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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실험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만병의 근원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약사, 양의사, 정치권력(특히 제국주의 시대 특정 대륙 특정인종에게 가한 폭력..근데 그게 그때의 문제일 뿐일까?)이 담합.
그 결과 죽어나는건 시민들과 마른하늘에 날벼락 마냥 어느날 갑자기 생체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여 끝내 죽임을 당하는 수 많은 생명체들.... 아니 어쩜 사람도 그들의 생체실험대상인지도 모른다(임상테스트인가 그거 말고) 그것도 치료비라는 명목아래 돈 갖다 바치고 전문가로서 각별히 예우까지 해가며 지 몸 하나 희생하니......
암튼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병이 아니라면 신은 결코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만을 가슴에 새긴채 살아간다면 결코 그들의 불순한 목적에 따른 희생양이 되지는 않을거다...

 

 

 

▲ 레이 그릭,진 스윙글 그릭 공저/김익현,안기홍 역
ⓒ2005 다른세상
언론에서 새로운 약이 개발됐다고 하는 소식을 전할 때 대부분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동물실험'이다. 즉 대부분의 경우 동물실험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기에 이제 임상관찰만 거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식이 들려오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환자들의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병이 치료됐다는 다음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제 곧 병을 정복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차후의 경과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의학계에 몸을 두고 있는 레이 그릭과 진 스윙글 그릭은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간단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동물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인간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애당초 동물실험은 '쓸모없는' 것이기에 당연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더불어 그들은 동물실험이 몇몇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도모하고 유지하기 위한 재원낭비이기에 동물실험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자체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껏 동물실험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어야만 인간에게 실험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기에 근본적인 것을 비판하는 그들의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그들도 이러한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실험의 무익성과 동물실험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인간들의 수많은 악의 행위를 거리낌 없이 폭로하고 있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무엇을 폭로하고 있는가? 첫 번째는 이제껏 믿고 있던 동물실험이 연구자들만의 복지이자 인간을 배제한 어처구니 없는 자원낭비라는 것이 그것이다. 지은이들은 동물실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인간과 다른 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뒤에 인간에게 그 효과를 얻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이것은 인간을 위한 과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은이들은 종이 다른 인간으로 실험을 한 뒤에 결과를 얻고 그것을 인간에게 실험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에서도 병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종이 다른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양이의 병에 효과적인 치료약이 있어 그것을 동일 병을 앓고 있는 인간에게 실험했을 때 인간은 치료는커녕 더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

관절염 치료제, 플로신트는 쥐, 원숭이 몇 개를 대상으로 실험하였다. 실험동물들은 플로신트를 잘 견뎠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간은 8명이 사망했다. 이와 같은 사건의 영향으로, 알버트 세인빈 박사의 전직 동료였던 길리오 타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궁극적으로 진통제 연구에서 어떠한 동물실험도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물실험의 결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신성하고 고귀한 직업이 사실은 인간의 건강을 돈내기하듯, 동물을 화폐 다루듯이 하는 거대한 규모의 도박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팅턴 연구 센터 책임자인 랄프 헤이우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독성 자료에서 역반응의 상호 관련성은 아마도 5~25퍼센트 사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불과 5~2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비율로 보면 동물실험이 동전 던지기보다 더 마구잡이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중에서

마찬가지로 쥐에게 효과가 있다고 하여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태에 초래할 수 있다. 이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은 탈리도마이드나 인슐린 등 이미 역사는 숱하게 그것들을 증명해왔다고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치료약의 발견들은 동물실험이 아니라 임상관찰과 연구, 약물역학, 유전학 등으로 얻어냈다고 말하면서 가장 많은 재원을 투입했던 동물실험은 효과는커녕 병에 대항하는 인류의 발걸음을 퇴보시켰다고 덧붙이고 있다.

지은이들은 동물실험의 그 같은 무익성과 유해성은 의학자들도 알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게 무익한 것을 알았다면 왜 이제껏 아주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것인가? 여기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이 두 번째로 놀라운 사실로 폭로하고 있다. 바로 인간이 아닌 돈을 신봉하는 세력들의 로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동물실험에 투자되는 국가 예산과 기부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제약 회사들과 동물실험을 위한 동물을 제공하고 장비를 제공하는 업체들에게는 이것은 '생명줄'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것이니 모든 능력을 동원해 동물실험을 계속하게 만든다. 인간을 위한 약을 개발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은 의아스럽게 여길 수 있겠지만 군수업체들이나 담배회사들이 벌인 유명한 로비들을 생각해본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어떤 기업들이 동물실험에서 이익을 얻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비스트들을 지지하고 있을까? 동물 사육업자들과 판매업자들 외에도 우리, 격리 우리, 주사기와 주사 바늘, 저울, 전문화된 수술 장비, 동물 조직, 기관 및 혈액, 동물 사료, 살수장치, 특수한 방식으로 동물을 죽이는 장비, 화학약품, 현미경, 미세수술용 확대 장치, 외과용 수술 칼, 전기 장치, 혈액 검사 장비, 입체배열 장비 등등을 제조하는 사람들과 판매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록은 거의 끝이 없으며, 각각의 품목은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로 판매된다. '본문' 중에서

또한 과거부터 내려온 관습도 한 몫 한다. 오랜 역사 덕분에 동물실험에서 인정되지 않은 약은 아예 인간에게 실험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지은이들이 우려한 대로 인간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을지 모르는 약들도 동물실험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지만 많은 이들이 관습에 얽매여 이대로 행동하고 있다.

더불어 지은이들은 안이함을 추구하는 의사들의 태도 또한 문제로 지적한다. 특히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상아탑에 있는 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에 대한 실험 보고서를 하나 쓰는 동안 동물에 대한 실험 보고서를 다섯 개는 쓸 수 있다. 인간은 까다롭지만 동물은 실험실에 가두어 두고 편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누가 편하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위한 이력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동물실험을 외면하겠는가?

이러한 지은이들의 폭로와 비판은 놀랍다. 너무 놀라워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숱한 예산과 의사들의 손끝에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절박함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로 존재한다. 인간의 에이즈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에이즈로 죽지 않는 동물들을 실험한다며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낭비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이 동물은 에이즈로 죽지 않는다'는 것임에도 아직도 동물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엄청난 재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암과의 전쟁이 가진 문제점을 단지 과학의 신빙성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매년 암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아래 수십억 달러의 연구비가 동물실험에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 연구 분야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다른 항암 연구자로 갈 수 있는 이러한 자산이 완전히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에 따르는 인간의 희생은 수치화할 수조차 없다.'본문' 중에서

<탐욕과 오만의 동물실험>에서 지은이들은 과학적으로 동물실험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당장 때려 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그 많은 자원들을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들, 예컨대 병리학이나 역학, 임상관찰이나 사람의 조직을 이용한 '시험한' 연구 등에 사용하고 국가적으로 병을 '예방' 하도록 조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만과 탐욕의 동물실험>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득권 세력이 순순히 자신들의 것을 포기할리는 만무하기에 개인이 진실을 알고 지역사회와 시민단체들이 진실을 알아서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오만과 탐욕의 동물실험>에서 밝힌 내용들을 상기한다면 그것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목 그대로 너무나 오만하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에, 병에 걸린 사람들과 앞으로 병에 걸릴지 모르는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숭이에게 무엇이 좋은 백신인가를 테스트해 보았는가? 원숭이에게 어떤 물질이 효과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데는 5~6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그 후에야 그것이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는가를 테스트해 볼 수 있다. 그때서야 당신은 인간이 원숭이와는 전혀 다른 방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5년의 시간이 허비되었음을 깨닫는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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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험 '알면 뒤집힌다'는 책

생명보험 '알면 뒤집힌다'는 책
장태상 <생명보험의 비밀>
텍스트만보기   김선영(josungokho) 기자   
나는 국민건강보험을 빼놓고는 어느 보험 한 가지도 가입하지 않고 살아오던 사람이다. 결혼하면 가입해야지 생각하며 미루어 오다가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고 살다 보니 한 가지도 가입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매월 만들어내야 하는 몇 만원의 보험료가 부담되었는지도 모른다. 국민건강보험료도 100만원쯤 밀려 있는 나에게는, 말하자면 사설보험 가입으로 미래를 설계할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이것이 손가락 안에 들 아주 특별한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한 대한민국 전업소설가의 실체다.

그러다가 이번에 상해사고를 당하고 나니 보험 가입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그렇다고 풍선처럼 부풀려졌을지 모를 보험설계사의 말을 듣고 무작정 가입할 수는 없는 일. 일간지 광고를 보면 얼마나 현란한가! 마치 자기 회사만이 보험 가입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듯한 카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 장태상 <생명보험의 비밀> 앞표지
ⓒ2005 이소출판사
이럴 때 보험 가입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보험의 진실, 특히 생명보험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책이 있다면? 마침 영업 현장에서부터 고객 서비스, 영업기획, 상품기획에 이르기까지 두루 체험하며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장태상씨가 수십 년간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보험업계의 천기를 누설한 책이 2004년 7월에 나왔다.

보험 안의 비밀과 보험 밖의 비밀

"몇 백만 원짜리 예금 이율은 꼼꼼히 따지면서 정작 1억 원짜리 보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나 같은 묻지 마 가입자들의 뒷머리를 후려갈기는 책."

종신보험에 가입한 벤처기업가 안종필씨가 이렇게 촌평한 책의 이름은 <생명보험의 비밀>이다.

이 책은 크게 '보험 안의 비밀'과 '보험 밖의 비밀'로 나누어져 있다. 저자가 설명하는 '보험 안의 비밀'은 크게 세 가지. '예정 사업비의 비밀', '예정 위험률의 알다가도 모를 비밀', '예정 이율의 낯 두꺼운 비밀'.

'보험 밖의 비밀'은 '판매 채널을 둘러싼 끼리끼리 비밀', '사후 서비스의 비밀 아닌 비밀', '비과세 혜택의 헛웃음 나는 비밀'.

이 내용들은 모두 보험 소비자의 권리 찾기를 위한 것들이다.

"보험료 산출 기초를 공개하라"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1부에서는 무배당 상품을 중심으로 보험 상품에서 손익이 발생하는 원인을 살펴본 뒤, 보험 계약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보험료 산출 기초인 예정 사업 비율, 예정 위험률, 예정 이율 등은 명확한 근거와 함께 공개되어야 하며, 무배당 상품에 가입하고 있는 보험 계약자는 배당 상품이나 실세 가정형 상품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권익을 보호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2부에서는 상품 이외의 영역인 판매 채널과 서비스 제도, 그리고 생명보험 관련 세제를 다루어 놓았다.

보험 가입자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 제시

안씨는 말한다.

"무관심한 보험 소비자와 무책임한 생명보험 회사가 서로 만날 때, 보험 자본의 천년 왕국은 만들어진다. 여기에 '국민 경제의 안정을 위해 생명보험 회사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망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 하에 보험 회사의 바람막이 역할을 마다 않는 감독 당국까지 합세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는 '생명보험 회사만의 일방적인 번영이 보험 소비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 <생명보험의 비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은 생명보험 회사의 이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밝혀내면서 보험 가입자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보험 가입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거나 정당한 이익을 침해당하는 일을 안타까워하던 안씨가 오랜 기간 현장에서 일하며 느껴 온 아쉬움과 바람이 빽빽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수많은 보험 가입자들과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보험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보호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이것이 안씨가 그동안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보험업계의 천기를 누설하면서까지 <생명보험의 비밀>을 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생명보험의 비밀> 장태상 씀/2004년 7월 30일 이소출판사 펴냄/2·6판 224쪽/책값 1만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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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아직도 천덕꾸러기인가?

 

그들은 돈벌이에 이득이 안되는건 모조리 잡초라 여긴다
심지어 사람 조차...."잡초갔은 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것중 필요없는건 없다. 단지 무지한 우리들이 그들의 쓰임새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잡초 활용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기는커녕 폭력으로서 그들을 제거한다는것은 마치 어느 인종주의자의 인종 청소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누가 그랬던가...암담하다.

 

  김현자(ananhj) 기자   
▲ "대지의 수호자 잡초"입니다
ⓒ2005 우물이 있는 집
봄, 지금도 버려지고 있는 이른 봄의 수많은 잡초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여름, 잡초가 무성한 여름 잡초 밭은 보호막과 먹이를 제공하는 동물들의 가장 이상적인 은신처가 된다. 가을, 일찍 발견돼 뽑혀져 나가지 않기 위해 잡초들은 대개 농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란다. 겨울, 잡초가 자라는 땅은 일찍 따뜻해진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사슴은 잡초 밭으로 몸을 숨긴다 - <대지의 수호자 잡초> 서문 중

내가 어릴 적엔 돼지감자가 있었다. 추수가 끝난 빈들의 언덕배기나 밭 울타리 가에 있는 멀대같은 줄기를 걷어내면 땅 속에서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돼지감자가 쏟아져 나왔다. 아삭 아삭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에 잠시 흥분했다가 다시 잊고 말았지만 이듬해 11월, 다시 찾은 그곳에선 어김없이 돼지감자가 쏟아져 나왔다. 돼지감자는 특별하게 가꾸지 않고 버려지다시피한 잡초일 뿐인데 늘 반가운 모습으로 아삭하고 달콤한 맛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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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이 돼지감자를 작물로 재배하였다면 지금 우리들은 돼지감자를 잡초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즐기는 만큼 현대인들의 당뇨수치도 낮았으리라. 시금치 대신 민들레를 작물로 재배하였다면 인간의 위는 좀 더 편안하여 위암으로 인한 사망의 기록도 줄었으리라(돼지감자는 당뇨병에 좋다. 최근 얼마 전 천연 인슐린이란 별칭으로 일본 학회에서 그 효능을 입증, 발표했다. 민들레는 위에 좋을 뿐더러 다른 약효로 뿌리부터 꽃까지, 홀씨를 제외한 전체를 약으로 쓴다고 한다).

제발 잡초를 하찮고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잡초는 생태계의 한 존재로서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 있으며, '쓸모 있음'에 의해 선택받아 재배되고 있는 작물 못지않게 우수한 먹을거리며 아주 유용한 약초다. 또 잡초는 황폐한 토양의 개척자이자 모성식물로서 오늘도 오염된 토양을 묵묵히 바꾸어간다.

▲ 책속에서 볼 수 있는 잡초들 일부
ⓒ2005 우물이 있는 집
이 책은 잡초 이야기다. '제 자리를 벗어나 자라는 모든 식물'이란 개념으로 우리들이 하찮게 여기고, 우리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작물을 위하여 뽑아내는 천덕꾸러기 잡초를 칭송하기 위해 씌어진 책이다. 1940년대에, 씌어진 책이지만 시대적인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환경학과 생물학을 평생 연구하였던 저자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잡초들이 자라날 수 없는 위기의 환경과 토양의 척박이 염려되어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 책은 세계에서 최초로 잡초의 이용을 옹호한 선구적인 저작물로 이미 유명하다.

잡초를 뽑아내야만 하는 하찮고 버려진 것, 쓸모없는 것으로 알고 성장하던 소년에게 어느 날 솔 벤슨이 들려주는 옥수수 밭의 쇠비름 이야기는 이후 조셉 코케이너가 50년 동안 잡초와 토양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물보호를 위하여 뽑아내던 쇠비름과 옥수수의 관계를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는 솔 벤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실히 옥수수가 자라는 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쇠비름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벤슨 아저씨,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하지만 잡초가 가축사료나 야채요리 말고는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아요."

"나도 알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무지하거나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야."

순간 나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무엇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구의 모양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류에 빠졌다면, 잡초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했다. 쇠비름이 옥수수가 자라는데 도움을 준 자는 사실은 대부분의 현상들을 받아들이는데 기지가 넘쳤던 솔 벤슨의 몫이었다!


우리에게 유익한 콩도 처음에는 잡초였다. 콩을 발견한 탐험대가 넝쿨 무성한 콩 옆을 스쳤다 하더라도 마침 꼬투리 없는 콩이었다면 선택받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들의 돼지감자처럼 잊혀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 인간들이 식물에 들이댄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선택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잡초에서 작물이 되어 인간에게 유익한 콩의 발견, 그 역사를 보자.

여러 날을 헤매던 어느 날 탐험대는 우연히 끝도 안 보이게 높이 자란 넝쿨 식물을 발견하였다. 그 식물에는 아주 탐스러운 열매로 채워진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고심 끝에 그들은 제비뽑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매를 먹어 볼 희생자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콩이 발견되었다. - 책 본문 중

요즘에는, 친환경적인 농사를 도모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들은 봄이면 한해 농사를 앞둔 논에 자운영 같은 사료작물로 인정받은 잡초를 끌어들여 땅을 비옥하게 한다. 옛날에는 시골마을마다 일손이 잠시 쉬는 한여름에 퇴비 만들기 공동작업을 했다. 산과 들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를 베어서 쌓은 뒤 거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손쉽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비료로 대체되면서 땅은 척박해지고, 자라나는 작물은 면역력이 약해져서 농약사용량이 늘었다. 그래도 비집고 뿌리를 깊숙이 내려 보란 듯이 자라나는 것은 잡초다.

▲ 책속에서 볼 수 있는 잡초들 일부
ⓒ2005 우물이 있는 집
동의보감 같은 책이나 민간요법을 보면 산야에 자라는 대부분의 풀들이 약으로 사용되고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관심을 두고 보면 지천에 널려 있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훌륭한 먹을거리다. 다만 우리가 이미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맛나게 먹고 있는 모든 야채나 과일도 선택받아 재배되기 전에는 널려 있는 잡초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우리의 주식인 쌀이나 빵의 주재료인 밀도 마찬가지다.

조셉 코케이너는 50년 동안 생물학과 환경 보존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잡초가 생태와 환경뿐 아니라 농작물에게도 이롭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에 따르면 잡초는 토양의 상태를 알아보는 지표이며, 모성작물로서, 혹은 초지개척자로서 잡초는 유능한 토양의 일꾼이며 작물의 친구다. 이 책을 통하여 만나지는 잡초의 우수성과 이용가치는 놀라울 정도다. 이 책의 목적은 이렇다.

저자는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시금치나 요리된 야채들에 비하여 흰 명아주가 결코 덜하지 않게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코케이너 교수는 잡초가 농장이나 정원을 무성하게 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선구적 역할은 잡초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정상적인 생태학이고, 또한 토양을 잘 보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농부나 정원사에게 진정한 이익을 증명하는데 있다. - 서문 중

농사와는 무관하게 다만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초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면 수없이 거론되는 잡초들의 쓰임새에 대하여 놀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 먹을거리로써 가치에 놀랄 것이다. 이 책엔 먹을거리와 약재로 쓰이는 잡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최근 몇 년간, 산야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몇 해 전에 많이 읽혀진 <야생초편지> <잡초는 없다> <산야초 이야기> 등이 잡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이런 책에 관심을 두었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더 깊은 근본적인 안목을 트여주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어제까지 무심하게 자라던 잡초들이 좀 더 근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젠 잡초를 다만 하찮고 쓸모없어서 버려진 존재들로만 생각하지 말자.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훌륭한 존재들이다. 사람이 판단하는 쓸모 있고 없음에 얽매일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우주를 품고 있는 생태계의 한 일원이다.

약간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장미는 지금도 찔레순에서 얻어내며, 달고 맛난 감은 고염에서 얻어진다. 포도 또한 머루에서 얻어진다. 생약성분의 많은 약들은 잡초에서 얻는다.

쓸모없음, 버려진 것들, 하찮은 존재들, 작물의 성장을 막는 방해꾼 등등 잡초에 대한 이런 생각을 이젠 버려야 한다. 그 생각을 버리는 데 이 책은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것이다.
책이름: 대지의 수호자 잡초
글쓴이:조셉 코케이너(Joseph A. Cocannouer,1882-1969)
옮긴이:양금철, 구자옥
책낸곳:우물이 있는 집
책값: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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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주의 선언


반자본주의 선언


▶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 정성진, 정진상 옮김 지음
▶ 책갈피
▶ 2003-12-25

▶ ISBN : ISBN : 8979660316
▶ 240쪽 9,500원


세계의 석학 캘리니코스의 역작
이 책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An Anti-Capitalist Manifesto, Polity, 2003)을 완역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현존하는 마르크스주의 분야의 세계 석학이자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지도적 인물로서,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미 대부분 번역돼 출판됐으며, 최근 우리 나라에 자주 방문 강연하여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1999년 ‘시애틀 전투’에서 시작돼 올해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있었던 반WTO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은 1989~1991년 소련?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인류의 숙명으로 간주돼 왔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결코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부활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의의를 갖는 새로운 사회 운동 흐름이다.
그런데 반세계화 운동은 흔히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점을 빼고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다양한 운동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99년 제3차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시애틀에 집결한 운동은 세계 각지의 노동 운동, 환경 운동, 농민 운동, 각종 NGO, 좌파 조직들이었는데, 이들은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슬로건 아래 하나로 합류했다.
하지만 오늘날 반세계화 운동의 내부에서 몇 가지 쟁점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저지하는 것이 자본주의 틀 내에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보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과제를 기존의 국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의 여부, 또 이 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로서 조직 노동 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는지의 여부, 2001년 9/11 대미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 이후 대두되고 있는 반전 운동과의 연대 여부 등이 그 주요한 쟁점들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쟁점과 과제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이와 같은 반세계화 운동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쟁점들과 향후 과제를 자신이 지지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정리한 책이다.
캘리니코스는 먼저 반세계화 운동이 세계화의 어떤 특정한 양상이 아니라, 세계화 그 자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또 국제주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 운동을 반세계화 운동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이 책 전반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금융 불안정과 과잉생산 위기,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캘리니코스는 최근의 세계화를 시장 근본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 금융세계화 등 주로 경제적 세계화로 이해하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수 견해에 반대하면서, 오늘날 세계화는 무엇보다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세계화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정치/군사적 갈등이 격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오늘날 세계화는 '무장한 세계화'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핵심 논지다.
그 다음 캘리니코스는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①반동적 반자본주의, ②부르주아 반자본주의, ③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④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⑤자율주의, ⑥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한 후, 마지막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반자본주의 운동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다소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이와 같이 유형화해 비교/분석한 것은 캘리니코스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특히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ATTAC(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과 같은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전략과 최근 일부 좌파들이 지지하고 있는 자율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운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흐름들이 오늘날 세계화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을 반전 운동과 연계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전략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노선의 구체적 대안을 정식화한다. 캘리니코스는 팻 데바인(Pat Devine)의 ‘협상 조정’ 모델과 같은 민주적 계획 모델을 시장 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로서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나아가 자유/평등/연대와 같은 ‘문명 세계의 가치들’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혁명적 변혁의 토대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캘리니코스가 제안한 민주적 계획 모델은 최근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의 ‘참여 경제’(‘파레콘’) 모델과 함께 대안 체제 구상과 관련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끝으로 캘리니코스는 민주적 계획과 같은 ‘최대 강령’의 실현 이전에 반자본주의 운동이 집중해야 할 ‘이행기 강령’으로 ①제3세계 부채의 즉각적인 탕감, ②토빈세 도입, ③자본 통제의 회복, ④보편적인 기본 소득 도입, ⑤주당 노동시간 단축, ⑥공공 서비스 보호와 재국유화, ⑦누진세, ⑧이민 통제 폐지, ⑨환경 재앙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 도입, ⑩군산복합체 해체, ⑪시민적 자유 방어 등을 제시한다. 캘리니코스가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이행기 강령’들은 그 동안 반자본주의 운동 과정에서 제출된 각종 투쟁 슬로건과 요구들의 정수를 뽑아 낸 것들로서 향후 반자본주의 운동의 행동 강령으로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다.
21세기의 ≪공산당 선언≫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과 관련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팸플릿과 논문, 저서들이 출판됐지만, 반자본주의 운동을 그 배경과 주요 쟁점, 과제로 나누어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캘리니코스의 이 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다음달 1월 16일부터 21일까지 인도 뭄바이에서 제4차 세계사회포럼이 열린다.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이 벌써 4회를 맞이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는 한국에서도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기치 아래 모인 전 세계 다양한 진보 세력들의 토론과 협력의 장이 될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캘리니코스는 ≪공산당 선언≫의 형식을 간헐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이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듯이, 이 책도 많은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
≪공산당 선언≫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 팸플릿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세계 20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혔다는 평가도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말로 끝나는 이 작은 책자가 인류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하고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외치는 동안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했던 예언은 빗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1999년 시애틀 저항 이후 급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은 마르크스를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현재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아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쟁적 자본 축적은 현재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한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세계적 규모로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자본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정도에 따라 임금 노동자의 숫자가 전 세계에서 증가했다.
그러하기에 캘리니코스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의 틀은 마르크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캘리니코스는 이 책의 2장에서 ≪공산당 선언≫ 3장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문헌”의 형식을 차용해 반자본주의 운동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력들의 정치 지형을 분석/비판하고 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다.
물론 ≪공산당 선언≫과 ≪반자본주의 선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1848년 쓰여진 ≪공산당 선언≫과 2003년에 쓰여진 ≪반자본주의 선언≫은 150여 년이 넘는 시/공간적 거리를 극복해 서로를 보완/발전시키고 있다.
지은이 알렉스 캘리니코스 (Alex Callinicos)
1950년 짐바브웨 출생으로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며 SWP의 계간 저널인 ≪국제 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의 편집위원이다. 현재 영국 요크 대학교 정치학 교수다.
번역된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노동자 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인가≫(책갈피), ≪역사의 복수≫(백의),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풀무질),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백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성림), ≪역사와 행위≫(교보문고), ≪이론과 서사≫(일신사), ≪현대 철학의 두 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갈무리), ≪마르크시즘에 미래는 있는가≫(열음사), ≪알뛰세의 마르크스주의≫(녹두) 등이 있다.
옮긴이 정성진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소련 국가자본주의≫(토니 클리프, 책갈피), ≪연속혁명 그리고 평가와 전망≫(레온 트로츠키, 책갈피), ≪붐 앤 버블≫(로버트 브레너, 아침이슬), ≪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로만 로스돌스키, 백의) 등이 있다.
정진상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며 현재 사회과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사회의 이해≫(지이) 등이 있다.

 

 

 

책소개
파이를 키우는 것이 먼저인가, 나누는 것이 먼저인가는 시장경제의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현재 세계 경제모델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세계화'는 선 성장 후 분배를 말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주장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60∼80년대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세계화가 주창되기 시작한 80∼2000년대보다 훨씬 나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과 주요 쟁점, 과제를 정리한 의미있는 저작이다.이 책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An Anti-Capitalist Manifesto, Polity, 2003)을 완역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현존하는 마르크스주의 분야의 세계 석학이자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지도적 인물로서,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미 대부분 번역돼 출판됐으며, 최근 우리 나라에 자주 방문 강연하여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1999년 ‘시애틀 전투’에서 시작돼 올해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있었던 반WTO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은 1989~1991년 소련?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인류의 숙명으로 간주돼 왔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결코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부활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의의를 갖는 새로운 사회 운동 흐름이다.
그런데 반세계화 운동은 흔히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점을 빼고는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다양한 운동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99년 제3차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시애틀에 집결한 운동은 세계 각지의 노동 운동, 환경 운동, 농민 운동, 각종 NGO, 좌파 조직들이었는데, 이들은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슬로건 아래 하나로 합류했다.
하지만 오늘날 반세계화 운동의 내부에서 몇 가지 쟁점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저지하는 것이 자본주의 틀 내에서 성취될 수 있다고 보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과제를 기존의 국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의 여부, 또 이 과제를 수행하는 주체로서 조직 노동 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는지의 여부, 2001년 9?11 대미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 이후 대두되고 있는 반전 운동과의 연대 여부 등이 그 주요한 쟁점들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쟁점과 과제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이와 같은 반세계화 운동의 주요한 이론적, 정치적 쟁점들과 향후 과제를 자신이 지지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정리한 책이다.
캘리니코스는 먼저 반세계화 운동이 세계화의 어떤 특정한 양상이 아니라, 세계화 그 자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또 국제주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 운동을 반세계화 운동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이 책 전반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금융 불안정과 과잉생산 위기,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캘리니코스는 최근의 세계화를 시장 근본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 금융세계화 등 주로 경제적 세계화로 이해하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수 견해에 반대하면서, 오늘날 세계화는 무엇보다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세계화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정치, 군사적 갈등이 격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오늘날 세계화는 '무장한 세계화'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핵심 논지다.
그 다음 캘리니코스는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①반동적 반자본주의, ②부르주아 반자본주의, ③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④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⑤자율주의, ⑥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한 후, 마지막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반자본주의 운동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다소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이와 같이 유형화해 비교?분석한 것은 캘리니코스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특히 현재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ATTAC(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과 같은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전략과 최근 일부 좌파들이 지지하고 있는 자율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운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흐름들이 오늘날 세계화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을 반전 운동과 연계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전략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 노선의 구체적 대안을 정식화한다. 캘리니코스는 팻 데바인(Pat Devine)의 ‘협상 조정’ 모델과 같은 민주적 계획 모델을 시장 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로서 제안한다. 캘리니코스는 나아가 자유?평등?연대와 같은 ‘문명 세계의 가치들’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혁명적 변혁의 토대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캘리니코스가 제안한 민주적 계획 모델은 최근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의 ‘참여 경제’(‘파레콘’) 모델과 함께 대안 체제 구상과 관련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끝으로 캘리니코스는 민주적 계획과 같은 ‘최대 강령’의 실현 이전에 반자본주의 운동이 집중해야 할 ‘이행기 강령’으로 ①제3세계 부채의 즉각적인 탕감, ②토빈세 도입, ③자본 통제의 회복, ④보편적인 기본 소득 도입, ⑤주당 노동시간 단축, ⑥공공 서비스 보호와 재국유화, ⑦누진세, ⑧이민 통제 폐지, ⑨환경 재앙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 도입, ⑩군산복합체 해체, ⑪시민적 자유 방어 등을 제시한다. 캘리니코스가 여기에서 열거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이행기 강령’들은 그 동안 반자본주의 운동 과정에서 제출된 각종 투쟁 슬로건과 요구들의 정수를 뽑아 낸 것들로서 향후 반자본주의 운동의 행동 강령으로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다.

21세기의 ≪공산당 선언≫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과 관련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팸플릿과 논문, 저서들이 출판됐지만, 반자본주의 운동을 그 배경과 주요 쟁점, 과제로 나누어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캘리니코스의 이 책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다음달 1월 16일부터 21일까지 인도 뭄바이에서 제4차 세계사회포럼이 열린다.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이 벌써 4회를 맞이했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는 한국에서도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기치 아래 모인 전 세계 다양한 진보 세력들의 토론과 협력의 장이 될 세계사회포럼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캘리니코스는 ≪공산당 선언≫의 형식을 간헐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이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듯이, 이 책도 많은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예스24 제공] 

 

지은이 소개
알렉스 캘리니코스
저자 - 알렉스 캘리니코스
- 1950년 짐바브웨 출생으로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며 SWP의 계간 저널인 「국제 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m)의 편집위원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자본론의 논리학」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현재 영국 요크 대학교 정치학 교수이기도 하다. 영국 반신자유주의 단체인 글러벌 라이즈 레지스턴스(Globalise Resistance)의 활동가이며, 우리 나라에도 여러 차례 방문해 강연한 적이 있다. 지은 책에 <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현대철학의 두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복수>,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 <이론과 서사>, <알뛰세의 마르크스주의> 등이 있다.

역자 - 정성진
-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소련 국가자본주의≫(토니 클리프, 책갈피), ≪연속혁명 그리고 평가와 전망≫(레온 트로츠키, 책갈피), ≪붐 앤 버블≫(로버트 브레너, 아침이슬), ≪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로만 로스돌스키, 백의) 등이 있다.

역자 - 정진상
-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며 현재 사회과학연구원장이다.
주요 역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북막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 사회의 이해≫(지이) 등이 있다.
[엘리트2000 제공] 

목차

한국어판에 부치는 저자 머리말
머리말
서론

1장 지구를 망치는 자본주의
2장 다양한 종류의 전략들
3장 다른 세계의 구상

후기

찾아보기
옮긴이 후기

[알라딘 제공] 

 

중앙일보 좌파의 역사 읽기와 만들기 정운영 논설위원 2004.07.24
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이런 제목의 책을 오늘 대한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왕급진’이 아니라면 아마도 “미래 같은 소리 하네”라며 쓰게 웃을지 모르겠다. 혹시 이 책이 번역된 17년 전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꼴보수’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웬 미래? 현재도 있는데”하고 되받았을 것이다. 혁명이 코앞에 닥쳤다고 믿던 때였으니까. 당시의 화끈한 전망은 빗나갔으나 오늘의 냉소적 관찰은 17년 뒤에 어떻게 될까?

이런 상념 속에 같은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책갈피, 2003년, 239쪽, 9500원)을 펴들었다. 자본주의 아닌 것이 없는 세상인지라 ‘반자본주의’란 말이 사뭇 어색하다. 그리고 ‘선언’에는 불온한 기억도 배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 유장한 레토릭을 “하나의 유령이 세계에 출몰하고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유령이”로 바꾸면 대강 감이 잡힐지 모르겠다. 책의 내용이나 장절(章節) 배열로 보아 19세기 ‘공산당 선언’의 21세기 판을 흉내낸 것이라고 해도 크게 과장이 아니리라.



소련, 서구 좌파, 반자본주의는 본래 한편이었다. 그 ‘혈맹’이 깨진 계기는 무엇보다도 스탈린주의의 발호며, 그리고 그 토양에서 자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다. 자고로 좌파들은 스탈린주의 탈색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구하려고’했다. 소련 붕괴로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으나 예상 외의 부담이 뒤따랐다. 반자본주의 투쟁이 약화되고 좌파 간의 결속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반자본주의 대열에는 ① 반동적인 반자본주의, ② 부르주아적 반자본주의, ③ 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④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⑤ 자율주의적 반자본주의, ⑥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가 늘어섰다.

반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잡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동’과 ‘부르주아’까지 내세우는 것은 너무 심하다. 하기는 마르크스도 ‘반동적 사회주의’니 ‘부르주아 사회주의’니 하며 악의 축과(?) 선의 축을(!) 조립한 적이 있다. 파시스트가 세계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반동적 반대라면, 대기업이 자본주의의 탈선을―자본주의가 아니고―교정하기 위해 시민 단체와 협력하는 경우가 부르주아적 반대의 사례가 된다. 저자의 기대는 물론 사회주의적 반대에 걸렸으며, 촘스키와 부르디외한테 특별히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오직 사회주의로써”(118쪽). 이런 구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이 반자본주의의 지배적 견해는 아니라고 저자는 솔직히 인정한다. 지배적 견해로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동기이리라.

트로츠키주의는 출세를 마땅찮게 여긴다. 출세도 하고 혁명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일까. 그런데 캘리니코스는 트로츠키주의자이고 ‘출세한’ 대학 교수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품은 한을 생각하면, 트로츠키주의자가 사부를 배반한 소련에 취할 태도는 아주 뻔하다. 소련이 망한 이제야말로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로써 자본주의와 진검 승부를 벌일 때라는 것이다. 때로는 트로츠키주의자답게, 때로는 교수답게 그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승리의 길을 도도하게 설파한다.

먼저 트로츠키주의자답게 저자는 개량과 혁명의 구별을 당부한다. 채찍과 당근이 당나귀 부리는 수단이듯 ‘억압과 통합’은 지배 권력이 피치자의 불만을 다스리는 수단이다. 억압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통합이란 미끼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국고 보조를 더 많이 타내고 기업 기부를 더 많이 얻으려고 시민 단체들이 “멜로드라마 같은 미디어 전략”(121쪽)을 앞세워 죽기 살기 경쟁을 벌이며, 알게 모르게 지배 질서와 한통속이 된다. 그래서 “계급이 끝났다는 믿음은 항상 오류였으며, 이제는 그 믿음을 완전히 매장할 때”(131쪽)라고 언성을 높인다.

그리고 교수답게 ‘다른 세계’로의 이행 전략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세계가 미쳐가고 있다고…이제 신자유주의를 처방이 아닌 질병으로 생각한다”(42쪽). 이견이야 있겠지만 신중히 들어둘 말이다. “거대한 반자본주의 저항 운동의 표출은 실제로 매력적이지만, 그것은 이기주의의 표현이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위험한 형태의 개인주의의 과시가 될 수 있다”(137쪽). 이런 반성과 겸손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가뜩이나 짜증나는 판에 하필이면 이런 책이냐고? 열(熱)에는 냉(冷)으로! 대안 제시에 앞서 저자는 “시장 경제의 어떤 변종이 정의, 효율성,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지”(155쪽)를 묻는다. 시장은 아무리 ‘인간화해도’ 이 네 가지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민주적 계획’이 필요하다는 그의 설득은 얼마나 강하고 또 부드러운가. 한동안 세상은 우파가 만드는 역사에 정신이 없었다. 좌파의 역사 읽기를 통해서 세계화 북새통을 ‘냉하게’ 들여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한겨레 “자본주의는 지구 망치는 주범 다시 혁명적 사회주의다” 고명섭 기자 2004.01.03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썼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성경적 저술이 유령으로 묘사한 그 공산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70여년 동안 세계를 양분한 실체적 존재가 됐다가 붕괴했다. 그러면 공산주의, 다시 말해 혁명적·과학적 사회주의는 끝났는가. 영국의 저명한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포연이 뒤덮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의 폐허 위에 다시 혁명적 사회주의의 부활를 선언하는 책이다.

이 책은 명백히 <공산당 선언>의 이론적 위상을 겨냥하고 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적 관점을 견지하되, 21세기의 변화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혁명의 새로운 전략을 제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여기서 지은이가 말하는 ‘반자본주의’는 수많은 세계화 반대자들이 쓰는 ‘반세계화’를 재정식화한 개념이다. 세계화에 대한 반대는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체제 운동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반세계화 운동이 근본적으로 겨누고 있는 ‘반자본주의’를 앞세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런데 이 ‘반자본주의’는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현재의 반세계화 운동이 모두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은이도 이 점을 인정한다. 그는 현재의 반세계화 운동이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대별된다고 말한다.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적으로 보는 것이 하나라면,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를 적으로 보는 것이 다른 하나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만을 반대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며,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반세계화 운동이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하고 전복하는 운동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그의 바람을 밑자락에 깔고 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이야말로 “지구를 망치는 주범”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착취를 이윤으로 바꿔내는 부도덕한 체제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의 경쟁적 축적 원리다. 개별 자본가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자본을 제압해야만 하는데, 이 때문에 상호경쟁이 경쟁이 격화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주기적인 시장파괴, 곧 공황이다.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전체 차원에서는 재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이런 맹목적 경쟁이 무제한의 환경파괴를 통제할 길을 봉쇄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인류적 고통은 민주적 계획경제로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이 책은 구성 형식에서도 <공산당 선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마르크스가 당대의 사회주의 조류를 ‘반동적 사회주의’,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따위로 분류해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로, <반자본주의 선언>도 현재의 반자본주의(반세계화) 흐름을 ‘반동적 반자본주의’, ‘부르주아적 반자본주의’,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따위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흐름 가운데 특히 지은이가 힘주어 비판하는 것이 ‘자율주의적 반자본주의’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제국>에서 밝힌 자율주의의 세계인식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 없는 제국으로 묘사하고, 이에 대한 저항의 힘으로 다중의 자율적 연대와 협력을 상정하고 있는데, 지은이는 이 관점이 제국주의의 국민국가적 성격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자본의 파괴적 경쟁 원리상 국민국가는 필수적 경제단위이며, 이 국민국가가 군사력을 동원해 자본 팽창을 돕고 있음은 명백하다. 또 다중의 자율적 연대는 이 체제를 전복하기는 너무 허약하며, 자본과 적대관계에 있는 조직화한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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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없어지나?

▲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005 동문선
'느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현대인들에게 게으름, 나태, 현실에 뒤쳐짐, 무능력 등의 이미지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또한, 느리게 행동한다는 것은 급변하는 현대에서 템포에 발맞출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인식되어왔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느림'은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현실 부적응의 태도라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쌍소는 '느림'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적 의미-게으름, 나태, 현실에 뒤쳐짐, 무능력-를 거부하고 그 정의를 새로이 하고 있다.

즉, '느림'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며 어느 한 기간을 정해 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데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쌍소가 주장하는 '느림'이라는 태도는 어느 정도 우리 사회 현실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극단적이며 이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태도를 어느 한 쪽으로 강요하고 있는 듯 한 논조가 조금은 비논리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바탕으로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 적실성 및 논리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쌍소는 '느리게 사는 것'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로부터 결연히 벗어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쌍소는 그 의미에 대한 공통된 합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생활의 여유를 가지며 주위를 돌아보고 다시금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게 사는 것이라는 이상적인 견해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호한 정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모호해지고 단순히 이상적으로 인식되어지고 만다.

또한, 저자는 "지금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것을 꿈꾸겠지만, 현실 속 그들은 영원히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끝없이 바쁘게 살아간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느림은 게으름이나 무력감과는 다른 것이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설득력이 없는 이상적인 삶의 제시에 불과하다. 시간에 쫓겨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연 그들 모두가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부족한 시간을 최대한 효율성 있게 활용하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끝없이 바쁘기 만한 삶이냐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최대한 효율성 있게 활용하여 최대한의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만족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느림이라는 정의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러한 느낌은 저자가 함께 제시하고 있는 느림을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쌍소는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우리에게 한결같은 평안함을 보장해 주는 몇 가지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한가로이 거닐기'로 나만의 시간을 내서 발걸음이 닿는 대로, 풍경이 부르는 대로 나를 맡겨보는 것을 말한다. 즉, 아무생각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인생이나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한가로이 거니는 자세는 현대인에게 부족한 모습인 동시에 필요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한가로이 거닐면서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가져다주는 것이 심적 평안함 이외에 과연 무엇이 더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이러한 심적 평안함은 한가로이 거닐기 이외에도 정신수양을 위한 각종 훈련법 및 체조 등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거닐기만이 가져다줄 수 있으며 다른 방법과 구별되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음으로 신뢰하는 이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는 '듣기'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상대방에게 몰입함으로써 오히려 삶은 윤택해진다고 설명한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받아 급하게 대화를 몰아가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죽은 시간들과 침묵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듣기'의 자세는 단순히 저자가 주장하는 '느림'이라는 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지극히 모범적이고 필수적인 자세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는 자세의 중요성은 교육과정이나 사회생활을 통해 누구나 터득하고 있는 삶의 진리인데, 그러한 진리를 새삼스레 '느림'이라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태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논거의 참신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을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하고 애정을 느끼는 '권태', 우리의 내면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희미하면서도 예민한 의식을 일깨우는 '꿈꾸기', 자유롭고 무한히 넓은 미래의 지평선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는 '기다리기', 내 존재 깊은 곳에서 지금은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부분, 우리 안에서 조금씩 진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의 소리를 옮겨보는 '글쓰기', 절제라기보다는 아끼는 태도, 그 방식을 따라 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훌륭한 느림의 태도로 꼽고 있다. 새삼스레 이러한 느림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지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삶의 요구 자세라는 것이다.

쌍소는 이와 같이 제시한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지극히 옳고 형이상학적인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느림'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다양하게 포함할 수 있는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에 실려야 할 말들이다. 특정단어에 대해 나름대로 재창조한 정의를 가지고 삶의 태도를 바꾸라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또한, 쌍소는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유명한 이의 격언이나 속담 등을 이용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단 하나의 문장 등으로 압축력 있게 무언가를 표현하는 아포리즘의 효용은 단순한 압축미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포리즘은 간단한 단어의 재배열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불안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쌍소가 인용한 파스칼의 아포리즘 역시 그러하다. 수학의 대우 명제를 사용해 그 문장을 재배열하면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단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된다. 사실이 그러한가? 문구 그 자체로 해석해 봐도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이고, 그 것이 휴식할 줄 모르는 데 있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가? 대우 명제를 통해 보아도 고요한 방에서 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없어지는가?

사실,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학자인 피에르 쌍소의 유명세와 프랑스 논픽션 부문 1위라는 책표지의 현란한 문구에 유혹 받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명세와 논픽션 부문 1위에 걸맞은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한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제공받았다. 그와 동시에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를 몸소 체험한 것 또한 하나가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내 시간을 한 없이 느리게 만들어 놓았고, 지나치게 나의 마음에 여유를 두었다는 점. 이 점이 너무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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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는 무교양주의 시대다

ⓒ2005 청어람미디어
과거에 비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찾고 있고, 더 많은 이들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더 많은 이들이 상아탑에 몸을 두고 있으며 더 많은 이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치고 있다. 오늘날의 이런 현상들을 본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테다. 과거에 비하면 대중이 더욱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국 켄트 대학의 사회학 교수 프랭크 퓨레디는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이 시대를 ‘무교양주의’의 시대라 말한다. 무교양주의란 무엇인가? 교양이 부족하고 물질적이고 진부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교양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없다는 것이다.

대중이 더욱 지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고 믿어지는 오늘날 저자의 말은 다소 의아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엘리트주의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저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저자는 작정한 듯 쓴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이 누리고 있는 것이, 그리고 믿고 있는 지적이고 교양이라고 하는 것들이 해수욕장의 모래성처럼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지식인의 실종’을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도 엄연히 지식인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지식인의 실종을 언급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저자는 과감하게 뉴스프로그램에 나와서 전문분야를 설명하고,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해 대중에게 아부하는 이들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라고 피력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식인은 단순한 전문가가 아니라 광범위한 관심 영역을 토대로 당대의 주요한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인데 그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지식인이 실종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자는 특히 ‘지식인의 가치 하락’과 ‘문화상대주의’, 그리고 ‘대중의 바보 만들기’등을 그 이유로 진단하고 있다. 먼저 지식인의 가치 하락은 지식인이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요즘 엘리트라는 단어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이는데 ‘학벌’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참뜻은 사회에 꼭 필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급진좌파들의 비판과 함께 지식인들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네 의견도 옳고, 내 의견도 옳다’는 일종의 상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지지는 것도 이런 현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대주의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토론’과 ‘논쟁’에서 더 좋은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 상대주의만이 능사가 아닌데 현대로 오면서 상대주의는 그 영역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지식인이 어느 것에 대하여 솔직한 주장을 꺼냈다고 해보자. 그럼 첫 번째로 직면하는 문제는 엘리트적인 생각이라는 비판이다. 이런 경우 대중은 지식인이 무엇을 이야기했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엘리트라고 공격받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상대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지식인의 주장도 맞지만 반대 의견도 맞다는 논리가 나오고 지식인이 그것을 비판한다.

그러면 지식인은 그 태도로 인해 근현대적인 엘리트주의자라고 다시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모습들은 자주 등장했고 결국 이런 문화들은 복합적으로 지식인의 실종을 야기했고 소위 요즘의 지식인들은 전문 분야에서 대중이 알아들기 쉽게 설명해주는 역할에 만족하게 된 것이다.

지식인의 실종과 무교양의 시대가 오게 된 데는 대학의 질적 하락도 한 몫 했다. 저자의 이 주장은 최근에 논쟁을 일으켰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와 비슷하다. 예전의 대학생과 오늘의 대학생에 대한 의미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듯이 요즘은 대학은 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질적 수준을 대폭 낮추었다. 저자는 그것을 강하게 비판하는데 특히 대학이 대학 고유의 특성을 버리고 기업들을 위한 취업양성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 오늘날의 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대중이 지적인 문화를 누리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도 실상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마치 대중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여 무조건 참가하게 하고 무조건 관심 갖게 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참가하고 있다고 믿게 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히려 저자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 않은 채, 교육 및 문호활동과 제도에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만을 유도하는 것이 진정으로 대중을 위한 것이냐고 반문하며 그것은 ‘사기극’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것은 도서관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여,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각종 오락 시설들을 들여놓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도서관의 문화를 누리는 것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여 책을 보는 이들이 늘었으면 모를까, 오히려 책을 읽는 이들은 줄어들었을 때 그것은 도서관의 본질적인 역할은 명백히 추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즘은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의 숫자만을 중요시하여 도서관의 본질적인 역할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저자의 말들은 교육의 기회가 확장되고 문화가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시대에 분명히 역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오늘날이 무교양의 시대라고 한다. 그렇기에 ‘문화전쟁’을 벌이자고 한다. 대중들이 진정으로 ‘황금시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문화전쟁으로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주장은 과격하다. 오늘날 대중이 믿고 있던 이 세계의 기본적인 틀을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자고 하는 그것은 분명 과격한 것이다. 그러나 과격하다하여 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더 대중의 교양과 문화를 위한 것이라면 더 반겨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까지 쓴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누가 있었던가? 그래서 저자의 주장이 반갑다. 그래서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의 물음이 반갑기만 하다.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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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보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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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 앞모습 - 낡고 오래되었으나 길고긴 사회과학 서점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풀무질>입니다. 작은 고추가 맵듯 작은 책방 <풀무질> 책들이 매섭고 좋습니다
ⓒ2003 최종규
<풀무질>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입니다. 많은 대학교 앞에 이러한 책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책방이 술집, 빵집, 옷집, 찻집, 밥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책 장사는 지금 시대에서 먹고사는 장사로서 이윤이 잘 남지 않는답니다. 더구나 대학교 앞 책방은 장사가 안 된답니다. 참 얄궂은 일이죠. 대학생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니까요. 또 책을 읽어도 마음을 살찌우고 몸을 올곧게 이끄는 책을 읽지 못한다는 소리니까요.

대학로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가거나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리면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가면 <풀무질>과 <논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바로 가는 버스 편도 많이 있습니다. 지하철은 혜화역에서 내려서 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가깝습니다.

성균관대학교로 접어드는 두찻길로 접어들면 얼마 걷지 않아 <논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좀더 올라가 성대 들머리 가까이 나올 때쯤 자그마한 책방 <풀무질>을 만날 수 있습니다. <풀무질>은 참 작습니다. 앙증맞다고 할까요. 어쩌면 책방이 이리도 작을꼬...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방이 작으면 그 책방 안에 둘 수 있는 책은 아주 적습니다. 그렇기에 책을 제대로 골라 놓지 못하면 사람들 발길은 쉬 끊이고 맙니다. 자그마한 책방으로 찾아오는 책손이 많고 오래도록 책장사를 이어간다면 그만큼 책을 보는 눈이 높고, 그곳을 찾는 책손 또한 좋은 책을 즐겨 찾는 눈높이와 마음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헌책방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작은 헌책방이라 해도 좋은 책을 꾸준하게 찾아볼 수 있으면 그곳을 들락거리는 사람은 많으며 그곳 장사도 오래오래 잘 됩니다. 크기만 넓다고 다 좋지 않으며 넓은 곳, 목이 좋은 곳에 있다 하여 헌 책 장사가 잘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찾아서 사서 읽을 만한 책"을 얼마나 잘 갖춰서 보여주느냐, 나눌 수 있느냐예요.


<2>

▲ 책방 안모습 - 사장님이 조그마한 자리에 앉아서 조그마한 책방을 지킵니다. 책방을 지키며 당신이 읽을 좋은 책을, 또 이곳을 찾을 이들이 사서 읽으면 좋을 책을 추스리고 가슴에 담으시죠.
ⓒ2003 최종규
<풀무질>에서 <송두율 지음-경계인의 사색,한겨레신문사(2002)>을 골라서 고운 님에게 새해 선물로 선사합니다. 제가 읽을 책으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이민아 옮김-허울뿐인 세계화,따님(2002)>를 고르고 <채광석 시모음-밧줄을 타며,풀빛(1985)>와 <이기형 시모음-설제,풀빛(1985)>를 고릅니다. 풀빛판화시모음이 열 권쯤 눈에 띕니다. 이 책은 판이 끊어져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책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있다니. 반가우며 놀라븝니다. 하지만 이 시모음은 한 사람이 사 가면 재고가 더 없어서 다른 이는 사갈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채광석 시 - 아버지와 아들>

제적학생 복교조치다 뭐다 시끄러울 때
다섯살박이 애녀석이 불쑥 물었다
아빠, 복학이 뭐야?

음, 그건 말이지, 으음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이 다시 학교에 들어가는 거란다

서른 일곱의 쉬어빠진 애빌 올려다보며
녀석은 오금을 박는다
그럼 아빠도 쫓겨났었어?

이때다 싶어 아내가 네 손가락을 펴 보이며
쐐기를 박았다
네 번씩이나 쫓겨났단다, 네 번, 알지?
그뿐인 줄 아니? 죄진 사람들 가는 곳에도
두 번씩이나 갔다 왔단다
네 첫돌때도 거기 갇혀서 까까 하나 사오지 못했단다

에이, 아빤 나쁜 짓 많이 많이 했는갑다
그치?

문득 좌경극렬...의 첫 운을 떼신
총장님인지 아전님인지 섬찟 떠오르고
제 밑창까지 들어먹은 신문 테레비의
그 쇳소리 손가락질 발길질 이간질 태질이 되살아나며
가슴은 울컷 머리를 쭈삣 사지는 덜덜거려
나는 미친 듯이 도리질을 했다

아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피이, 아빤 거짓말쟁이야
나쁜 짓도 안했는데 왜 쫓겨나고 그런 데 갇힌담

아득하고 막막하고
갑자기 아이의 얼굴이 가물가물 멀어졌다

수왕이 네가 나쁜 애야, 연식이가 나쁜 애야?
에이 연식이 걘 욕심쟁이야
저는 맨날 맨날 다른 애들 장난감 뺏어 가지구
저 혼자 실컷 놀면서 제 장난감에는 손도 못 대게 해
같이 나눠 가지구 놀자구 그러면 때리구 내쫓구 그래
오늘 낮에두 나를 막 할퀴구 때리구 그랬지 뭐야
호연이두 맞구 동진이도 맞구 희진이두 맞았어

아빠도 그래서 쫓겨나구 갇히구 그랬던 거란다

증말? 에이 세상에 아빠보다 힘센 사람이 어딨어?
아빠는 엄마보다두 힘이 훨씬 세잖아?

너도 크면 알게 돼
저쪽 동네에는 엄마 아빠보다 힘센 사람들이 많단다

그치만 우리 동네에선 아빠가 최고로 힘세지?

그래, 그래

그 사람들은 뽀빠이같이 시금치만 먹는갑다
그치만 아빠, 내가 크면 말이지
엄마가 그러는데 밥 잘 먹고 군것질 안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제일 힘센 사람이 된대
내가 크면 말이지, 그 사람들 혼내 줄 거야
근데 아빤 뭘 나눠 가지구 놀자구 그러다가 쫓겨났었어?

아내의 눈꼬리가 갑자기 올라가더니만
애를 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느덧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는지
축축한 오한이 몰려오고
어지러운 머리 속으로 몇 개의 말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자유 밥 사랑


▲ 채광석 시모음 <밧줄을 타며> 겉그림
ⓒ2003 풀빛
좀 길긴 하지만 채광석씨를 읽으며 눈물이 찔끔 나옵니다. `자유 밥 사랑'을 바라고 지키고자 그렇게 애쓰고 싸우다가 고문실로 끌려가 모진 발길질 손찌검을 받았던 일을 떠올린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채광석씨는 나이 서른아홉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사람. 한때는 <채광석 전집>도 나오고 이래저래 추모도 했지만 이제 채광석 씨는 우리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어 자그마한 책방 <풀무질> 책꽂이 한켠에 겨우 고개를 내밉니다.

사지는 않고 읽으면 좋겠다고 보이는 책도 여럿 눈여겨봅니다. <풀무질> 사장님은 <더글러스 러미스-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2002)>라는 책이 아주 대단하다며 나중에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추천합니다. 척 보기에도 퍽 읽을 만하다는 느낌입니다. 나중에 꼭 찾아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그마한 책임에도 책값이 퍽 나가는군요. 6000원이면 알맞겠다 싶은데 7000원을 매겨 놓았습니다. 그 작은 책이...

▲ 잘나가는 책 100선 - 책방 <풀무질>에서는 "이곳에서 잘 팔리는 책 100 가지"와 "<풀무질> 책방에서 추천하는 책 100가지"를 문 바로 옆에 있는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 놓고 있습니다
ⓒ2003 최종규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종로서적>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책은 판이 끊어졌을 뿐 아니라 종로서적이 문을 닫아 버려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보름쯤 앞서 `한걸음'이라는 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새로 냈군요. 그 책이 눈에 띕니다. 새로 나온 판은 <권정생 이야기>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 어디에도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를 새로 낸 판이라는 소개가 없습니다. 무척 아쉽군요. 그리고 한 권짜리 책을 둘로 나누면서 작은 판으로 만들었는데 책값을 8500원씩 매겼습니다. 아. 그러니까 둘을 사자면 17000원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 놀랍습니다. 헌책방에서는 1500~3000원이면 살 수 있는 책을 17000원을 들여야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히유. 그냥 한 권으로 묶었으면 아무리 비싸게 매겨도 12000원 안팎이 될 텐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3>

▲ 문에 붙은 것 - 파리채, 책겉장, 부적, 스티커, ......
ⓒ2003 최종규
책방 <풀무질> 간판은 열여덟 해가 되었답니다. 이제는 낡아서 밤에 형광등도 켜지지 않는답니다. 그래도 그냥 두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형광등을 새로 갈고 간판을 새로 간다고 책방 장사가 더 잘 되거나 책방 모습도 더 깔끔하고 보기 좋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도 중요하고 겉도 꾸미면 좋습니다. 그러나 겉과 함께 속을 가꾸는 마음이 있어야 좋아요.

제가 잘은 모르나 <풀무질> 사장님에게는 간판 바꾸는 일보다 알뜰한 책을 <풀무질> 안에 잘 갖추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힘을 쏟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돈 얼마 들이고 잠깐 짬을 내면 간판이야 얼마든지 갈 수야 있지만 세월히 흐르고 흐르면서 `낡은 간판'을 갈기보다는 `역사'와 `기억'으로 그대로 남겨두는 일도 좋지 싶어요. 한동안은 `불편함'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새로운 역사'처럼 남기도 하니까요.

<4>

▲ 테이프와 무엇 - 노래테이프, 카드계산기, 이런저런 스티커 딱지가 붙은 책상......
ⓒ2003 최종규
대학로로 술 한잔 꺾으러 가거나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조금 걸어서 한성대입구역 <삼선서림>을 가 보아도 좋겠고 성대 쪽으로 가서 <논장>과 <풀무질> 같은 책방으로 가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갖춘 책을 휘 둘러보면서 우리를 가꾸고 살찌울 좋은 책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즐겁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적시는 책을 만나면 눈물도 찔끔 나오고요.
- 성균관대 앞 <풀무질> / 02) 745-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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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스 &quot;수정주의는 '수정'되지 않았다&quot;

한국전쟁에 관한 논의를 할 때 으레 회자되는 책이 있다. 미국 시카코대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62)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전 2권)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논구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책은 1981년 1권이 출간되자마자 미국 학계에서 한국학의 수준을 중국학이나 일본학 수준으로 일거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흔히 '수정주의'라고 설명되는 커밍스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한국현대사에 대한 커밍스의 해석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현재성은 어떠할까.

"내전은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주로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식민통치기간 동안 한국에 부과된 외부세력과 그것이 전후의 한국에 남긴 독특한 자취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일월서각 펴냄)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그의 문제의식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에 대한 내 책의 전체적 강조점은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한국현대사>(김동노 외 옮김·창비 펴냄) '한국어판을 내면서'중에서)는 입장으로 드러난다.

커밍스는 당시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40년 동안 일본의 운명에 매여 있었던 한국은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그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두 조각으로 쪼개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며, "그로부터 5년 간 한반도에서의 주된 문제는 새로운 충성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가- 모스크바인가, 워싱턴인가, 북경인가 -에 있었다"고 봤다.

▲ <한국전쟁의 기원> 영문판 표지와 일월서각 번역본 표지.
ⓒ2005 조성일
이런 입장에서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구체적 발발 유형을 ▲전면남침설 ▲남침유도설 ▲전면북침설 등 세 가지로 나눈 후 분명하게 어떤 것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에 무게중심을 두고 설명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휴전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했는데, 이날 감행된 공격도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분명치 않다는 것.

또한 그는 한국전쟁은 소련의 사주 없이 김일성이 주체적으로 수행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훗날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서 허락을 받고, 남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주장이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미국과 남한, 혹은 미국의 '남침유도설' 내지 '남침묵인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기존의 '북한 남침설'에 입각한 정통적 연구방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수정주의로 받아들여졌다.

수정주의에 가해진 다양한 비판들

커밍스의 수정주의는 1980년대 한국의 소장 연구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특히 해방공간이라고 불리는 8·15해방 후 3년간 혹은 해방에서 단독정부 수립까지 8년 동안의 정치·사회적 변동에 대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1950년 6월25일 이전의 몇 주일 혹은 몇 달 간의 사건에 초점을 맞춰 '남침과 북침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분법적 논쟁 속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남침설'이외의 주장은 허용하지 않았던 보수적 관제 사관이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던져진 커밍스의 신좌파적 수정주의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음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의 이같은 시각은 <고개숙인 수정주의>(전통과 현대 펴냄)라는 책을 펴낸 전상인 교수의 말처럼 한국 현대사 해석과 관련하여 우리 학계에 좌파적 시각의 '커밍스 콤플렉스'와 우파적 시각의 '커밍스 알레르기'를 동시에 일으켰다.

<고개숙인 수정주의>에서 전상인 교수는 "1980년대 '커밍스의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었지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이 고개를 숙였다"며, 커밍스가 당대의 객관적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는 실증적 접근이 아닌 역사와 사회의 흐름 속에서의 구조적 변화에 관심을 갖는 소위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택한 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전2권, 나남출판) 역시 커밍스의 비판과 극복의 성과물이다. 박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른바 '48년 질서'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던 요소는 이념도 경제도 아닌 정치라고 전제한 후 전쟁은 혁명과 달리 결정의 과정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한국전쟁에 관한 한국 학자들의 연구서들과 커밍스의 저작들.
ⓒ2005 조성일
따라서 한국전쟁은 정통성의 배타적 독점을 주장하는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 원인이며, '48년 질서'를 타파하려는 북한 리더십의 급진군사주의의 결과라는 것.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감독이 여러 번에 걸쳐 통독했고, 필자에게 자문까지 구했던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돌베개 펴냄)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한국 전쟁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전쟁 발발과 책임 규명에만 맞춰져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 후 김 교수는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왜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는가?"가 아닌 "전쟁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 한국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커밍스에 대한 오해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한국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서너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로 인한 '친북인사'라는 복선 아래 그를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 오해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는 한국전쟁을 남한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학자"라는 주장이다.

이런 자신에 대한 오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커밍스 교수는 <한국현대사>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례적으로 그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 책에 따르면, 커밍스 교수는 언젠가 한 한국인 외교관을 만났는데, 그는 "당신이 이제 생각을 바꾼 것을 이해합니다. 이제는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지요"라고 하더란다.

▲ 6·25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에서 한 사형수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커밍스 교수는 자신이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기 때문에 그들 체제의 관리들은 자신과 자신의 저작을 비방하는 게 편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신이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는 것. 그러나 커밍스 교수는 "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결코 바뀐 적이 없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생각은 앞에서도 말했듯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는 입장을 지금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가가 그 복잡한 역사를 알고 있는 한 수많은 요인으로 빚어지는 전쟁에 대해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조국(미국-인용자)이 한국에서 해온 행위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비춰보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인데 이것 역시 새로 찾아낸 문서의 결과로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믿게끔 인도된 냉전신화와 모순된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 인정할 때 문제 해결 시작"

지난 3월 커밍스 교수의 2004년 신간 <김정일 코드>(원제 North Korea : Another country, 따뜻한 손 펴냄)가 번역 출간되면서 요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북핵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북한'만을 테마로 삼아 집중분석한 이 책에서 커밍스 교수는 "북한 침략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정당했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가혹했던 미군의 전쟁 수행 방식은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분노와 불신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폭력전문가들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병영국가'개념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북한을 규정한 커밍스 교수는 그렇더라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그 작동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라고 말한다.

최근 '6·15 5주년 기념 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했던 커밍스 교수는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인정해야 문제해결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국 현대사에 관한 연구로 일약 세계 석학의 반열이 올랐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커밍스 교수의 스칼라십은 비판자들의 지적처럼 시쳇말로 '약발이 다한 이론'일지라도 그 영향은 단순한 수정주의의 시각과 방법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든 안하든, 한국전쟁과 한국 현대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커밍스 책 영문판 판권도 ‘역비’가 갖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역작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전2권)에 대한 영문판, 한국판 출판권은 모두 한국의 역사비평사(대표 장두환)가 갖고 있다.

1981년 1권과 1990년 2권 모두 미국의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이 책의 출판권이 만료되자 커밍스 교수는 한국인 제자인 코넬대 신동준 교수에게 이 책은 한국책이나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출판사가 출판권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와 함께 믿을만한 역사 전문 출판사를 추천해달라고 했던 것.

이 부탁을 받은 신 교수는 역사비평사에 편지를 보냈고, 역사비평사는 ‘사업성’ 따위는 아예 따지지 않고 커밍스 교수의 계약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졌다.

커밍스와 계약을 한 후 역사비평사는 2003년 5월말 이 책의 영문판을 발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고, 내년 상반기에는 새로운 정본 개념의 한국어판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역사비평사는 올해에 나올 예정인 <한국전쟁의 기원> 축약본도 번역 출간할 예정이며, 청소년을 위한 축약본 등도 따로 기획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6년 일월서각에서 1권만 타계한 언론인 송건호씨의 추천사와 함께 번역 출판되었고, 2권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 조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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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되 자본주의로서의 지식사회

 
생활정보지에 정보 없듯 포털에도 지식 없다..ㅎㅎ
생활정보지 = 생활광고지
지식검색 = ???? 보나마나한 잡다한것만 공짜로 보여주고 좀 괜찮다 싶은건 죄다 유료로 보도록 하니.......지식의 상업화...지식은 공유되어야 더 큰 가치를 지니는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측면에서 인터넷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기업이 야속하기만 할뿐입니다.
아울러 문화사회, 생태사회 진짜 공감합니다. 솔직히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 보면 쎄빠지게 일만-그것도 자신이 하는 일이 이웃과 자연에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같은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호주머니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기주의자들... 진짜 죽이고 싶습니다.- 하다 어쩌다 책을 보거나 텔레비전 시청하는것 또 그러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나면 놀러다니는걸로 시간을 때우는데 그렇게 사는건 좀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밖에 안 들죠 왜 그래야 합니까 돈 많이 벌기 위해서??그래봤자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비에 써 버려 결국 자본가 호주머니에 넣어주기나할뿐인데 차라리 먹고 살 정도의 벌이를 위해 일하고 나머지는 문화활동..이를테면 독서라든지 영화 음악 감상, 레저 스포츠 활동 등 이런걸 하면서 문화적 힘을 키워 나가는게 훨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 그건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가치를 지니고요.. 그런 의미에서 아마츄어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먹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하고 남는 시간으로 활동을 하는것..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프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죠. 우리 모두 아마츄어가 되자 Be the amateur??
야구 축구 농구 스키 같은 운동이든 문학 영화 방송 같은거든 상관 없이..... 근데 정부는 시민들이 이런 활동하는데 시설 같은거 지원해줘야 하지 않나 맨날 올림픽 금메달을 위한 전문 선수들만 지원하지 말고.... 그놈들 지원해봤자 어차피 지들 몸값 올리는데만 이용할뿐인데 뭘.. 프로..전문 선수..직업 삼아 하는 것에 대해선 그넘들이 시자에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고 일반 시민들이 그러한 것을 여가활동 삼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죠
몇 년 전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지식검색’, ‘○○도 지식이다’, ‘**를 알면 나도 지식인’ 등의 말이 등장하였고, 지금은 포털 광고마다 나오지 않을 때가 없는 유행어가 되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사이트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사실 ‘잡다한 상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강남역의 맛있는 갈비탕집’이라든가 ‘지하철 가장 빨리 갈아타는 방법’이라든가 ‘여름에 예쁘게 피부 태우는 방법’ 등이 ‘지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포털사이트는 어떻게든 유저들이 자기 포털에서 오래 머물게 하려고 눈길을 끄는 갖가지 잡다한 상식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그럼으로써 검색 빈도수를 높이고, 그렇게 해서 광고 단가 역시 높인다. 포털의 ‘지식’은 이렇게 상업적 이익과 긴밀히 연관되어 ‘탄생’한 개념이다.

인터넷 포털의 ‘지식’이 사기성 짙은 개념이라면,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를 거치며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앨빈 토플러, 다니엘 벨, 피터 드러커 등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들은 도래 중인 새로운 사회의 대표적 가치창출자원으로 ‘지식’을 자리 매겼다.

이제 지식과 정보의 시대가 올 것이고, 그 ‘제3의 물결’은 온 세계를 휩쓸 것이며, 지식과 정보를 지배하는 자가 성공하게 되고, 따라서 현재의 산업 자본주의는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니 노사갈등이나 자원고갈, 빈부격차 등은 모두 낡은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담론, 이들이 만들어낸 담론은 각자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식사회’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김영삼 정부가 ‘제 경쟁상대는 덴마크 농부예요’ 등의 카피를 통해 세계화를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뒤이은 김대중 정부가 90년대 후반부터 ‘신지식인’ 운동을 벌이면서 지식이나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것은 이런 담론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노무현 정부 역시 ‘능력 있는’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허물을 덮어주고, 황우석 교수를 국민스타로 만들면서 지식이나 정보를 통해 성공한 인물들을 국민들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등 앞선 정부들의 기조를 이어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 책, 정부, 언론, 심지어 냉장고나 아파트 광고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지식’을 외치는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 『지식사회 비판』
ⓒ2005 문화과학사
상지대 홍성태 교수의 <지식사회 비판>(문화과학사, 2005)은 ‘지식사회’, 그 환상적인 외피 아래의 본질을 따지고 들어가는 책이다. 일단 그는 지식사회를 “지적재산권제도의 확대ㆍ강화를 통해 지식의 사유화와 상품화가 고도로 촉진되는 사회”(6쪽)로 정의한다. 오늘날 강조되는 ‘지식’은 국민들의 인문적 교양이나 전문적 식견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사유화”될 수 있고 “상품화”될 수 있는 지식이라는 말이다.

각 대학의 철학과와 어문학과들이 문을 닫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돈이 되지 않는 지식은 이 시대에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돈이 안 되는 지식을 망하게 만드는 반면 돈이 되는 지식은 독점해야 하고, 따라서 지적재산권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과 미국을 본거지로 하는 초국적 자본들이 지적재산권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지식이 돈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3장 ‘지구화와 지식의 위상 변화’, 8장 ‘지식사회와 정보제국주의’).

벨ㆍ드러커ㆍ토플러 등의 ‘주류 정보사회론’, ‘벤처 이데올로기’, ‘지적재산권’, ‘신지식인론’ 등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홍성태가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보사회나 지식사회는 단순히 정보나 지식의 사회적 구실이 중요해지는 사회가 아니라 사유화를 통해 정보나 지식의 경제적 가치가 인위적으로 커지는 사회”(25쪽)라는 것이다. 즉, 지식사회는 지식과 정보 안에서 모두가 잘 사는 미래의 혁명적 이상사회가 아니라, 사실 자본주의가 지식까지 완전히 사유화ㆍ상업화ㆍ환금화하는 “자본주의의 정보적 확장”(46쪽)일 뿐이다.

인터넷과 개인 모바일 미디어가 거의 완벽하게 전파된 ‘정보사회’이자 지식이 이토록 화려하게 대접받는 ‘지식사회’인 한국에서 여전히 노동자 탄압이나 재벌의 탈세가 일상화되고, 노동시간이 야만적으로 늘어나며, 실업문제가 심각하고, 인문학 대학강사가 자살을 하며, 대학원생들이 학원강사를 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지식사회’의 본질이 '지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식사회를 만든 자본주의는 그 전보다 훨씬 약탈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을 가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다.

이처럼 지식사회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천착한 저자가 새로운 사회의 대안으로 내놓는 모델은 ‘문화사회’와 ‘생태사회’다. 그에 따르면, 세련되고 샤프한 이미지로 덧칠된 ‘지식사회’는 돈과 성공을 찾아 “마치 난민들의 집합체 같은 일대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248쪽) ‘난민사회’이고, 이런 난민사회에 대한 대안이 “시민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생적이고 창발적인 사회…. 노동이 아니라 문화가 삶의 기축원리로 구실하는 사회”(249쪽), 즉 ‘문화사회’이다(9장 ‘지식사회에서 문화와 산업’).

또, ‘지식’이 마치 ‘비물질’이자 ‘무형’일 뿐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경제활동에 이용되어 생태계 파괴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지식의 파괴적 속성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 저자는 ‘생태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문화’가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비되는 인간활동을 의미하고, ‘생태’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는 개념이라면, ‘문화사회’와 ‘생태사회’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각종 지면에 발표된 글들을 모은 이 책에는 아쉽게도 각 글의 발표시기가 전혀 표기되지 않았다. ‘지식사회 비판’이라는 전체 주제를 분명히 하는데 문제는 없지만, 각 글이 태어난 시기별 맥락을 독자가 제대로 짚어줄 수 있게 글의 발표시기를 표시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또, 논문 모음집의 맹점인 ‘반복’ 역시 빈번이 나타난다. 1부 ‘지식사회와 지구화’에 묶인 네 편의 글에는 주류 정보사회론에 대한 분석이 곳곳에서 반복되어서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반복이 확실한 개념정리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몇몇 편집상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지식사회 비판>은 자본의 첨병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지식과 정보가 유일한 등대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제대로 된 항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 구실을 해주는 중요한 책이다. 지식이니 정보니 벤처니 디지털이니 하는 말들에 깃든 사악한 정치적 의도를 탐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새로운 시대를 꿈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강형준 님은 무크지 <모색>의 편집위원이고, 홈페이지는 http://blog.naver.com/caujun.d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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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은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변혁은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by이진성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 <자본을 넘어선 자본>
ⓒ2004 그린비
한참 주목받다가 좀 시들해지긴 했지만 '뉴-라이트(New-Right)'운동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이들이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우파를 새롭게 했다는 것인지 참 모를 일이지만, 아무 이론적 새로움도 없는 이들이 자신의 '새로움(New)'을 주장하는 근거는 동구권 붕괴 이전의 좌파와 자신들을 비교함으로써인 것 같다.

물론 이들의 말대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했다. 그리고 과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방법론들은 폐기되거나 재고될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세상을 변혁하려는 모든 시도의 폐기를 의미하는가? 이들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미래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때부터 '뉴-라이트'는 새로운 이념적 운동이 아니라 위기의 우파를 위한 '정치적 캠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맑스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우파가 냉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적(敵)'을 한번도 업데이트하지 않는 동안, 오히려 68년 혁명 이후의 좌파들은 '맑스'를 읽는 다양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동구권의 붕괴를 비롯한 일련의 위기들과 휘몰아치는 세계화의 논리에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오늘의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고자 했다. 국내에서도 그런 작업들은 활발하게 계속되어 왔는데, 지금부터 소개할 이진경은 현대 사유를 통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를 통해 현대 사유를 새로이 해석해 온 저작들로 오래 전부터 주목받아온 학자이다.

외부를 통한 사유의 가능성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껏 만나온 '사유'란 외부의 조건들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자신의 내적 성질이나 보편적 양상으로 서술해왔고, 어떤 외부의 조건과도 무관한 보편적 진리를 자신이 설파하고 있는 듯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학문이라는 말로 다른 앎들을 억압하는 '보편성'의 시도와 체계적이고 위계화하는 '내부성'의 논리에 강한 반감을 보여왔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외부를 통한 사유'로 정의하고 여러 저작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열어왔다.

내부성의 형이상학과 관념론이 삶이나 사물, 사건 등을 관념의 내부에 쑤셔넣어 결과적으로는 '외부'를 말살하는데 집중한다면, 그가 주장하는 '외부성의 유물론'은 내적인 보편성의 형식조차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조건'과 권력이 작동하는 '배치'를 통해 의문에 부치려 할 것이다. 관념론에 오직 '이성의 목적'이라는 '내부'로의 한가지 방향만이 있다면, 유물론에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방하는 '외부'의 모든 방향으로의 열린 길이 있다.

그러므로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 책의 부제를 '자본과 그 외부'로 삼아도 좋겠다고 밝힌 그에게서 <자본>을 요약하고, 그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주석서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보편타당한 과학으로 설명하고, 정치 경제학이 어떤 외부도 포괄할 수 있는 철의 법칙임을 주장하는 소위 '정통' 좌파들의 작업 방식에 해당될 텐데, 그런 작업방식과 그가 그리는 사유의 선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궤적을 그릴 것이기에.

정치경제학적 법칙들과 유명한 명제들을 쉽게 풀어놓은 이 책을 통해 중요한 고전임에는 분명한 맑스의 <자본>을 나름대로 요약, 정리해 두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을 활용하는 가장 재미없는 방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이 책을 차라리 '변혁을 꿈꾸기 위한 도구', '변혁을 기획하기 위한 기계'로 활용하길 바랄 것이다.

'외부'를 통해 다시 읽어낸 <자본>

일견 <자본>은 자본의 발생과 가치론 등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자본>이 정치경제학의 법칙들을 완성하고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 그것을 끝까지 밀어부쳐 그들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드러내고, 결국 근본으로부터 전제들을 붕괴시키는 '외부'를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둔 책으로 해석한다.

<자본>은 근면과 성실을 통해 자수성가한 자본가의 신화를 계보학적으로 탐색해 그 안에서 자본의 역사가 본원적으로 수탈의 역사임을 밝히는가 하면, 화폐의 발생이 시장이 아닌 국가의 초월적 힘을 통해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없는 가치 증식이 가능해진 기계적 잉여가치의 시대에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 가치론이 허구임도 보여준다. 따라서 얼핏 가치법칙과 관련이 없어보이는 기술과 기계의 발전들도 자본의 계급투쟁 전략임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끊임없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법칙에 잡히지 않는 '외부'가 모든 법칙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를 통해 이진경은 '외부적 조건'으로부터 무관한 자본의 법칙은 없으며, 그 법칙들은 '외부'의 처절한 계급투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오늘과 대화하는 새로운 사적 유물론의 가능성을 이책에서 기대한다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책의 '활자적 물질성'과 그 안의 서술을 신성화하기 보다, <자본>이 쓰여졌던 상황과 다른 '외부적 조건'과 함께 사유하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만 <자본>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변혁의 가능성을 제한당한 <자본>을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조건으로 다시 읽어내고, 각자의 창조적인 욕망의 흐름을 통해 가능성의 뇌관을 복구하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자본의 생산과 계급투쟁의 전략이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TV와 인터넷 등 생활의 곳곳에 침투한 시대에, 그리하여 사회의 전 영역에 잉여가치의 수취가 확대된 지금, 더 이상 변혁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이라는 식의 대응을 통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광고시청이나 인터넷 배너처럼 대중들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모든 부분에 자본의 지불을 요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안은 더 이상 가치의 생산을 자본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욕망을 통해 조직화하고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자본의 모든 법칙에 '외부'가 있음을 안 이상, 자본주의의 공리계에도 '외부'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므로.

변혁을 꿈꾸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권력에게 포획되지 않은 욕망을 통해 그 '외부'를 가시화하고 현재화하는 것, 아마 그것은 <자본>만을 읽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고 여성과 소수자, 생태학적 관심 등의 다른 가능성들과 연대함으로서 보다 풍부해질 것이다. 그를 통해 아마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이미 와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리라. 그리하여 '새로움(New-Right?)'을 가장해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처음부터 '낡았음(Old-Right!)'을 깨닫고 비웃게 되리라.

다시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의미는 한번에 현전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기"된다. 의미를 확정하려는 보편성의 시도를 비웃으며 오늘도 기존의 의미를 뒤집는 반역적이고 발칙한 읽기는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작업만이 '새로울' 수 있음을 잘 안다. 그 끊임없는 '새로움'이 말해주듯 '변혁'을 꿈꾸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많은 논란에 휩싸였음을 알려둔다. 김재인을 필두로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 이진경의 들뢰즈 이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자본의 두얼굴>에서 김동수는 "정통 좌파의 입장에서 이진경이 들뢰즈 모방하기에 그쳤다"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이진경 측에서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론을 펴지는 않고 있다. 이들이 자신과 수준이 다르다거나 자신의 논점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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