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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타면서 지구를 느낄 수 있나?"

곰치는 고려 때 글자를 모르는 어느 상놈의 이름

▲ 작가 김곰치 르포 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
ⓒ2005 녹색평론사
""'삶의 구호'라고 할까.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 내 몸 밖의 존재들에 대한 집중력을 잃을 때, '발바닥, 내 발바닥' 하고 외워 본다. 그러면 잠이 깨고 눈이 밝아지고 오늘 하루도 귀하게 살 투지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십억! 십억!'하며 삶의 욕망을 일깨웠다고 한다.

'십억!'하고 외치면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고 화장실 가는 발걸음부터 가벼워졌다고 한다. 그는 대학 때부터 군대 다녀와 직장생활 삼사년간을 그랬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은 뒤 그의 구호는 달라졌다. 딸아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곤함도 잊고 돈을 벌려고 천지사방으로 쫓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발바닥, 내 발바닥'이란 나의 구호에도 사연은 있다. 후배 하나가 자동차를 끌고 왔다. 나는 자동차에 대한 반감이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환경재앙이 올 때, 분노에 찬 사람들이 골목길에 주차돼 있는 자동차부터 때려부수지 않을까, 상상할 때가 있다.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나는 걷는 게 좋아. 자동차 타면서 지구를 느낄 수 있니? 난 내 두 발이 참 좋아. 발바닥은 지구를 느끼며 걷기를 좋아해.'"

-192~193쪽, '발바닥, 내 발바닥' 몇 토막


여기 '곰치' 라는 독특한 필명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있다. 우리 말 중에는 '곰치'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낱말들이 참 많기도 한데, 이 작가는 왜 동해의 사나운 물고기인 '곰치'란 필명을 지었을까. 김경태란 본명도 참 좋은 이름인데, 이 작가는 왜 얼른 듣기에도 좀 미련스러워 보이고, 좀 무식해 보이는 '곰치'란 이름을 고집하는 걸까.

작가는 "곰치는 고려 때 어느 상놈의 이름이었는데 그 녀석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났고, 또 왜 죽는 건지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글자를 전혀 몰라 그저 심심한 상놈의 삶을 살다 갔다"며, 오랜 세월 동안 양반들의 소유였던 문자에 한 맺힌 그 상놈이 20세기에 환생한 게 바로 나"라고 말한다.

작가 김곰치는 "제 필명은 오만한 문명의 질주에 반대하는 말로 자연과 민중의 혼융을 뜻한다"고 되뇐다. 이어 작가는 "우리의 고된 역사 속에서 민중은 늘 지배세력에게 당해왔고, 자연은 늘 사람한테 당해왔다"고 덧붙인다. 이 말은 곧 작가가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파괴되는 대자연의 현장을 동해를 누비고 다니는 곰치처럼 온몸으로 헤집고 나아가겠다는 그런 뜻이다.

발바닥으로 쓰는 글이 최고의 글쓰기이자 온몸으로 쓰는 것

"발바닥으로 쓰지 말고 온몸으로 쓰라고? 발바닥은 몸 아래의 가장 밑바닥이므로 사실 위의 모든 것을 짊어진 글쓰기다. 발바닥으로 쓴다는 것은 곧장 온몸으로 쓴다는 것이다. 손으로 머리로 엉덩이로 글을 쓴다고 착각하고 살았지만, 발바닥이 쓰는 글이 최고의 글쓰기라는 것을 새삼 알겠는 기분이다./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이다" - '책머리에-발바닥으로 글쓰기' 몇 토막

지난 1999년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로 제4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김곰치(35·본명 김경태)가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사람 편리 위주로 파괴되는 대자연의 현장을 발바닥이 부르터지도록, 온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찾아다니며 꼼꼼하게 기록한 르포ㆍ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사)을 펴냈다.

이 책은 모두 4부에 26편의 땀내 밴 르포와 산문, 꽁트, 단편소설이 작가가 이 땅 구석구석에 꼭꼭 찍어놓은 발자국처럼 새겨져 있다. '기억을 향한 투쟁'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도룡농 소송 재판부에 올리는 탄원문' '그놈 한 분-백무산 시인께' '똥 생각' '소설가가 된 청소부' '발바닥으로 쓴 일기' '곰치를 아시나요' '삼춘, 공부하나?' 등이 그것.

발바닥이 쓰는 르포, 온몸으로 쓰는 산문
작가 김곰치는 누구인가?

▲ 작가 김곰치
ⓒ녹색평론사
"그는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산하와 거기에 기대어 살아온 풀뿌리 삶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는 사태 앞에서 깊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해왔다. 그러나 그는 자폐적인 슬픔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발품을 팔아 현장으로 달려가 몸소 그 파괴를 실감하고, 그러면서 그 파괴의 한가운데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발견해왔다."-김종철(문학평론가, <녹색평론> 발행인)

작가 김곰치는 19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1991년 단편 '토큰 한 개의 세상'으로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받았으며, 199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푸른 제설차의 꿈'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시와 사상>에 문학평론 '민중시를 위한 밤'을 발표하기도 한 작가는 지금 부산에 살면서 '시 21 동인'에 참여, 시 읽는 기쁨을 한껏 누리고 있다. 1999년에는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로 제4회 한겨레 문학상을 받았다.

/ 이종찬 기자
작가 김곰치는 책머리 말에서 "민중의 삶은 주류 지식에서 비껴있기 마련이고, 주류 지식을 민중은 불신하면서도 그 파괴력을 무서워한다"며, "글을 쓴 시점과 비교할 때 현장마다 이런 저런 변화가 생겼지만, 글에 담은 나의 울음 섞인 노래만은 이 세상의 아픈 누군가에게 연대와 격려가 되리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새만금 갯벌 양식장 허가권 쥔 사람들 대부분은 외지인

"김제, 군산, 부안에 걸친 4만여헥타르의 갯벌을 농지와 호수로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 이를 단일사안으로 하여 지역에서 반대조직을 결성한 것은 작년 11월 '부안사람들'이 처음이다. 사진사, 학생, 사업가, 전기기사 등 저마다 생업을 가진 20여명이 개인별로 참가했다.

"우리의 목표는 사업중단이다. 그렇지만 방조제를 다 들어내라는 건 아니다. 배가 다니고 물길이 드나들도록 중요한 물골이라도 다시 트라는 거다. 농업기반공사는 방조제를 방치하거나 철거하면 더한 환경파괴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방조제 내부는 새만금 바다에서 퍼낸 해사로 채워져 있다. 좀 쓸려간다고 해도 바다가 황폐화될 거라는 건 협박에 가깝다"

김 씨는 새만금사업을 찬성하던 지역정서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만금 전시관에 가보면, 야 이렇게 우리 지역이 발전하는구나, 우리 전북도 이제 찬란한 미래를 맞는구나, 다들 입이 쩍 벌어진다. 없던 애향심도 새로 생긴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시화호가 썩어버리는 걸 보고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사업 강행론자들은 재빨리 개발과 환경,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65~66쪽,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몇 토막


작가 김곰치는 새만금 간척사업 현장이 있는 전북 부안에 가서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보다 실제 갯가에서 살아가는 어민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민들은 작가에게 "이 지역에서 논 10필지, 그러니까 60마지기를 가지고도 (정부로부터) 학자금을 지원받지 않으면 자식 둘 대학 보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어민들은 새만금 갯가에 나가면 "맨손어업이라도 끄랭이와 찢어진 구럭 하나 달랑 들고 하루 서너시간 갯벌 뒤지면 오만원에서 십만원은 번다"고 작가에게 설명한다. 즉, 바다와 갯벌만 굳게 믿고 자식 둘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 하지만 새만금 간척사업이 그대로 진행되면 이곳 어민들이 보상을 받아봤자 많게는 팔백만 원이요, 그밖에는 대부분 오백만 원뿐이어서 자식들 대학 공부는커녕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진다는 것이다.

이 곳 어민들의 말에 따르면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바다와 갯벌에 의지하며 살아온 어민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 그들은 곧 이 곳 갯벌의 양식 허가권을 가진 사람들, 적게는 몇 억에서 많게는 십억 가까운 보상을 받는 외지인들이다. 또한 그들은 갯벌이 사라지든 바다가 죽든 우선 보상금만 두둑이 챙기면 되는 사람들이다.

지율스님이 살아야 천성산도 영원히 살 수 있다

"스님, 용서해주십시오. 스님은 천성산이 뚫린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하셨지만, 저는 스님의 간절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천성산은 곧 뚫린다고 각오하려 합니다. 진행중인 국책사업, 어려운 나라경제라는 이유말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깊은 이유로 천성산은 뚫려나가야 하는 운명의 산인 것 같습니다.

설사 우회노선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작은 산과 들, 그리고 근처 지역주민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천오백년 전 원효 스님이 산에 드셔서 화엄 강의를 하시고 천 명의 성인을 배출해낸 산, 바로 우리 천성산은 너무도 뜻 깊은 산이라 다른 존재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천성산은 '오냐, 지율이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오너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성산도 자체의 대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터널이 뚫려도 터널은 결국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아니, 터널을 뚫는 순간부터 산의 저항은 시작됩니다."

-141쪽, '지율 스님께 드립니다' 몇 토막


작가는 천성산 터널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지율 스님께 천성산은 언젠가는 뚫리고 말 것이라는, 다소 회의적인 편지를 쓴다. 하지만 작가는 예정대로 천성산 터널을 뚫게 되면 천성산 스스로 "콘크리트의 틈을 노려 물을 누수시킬 것이며 엄청난 지압으로 콘크리트를 찌그려 뜨리려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는 또한 "산 자체의 객관적 특성이면서 태고적부터 산이 산다울 수밖에 없었던 산의 성정이자 생명력"이며, 산의 의지라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작가는 강원도의 수많은 산들을 들먹인다. 강원도의 산들도 탄광 때문에 속내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산 스스로 수맥의 새 진로를 찾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의 자생력 때문에 작가 김곰치는 천성산에 터널이 뚫리는 것보다 오히려 지율스님을 더 많이 걱정한다. 만약, 법원에서 터널공사를 하라는 판결문이 나오면 그 판결문을 들은 지율스님이 또다시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지율스님에게 천성산 터널공사가 시작되더라도 지울스님이 살아 있으면 천성산도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식은 절대 안 된다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요?

"나는 노총각이다. 새해 서른두살이다. 애인도 없다. 작년 가을, 참 힘들었다.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해 술이나 한잔 사달라고 한 선배한테 전화를 했다. 그는 재작년 여름, 서른다섯에야 노총각 신세를 탈출한 자다.

"형, 가을이 무서워 죽겠어." "자슥아. 서른 넘으면 원래 그래. 두어 번 가을 더 맞으면 적응한다. 그 다음부터는 쭉 순항이다." 이건 위로가 아니고 협박 같다. 그러면서도 "얼른 여자 만나 결혼해, 개기지 말고" 한다. 나는 대답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요?"

옛 애인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스물두살 대학 4학년 때 만나 스물다섯살 군대 있을 때 헤어졌다. 첫 애인이자 마지막 애인이다. 헤어진 지 벌써 7년이다./ 그녀는 4년 전 이미 결혼을 했다. 이제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녀 생각은 내가 굳이 하려고 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반년에 한번쯤은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232~234쪽, '황당하고 절실한 약속' 몇 토막


작가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은 늘 약한 자를 대상으로 수탈과 억압을 일삼는 지배계급을 향해 날리는 민중의 불화살이자 대자연을 사람 편리주의로 마구 뭉그려뜨려 생태계를 혼란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대자연의 붉은 경고장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물질 문명이 낳은 편리함이 언젠가 지구촌에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문학평론가 김종철은 "문학이 자기 본연의 역할, 즉 가장 근원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밑바닥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비타협적으로 얘기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김곰치의 르포 산문집은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 어리석은 시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문학적 증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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