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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선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최보은의 인터뷰 무제한/교사 때려치우고 농부의 삶 공영석·서원정씨 부부

민성(10)이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민성이는 자유다. 아빠 공영석(45)씨도, 엄마 서원정(35)씨도 민성이를 붙들고 무엇을 가르치려 들거나, 무엇을 하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같이 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와 기타 치기가 전부다. 부모를 교사 삼아 학교 교과과정을 집에서 그대로 공부하는 이른바 홈스쿨링과는 거리가 먼, 이런 양육방식을 이들은 농담삼아 ‘안 스쿨링’이라고 부른다. 탈학교의 아이 민성이는 경남 산청군 오부읍 산꼭대기, 하늘 아래 첫째 집에서 늘 엄마 아빠, 그리고 이제 6개월된 동생 태현이와 함께 생활한다. 이들 가족은 낮에도 밤에도, 집에서도 밖에서도, 헤어지는 법이 없다.

민성이는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없어서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있으면 보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거지예”라고 말하는, 아무 것에도 중독되지 않을 자유를 가진 아이다. 민성이의 그림에서는 기교적 훌륭함을 떠나, 우선 생명이 느껴진다. 삶의 맥락을 놓친 도시 아이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려내는, 생활과 동떨어진 죽은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사는 이야기에 상상을 보탠 숨쉬는 그림이다. 엄마가 동생 태현이를 임신해서 출산하는 과정을 동화책으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상황도 연출하고 이야기도 만들면서 그린 연작 그림 앞에서 나는 한참을 입 벌리고 서 있었다.(우리 큰딸은 4년 동안 미술학원에 다녔는데도, 지금도 만화 베끼는 수준밖에는 못 그리던데…) 기타는 아빠가 읽어주는 악보를 따라 줄을 튕기며 익혔는데 제법 잘 친다. 민성이 뿐만 아니라 이 집 식구들은 무엇이든 돈을 주고 배우는 대신, 스스로의 머리를 써서 익힌다.

영석씨는 10년 전 산청에 들어와 농부가 되기 이전에는, 중학교 미술교사였다. 10년간 교사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왠지 행복하지 않았다. 한국화를 전공하고 화랑에서 임시로 일하던 원정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영석씨의 개인전 때 화랑에서 만나 결혼한 두 사람은, 먹고 입고 자고 쉬는, 존재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모든 것을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도시에서는 결코 근원적으로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뒤, 직장을 그만 두고 퇴직금으로 받은 1천만원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도시에서 자녀는 ‘돈먹는 호랑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3년 걸려 부부가 직접 지었다. 치장을 위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이 집에서, 민성이를 기르고 둘째 태현이를 낳았다. 아이는 영석씨가 직접 받았다.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면서 아이가 조금만 아프면 지갑 챙겨 병원으로 약국으로 달려가는 대신, 맑은 공기 속에서 뛰어놀며 인체의 고유한 면역력을 통해 스스로 건강을 지키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 “옛날에는 아이를 싫어했어예. 아이가 내 삶을 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예. 그런데 지금은 많이 낳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예.” 모든 교육을 돈으로 전문가를 사서 해결해야 하고, 따라서 아이가 ‘돈 잡아 먹는 호랑이’가 된 세상에서는 웬만해서는 들지 않는 생각일 것이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몇억이 든다는 보도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돈의 잣대로 재량되는 자녀의 양육이라니!

산청에 들어온 뒤,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짓고, 농사지은 만큼만 먹었다. 가난하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가난과 불편은 이들에게는 지성을 갈고 닦을 수 있는 ‘뻬빠’쯤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불편하면 생각을 하게 되잖아예. 자기가 익숙해진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고예.”

농사 짓고 남는 시간에는 같이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쳤다. 하지만 민성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은, 돈 문제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이를 스스로 생각할줄 아는 지성인으로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고유한 맥락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회의 일률적인 가치관을 성찰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곳이 학교다. 또한 학교는,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한반에 50명이 있다고 치면, 그중의 25명 수준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하거든예. 그러면 잘 하거나 못 하는 학생들은 손해보는 거지예.” 하지만 교사 경험을 통해 학교교육에 대해 확실하게 비판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던 영석씨와는 달리, 원정씨는 처음에는 학교에 보낼 생각이었다.

“본인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른들 의견으로 안 보내는 것은 안 된다. 일단 경험을 시켜보자”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민성이는 딱 열흘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학교를 보내자마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들더라고예. 제가 어릴 때 다녔던 학교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고. 온 식구가 같이 학교 다니는 시스템이 되어버리면서, 아침 일찍 같이 일어나서 학교 보내고, 돌아올 때까지 마음 졸이고.” 생활의 자유가 없어져 버렸다. 당연히 엄마가 도와주는 것을 전제로 한 숙제는, 원정씨가 보기에 너무도 불필요하고 무의미했다. “어떤 것이 더 잘한 것이라는 기준이 없는데도, 자의적으로 이건 백점, 이건 팔십점하는 식이니까 학교의 가치관에 가족생활을 맞춰야 되더라고예.“

영석씨는 “가족이 분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에서는 그런 느낌이 덜 들었을 텐데, 항상 같이 있다가 애가 학교 가니까 같이 있는 시간이 적어지는 것이 바로 느껴지데예.” 사실 학교가 돈 버는 부모들을 위한, 거대한 탁아소인 것은 맞다. 인정하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아줄 학교가 필요한 악순환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 가족들은 내용상 이산가족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부모는 자녀양육에 있어서 완전한 비전문가가 되어, 어쩌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되면 어쩔줄을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것이리라. 방학 때가 되어 아이가 집에 있을라치면 어떻게 그 아이들의 시간을 해결해줄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비싼 돈 주고 이런 캠프 저런 캠프 등 떠밀어 보내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석씨가 보기에, 도시 가족들이 세대간의 소통 단절을 경험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하는 생활이 없으니까 서로 할 말이 없는 거지예. 대화를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예.” 많은 사람들은 학교를 다녀야 생활에 필요한 사회성을 익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사회성이라는 게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어예.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보면, 사람 잘 사귀어예. 학교 다니는 아이들 보면 또래들하고는 잘 어울리는데, 어른들하고는 그렇지 못하거든예. 그런데 민성이는 우리와 늘 함께 다니고, 어른들 있는 자리에도 함께 가서 같이 대화에 참여하니까 어른들하고도 잘 어울려예. 다양한 연령층과의 소통을 경험하는 거지예.”

우린 어떤것도 미리 걱정하지 않아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바뀌는데, 이런 산골에 살면서 뒤처지는 느낌은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디지털이다 모바일이다 온갖 기기들이 자고 일어나면 ‘메롱, 나 잡아봐라’ 쉴틈 없이 외쳐대는 세상에서 아이를 그렇게 키워서 어쩔 작정이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도 걱정 안해예. 우리는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예. 그런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미래라예.” 그들은 어떤 것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가 갑자기 큰 병에 걸리면? 다치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 해결한다!

아이가 나중에라도 학교 안 다닌 것을 원망하고 대학 진학을 하고 싶어 한다거나 취직을 원하는데 학력 때문에 못한다거나 하는 경우엔 또 어쩔 작정이냐. 영석씨와 원정씨가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우리 가치관에 대한 확신이 있거든예. 지금 너무 행복하잖아예. 민성이는 매일같이 삶을 최대한 누리고 있는 거라예. 매일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여한이 없을 거라예. 그리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겠다 하면, 자기 힘으로 하면 되는 거지예.”

그래도 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취직이라도 하고 취직해서 돈 벌어야 시집장가 가서 애도 키울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런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부부에게는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민성이가 좋은 회사 취직해서 돈도 잘 벌고 그럴듯한 배우자 만나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 민성이가 늘 오늘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생각하는 인간이기를 멈추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같았다.

영석씨와 원정씨는 민성이가 열아홉살 될 때까지만 같이 살 생각이다. 그 이후에 민성이는 독립해야 한다. 지금은 지금 필요한 사랑과 자유와 행복을 주고, 그가 독립해서 살 때, 돈 대신 두고두고 밑천이 될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지금 이들 부부가 하고 있는 일이다.

아침이면 온 가족이 회사로, 학교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밤중에 지쳐서 한마디도 못할 상태로 모이고, 어쩌다 모여도 그저 텔레비전에 눈을 팔다가 잠이 드는 가족이라면, 민성이네 가족의 사는 법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자녀 교육비를 벌기 위해 삶을 포기하다시피 돈벌이에 매달리는 데도, 자녀들이 마음 같이 자라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부모라면, 자식을 키우는 데 돈보다는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근본을 돌아다보는 일은, 어쩌면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대비일 수도 있다.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청계천 살리시 참여한 황기연 교수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 브릿지 위를 흘러가네’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도시 속의 군중을 이렇게 그려 놓았다. 정말 청계천 다리 위를 사람들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청계천과 사람들의 얼굴이 수 십 년만의 상봉을 즐기고 있었다. ‘땅 속에 묻혔던 물길이 다시 찾아오니 그 어찌 반갑지 아니하랴’고 공자님도 말씀하셨지만 (아닌가?), 어쨌든 갇혀 있던 게 풀려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일종의 감동이다. 이번 복원사업에 단단히 한몫을 한 황기연 교수(48. 홍익대 도시공학과)와 약속시간을 정하는 데에는 이명박 시장의 역할이 있었다.

“아, 그 시간은 좀 곤란해요. 세계도시 시장포럼 중인데 제가 시장님 뒤에 배석을 해야 하거든요. 다른 시간으로….” 그리고 좀 일찍 만나자는 연락이 다시 왔다. “시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제 시간이 괜찮아요.”

나는 속으로 그가 이 시장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서울을 보러온 시장님들이 나름대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옆 한적한 회의실이 우리의 자리였다.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도시 교통을 공부한 황 교수는 92년 8월부터 서울시 산하 정책연구기관인 시정개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번 9월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장장 13년간이나. 그러니 뒤에 앉아 있다가 혹 시장님이 숫자에 막히거나 연도를 헷갈릴 경우 귓속말로 전해주는 배석의 임무에 적임자일 듯 했다. 어쨌든 ‘시장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는 이야기를 마쳐야 했다.

그는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에서 교통전문가역을 맡았다. 교통전문이라지만 그는 기존의 교통 개념과 좀 다른 차원이다.

“사실 승용차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대중교통과 보행이 저의 주된 관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승용차 이용을 줄이고 사람들을 걷게 만들 수 있나 그거죠.”




이번 청계천복원도 결국 사람들을 걷게 만든다고 그는 주장한다.

“시민들이 걷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로의 양을 상당히 줄여야합니다. 기존 교통학자들은 도로를 줄이면 교통이 막힌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반대지요. 사람들이 차를 덜 타게 되니까요.”

지식인 자발적·희생적 봉사 소중

복원사업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벌써 그는 서울시의 교통문제 해소에 도움이 될 거라고 알아봤다. 고가도로를 걷어내면 심각한 교통체증이 올 거라고? 오히려 반대일 거라고 우겼다.

“공사를 통해 이미 경험했습니다. 도로를 줄이면 오히려 차량소통이 좋아지는 게 바로 교통의 역설입니다. 도로는 차를 흘려보내는 기능과 함께 차를 유인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으니까요.”

청계천 사업에서 얻은 경험은 서울시의 교통정책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 교통연구부를 맡고 있던 그는 시청앞 광장, 버스 중앙차로제 등을 시리즈로 내놓았다.

“도로의 여건이 달라지면 자동차는 다른 방도를 찾기 마련이지요. 도로의 용량을 줄여서 그 길을 보행로로 확장하는 사업이 점차 정착되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그동안 많이 내려온 거지요. 위에서 아래로. 입체교차로도 많이 없앴지요. 육교도 없애고 차도를 광장으로 만들고, 도로의 폭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이야기 주제가 청계천이 아니라 오히려 보행자 권리로 옮겨갔다. 평소 대중교통과 보행위주로 이동의 삶을 영위하는 나로서는 할 말이 많았다.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정거장으로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툭하면 지하도에다가 또 건널목은 얼마나 인색한지, 오죽하면 광화문 건널목 하나를 텄다고 서울시가 그리 생색을 내는데도 가련한 시민들은 그저 감지덕지한다 등등.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조금씩 바꿔질 거라고 봐요. 너무 빨리 바꾸면 반발이 심하니까요. 특히 자동차 업계에서요. 사실 보행환경을 좋게 하는 것은 대중교통을 성공적으로 개혁하는데 필수적인 여건이지요.”

청계천 주변도 걷기에는 여간 불편하지 않다. 좁은 보행도로와 잦은 신호등, 사람보다 언제나 많은 자동차들. 그는 청계천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 해봤는지?

“아휴, 다 걸어보진 못했지요. 많이 불편해요. 솔직히 아래로 내려가야 걷는 게 가능하지 위에서는 도로를 건너갈 수가 없어요.”

좀 의외다. 적어도 수십 번은 걸어봤다고 대답할줄 알았는데.

“이동의 연속성이 중요하지요. 앞으로 청계천 주변을 걷기 좋게 만드는 것이 주요과제인거죠. 신호를 기다린다고 몇 분씩이나 기다려야한다면 걸을 재미가 안 나죠. 사람들은 자기가 건너기 가장 편한 곳에서 건널 수 있어야 하거든요.”

황 교수는 걸어 다닐 때는 신호위반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신호는 자동차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을 피해서 조심해서 달리라고 있는 거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신호다, 신호만 믿고 달리는 차들은 공공의 적이다…. 황 교수가 이런 ‘과격한’ 주장을 쏟아내는 동안 나는 혹시 운전자가 엿듣지나 않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보행도시’ 서울은 아직 꿈같은 공상이 아닐까? 배낭여행 다녀온 사람들이 외국 유명도시에서야 당연히 그렇다고들 하지만.

“글쎄, 그렇게 말씀들을 하시는데 틀린 말이에요. 사람들이 가면 차는 서야 하거든요. 여태 자동차가 사람을 길들였는데 이제는 사람이 차를 길들여야지요. 자꾸 말을 해야 해요. 우리는 행인들이 너무 순해요. 길들여져 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거예요. 요구하고 부르짖어야 해요. 길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정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걷지 않는다면 직립으로 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프랑 미셀은 말한 적이 있다.‘걷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걷기는 무기력한 관성의 안티테제’라고 주장한 미셀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황 교수의 얼굴을 다시 한번 뜯어보았다. 혹시 그의 얼굴에도 모든 뚜벅이들이 가지는 ‘위엄과 예민함을 지니고 자유를 배우는 수련의 예비단계’에 든 표정이 보이는지. 그는 완전한 뚜벅이는 아니라고 한다. 연구를 위해 자동차를 타보기도 해야 한다며.

어쨌거나 황 교수는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보행에 관한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다음 과업은 ‘신호를 깨는 일’이라고 엄숙히 말했다. 그동안 자동차가 누린 만큼의 혜택을 보행자들도 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 미래세대는 그렇게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문화·역사계쪽 불만은 짧게 외면

그는 자신이 보행만큼이나 사회의식에서도 선진적이라고 약간 목소리 톤을 낮추어 <청계천 살리기연구회>의 의미를 설명한다.

“전 평소 자율적인 연구를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믿어요. 이번에만 해도 노수홍 교수 같은 분의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기여가 컸지요. 지식기반 리더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봉사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사회 곳곳에 묻혀 있는 힘을 적절히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주5일제 근무로 늘어난 휴일을 사회변화로 쓸 수 있게 분위기를 잡는 게 역시 중요하다며 자신의 생산적인 휴일을 소개한다.

“돈이나 벌어주고 공부 안한다고 혼이나 내는 게 아버지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꿨지요. 매주 토요일 저녁 아들과 그 친구 애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주도 안빠지고 합니다. 부모들도 모여 교육도 고민하고요.”

그는 아주 긍정적인 ‘바른 생활주의자’인 듯했다.

긍정일변도인 그에게 청계천 복원에 대한 문화 역사계 쪽의 불만에 관해 물었다. ‘묻혀 있던 것을 드러낸 것만 해도 큰 성과 아니겠느냐’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길게 답할 용의가 없어보였다. 대신 이번 사업으로 서울시의 환경이 얼마나 업그레이드 되었는지 증거를 들이댄다.

“세계 언론을 보세요. 우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발의 시대를 남들보다 빨리 달려온 게 사실이지만 또 누구보다 그 상처를 빨리 치유하고 있다고 세계는 보고 있습니다.”

다리를 둥둥 걷고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 어… 진짜 물이 흐르네 하며 신기한 표정을 짓던 시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은 과연 앞으로 청계천 덕분에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

▲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행복지수를 지불의사력으로 산정해볼 수 있는데요. 세금을 얼마나 낼 용의가 있느냐 물어봤더니 가구마다 1년에 10만4천원 정도 낼 수 있다고 나왔어요. 깨끗한 물, 역사문화 복원, 바람길 등의 항목으로 나눴는데 물에 대한 지불의사가 6만원으로 가장 높게 나왔어요.” 6만원이나! 옛날처럼 천변에 나앉아 빨래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비싼 거 아니냐며 물어보려는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린다.

황 교수가 전화를 받고 일어설 준비를 한다.

“저, 시장님이 오셨답니다. 그만 이만 가봐야….”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이 시장의 등이 보였다. 황 교수가 배석을 하기 위해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보행 진보주의자 황 교수의 행보가 나와는 달랐지만 걷기에 관한 한 그와 나는 동지로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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