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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안위 걱정하는척 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2편의 칼럼

믿지말자 권력!! 이젠 권력이 백성을 생각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할때... 권력이 하는 일은 언제나 그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그것을 강화하려는것뿐....

 

금속활자, 왜 한글은 없나?

 

한글날이 되면 신문과 방송은 늘 그래 왔듯 일제히 한글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외국인이 거들기도 한다. 외국인(그것도 이른바 선진국 학자들!)까지 한글의 우수성, 과학성을 칭송한다는 말을 들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기분이 갑절이나 좋아지리라. 나 역시 과거에 적잖이 기분이 좋았었다. 나는 이토록 잘난 민족의 일원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글날이 되면 이 상식적 기쁨을 배반하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솔솔 피어난다.

뭔가 하면 금속활자와 인쇄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한글은 1443년에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10년 전인 1434년에 세종은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제작한다. 금속활자야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책을 찍어낸 것은 조선 건국 이후다. 태종 3년(1403)에 계미자를 만들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세종 16년(1434)에 다시 갑인자를 제작한다. 이후 갑인자는 지금 보아도 놀라울 정도의 엄청난 종수(種數)의 책을 쏟아낸다. 이뿐이랴. 갑인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많은 활자의 모본(母本) 구실을 했으니, 그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갑인자는 한자(漢字) 활자다. 그런데 왜 한글 활자는 없는가. 갑인자를 만든 바로 그해 세종은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삼강행실도'란 책을 편찬한다. 그리고 10년 뒤 언문 제작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 모두가 쉽게 깨달아 충신.효자.열녀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세종은 한글로 표기된 서적을 백성들에게 보급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금속활자 갑인자는 다수의 책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세종의 머릿속에는 한글과 금속활자를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한문서적을 언해(諺解)하면서 극히 소수의 한글 활자를 만들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문 언해 서적의 부속물일 뿐이었다.

'삼강행실도'가 언문으로 번역된 것은 성종 때였고 그 번역물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 기묘한 것은 이 목판본 '삼강행실도'가 조선 전기의 백성들에게 직접 읽히기 위한 거의 유일한 책이라는 점이다. 즉 '삼강행실도'를 위시한 극히 소수의 윤리 서적 외에 백성들에게 공급되는 책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금속활자 갑인자는 양반을 위해 막대한 분량의 한문서적을 쏟아내고 있었다. 세종시대의 금속활자는 오로지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의 지식과 교양을 생산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한글 인쇄물이 제법 나오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다. 하지만 대부분 목판 인쇄였고 질과 양에서 한문 인쇄본을 따를 수 없었다. 한글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책을 쏟아낸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한글은 금속활자화하여 한글 인쇄물을 쏟아내지 못하고 20세기를 맞았던 것이다.

민중이 문자를 갖는다는 것은, 무지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그 해방은 다름 아닌 인쇄물, 곧 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데, 조선의 한글은 분명 민중의 문자로 만들어졌으되, 지배층은 민중의 책을 찍는 데 인색했다. 세종의 시대에 금속활자가 개량되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또 그 시기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 둘은 결합하지 않았다. 금속활자는 모두 한자 활자였으며, 그 소유주는 국가와 양반이었다. 애당초 적극적으로 책을 통해 민중을 무지에서 해방한다는 생각은 왕과 양반들의 머릿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애석하지 않은가.

해마다 한글날이면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훌륭함을 한목소리로 찬송한다. 찬송가 부르는 것을 누가 탓하랴만, 찬송과 함께 그 이면의 사정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김치 먹어도 되냐고요?

 

1998년 7월 검찰은 W, D, N사 등이 포르말린을 넣은 통조림을 만들어 팔았다고 발표했다. 통조림의 내용물인 번데기.골뱅이가 상하지 않도록 제조사가 포르말린을 넣었다는 내용이었다.

퇴근길 골뱅이나 번데기 안주에 생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달랬던 사람들은 분노했다. 시체 부패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품이 들어 있는 안주를 먹었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통조림에서 가장 많이 검출된 포르말린 양이 자연상태의 표고버섯에서 검출되는 양보다도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성급한 발표가 공연히 국민의 불안감만 증폭시킨 것이다. 통조림을 생산하던 업체의 도산도 이어졌다. 일부 피해자는 국가와 언론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내기도 했다.

벌써 16년 전 일이지만 '라면 공업용 우지(牛脂:쇠기름) 파동'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89년 가을 검찰은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내용의 익명 투서를 받고 수사를 시작했다. 팜유를 사용하던 농심을 제외한 거의 모든 라면 제조업체의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100억원대의 라면제품이 수거되고 당시 라면시장 점유율이 60%에 달했던 삼양식품(당시 삼양식품공업)은 3개월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은 10%대로 떨어졌다. 10여 년이 지난 97년 대법원 판결에서 모든 혐의가 무죄로 드러났지만 삼양식품은 파동 이후 아직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 회사가 사라질 위기까지 몰렸다. 삼양식품은 올 3월 말 화의를 마치고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특정 식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이 나오면 그때마다 한 차례씩 홍역을 치른다. 국민은 불안에 떨고, 해당 식품을 생산한 기업이나 팔았던 업소가 문을 닫기도 한다. 명백하게 건강을 해치는 성분이 포함된 식품을 만들고 판매한 기업이나 업소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산 수입 장어의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 검출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외신이 중국산 장어에서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이 검출됐다고 보도하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국민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말라카이트 그린은 전문가들조차 "물고기에 대해 독성이 있지만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하는 성분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곧바로 수입 장어의 성분을 검사해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암에 걸린다'며 보양식으로 즐기던 장어를 멀리했다. 그 결과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국내 양만(養鰻) 업계의 매출까지 평상시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채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당시 중국산 장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일본의 대응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에 사는 교포는 "(일본 국내에서 장어 파동이 났을 때) 일본 언론은 말라카이트 그린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 후생성은 중국산 장어의 성분 검사를 우리보다 20일 늦게 했다. 일본의 차분한 대응이 검역시스템의 한계인지 국익을 생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혼란을 줄이는 효과는 있었다.

식품의 위해성 여부를 가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거나 몸에 해로울 수 있는 특정 성분이 '검출됐다'는 것만 가지고 유해성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 식품의 유해성을 판정하는 기준 중에는 체중이 70㎏인 사람이 70년 동안 계속해 노출(섭취)됐을 경우 100만 명당 1명꼴로 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라는 조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 물질을 경고할 때는 노출 양과 시간, 위험 등 납득할 만한 분석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시민단체나 정치권, 사법 당국도 한건주의식 공개는 자제해야 한다.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실 공개로 국민이나 관련 기업들은 충격받고 불안해한다.

국민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1일에도 국정감사장에서는 '김치의 안정성'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야당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김치에 납이 얼마나 들었느냐'가 아니고 '먹어도 되느냐'라는 점을 공방의 당사자는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송상훈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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