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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 일본 VS 닫힌 사회 한국

프랑스의 철학자 H. 베르그송의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도덕 개념과 관련해, 닫힌 사회(morale fermée)와 열린 사회(morale ouverte)로 구분되는 두 개의 사회 유형이 있다.
  
  이에 대해 백과사전에는 닫힌 사회는 본능에 가까운 습관이나 위압, 제도에서 유래하는 사회적 의무에 따라 안으로는 개인을 구속 ·위압하고, 밖으로는 배타적이며 자위와 공격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폐쇄적 사회를 의미하며, 열린 사회는 적대적 폐쇄성을 초월한 무한의 개방적 사회로서 인류애로 전인류를 포용하려는 사회라고 되어 있다. 이에 비춰볼 때 우리 사회의 열린 사회성과 닫힌 사회성은 과연?
  
  얼마전 한 인터넷 매체의 칼럼을 통해 "6.25는 통일전쟁이자 내전"이라는 주장을 해 논란을 일으키며 경찰조사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 그런데 필자는 그의 주장에 대한 찬반이나 적부 여부를 떠나 그의 주장 자체에 대한 우리사회의 반응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존재하는 법. 인류는 이 괴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러한 노력의 최선전에 위치한 상아탑은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즉 학자들은 학문을 통해 다양한 견해를 피력,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다원적 다수가 갑론을박 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인류는 발전이라는 문명의 수레바퀴를 다듬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원성의 공존을 불허하는 사회주의 체제도 아닌 현행 우리 체제에서, 또 다른 다양함을 제기함으로써 발전의 디딤돌을 제시하고 있는 학자에 대해 21세기를 역행하는 조지 부시류의 멍청한 분류기준을 들이대며 재갈을 물리려 하는 것이 과연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작금의 상황은 열린 사회는 고사하고 "데모크라시(Demo"=people", Cracy"=rule)", 즉 민중이 다스린다는 민주주의 개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민중이 어디 한두 명이겠으며 그들의 생각 또한 언제나 한 방향으로 일치할 수 있겠는가. 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 존이구동(存異求同)에 근거해 국가의 외교전략을 수립하고 있거늘, 아직도 의연하기만 한 한국적 매카시즘이여! 이는 전방위적 사회발전을 왜곡하며 편향에 안위하려는 우리 사회 수구세력의 건재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며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깨고 나가야 할 틀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의 닫힌 사회성은 부지불식 간에 우리 사회의 경직성 심화와 더불어 우리를 주변국에 의해 놀림 당하며 이용 당하는 신세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단적인 예가 우리 사회의 가히 천편일률적이라 할 수 있는 대일관, 일본 인식이다.
  
  물론 과거사에 대해 아직도 온갖 꼼수로 얄팍한 술수를 부리려 하는 일본 정계 일부의 구악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분강개가 당연하며 또 필요한 대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일관에 있어서는 대통령부터 국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항상 동일한 목소리에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똘똘 뭉쳐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저들이 북한이나 중국에 의해 애를 먹거나 곤혹스러워 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잦은 비분강개에 대해 버거워 했는가. 오히려 우리를 자극하고 유도함으로써 국내외정치용으로 잘 활용하곤 하지 않았던가.
  
  지난 9월, 우익보수를 주창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수상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지지는 알려진 바와 같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 한 가지 곰곰 생각해보자. 한국언론에 비쳐지는 고이즈미 수상은 주변국과의 마찰은 아랑곳 않은 채 줄곧 강한 일본을 주창하는 일본의 우익화와 군국주의를 총지휘하는 선봉자가 아닌가. 그러한 그를 지지한다 함은 곧 그의 우익화 사조에 동조하는 것이 되므로 결국 일본국민 대다수도 우익화와 군국주의를 원한다는 식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또 실제로 적지 않은 한국의 매스컴이 이와 같은 논조에 의거해 일본을 전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 일본을 접하는 우리 국민들의 일본 인식은 과연….
  
  그렇다면 과연 고이즈미를 지지하는 일본인 대다수가 군국주의에 매료된 보수 우익주의자들일까? 과연 고이즈미가 군국주의를 주창하기에 일본국민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일까?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국가 사회 전 분야(외교 분야 포함)에 걸친 다양한 공약이 제기되고 유권자들은 이를 토대로 자신들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마련이다. 한편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 공약사항 가운데 가슴에 더욱 가깝게 와닿는 분야는 과연? 당장의 민생문제가 시급한 국민들에게 있어 외교 부문이 과연 득표에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을까.
  
  고이즈미 수상은 중의원을 해산한 뒤, 우정사업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국내의 민생 현안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개혁을 저지 말라!"는 새로운 선거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국민생활과 직결된 민생문제만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외교문제(일본 노무라총합연구소 마타키 연구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타키 연구원의 분석에 의하면 외교 문제는 고이즈미 수상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만약 일본의 유권자들이 외교 문제를 주요 이슈로 선거에 참가하게 되었다면 고이즈미는 재집권에 성공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일본 국민들도 주변국과 좌충우돌 마찰만 빚고 있는 고이즈미 정권의 외교행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과 일본인들의"고이즈미 지지 = 일본인들의 우경화, 군국주의 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의 어긋난 대일 인식은? "때려야 할 일본"이라는 불변의 프리즘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언론에 의해 취사선택된 편협한 정보는, 이처럼, 우리 국민의 열린 사회적 대일인식을 저해하며 한국적 매카시즘의 끈을 더한층 옭조이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닫힌 사회의 결합원리는 정지된 관습이나 위압, 명령 등에 의해 개인을 사회에 복종시키려는 불변의 비인격적인 닫힌 도덕으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도시, 국가도 타인을 선별, 배척하며 거부와 투쟁을 전개한다. 이에 대해 열린 사회의 결합원리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생명의 근원에 감촉되는 환희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향상하려는 인류애적 도덕, 즉 열린 도덕이다. 따라서 열린 도덕은 가족이나 사회, 국가의 닫힌 도덕을 초월한 사랑으로 맺어진 인류사회에 대응한다….
  
  10여 년 이상을 미국, 일본, 중국을 포함한 다양한 외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필자는 우리 사회의 상대적 닫힘성(사회주의 독재체제인 중국과의 비교는 사실상 무의미하므로 논외로 하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밟힐수록 강해지며 푸르러지는 우리의 열린 사회 지향성도 발견,'희망!'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아직은 닫혀 있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활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온갖 가시덩쿨로 우리를 둘러싼 채 국가와 민족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 사회의 열림 지향성을 저지하려는 일부 닫힘성 인자들!.
  
  하지만 필자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의 지력과 총력은 필자가 경험한 어느 국가, 어느 국민들보다도 21세기를 리드하기에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있어 20세기적 닫힌 사회를 고수하려는 19세기적 독소와 저항은 우리의 열린 사회화를 더욱 촉진하는 촉매제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하나의 알을 깨는 고통 속에 놓여 있는 현재의 우리 사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할만 하지 않은가.
   
 
  우수근/중국 화동사범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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