는 것 그러나 요즘 자본주의체제를 도입한 지금의 현대 사회는 어떤가?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서 그것을 자신의 출세수단이자 부를 거머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그들끼리 조직화 해서 법이라는 이름을 빌려 철저하게 기득권을 확대재생산시키려고만 드니........과연 이런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무슨 살맛을 느낄까??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밟히지 않기 위해 죽자살자 그들의 블럭 안에 편입되기 위해 오늘날 망국적인 사교육열풍이 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뒤틀어지니....이러고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설령 느끼더라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회. 그 사회는 죽은 사회가 아니라고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누구나 똑같이 사회적 가치 있는 노동을 하며 교양과 지식을 쌓아 사회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삶, 그런 사회? 과연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걸까????

 

 

자본이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그렇게 좋던 사람 사이가 돈 때문에 많이 깨지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돈이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없어지는 형국이 되고 있다. 강제로 퍼다 주거나 빼앗지는 않지만 현실 사회가 꼭 그렇게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자본이 인류에게 그 모든 것이요, 만사가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 초등학생들도 이미 물들어 있다. 많은 대학이 철학을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꾼 지는 이미 오래다. 대학생들에게 쓸데 있는 것은 정신이나 도덕이 아니라 오직 경쟁력 있는 경제력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이 사람을 주물러대고, 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에 희망이 있겠는가?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가는 열 사람 보다 혼자서 한 사람만 앞서 나가는 그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보통 사람 열 사람이 아닌 똑똑한 지도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일등이 되기 위해 미쳐 있는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경제적 가치만을 우선시할 뿐 생명이나 환경 따위는 뒷전인 사회에 진정 희망이 있겠는가?

희망, 그 자체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어떤 희망을 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희망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인간의 삶을 황폐케 하는 것이면 그것이야말로 없애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가 그렇다면 어떤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할지,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우리 시대 여덟 명의 영적 스승들이 들려주는 <희망의 숲>(김성수 외· 예담)은 그래서 소중한 책이다.

"세상은 힘센 사람들이 앞에서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힘없고 가녀린 사람들이 손을 맞잡아 옳은 길로 밀고 가는 힘이 더욱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스승들이 민초들과 직접 만나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은 시민교육의 첫걸음일 수밖에 없다." (머리말에서)

그렇다. 이 책은 광명시 평생학습원에서 했던 강의들을 한데 묶어 종이에 옮긴 것이다. 시민교육의 장을 지면에 옮긴 것에 불과하지만, 책에 쓰인 내용들은 결코 그 테두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학습장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이 시대 모든 시민들을 위한 지침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 시민들이 어떤 사회를 그리며 나아가야 할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주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토록 해 주는 책이다.

그 속에서도 가장 중심을 잡고 있는 초점은 바로 '더불어 숲'을 이루며 사는 일에 맞춰 있다. 이를 위해 각 연사들이 나서 하나하나 연설을 해 나가고 있는데, 모든 나무들이 곧게만 자라지 않고 옆의 나무와 서로 기대며 자라듯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시민시회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옆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시민, 이른바 열린 마음을 갖고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곧 많이 가진 자이든 적게 가진 자이든, 한국 노동자이든 외국인 노동자이든, 모든 사람이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사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온 몸에 전신 3도 화상을 입었지만 신념과 신앙으로 절망을 이겨낸,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인 채규철 씨는 인간에게는 적어도 네 가지 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시간이고, 둘은 죽음이고, 셋은 책이고, 그리고 넷은 친구라는 것이다. 시간 앞에 평등하고, 죽음 앞에 모두 평등하며, 책 앞에 노숙자나 대통령도 다름없이 평등하며, 그리고 어떤 친구를 사귈지도 평등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 평등의 요소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꿀지, 그것은 철저히 자기 몫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대신하여 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남길 수 있는 것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바로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보람 있는 이야기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신념으로 이겨낸, 겨울을 견디는 나무 같은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몸으로 써내려가야 할 몫이다."(53쪽)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이건용 씨도 "작곡하고 연주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거나, 그것으로 더 많은 인기를 유지하고 확보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란다. 그가 곡을 쓰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오로지 청중들, 다시 말해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과 민중들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건용 씨처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자기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진정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세상은 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세상이 진정 살맛나는 세상이 되고, 그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희망의 삶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외형적 소유의 양이나 거창하고 화려한 것에서 기쁨을 찾기보다는 내면적 체험의 깊이를 추구하며 공동체적 협동과 조화로운 유연성을 지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살맛나는 세상이고 바로 서는 세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살림과 나눔의 생활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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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자동차를 타면서 지구를 느낄 수 있나?&quot;

곰치는 고려 때 글자를 모르는 어느 상놈의 이름

▲ 작가 김곰치 르포 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
ⓒ2005 녹색평론사
""'삶의 구호'라고 할까.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 내 몸 밖의 존재들에 대한 집중력을 잃을 때, '발바닥, 내 발바닥' 하고 외워 본다. 그러면 잠이 깨고 눈이 밝아지고 오늘 하루도 귀하게 살 투지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십억! 십억!'하며 삶의 욕망을 일깨웠다고 한다.

'십억!'하고 외치면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고 화장실 가는 발걸음부터 가벼워졌다고 한다. 그는 대학 때부터 군대 다녀와 직장생활 삼사년간을 그랬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은 뒤 그의 구호는 달라졌다. 딸아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곤함도 잊고 돈을 벌려고 천지사방으로 쫓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발바닥, 내 발바닥'이란 나의 구호에도 사연은 있다. 후배 하나가 자동차를 끌고 왔다. 나는 자동차에 대한 반감이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환경재앙이 올 때, 분노에 찬 사람들이 골목길에 주차돼 있는 자동차부터 때려부수지 않을까, 상상할 때가 있다.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나는 걷는 게 좋아. 자동차 타면서 지구를 느낄 수 있니? 난 내 두 발이 참 좋아. 발바닥은 지구를 느끼며 걷기를 좋아해.'"

-192~193쪽, '발바닥, 내 발바닥' 몇 토막


여기 '곰치' 라는 독특한 필명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있다. 우리 말 중에는 '곰치'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낱말들이 참 많기도 한데, 이 작가는 왜 동해의 사나운 물고기인 '곰치'란 필명을 지었을까. 김경태란 본명도 참 좋은 이름인데, 이 작가는 왜 얼른 듣기에도 좀 미련스러워 보이고, 좀 무식해 보이는 '곰치'란 이름을 고집하는 걸까.

작가는 "곰치는 고려 때 어느 상놈의 이름이었는데 그 녀석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났고, 또 왜 죽는 건지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글자를 전혀 몰라 그저 심심한 상놈의 삶을 살다 갔다"며, 오랜 세월 동안 양반들의 소유였던 문자에 한 맺힌 그 상놈이 20세기에 환생한 게 바로 나"라고 말한다.

작가 김곰치는 "제 필명은 오만한 문명의 질주에 반대하는 말로 자연과 민중의 혼융을 뜻한다"고 되뇐다. 이어 작가는 "우리의 고된 역사 속에서 민중은 늘 지배세력에게 당해왔고, 자연은 늘 사람한테 당해왔다"고 덧붙인다. 이 말은 곧 작가가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파괴되는 대자연의 현장을 동해를 누비고 다니는 곰치처럼 온몸으로 헤집고 나아가겠다는 그런 뜻이다.

발바닥으로 쓰는 글이 최고의 글쓰기이자 온몸으로 쓰는 것

"발바닥으로 쓰지 말고 온몸으로 쓰라고? 발바닥은 몸 아래의 가장 밑바닥이므로 사실 위의 모든 것을 짊어진 글쓰기다. 발바닥으로 쓴다는 것은 곧장 온몸으로 쓴다는 것이다. 손으로 머리로 엉덩이로 글을 쓴다고 착각하고 살았지만, 발바닥이 쓰는 글이 최고의 글쓰기라는 것을 새삼 알겠는 기분이다./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이다" - '책머리에-발바닥으로 글쓰기' 몇 토막

지난 1999년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로 제4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김곰치(35·본명 김경태)가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사람 편리 위주로 파괴되는 대자연의 현장을 발바닥이 부르터지도록, 온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찾아다니며 꼼꼼하게 기록한 르포ㆍ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사)을 펴냈다.

이 책은 모두 4부에 26편의 땀내 밴 르포와 산문, 꽁트, 단편소설이 작가가 이 땅 구석구석에 꼭꼭 찍어놓은 발자국처럼 새겨져 있다. '기억을 향한 투쟁'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도룡농 소송 재판부에 올리는 탄원문' '그놈 한 분-백무산 시인께' '똥 생각' '소설가가 된 청소부' '발바닥으로 쓴 일기' '곰치를 아시나요' '삼춘, 공부하나?' 등이 그것.

발바닥이 쓰는 르포, 온몸으로 쓰는 산문
작가 김곰치는 누구인가?

▲ 작가 김곰치
ⓒ녹색평론사
"그는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산하와 거기에 기대어 살아온 풀뿌리 삶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는 사태 앞에서 깊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해왔다. 그러나 그는 자폐적인 슬픔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발품을 팔아 현장으로 달려가 몸소 그 파괴를 실감하고, 그러면서 그 파괴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발견해왔다."-김종철(문학평론가, <녹색평론> 발행인)

작가 김곰치는 19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1991년 단편 '토큰 한 개의 세상'으로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받았으며, 199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푸른 제설차의 꿈'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시와 사상>에 문학평론 '민중시를 위한 밤'을 발표하기도 한 작가는 지금 부산에 살면서 '시 21 동인'에 참여, 시 읽는 기쁨을 한껏 누리고 있다. 1999년에는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로 제4회 한겨레 문학상을 받았다.

/ 이종찬 기자
작가 김곰치는 책머리 말에서 "민중의 삶은 주류 지식에서 비껴있기 마련이고, 주류 지식을 민중은 불신하면서도 그 파괴력을 무서워한다"며, "글을 쓴 시점과 비교할 때 현장마다 이런 저런 변화가 생겼지만, 글에 담은 나의 울음 섞인 노래만은 이 세상의 아픈 누군가에게 연대와 격려가 되리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새만금 갯벌 양식장 허가권 쥔 사람들 대부분은 외지인

"김제, 군산, 부안에 걸친 4만여헥타르의 갯벌을 농지와 호수로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 이를 단일사안으로 하여 지역에서 반대조직을 결성한 것은 작년 11월 '부안사람들'이 처음이다. 사진사, 학생, 사업가, 전기기사 등 저마다 생업을 가진 20여명이 개인별로 참가했다.

"우리의 목표는 사업중단이다. 그렇지만 방조제를 다 들어내라는 건 아니다. 배가 다니고 물길이 드나들도록 중요한 물골이라도 다시 트라는 거다. 농업기반공사는 방조제를 방치하거나 철거하면 더한 환경파괴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방조제 내부는 새만금 바다에서 퍼낸 해사로 채워져 있다. 좀 쓸려간다고 해도 바다가 황폐화될 거라는 건 협박에 가깝다"

김 씨는 새만금사업을 찬성하던 지역정서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만금 전시관에 가보면, 야 이렇게 우리 지역이 발전하는구나, 우리 전북도 이제 찬란한 미래를 맞는구나, 다들 입이 쩍 벌어진다. 없던 애향심도 새로 생긴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시화호가 썩어버리는 걸 보고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사업 강행론자들은 재빨리 개발과 환경,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65~66쪽,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몇 토막


작가 김곰치는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이 있는 전북 부안에 가서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보다 실제 갯가에서 살아가는 어민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민들은 작가에게 "이 지역에서 논 10필지, 그러니까 60마지기를 가지고도 (정부로부터) 학자금을 지원받지 않으면 자식 둘 대학 보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어민들은 새만금 갯가에 나가면 "맨손어업이라도 끄랭이와 찢어진 구럭 하나 달랑 들고 하루 서너시간 갯벌 뒤지면 오만원에서 십만원은 번다"고 작가에게 설명한다. 즉, 바다와 갯벌만 굳게 믿고 자식 둘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 하지만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대로 진행되면 이곳 어민들이 보상을 받아봤자 많게는 팔백만 원이요, 그밖에는 대부분 오백만 원뿐이어서 자식들 대학 공부는커녕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진다는 것이다.

이 곳 어민들의 말에 따르면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바다와 갯벌에 의지하며 살아온 어민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 그들은 곧 이 곳 갯벌의 양식 허가권을 가진 사람들, 적게는 몇 억에서 많게는 십억 가까운 보상을 받는 외지인들이다. 또한 그들은 갯벌이 사라지든 바다가 죽든 우선 보상금만 두둑이 챙기면 되는 사람들이다.

지율스님이 살아야 천성산도 영원히 살 수 있다

"스님, 용서해주십시오. 스님은 천성산이 뚫린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스님의 간절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천성산은 곧 뚫린다고 각오하려 합니다. 진행중인 국책사업, 어려운 나라경제라는 이유말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깊은 이유로 천성산은 뚫려나가야 하는 운명의 산인 것 같습니다.

설사 우회노선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작은 산과 들, 그리고 근처 지역주민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천오백년 전 원효 스님이 산에 드셔서 화엄 강의를 하시고 천 명의 성인을 배출해낸 산, 바로 우리 천성산은 너무도 뜻 깊은 산이라 다른 존재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천성산은 '오냐, 지율이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오너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성산도 자체의 대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널이 뚫려도 터널은 결국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아니, 터널을 뚫는 순간부터 산의 저항은 시작됩니다."

-141쪽, '지율 스님께 드립니다' 몇 토막


작가는 천성산 터널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지율 스님께 천성산은 언젠가는 뚫리고 말 것이라는, 다소 회의적인 편지를 쓴다. 하지만 작가는 예정대로 천성산 터널을 뚫게 되면 천성산 스스로 "콘크리트의 틈을 노려 물을 누수시킬 것이며 엄청난 지압으로 콘크리트를 찌그려 뜨리려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는 또한 "산 자체의 객관적 특성이면서 태고적부터 산이 산다울 수밖에 없었던 산의 성정이자 생명력"이며, 산의 의지라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작가는 강원도의 수많은 산들을 들먹인다. 강원도의 산들도 탄광 때문에 속내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산 스스로 수맥의 새 진로를 찾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의 자생력 때문에 작가 김곰치는 천성산에 터널이 뚫리는 것보다 오히려 지율스님을 더 많이 걱정한다. 만약, 법원에서 터널공사를 하라는 판결문이 나오면 그 판결문을 들은 지율스님이 또다시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지율스님에게 천성산 터널공사가 시작되더라도 지울스님이 살아 있으면 천성산도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식은 절대 안 된다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요?

"나는 노총각이다. 새해 서른두살이다. 애인도 없다. 작년 가을, 참 힘들었다.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해 술이나 한잔 사달라고 한 선배한테 전화를 했다. 그는 재작년 여름, 서른다섯에야 노총각 신세를 탈출한 자다.

"형, 가을이 무서워 죽겠어." "자슥아. 서른 넘으면 원래 그래. 두어 번 가을 더 맞으면 적응한다. 그 다음부터는 쭉 순항이다." 이건 위로가 아니고 협박 같다. 그러면서도 "얼른 여자 만나 결혼해, 개기지 말고" 한다. 나는 대답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요?"

옛 애인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스물두살 대학 4학년 때 만나 스물다섯살 군대 있을 때 헤어졌다. 첫 애인이자 마지막 애인이다. 헤어진 지 벌써 7년이다./ 그녀는 4년 전 이미 결혼을 했다. 이제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녀 생각은 내가 굳이 하려고 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반년에 한번쯤은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232~234쪽, '황당하고 절실한 약속' 몇 토막


작가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은 늘 약한 자를 대상으로 수탈과 억압을 일삼는 지배계급을 향해 날리는 민중의 불화살이자 대자연을 사람 편리주의로 마구 뭉그려뜨려 생태계를 혼란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자연의 붉은 경고장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물질 문명이 낳은 편리함이 언젠가 지구촌에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문학평론가 김종철은 "문학이 자기 본연의 역할, 즉 가장 근원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밑바닥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비타협적으로 얘기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김곰치의 르포 산문집은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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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저자
레이 그릭, 진 스윙글..
출판사
다른세상
출판일
2005
가격
15000
등록번호

ISBN
8977660637
출처

기타
414
링크

미국의 저명한 마취학자와 수의사인 레이 그릭과 진 스윙글 그릭 부부의 공동 저서로 동물실험과 관련된 일련의 저서 중 첫 번째 책으로, 그릭 부부는 동물실험의 역사를 낱낱이 파헤치며, 동물실험으로 파생된 의학 발달의 모순과 부작용을 역사적 진실 위에서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1998년 11월부터 2004년까지 DPT예방접종으로 인한 유아 사망 꾸준히 발생했던 일과 2005년 7월 28일 관절염 치료제 하이랄러닉 엑시드를 주사 맞은 5명의 환자들에게서 무릎에 물이 차고 부종이 생기면서 백혈구수치가 늘어나는 부작용 증세가 나타나는 등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사례가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 원인을 밝히고 있는 한편, 우리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에 관련된 수많은 의약품, 질병(광우병, AIDS, 암, 심혈관계 질병, 이종이식 등등)에 관한 이야기기를 다루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놀라움과 충격을 주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지만, 동물실험에 대한 추적과 비판에 그치지 않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어 책이 주는 충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든다.
들어가며-제인구달
감사의 말
특별 감사의 말

1장 서론

2장 동물실험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동물실험의 기원|갈레노스의 유산|위대한 깨달음, 르네상스기의 과학
|의료연구에서 인간 배제하기|좀처럼 피하기 힘든 실수|소우주를 향한 창

3장 법제화된 불합리
의약 발전과정에서 왜곡된 이성|탈리도마이드의 시대|사형선고
|인슐린, 동물실험자들의 '선전용 의약품'|교훈없는 사기극

4장 동물실험으로 개발된 약에 대한 과대망상
질병보다 해로운 치료법|해악의 망상

5장 동물실험, 연구자들만의 복지
고등교육의 엔진|엔진 출력 높이기|거대산업의 지배력|통찰력 있는 소비자 되기

6장 동물실험, 대안은 없는가
환자에 대한 임상연구|시험관 연구와 줄기세포|부검|역학
|수학적 모델링과 컴퓨터 보조연구|유전학적 연구|진단영상|출하 후 약물감독

7장 신약의 실제기원
신약의 안정성을 조사하는 방법|자연의 유산|우연한 발견 치료하기
|인간을 기초로 한 신약 개발 기술|때늦은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

8장 현대의 흑사병, 암
암, 무엇이 두려운가?|동물실험도 전이 한다|생쥐와 인간에 대하여
|질병을 만드는 기업과 그 결과|새로운 창조물에 암을 선사하는 일, 완성된 과제
|쥐덫 탈출|담배 게이트|이대로 죽을 것인가? 예방할 것인가?|거짓말 기계
|암 연구의 미래, 과거로부터 배운다

9장 심혈관계 질환
과거로부터의 폭로|심장질환|고혈압과 뇌졸중|심혈관계 수술

10장 AIDS와 초라한 과학
인간의 면역 시스템|AIDS에 대한 학습|HIV, 어떻게 작용하는가?
|SIV 연구의 어리석음|치료|인간 연구를 통해 이해의 깊이를 더하다
|AIDS 백신으로 가는 길

11장 이종이식, 파멸의 시작
제프 게티의 사례|탐욕이 낳은 차세대 바이러스|동물장기로 인한 죽음
|지금 중지 해야 한다

12장 행동하기를 바라며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레이 그릭 / 진 스윙글 그릭 레이 그릭은 미국에서 인정받는 의사이자 마취학자로서 현재 국립반생체해부모임의 과학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진 스윙글 그릭은 미국의 저명한 수의사로서 동물실험을 주제로 한 국제적인 포럼에서 연구결과를 수차례 발표했으며, 동물실험의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를 널리 알리는 데 헌신하고 있다.이들은 의학발전을 위한 미국인 모임과 의학발전을 위한 유럽인 모임을 설립했으며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 을 비롯해 등의 저서는 전 세계 의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이들은 북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리아 등 전 세계를 돌며 수백 차례 강연을 해왔고, BBC 및 기타 유명 방송매체를 통해 인간의 질병을 연구하는 데 동물모델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인간질병을 위한 진정한 과학은 무엇인지와 같은 의미 있는 내용을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한겨레] 신약 개발과 동물실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흔히 연구자나 제약사들은 “약물의 효능과 안전성이 동물실험에서 확인됐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점에서 마우스, 래트, 개, 침팬지 등 실험용 동물들은 사람을 위한 생체실험에서 희생되면서 의학과 생물학의 발전과정에 기여해왔다. 동물실험 연구자들은 희생된 실험동물의 넋을 달래려고 위령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 생리·생물학 연구의 기초가 돼온 동물실험의 전통에 대해 일부 과학자들이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나섰다. 미국인 의사 레이 그릭과 수의사 진 스윙글 그릭 부부가 함께 쓴 <탐욕 오만 동물실험>(다른세상 펴냄)은 “동물모델은 부정확하고 불필요하며 인간에게 위험부담을 가중시킬 뿐이다”라는 도발적 주장을 내세운다.  “동물실험은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동물실험은 제약회사에 법적인 성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물실험은 그 자체가 근본적인 의료사고이다. 동물실험을 거친 의약품이 인간에게 동일한 결과를 제공할 가능성은 언제나 50대 50보다 적다. 통상적으로 훨씬 더 적다. 동물실험은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위험천만한 도박인 것이다”(73쪽). 동물실험이 과학이 아니라니!

이들의 목소리는 ‘동물 복지’를 내건 동물보호주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 만한 이 책의 강렬함은 그런 주장이 도덕과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동물실험에 관한 여러 과학적 근거의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들은 동물 연구에서 나온 지식을 인간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역사상 대형 약물사고의 사례들이 ‘잘못된 믿음’과 ‘신념 비약’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동물실험이 신약 개발과정에서 필수적 관례가 된 것은, 근래의 역사적 사건을 거치며 이뤄진 일이라고 지적한다. 1937년 사건은 그 계기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항생제 설파닐 아미디라는 특효약을 복용했는데, 이로 인해 107명이 숨졌다. 곧이어 과학자들은 이 약물을 동물에 시험했고 동물 역시 죽었다. “이 단 한번의 사례로 과학계는 이후 모든 약물검사에 동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으로 약물 수요가 급증하면서 제약사들은 실험동물이 부작용을 나타내지 않거나 죽지 않으면, 사람의 임상실험을 통해 그 약물의 사용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1950년대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은 “모든 비극적인 부작용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1956년 이후 이 약물 사용으로 기형아 출산이 속출하자 과학자들은 다양한 동물을 대상으로 기형 발생을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은 동물에서 확인되지 않았고 약물 사용은 허용됐다. 정상 분량의 수십~수백 배를 토끼·침팬지 등에 투여하고서야 부작용을 뒤늦게 확신한 제약사는 1962년에야 이 약물을 리콜했다. 1만명 이상의 신생아들이 불구로 태어난 이후였다.  국내에서도 몇 해 전부터 ‘실험동물의 복지’에 관한 논의가 과학계 안팎에서 일고 있으며, 불필요한 동물실험의 횟수를 줄이고, 동물실험은 되도록 다른 실험으로 대체하며, 실험방식을 세련화해 동물의 고통을 줄인다는 동물실험의 3원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그 도발적 주장에 다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을지라도 ‘실험실의 동물들’에 진지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될 만하다. 또 신약 개발과정에 대한 맹신의 허상을 깨고, ‘모든’ 동물실험이 ‘모두’ 불가피한 선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상 한겨레)

 

  언론에서 새로운 약이 개발됐다고 하는 소식을 전할 때 대부분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동물실험’이다. 즉 대부분의 경우 동물실험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기에 이제 임상관찰만 거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식이 들려오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환자들의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병이 치료됐다는 다음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제 곧 병을 정복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차후의 경과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의학계에 몸을 두고 있는 레이 그릭과 진 스윙글 그릭은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간단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동물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인간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애당초 동물실험은 ‘쓸모없는’ 것이기에 당연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더불어 그들은 동물실험이 몇몇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도모하고 유지하기 위한 재원낭비이기에 동물실험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자체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껏 동물실험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어야만 인간에게 실험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기에 근본적인 것을 비판하는 그들의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그들도 이러한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실험의 무익성과 동물실험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인간들의 수많은 악의 행위를 거리낌 없이 폭로하고 있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무엇을 폭로하고 있는가? 첫 번째는 이제껏 믿고 있던 동물실험이 연구자들만의 복지이자 인간을 배제한 어처구니 없는 자원낭비라는 것이 그것이다. 지은이들은 동물실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인간과 다른 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뒤에 인간에게 그 효과를 얻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이것은 인간을 위한 과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은이들은 종이 다른 인간으로 실험을 한 뒤에 결과를 얻고 그것을 인간에게 실험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에서도 병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종이 다른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양이의 병에 효과적인 치료약이 있어 그것을 동일 병을 앓고 있는 인간에게 실험했을 때 인간은 치료는커녕 더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

관절염 치료제, 플로신트는 쥐, 원숭이 몇 개를 대상으로 실험하였다. 실험동물들은 플로신트를 잘 견뎠다. 그러나 글 인해 인간은 8명이 사망했다. 이와 같은 사건의 영향으로, 알버트 세인빈 박사의 전직 동료였던 길리오 타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궁극적으로 진통제 연구에서 어떠한 동물실험도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물실험의 결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신성하고 고귀한 직업이 사실은 인간의 건강을 돈내기하듯, 동물을 화폐 다루듯이 하는 거대한 규모의 도박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팅턴 연구 센터 책임자인 랄프 헤이우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독성 자료에서 역반응의 상호 관련성은 아마도 5~25퍼센트 사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불과 5~2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비율로 보면 동물실험이 동전 던지기보다 더 마구잡이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중에서

마찬가지로 쥐에게 효과가 있다고 하여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태에 초래할 수 있다. 이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탈리도마이드나 인슐린 등 이미 역사는 숱하게 그것들을 증명해왔다고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치료약의 발견들은 동물실험이 아니라 임상관찰과 연구, 약물역학, 유전학 등으로 얻어냈다고 말하면서 가장 많은 재원을 투입했던 동물실험은 효과는커녕 병에 대항하는 인류의 발걸음을 퇴보시켰다고 덧붙이고 있다.

지은이들은 동물실험의 그 같은 무익성과 유해성은 의학자들도 알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게 무익한 것을 알았다면 왜 이제껏 아주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것인가? 여기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이 두 번째로 놀라운 사실로 폭로하고 있다. 바로 인간이 아닌 돈을 신봉하는 세력들의 로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동물실험에 투자되는 국가 예산과 기부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약 회사들과 동물실험을 위한 동물을 제공하고 장비를 제공하는 업체들에게는 이것은 ‘생명줄’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니 모든 능력을 동원해 동물실험을 계속하게 만든다. 인간을 위한 약을 개발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은 의아스럽게 여길 수 있겠지만 군수업체들이나 담배회사들이 벌인 유명한 로비들을 생각해본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어떤 기업들이 동물실험에서 이익을 얻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비스트들을 지지하고 있을까? 동물 사육업자들과 판매업자들 외에도 우리, 격리 우리, 주사기와 주사 바늘, 저울, 전문화된 수술 장비, 동물 조직, 기관 및 혈액, 동물 사료, 살수장치, 특수한 방식으로 동물을 죽이는 장비, 화학약품, 현미경, 미세수술용 확대 장치, 외과용 수술 칼, 전기 장치, 혈액 검사 장비, 입체배열 장비 등등을 제조하는 사람들과 판매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록은 거의 끝이 없으며, 각각의 품목은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로 판매된다. ‘본문’ 중에서

또한 과거부터 내려온 관습도 한 몫 한다. 오랜 역사 덕분에 동물실험에서 인정되지 않은 약은 아예 인간에게 실험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지은이들이 우려한 대로 인간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을지 모르는 약들도 동물실험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지만 많은 이들이 관습에 얽매여 이대로 행동하고 있다.

더불어 지은이들은 안이함을 추구하는 의사들의 태도 또한 문제로 지적한다. 특히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상아탑에 있는 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에 대한 실험 보고서를 하나 쓰는 동안 동물에 대한 실험 보고서를 다섯 개는 쓸 수 있다. 인간은 까다롭지만 동물은 실험실에 가두어 두고 편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누가 편하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위한 이력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동물실험을 외면하겠는가?

이러한 지은이들의 폭로와 비판은 놀랍다. 너무 놀라워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숱한 예산과 의사들의 손끝에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절박함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로 존재한다. 인간의 에이즈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에이즈로 죽지 않는 동물들을 실험한다며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낭비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이 동물은 에이즈로 죽지 않는다’는 것임에도 아직도 동물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엄청난 재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암과의 전쟁이 가진 문제점을 단지 과학의 신빙성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매년 암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아래 수십억 달러의 연구비가 동물실험에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 연구 분야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다른 항암 연구자로 갈 수 있는 이러한 자산이 완전히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에 따르는 인간의 희생은 수치화할 수조차 없다.‘본문’ 중에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지은이들은 과학적으로 동물실험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당장 때려 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그 많은 자원들을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들, 예컨대 병리학이나 역학, 임상관찰이나 사람의 조직을 이용한 ‘시험한’ 연구 등에 사용하고 국가적으로 병을 ‘예방’하도록 조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만과 탐욕의 동물실험>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득권 세력이 순순히 자신들의 것을 포기할리는 만무하기에 개인이 진실을 알고 지역사회와 시민단체들이 진실을 알아서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오만과 탐욕의 동물실험>에서 밝힌 내용들을 상기한다면 그것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목 그대로 너무나 오만하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에, 병에 걸린 사람들과 앞으로 병에 걸릴지 모르는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숭이에게 무엇이 좋은 백신인가를 테스트해 보았는가? 원숭이에게 어떤 물질이 효과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데는 5~6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그 후에야 그것이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가를 테스트해 볼 수 있다. 그때서야 당신은 인간이 원숭이와는 전혀 다른 방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5년의 시간이 허비되었음을 깨닫는다. ‘본문’ 중에서 (이상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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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의 내면을 알고 싶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내면을 알고 싶다면…"

[화제의 신간]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

800만 비정규직 시대. '한 집 건너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더 이상 빈말이 아니다.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때 예외적으로 허용되던 비정규직은 불과 수년 만에 일상적인 근무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절반의 임금', '4대보험 미적용' 등은 비정규직 차별의 한 예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신분적 차별, 문화적 차별 현상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말 민주노총에서 제작한 한 포스터 제목은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였다.

정부도 나섰다. 지난해 비정규 관련 법안을 내놓았다. 당시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법률안"이라고 주장했다. 입법예고 8개월 만에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 정부를 쑥스럽게 한 이 법안은 이유야 어떻든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계만의 고민거리가 아님을 보여줬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된 데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의 투쟁이 큰 몫을 담당했다. '투쟁'마저도 차별받았다. 노조 설립 자체가 쉽지 않았다. 자기 권리를 찾아보겠다는 순간 징계·해고는 물론 구속 수감생활을 각오해야 했다. 이 모든 사항은 현재진행형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사람의 고민과 고통을 알기 쉽지 않다. 단편적으로 나오는 언론 보도나 연구보고서는 일면만 드러낸다. 더구나 건조한 문체 속에 '인간' 비정규직의 모습을 짐작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적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시집 한 권이 최근 출판됐다.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출판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지은이 주봉희씨는 해고 노동자다.

주씨는 1998년 6월30일 KBS에 파견직 방송차량 운전기사로 입사했다가 2000년 7월1일 해고됐다. 98년 도입된 파견법이 파견근로를 2년 이상 제공받은 사용자는 해당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주씨는 방송사 비정규노조를 결성해 5년간 전국 비정규투쟁 사업장을 돌아다니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현재 주씨는 노동계에서 '비정규 노동운동의 산 증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5년간 투쟁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복직투쟁 과정에서 겪은 말 못할 인간적 고뇌, 투쟁 속에서 깨달은 희망의 존재를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았다. 비정규관련 각종 통계 그래프, 보도기사, 연구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특히 비정규 근로를 '정상'적 근로형태로 규정한 법률안을 제출한 정부 당국자에게도 추천한다.


(출판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프레시안

동지들의 함성이, 외침이 없었다면
십수년 이중파견, 이중착취를 방조하고 방관한 방송사들이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KBS, MBC, SBS, YTN …
주 60시간이 넘는 강제노동, 24시간 야간 맞교대에
월차가 있었는지,
연차가 있었는지,
산재라니 무슨 화산재인 줄만 알았던
지난 세월과 지금도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3년 전쯤 한 동지가 운행 중 사고를 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차량 기사실로 들어온 그 동지는 그래도 먹물 좀 먹었다고 항상 으스대던 옆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형님, 근무 중에 다치면 산재 된다는데 좀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야! 너, 산재 안돼! 임마, 산재는 말야, 집에 불이 나든지, 불에 데어야 산재가 되능겨, 너 집에 불났냐? 책임보험은 되겠다."
그 선배는 웃지 못할 엉터리 해답을, 시원시원 내놓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정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파견노동자의 편지> 중에서


파견 노동자는 6월 30일생
신자유 광풍이 춤을 춘다
시퍼런 칼날이 날을 세우고
여의도 광장에 춤을 춘다
두 번의 겨울을 지나 여름이 오면
축 늘어진 버들가지 하늘거리고
살랑대는 바람결에 나를 묻는다
동쪽에서 울음소린 MBC라네
서쪽에서 통곡소리는 SBS
북쪽에서 우는 소리 KBS라네
방송사 파견노동자 피울음소리
파견노동자 보호한다더니
이중착취
중간착취
오늘이 이 년이니 나가달란다
누구를 보호했나
말 좀 하거라
반팔 입고 왔다가 반팔 입고 쫒겨가는 나
유월 노동자
30일이 생일이라네
- <파견 노동자는 앵벌이> 중에서


그 옛날 그 사랑은 온데 간데 없고
아스팔트 덩어리에 묻혀버리고
육중한 도너츠가 나를 갈기고 가도
시골 아낙네의 싸리바구니 한웅큼 담겨 있지요
어쩌다 찾아오는 할멈 손이 그리워
태양이 내리쬐는 한 귀퉁이에
꽃을 피우면 왜 이리 못 생겼냐
지나는 길손 차 버리고
미안타 사과하면 아가리 찢어지나
나는야 파견 나온 비정규 나물인가베
그래도 나는 질기고 질긴
질경이인 것을
-<밟히고 밟히어도 나는 질긴 질경이> 중에서

비정규직을 없앱시다? 그런데 그게 될까? 솔직히 얘기해봐....할인점 가고 싶죠? 싼값에 고품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해다 쓰고 싶죠? 그래놓곤 왜 비싼 봉급 받을려고 합니까?? 이거 너무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싼맛 들일때 이렇게 싼값에 이용 당하는 서러운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것..제발 잊지 맙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하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하면...그만큼 임금 올라가고?? 자연스레 소비자, 고객 부담 가중되겠죠? 그럴바에 차라리 정규직 임금 내려주세요 그런다음 사회적 타협을 하세요 우리가 이렇게 낮춰으니 이용자 부담 줄일 수 있게 아니 낮게 유지하는 임금에 대한 구매능력을 감안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을 낮춰라고 요구하면??? 자본이 거부할까요?? 물론 그럴 수 있겠죠 스크루지 영감 같은넘일 경우 그러나 그땐?? 전체 통합된 노동자들이 가만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폭동 일어날겁니다. 물론 역사는 그것을 노동자 혁명이라고 부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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