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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론

신채호(申采浩)의 반자본주의 혁명론

                                                                                                 안태정(연구원)


1. 머리말


  단재(丹齋) 신채호는 근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으며 실천가였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농촌 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1936년 2월 21일 여순 감옥에서 사망했다. 신채호는 56년의 생애 동안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에 대응하여 남달리 치열하게 살았다. 기존의 연구는 주로 신채호의 역사사상, 민족주의사상, 무정부주의사상 등을 밝히는 데 집중되었다.1)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의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역사현실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2)가 대세였다. 특히 신채호가 태어난 한국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략대상이었고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자본주의사회로 바뀌어 갔다. 신채호는 이러한 제국주의시대라는 역사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신채호의 한평생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체로 1880년에서 1897년까지는 양반의 입장, 1898년에서 1910년대까지는 민족부르주아지의 입장, 1919년 하반기에서 1926년 전반기까지는 한국민중의 입장, 1926년 후반기에서 1936년까지는 세계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제국주의시대에 대응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1919년 하반기부터 양반과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한국민중과 세계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민중과 무산대중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로부터 자기해방 하도록 투쟁했다.

  신채호는 반자본주의 혁명운동 과정에서 혁명운동의 범위를 ‘일국적’ 혁명전선에서 ‘국제적’ 혁명전선으로 확장해 갔다. 대체로 1919년 하반기부터 1926년 전반기까지의 신채호의 혁명운동은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하려는 일국적 혁명인 ‘한국혁명’운동이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참여하는 1926년 후반기부터 신채호는 일본제국주의를 포함한 세계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세계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글은 1919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을 뒷받침하는 반자본주의 혁명론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먼저 신채호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에 대해서는 주로 1923년 1월 「의열단선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을3) 분석하여 알아보겠다. 다음에 신채호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에 대해서는 주로 1928년 4월에 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대회의 「선언문」과,4)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계급투쟁을 형상화한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5) 통하여 알아보겠다.  

  이 글이 오늘날의 무산대중이 자기해방 하도록 고무하는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역사적 경험으로 읽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2.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


1)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론 제기


  늦어도 1920년대 초반기에 신채호는 한국에 침투한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한국혁명을 주장했다. 이것은 신채호가 당시 일본자본주의와 한국민중 간에 형성된 적대적 모순관계를 인식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6)

  신채호는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 두 가지, 즉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체계와 자본의 ‘경쟁적 축적’체계가 일본자본주의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채호는 일본을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국가로 규정했다. 즉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의 하나인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체계를 파악했다. 이것은 자본과 노동 간의 적대적인 계급적 모순관계의 형성과, 이러한 자본․노동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체제로서 자본주의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채호는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한국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오”라고 하여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의 다른 하나인 ‘자본의 경쟁적 축적’체계도 인식했다. 이것은 임금노동 착취의 산물인 이윤의 분배를 둘러싸고 자본 내부에서 자본 분파들 간의 경쟁과, 경쟁 과정에서 형성된 독점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를 대두시켰다. 신채호는 이러한 일본에 대하여 “자본주의 강도국” 또는 “강도적 침략주의의 초패(招牌)인 제국(帝國)”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일본자본주의와 한국민중 간의 적대적인 민족적 모순관계의 형성과, 이러한 일본자본․한국민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체제로서 식민지 자본주의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한국에서 무엇을 했을까? 신채호는 모두 ‘6천 400여’ 개의 글자로 완성한 「조선혁명선언」을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했다. 신채호는 한국을 침략한 일본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한국민중의 생존의 필요조건, 즉 경제적 생존․정치적 생존․문화적 생존․신체적 생존 등을 박탈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말하자면 일본자본주의의 한국 침략에 의하여 한국민중의 생존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일본자본주의와 한국민중 간의 민족적․계급적 모순관계가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이렇게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라고 하여 일본자본주의를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敵)’으로 규정하고, 한국민중의 생존을 위해서는 한국민중 생존의 적인 ‘자본주의 강도국 일본’을 없애는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7)

  이와 같이 신채호가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을 제기할 수 있었던 사회적 기반은 무엇일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5-1846년에 쓴 ꡔ독일이데올로기ꡕ에서 “특정한 시대에 있어서 혁명적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의 혁명적인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8) 다시 말해서 신채호가 1920년대부터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일본자본주의의 한국 침투에 의하여 한국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되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계급, 즉 민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무산대중=노동자계급이 일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 한국혁명의 주체와 폭력


(1) 민중직접혁명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장한 한국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었다. 신채호가 말한 ‘혁명’의 성격과 혁명의 방법으로서 민중의 ‘직접’혁명 그리고 민중관에 대해서 보자.

  신채호는 왜 ‘혁명’을 주장했을까? 그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역사적 경험으로나 자본의 경쟁논리로나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운동인 ‘외교론’과 ‘준비론’ 등으로는 식민지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뿐이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라고 하여 ‘혁명’을 강조했다. 신채호는 과거의 혁명은 계급사회 내부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인민을 지배하는 또 다른 지배계급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    시 말하자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 세력 곧 신․구 양 상전의 누가 더 어질며,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들인다’가 혁명사의 유     일한 미담이 되었거니와….


  그러나 신채호가 주장한 ‘혁명’은 과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신채호의 ‘혁명’은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라고 하여 다수의 민중이 안팎의 지배자들을 타도하고 구축(驅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혁명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인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다수가 소수의 지배자들을 없애는 혁명이었다. 즉 신채호가 말한 한국혁명은 ‘민족해방’인 동시에 ‘사회혁명’이었다.9)

  그리고 신채호가 말한 혁명의 방법은,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라고 한 데서 보듯이 민중이 ‘직접’하는 것이었다.

  어떤 논자는 이러한 민중의 ‘직접’혁명은 공산주의자들=당의 지도나 매개에 의한 것과는 대립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채호가 말한 것은 ‘누구의 지도나 매개’ 없이 민중이 ‘직접’하는 혁명이라는 것이었다.10) 그러면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쓴 「공산당선언」은 노동자대중 가운데 ‘선진적 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했다.11) 로자 룩셈부르크도 1906년에 쓴 ꡔ대중파업론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잘 계몽되고 계급의식적인 전위이다”라고 했다.12)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신채호도 민중 가운데 ‘선각한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야 한다고 해 ‘지도’ 또는 ‘매개’를 전제했다. 그리고 역사 현실적으로는 의열단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 따라서 노동자들 가운데 ‘선진적 부분’인 공산당과, 민중 가운데 ‘선각한 민중’인 의열단이 대립된다고만 할 수 없다.

  역시 어떤 논자는 신채호가 ‘민중직접혁명’에서 말한 ‘민중’은 ‘고도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자주인’이라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민중관과는 대립적이라고 주장했다.13) 과연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타율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보았는가? 마르크스가 1864년에 쓴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잠정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하여 쟁취되어야 한다”로14) 시작한다. 또한 「공산당선언」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자주적 운동이다”15)라고 했다. 즉 공산주의자들도 노동자계급을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논자가 말한 신채호의 민중관과 마르크스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민중(노동자대중)관이 대립된다고만 할 수 없다.


(2) 혁명의 주체와 폭력


① 민중 속의 선각한 민중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혁명을 ‘직접’하는 객관적 주체로서 민중은 누구일까? 당시 신채호는 민중이 어떠한 사회적 집단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를테면 계급적 관점에서 민중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았다. 민중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지어 파악하지 않았다.16) 앞서 보았듯이 신채호가 말한 민중은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 이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한국인,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적 한국인 운동가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피지배자를 지칭한다고 보면 크게 잘못이 없다.17)

  그러면 이러한 민중이 어떻게 한국혁명을 ‘직접’ 할 수 있을까? 신채호는 민중의 직접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民衆覺悟)의 요구니라”라고 했다. 신채호는 민중각오의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神人)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     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    오 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    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    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각오의 첫째 길이다.


  신채호는 ‘민중이 스스로를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서, 이러한 ‘민중각오의 첫째 길’민중 속에서 ‘먼저 깨달은 민중이’ 전체 민중을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당시의 의열단이 민중 가운데서 ‘선각한 민중’으로서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의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18) 


② 선각한 민중의 폭력과 민중각오

  다음에 신채호는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되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들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 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 잡지가 한번의 폭동만 못할 지니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신채호는 ‘선각한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을까?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 민중의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     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요 원인 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    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의 눈    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한 길이 남아 있       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    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온 나라가 일치하는 대    혁명이 되면 간사하고 교활하며 포악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신채호는 민중이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 하에서 부자유와 빈곤 등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자본주의를 쫓아내는 한국혁명을 전체 민중이 ‘직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민중직접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각오’가 필요하고, ‘민중의 각오’를 위해서는 ‘선각한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이러한 ‘폭력(암살․파괴․폭동 등)’의 목적물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①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②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③ 정탐꾼․매국적 ④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     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    써 마주 할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    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 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신채호는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의 억압적․착취적 국가기구, 즉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인 전국에 산재한 개별적 정치적 권력자와 그 집행기구 등, 그리고 착취기구인 개별적 경제적 권력자와 그 집행기구 등을 ‘폭력’으로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의열단은 스스로의 주장대로 실천했다.20) 즉 선각한 민중의 폭력을 통하여 여타의 민중을 각오케 한다는 것이었다.21)


③ 각오한 민중의 폭력과 혁명

  신채호에 의하면 ‘민중직접혁명’은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의 ‘폭력’에 의하여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이 혁명을 이루려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서 정당화했다.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궐 안 한때의 활     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    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 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    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양자의 그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    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며 장렬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 도다.


  신채호는 한편으로 ‘특수세력’의 ‘갑신정변’, 1910년 전후의 ‘독서계급’의 ‘의병투쟁’, ‘안중근 등의 폭력’은 ‘민중적 역량’과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민중적 일치’의 3․1 운동은 ‘폭력’과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이러한 운동은 ‘각오한 민중’이 ‘폭력’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일본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선각한 민중’의 ‘폭력’에 의하여 ‘각오한 민중’이 ‘폭력’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과 ‘폭력’이 결합하면, 일본자본주의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사하고 교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라고 하여 민중직접혁명인 한국혁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이상적 한국 건설


  이상과 같이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한국혁명의 길로서 ‘각오한 민중’이 ‘선각한 민중’의 ‘폭력’을 본받아서 ‘직접’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고, 그 대신에 ‘이상적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파괴하고 건설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파괴하고 건설하는 ‘주체와 행위’의 성격은 무엇일까?


(1) 혁명적 파괴 대상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신채호는 첫 번째의 파괴 대상에 대하여, “이민족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민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의 조선이 아니니, 고유의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통치를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두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세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요, 곧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네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등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원수 시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마지막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끝내 숫자상의 공이 되고 말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다섯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통적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이바지하던 여러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민중을 노예화하게 했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이렇게 신채호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서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정치적 측면에서 ‘일본의 한국통치’라는 자본주의 억압체제의 파괴, 사회적 측면에서 ‘특권계급’과 ‘사회적 불평균’이라는 자본주의 불평등 사회의 철폐, 경제적 측면에서 ‘경제약탈제도’라는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파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노예적 문화사상’이라는 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혁명적 건설 대상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기존의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혁명적으로 파괴한 후에 무엇을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신채호는 ‘파괴와 건설은 하나’라면서 “이민족(異民族) 통치의․약탈제도의․사회적 불평등의․노예적 문화사상”을 ‘폭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고유적 조선의․자유적 조선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신채호는,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당시에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자본주의 억압체제․자본주의 불평등 사회․자본주의 착취체제․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파괴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무엇을 건설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 어떠한 ‘생산양식’ 또는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수립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3) 혁명적 파괴․건설의 주체와 행위의 성격


  이미 보았듯이, 신채호는 민중을 한국혁명의 주체로서 강조했다. 그런데 이 민중은,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을 사용한 결과 ‘환성(喚醒)한 민중’이었다. 이렇게 ‘각오한 민중’은, ‘선각한 민중’의 ‘폭력’을 본받아서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혁명적으로 타도하고, 한국을 혁명적으로 건설하는 주체였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적 주체로서 ‘각오한 민중’은 실질적으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할만한 강력한 ‘폭력’, 즉 일종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역시 혁명적 건설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만한 강력한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할 만한 ‘폭력’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만한 창조력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 또한 혁명적 파괴와 건설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안팎에서 시도하는 반혁명적 경향의 세력을 억압하고 혁명을 보위하는 힘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22)

  한편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하고 창조력으로 혁명적 건설을 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행위’로 규정해야 할까?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하는 ‘행위’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지배과정, 즉 자본가계급에 대한 다수 민중의 지배과정 같은 것이 아닐까? ‘각오한 민중’이 창조력으로 혁명적 건설을 하는 ‘행위’는 각오하지 못한 민중을 비롯한 전체 민중의 힘을 새로운 사회 건설에 집중시키는 자기 통제행위로서 계급이 철폐된 사회에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와 협동․자율과 자치의 과정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4) 한국사회 내부의 반혁명 세력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한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반혁명’ 세력을 두 가지 로 구분했다. 하나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하겠다는 개량주의운동 세력이었다.


(1) 일본자본주의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


  신채호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으로서 ‘내정독립’을 주장하는 자들, ‘참정권’ 획득을 주장하는 자들, ‘자치’를 주장하는 자들, ‘문화’운동을 주장하는 자들을 지적했다.

  첫째, 신채호는 이른바 ‘내정독립운동’에 대하여,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미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신채호는 만약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흔히 보이는 배고픈 귀신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둘째, 신채호는 이른바 ‘참정권획득운동’에 대하여,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몇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굶어 죽는 화를 면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셋째, 신채호는 이른바 ‘자치운동’에 대하여,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종류의 자치임을 묻지 않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지배 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느냐”라고 말했다.

  넷째, 신채호는 이른바 ‘문화운동’에 대하여, “일본 강도 정치 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 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성이 있으랴”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이러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내정독립 운동가’․‘참정권운동가’․‘자치운동가’․‘문화운동가’ 등은 일본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2) 개량주의운동 세력


  신채호는 ‘외교론자’와 ‘준비론자’ 등을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하겠다는 개량주의운동 세력으로 보았다.

  첫째, 신채호는 이른바 ‘외교론자’들에 대하여,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을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 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국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었으며,  “평화회의․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라고 말했다.

  둘째, 신채호는 이른바 ‘준비론자’들에 대하여,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론’과 ‘준비론’ 등은 ‘자본들 간의 경쟁’ 체계를 통하여 일본자본을 이길 수 있다는 개량주의운동 논리로서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하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3.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


1) 반세계자본주의 국제혁명론 제기


  신채호는 1926년 후반기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참여를 계기로 반자본주의 혁명전선을 ‘일국적’ 혁명에서 ‘세계적’ 혁명으로 확장했다. 신채호는 1928년에 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대회의 「선언문」에서 “자본주의의 강도제국(强盜帝國) 야수군(野獸群)들”의 그동안의 발전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야수들이 중세기 이래 자유도시에서 발달하여 오는 과학과 공업적 기계 - 증기기계․    전기기계 등을 빼앗아, 나날이 정치적․경제적․상공업적․군용적 모든 시설을 확대하며    증가하여, 커다란 지구가 우리 무산민중의 두뇌와 육체를 가루가 되도록 갈고 있는 한      개의 맷돌 짝이 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자본주의의 특징인 임금노동 착취체계와 이를 기반으로 한 경쟁적 자본축적체계에 의하여 자본주의의 정치적․경제적 억압착취 체제가 일국적 자본주의의 수준에서 세계적 또는 지구적 자본주의 수준으로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을 신채호는 “하루아침에 영국․프랑스․일본 등 자본제국 경제적 야수들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력이 전속력으로 전진하여 우리 민중을 맷돌의 한 돌림에 다 갈아 죽이려는 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에 의하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국제적으로 확대된 조건에서 일국적인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한다고 하더라도 세계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이상 무산대중의 생존은 역시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채호는 당시 자본주의의 발전과 무산대중의 상태 그리고 양자의 적대적인 계급적 모순관계를 세계적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채호의 혁명운동을 세계적 차원으로 넓혔다.23)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세계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생존을 빼앗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가죽․뼈․골을 빨     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 온 자본주의 강도제국 짐승 무리는 지금 그 창자가 뚫    어 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래서 저들이 그 최후의 발악으로 우리 무산대중 더욱    동방 각 식민지 민중을 대가리에서 발끝까지 박박 찢으며, 아삭아삭 깨물어, 우리 민중은    죽어 멸망하는 것보다도 더 음울하고 참혹한 생존 아닌 생존을 하고 있다. 아, 세계 무산    민중의 생존! 동방 무산민중의 생존! 소수가 다수에 지는 것이 원칙이라면, 왜 다수의 민    중이 초소수인 야수와 같은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고기를 찢기느냐? 왜 우리 민중의 피    와 고기가 아니면 굶어 죽을 강도들을 없애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그놈들에게 죽임을 당하    느냐?


  그러면 왜 세계 무산대중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인 세계자본주의의 지배계급에 의하여 생존을 박탈당하고 있을까? 신채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말했다.


  저들은 역사적으로 발달․성장하여 온 수 천년이나 묵은 괴상한 동물이다. 이 괴상한 동    물들이 맨 처음에 교활하게 자유․평등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 민중을 속이어 지배자의 지    위를 얻어 가지고, 그 약탈행위를 조직적으로 대낮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    한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사람고기 나누어 간직하는 곳’인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직위를 누리려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억압하는 소위 법률․형벌 등 부    어 터진 조문(條文)을 만들며, 민중을 노예적으로 복종시키려는 소위 명분․윤리 등 문둥    이 같은 도덕들을 조작하였다. 


  신채호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억압체제가 극소수의 세계자본주의의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다수의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을 빼앗도록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세계자본주의의 경제적 착취체제와 이를 보장하는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억압체제가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을 박탈하고 있었다. 때문에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의 적인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 억압체제와 경제적 착취체제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저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저들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며, 저들이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 곧 개선(凱旋)의 날이니, 우리 민중의 생존할 길이 여기 이 혁명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2) 세계혁명의 주체와 폭력


  이곳에서 살펴보아야 할 논점들의 대부분은 앞에서 본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그것들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하면 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사회적 성격은 다르지만, ‘한국’혁명의 주체는 ‘한국’민중이었고, ‘세계’혁명의 주체는 ‘세계’ 무산대중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보지 않은 논점들은 1923년의 그것으로 대신 하겠다.


(1) 세계혁명의 주체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세계혁명의 객관적 주체로서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역할을 강조했다. 왜 신채호가 세계 무산대중 속에서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역할에 주목했을까?


  우리 무산민중의 최후 승리는 필연적으로 정해진 사실이지만, 다만 동방 각 식민지 반식    민지의 무산민중은 옛부터 석가․공자 등이 제창한 곰팡내 나는 도덕의 독 안에 빠지며,    제왕․추장 등이 건설한 비린내 나는 정치의 그물에 걸리어 수 천 년 헤매다가, 하루아침    에 영국․프랑스․일본 등 자본제국 경제적 야수들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력이 전속    력으로 전진하여 우리 민중을 맷돌의 한 돌림에 다 갈아 죽이려는 판인 즉, 우리 동방      민중의 혁명이 만일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으면 동방민중은 그 존재를 잃어버릴 것이다.     

  신채호는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은 ‘영국․프랑스․일본 등’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주요 대상’으로서 생존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의 중심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채호는 생존을 위해서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은 생존의 적인 세계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의 주체로서 앞장설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신채호는 왜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을 비롯한 세계 무산대중이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는가? 이미 보았듯이 신채호는 “저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저들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이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부인하고 파괴하면’ 세계자본주의는 그 존재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세계 무산대중이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부인하고 파괴하면’ 자본주의는 멸망할까? 그것은 세계자본주의가 무산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계체제’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무산대중의 임금노동을 착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무산대중을 억압하지 않으면 작동될 수 없는 ‘사회체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무산대중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부인하고 파괴하면’ 세계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채호의 주장은 반자본주의 세계혁명 주체의 사회적 성격을 계급적 관점에서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혁명의 주체를 무산대중이라고 하여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으로 규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회적 집단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성격 규정했다는 것이다. 무산대중=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로부터 생겨난다.24) 이러한 계급적 관점에 입각한 혁명주체에 대한 사회적 성격 파악은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에서는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신채호는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의 주체를 ‘무산자’라는 계급적 관점의 용어가 빠진 일국적 존재인 ‘한국민중’으로만 호명했다.25) 

  그러면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이 어떻게 세계자본주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는가? 즉 ‘세계 무산대중이 각오’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소기독의 참사의 하수자들은 민중이지만 그 하수의 수범(首犯)은 드래곤이라 한다. 드     래곤은 아직 출처가 불명한 괴물인데, 수일 전부터 그 지방에 와서 상제를 ‘잡아먹어도 시    원치 못한 악물’이라고 욕설하며, 야소기독을 ‘제 아비보다 더 간흉한 놈’이라고 지적하고,    상제 및 기독의 죄악을 열거한 90조의 격문을 돌리고 그날 마침 기독의 내림(來臨)을 기    회하여 민중의 선봉이 되어 이같이 기독을 참살하는 흉행을 범한 것이다. … 드래곤은 늘    희랍․로마 등지에 체재하여 드디어 서양의 용이 되어 늘 반역자․혁명자들과 교유하여     ‘혁명’ ‘파괴’ 등 악희(惡戱)를 즐기어 종교나 도덕의 굴레를 받지 않는 고로 서양사에서     매양 반당(叛黨)과 난적(亂敵)을 드래곤이라 별명하였다.


  신채호는 ‘반역자․혁명자․반당․난적’ 등 세계 무산대중 가운데서 드래곤으로 상징되는 ‘선각한 무산대중’이 무산대중의 ‘선봉’이 되어 ‘폭력’ 등을 사용하여 ‘세계 무산대중’으로 하여금 ‘각오’케 한다고 했다.26) 이를테면 당시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이 세계 무산대중 속에서 ‘선각한 무산대중’으로서 무산대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봉’의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27)  


(2) 세계혁명과 폭력


  이와 같이 ‘선각한 무산대중’의 ‘폭력’에 의해서 ‘각오한 세계 무산대중’은, 또한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저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저들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라고 말했다. 역시 세계 무산대중은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억압기구와 경제적 착취기구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민중들이 야소를 죽인 뒤 미구에 공자․석가․마호메트” 등 “종교 도덕가 등을 때려죽이고, 정치․법률학교․교과서 등 모든 지배자의 권리 옹호한 서적을 불지르고, 교당․정부․관청․공해(公廨)․은행․회사” 등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 속에서 ‘선각한 무산대중’이 ‘폭력’으로써 세계의 ‘전체 무산대중을 각오’케 하고, 이 ‘각오한 세계 무산대중’이 ‘선각한 무산대중’의 ‘폭력’을 본받아서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3) 이상적 지국(地國) 건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논점들의 대부분도 앞에서 본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그것들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하면 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이상적 ‘한국’이 이상적 ‘지국’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살펴보지 않은 논점들은 1923년의 그것으로 대신하겠다.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저들이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라고 하여 세계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이 없어질 때 세계 무산대중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존이 보장되는 진정한 해방의 지상(地上)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도 이상적 지상사회와 관련하여 “과거의 사회제도를 일체 부인하고, 지상의 만물을 만중(萬衆)의 공유(共有)”로 하고, 나아가 “지배계급이 이미 멸망함에, 민중들은 이에 전 지구를 총칭하여 지국(地國)”을 건설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러한 무계급 사회와 ‘지국’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즉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생산하기 위해서 노동을 어떻게 배치하는지, 생산물들을 어떻게 분배하고 소비하는지, 그 결과 무계급 사회 내부에 어떠한 조직이 형성되는지, 그러한 사회에 알맞는 ‘지국’의 짜임새와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았다.28)

4) 세계자본주의의 반혁명 정책


  신채호는 「선언문」과 1928년에 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세계자본주의 지배계급의 반혁명 정책을 두 가지 측면에서 말했다.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의 반자본주의 세계혁명투쟁을 저지하는, 국제자본주의의 폭력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역할과, 세계 무산대중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들었다.


(1) 폭력적․이데올로기적 지배정책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억압착취 체제를 파괴하기 위한 세계 무산대중의 혁명투쟁을 막으려는 지배계급의 폭력적 국가기구와 지배이데올로기의 반혁명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서 역사에 전하여 온 제왕․성현이, 강도나 야수를 감싸고 돈 강도․야수의 우두머리     들이다. 민중이 종종 그 약탈에 견딜 수 없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많았지만, 마침내    몇 명의 교활한 놈에게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락하여 과거의 폭력적 지    배자 대신에 새로운 폭력적 지배자를 앉히는 현상으로 역사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다수의 민중이 소수의 야수들에게 유린당하여 온 원인이다. … 아, 잔학․음침․참     담, 부도덕한 야수적 강도․강도적 야수, 이 야수의 유린 밑에서 고통과 비참을 받아 오는    우리 민중도 참다못하여, 견디다 못하여, 이에 저 야수들을 쫓아내려고 하여 없애 버리려    고 하여 재래의 정치며, 법률이며, 도덕이며, 윤리며 기타 일체 문구를 부인하는 군대며,     경찰이며, 황실이며, 은행이며, 회사며, 기타 모든 세력을 파괴하자는 분노의 절규 ‘혁명’     이라는 소리가 대지 위에 일반 사람의 고막을 울리었다. 이 울림이 강조됨에 따라 저들     야수들의 신경도 비상히 긴장하여 극도의 전투적 눈빛으로 우리 민중의 태도를 자세히 살    펴본다. 그래서 군인의 총과 경찰의 칼로 혁명적 민중을 억누르는 동시에 신문․서점․학    교 등을 세우거나 혹 사들이고 혹 감독하여, 저들의 앞잡이인 기자․학자․문인․교수들    을 시키어 그 야수적 약탈, 강도적 착취를 공인하며, 변호하여, 예찬하여, 민중적 혁명을     소멸하려 한다.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도 역시 세계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반혁명 정책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하, 딱한 사람, 우리가 만든 정치 법률이 코뚜레보다 더 잔악하지 안하냐? 윤리도덕이     굴레보다 더 흉참(凶慘)하지 안하냐? 군대의 총과 칼이 채찍보다 몇 만 배나 더 전율한     무기가 아니냐? 그래도 고놈들이 반역을 도모하는구나! 그러면 일등 닥터를 불러 마취      약을 제조하여 고놈들을 영원히 마취시키어 우리에게 잡히어 먹는 줄 모르고 잡히어 먹이    게 합시다. 흥, 그 약도 내가 써보았지. 공자놈을 시키어 명분설(名分說)을 지어 ‘빈자․     천자(賤子)의 천분(天分)을 안수(安受)하여 세력자의 명령을 잘 받아 충신․열사의 명예를    후세에 끼쳐라’고 속이며, 석가놈과 예수놈을 시켜 ‘너희들이 남에게 고통을 받을지라도     이것을 반항 없이 간과하면 죽어서 너희의 영혼이 천국으로, 연화대(蓮花臺)로 가리라’고    속이었다. 이러한 마취약들이 또 어디 있겠느냐? 이천년 동안이나 크게 그 약효를 보았더    니, 지금에는 그 약의 힘도 다하여 그놈들이 점점 자각하여 반역이니 혁명이니 하고 떠드    는구나. 그러면 오늘은 과학․문학 등이 크게 위력을 가지 때니, 많은 과학자․문학자들     을 꾀어다가 부자․귀자(貴者) - 지배계급 - 의 주구를 만들어 학설로서 지배계급의 권리    를 옹호하며, 시와 소설로서 지배계급의 장엄을 구가하면 될까 합니다. 야소기독은 … 일    반 민중에게 사람이 사람 잡는 술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늘 ‘고통자가 복 받는다, 핍박자    가 복 받는다’는 거짓말로 망국민중과 무산민중을 거룩하게 속이사 실제의 적을 잊고 허    망한 천국을 꿈꾸게 하여 모든 강권자와 지배자의 편의를 주셨으니….


  이상과 같이 신채호는 ‘군대․경찰’, ‘정치법률’, ‘윤리도덕’, ‘유교․불교․기독교’ 같은 종교, ‘과학․문학’ 등 자본주의의 폭력적․이데올로기적 지배기구들이 세계 무산대중의 혁명투쟁을 저지하는 반혁명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2) 세계 무산대중에 대한 분할지배 정책


  신채호는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중에 “미리님이 안출한 민중진압책”에서 세계의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유지하고 무산대중의 혁명투쟁을 저지하려고 세계 무산대중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상의 민중을 대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일은 강국의 민중이요, 또 일은 식민지    의 민중이올시다. 강국의 민중은 아주 그 타성적인 애국심을 가진 동시에 나라를 지배계    급의 나라로 오인하여 그 애국심이 거짓된 애국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즉 강국의 민    중에게는 얼마큼 보통선거의 권리 같은 것, 노동임금의 증가 같은 것이나 허락하여 주고,    일면으로 그 거짓된 애국심을 장려하여 약소국의 민중을 정복케 하며, 식민지의 민중을     압박케 하여 지배계급 - 자본주의 - 의 선봉이 되게 하면 그들의 고픈 배가 다시 이 이    익 없는 허영에 불려져 우리가 비록 몇 십 년 동안 그들의 피를 빨아먹어도 아픈지를 모    를 것이요. 식민지의 민중은 그 고통의 정도가 다른 민중보다 만 배나 되지만 매양 그 허    망한 요행심을 가져 굶어죽는 놈이 요행의 포식을 바라며, 얼어 죽는 놈이 요행의 따뜻한    옷을 바라며, 교수대에 목을 디민 놈이 요행의 삶을 바랍니다. 그래서 반항할 경우에도 반    항을 잘 못합니다. 그런즉 식민지의 민중처럼 속이기 쉬운 민중이 없습니다. … 속이기      쉬운 것은 식민지의 민중이니, 상제시여, 마음 놓으십시오. 세계 민중들이 다 자각한다 하    여도 식민지 민중만은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가 식민지의 민중만 잡아먹더라도 몇 십 년    동안은 아무 걱정 없을 것이올시다.


  신채호는 국제자본주의가 세계 무산대중을 ‘강국의 민중’과 ‘식민지 민중’으로 분할하여 각 민중에 대한 서로 다른 지배정책을 실시한다고 주장했다.29) 그리하여 세계 무산대중끼리 서로 싸우도록 만들어 그들의 계급적 연합을 파괴해서 무산대중의 세계혁명투쟁을 무력화시키고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30)



4. 맺음말


  지금까지 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운동을 뒷받침하는 반자본주의 혁명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론은 1919년 하반기부터 1926년 전반기까지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과, 1926년 후반기 이후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으로 구분된다.

  먼저, 신채호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을 주로 1923년 1월 「의열단선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 등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신채호는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한국혁명을 주장했다. 그것은 당시 한국을 침략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한국민중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신체적 생존을 박탈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채호가 주장한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었다. 신채호는 역사적 경험으로나 자본의 경쟁논리로나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적인 외교론과 준비론 등으로는 식민지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없다면서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혁명과는 반대로, 신채호가 주장한 혁명은 다수의 민중이 안팎의 소수의 지배자들을 없애는 것으로서, 민족해방인 동시에 사회혁명이었다.

  신채호가 주장한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의 객관적 주체로서의 민중은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 이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한국인,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적 한국인 운동가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피지배자였다. 신채호에 의하면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 속에서 먼저 깨달은 민중이 전체 민중을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선각한 민중의 폭력에 의하여 각오한 일반민중도 폭력으로써 이민족 통치․특권계급․경제약탈제도․사회적 불평균․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폭력으로 파괴한 것 대신에 고유적 한국의・자유적 한국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 이상적 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신채호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이었다.

  그런데 혁명적 파괴를 하기 위해서는 각오한 민중이 실질적으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할만한 강력한 폭력, 즉 일종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역시 혁명적 건설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만한 강력한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기존의 체제를 파괴할 만한 폭력과 이상적 한국을 건설할 만한 창조력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   그리고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하고 창조력으로써 혁명적 건설을 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가진 행위로 규정해야 할까.

  신채호는 한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반혁명 세력으로서, 일본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인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인 내정독립을 주장하는 자․참정권 획득을 주장하는 자․자치를 주장하는 자․문화운동을 주장하는 자와,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하겠다는 외교론자․준비론자 등의 개량주의운동 세력을 들었다. 

  다음에, 신채호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을 주로 1928년 4월에 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대회의 「선언문」과, 계급투쟁을 형상화한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신채호는 1926년 후반기에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참여를 계기로 반자본주의 혁명전선을 일국적 혁명에서 세계적 혁명으로 확장했다. 신채호는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세계적으로 확대된 조건에서 세계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을 하지 않고서는 한국 무산대중을 비롯한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 박탈을 피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론에서와는 달리 반세계자본주의 국제혁명의 객관적 주체로서 세계 무산대중을 내세웠다. 세계자본주의는 국제 무산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에 기반을 두고 존립하고 있는 사회체제이다. 따라서 무산대중이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거부하고 파괴하면 자본주의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일국적 한국혁명론에서는 혁명의 사회적 주체를 일국적 단위의 한국민중으로 규정하여 계급적 관점을 적용할 수 없었으나, 세계혁명론에서는 혁명의 사회적 주체를 세계적 단위의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타리아트=무산대중으로 규정했다. 한편 세계 무산대중 전체와 더불어 특히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세계혁명의 주체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주요대상이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이었기 때문이다.

  신채호에 의하면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의 주체와 폭력의 관계는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의 그것과 같았다. 즉 세계 무산대중 가운데서 선각한 무산대중이 무산대중의 혁명적 선봉이 되어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를 파괴하면, 이것을 본 여타의 세계 무산대중도 각오하여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폭력으로써 파괴한 것 대신에 세계 무산대중은 전 지구에 단 하나인 이상적 지국(地國)을 건설한다고 했다. 그곳에는 생산자원을 지구인(地球人) 모두가 공유하고, 폭력적․이데올로기적 지배기구도 없는 자유스럽고 평등한 무계급 사회였다. 이것이 신채호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이었다.

  신채호는 무산대중의 반세계자본주의 국제혁명을 무력화시키고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세계자본주의의 반혁명 정책으로서, 군대․경찰, 정치법률․윤리도덕, 유교․불교․기독교 같은 종교, 과학․문학 등의 자본주의의 폭력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역할과 세계 무산대중을 강국의 민중과 식민지 민중으로 분할하여 무산대중의 연합을 파괴하는 분할 지배정책을 들었다.


  신채호가 살았던 1880-1936년의 역사현실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시대였다. 신채호는 1919년 하반기부터 1936년까지 한국민중과 세계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당시 역사현실의 대세인 일본자본주의를 비롯한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로부터 민중과 무산대중이 자기해방 하도록 투쟁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체계와 자본의 경쟁적 축적체계가 작동할 수 없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 즉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무계급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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