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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보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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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 앞모습 - 낡고 오래되었으나 길고긴 사회과학 서점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풀무질>입니다. 작은 고추가 맵듯 작은 책방 <풀무질> 책들이 매섭고 좋습니다
ⓒ2003 최종규
<풀무질>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입니다. 많은 대학교 앞에 이러한 책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책방이 술집, 빵집, 옷집, 찻집, 밥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책 장사는 지금 시대에서 먹고사는 장사로서 이윤이 잘 남지 않는답니다. 더구나 대학교 앞 책방은 장사가 안 된답니다. 참 얄궂은 일이죠. 대학생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니까요. 또 책을 읽어도 마음을 살찌우고 몸을 올곧게 이끄는 책을 읽지 못한다는 소리니까요.

대학로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가거나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리면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가면 <풀무질>과 <논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바로 가는 버스 편도 많이 있습니다. 지하철은 혜화역에서 내려서 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가깝습니다.

성균관대학교로 접어드는 두찻길로 접어들면 얼마 걷지 않아 <논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좀더 올라가 성대 들머리 가까이 나올 때쯤 자그마한 책방 <풀무질>을 만날 수 있습니다. <풀무질>은 참 작습니다. 앙증맞다고 할까요. 어쩌면 책방이 이리도 작을꼬...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방이 작으면 그 책방 안에 둘 수 있는 책은 아주 적습니다. 그렇기에 책을 제대로 골라 놓지 못하면 사람들 발길은 쉬 끊이고 맙니다. 자그마한 책방으로 찾아오는 책손이 많고 오래도록 책장사를 이어간다면 그만큼 책을 보는 눈이 높고, 그곳을 찾는 책손 또한 좋은 책을 즐겨 찾는 눈높이와 마음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헌책방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작은 헌책방이라 해도 좋은 책을 꾸준하게 찾아볼 수 있으면 그곳을 들락거리는 사람은 많으며 그곳 장사도 오래오래 잘 됩니다. 크기만 넓다고 다 좋지 않으며 넓은 곳, 목이 좋은 곳에 있다 하여 헌 책 장사가 잘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찾아서 사서 읽을 만한 책"을 얼마나 잘 갖춰서 보여주느냐, 나눌 수 있느냐예요.


<2>

▲ 책방 안모습 - 사장님이 조그마한 자리에 앉아서 조그마한 책방을 지킵니다. 책방을 지키며 당신이 읽을 좋은 책을, 또 이곳을 찾을 이들이 사서 읽으면 좋을 책을 추스리고 가슴에 담으시죠.
ⓒ2003 최종규
<풀무질>에서 <송두율 지음-경계인의 사색,한겨레신문사(2002)>을 골라서 고운 님에게 새해 선물로 선사합니다. 제가 읽을 책으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이민아 옮김-허울뿐인 세계화,따님(2002)>를 고르고 <채광석 시모음-밧줄을 타며,풀빛(1985)>와 <이기형 시모음-설제,풀빛(1985)>를 고릅니다. 풀빛판화시모음이 열 권쯤 눈에 띕니다. 이 책은 판이 끊어져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책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있다니. 반가우며 놀라븝니다. 하지만 이 시모음은 한 사람이 사 가면 재고가 더 없어서 다른 이는 사갈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채광석 시 - 아버지와 아들>

제적학생 복교조치다 뭐다 시끄러울 때
다섯살박이 애녀석이 불쑥 물었다
아빠, 복학이 뭐야?

음, 그건 말이지, 으음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이 다시 학교에 들어가는 거란다

서른 일곱의 쉬어빠진 애빌 올려다보며
녀석은 오금을 박는다
그럼 아빠도 쫓겨났었어?

이때다 싶어 아내가 네 손가락을 펴 보이며
쐐기를 박았다
네 번씩이나 쫓겨났단다, 네 번, 알지?
그뿐인 줄 아니? 죄진 사람들 가는 곳에도
두 번씩이나 갔다 왔단다
네 첫돌때도 거기 갇혀서 까까 하나 사오지 못했단다

에이, 아빤 나쁜 짓 많이 많이 했는갑다
그치?

문득 좌경극렬...의 첫 운을 떼신
총장님인지 아전님인지 섬찟 떠오르고
제 밑창까지 들어먹은 신문 테레비의
그 쇳소리 손가락질 발길질 이간질 태질이 되살아나며
가슴은 울컷 머리를 쭈삣 사지는 덜덜거려
나는 미친 듯이 도리질을 했다

아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피이, 아빤 거짓말쟁이야
나쁜 짓도 안했는데 왜 쫓겨나고 그런 데 갇힌담

아득하고 막막하고
갑자기 아이의 얼굴이 가물가물 멀어졌다

수왕이 네가 나쁜 애야, 연식이가 나쁜 애야?
에이 연식이 걘 욕심쟁이야
저는 맨날 맨날 다른 애들 장난감 뺏어 가지구
저 혼자 실컷 놀면서 제 장난감에는 손도 못 대게 해
같이 나눠 가지구 놀자구 그러면 때리구 내쫓구 그래
오늘 낮에두 나를 막 할퀴구 때리구 그랬지 뭐야
호연이두 맞구 동진이도 맞구 희진이두 맞았어

아빠도 그래서 쫓겨나구 갇히구 그랬던 거란다

증말? 에이 세상에 아빠보다 힘센 사람이 어딨어?
아빠는 엄마보다두 힘이 훨씬 세잖아?

너도 크면 알게 돼
저쪽 동네에는 엄마 아빠보다 힘센 사람들이 많단다

그치만 우리 동네에선 아빠가 최고로 힘세지?

그래, 그래

그 사람들은 뽀빠이같이 시금치만 먹는갑다
그치만 아빠, 내가 크면 말이지
엄마가 그러는데 밥 잘 먹고 군것질 안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제일 힘센 사람이 된대
내가 크면 말이지, 그 사람들 혼내 줄 거야
근데 아빤 뭘 나눠 가지구 놀자구 그러다가 쫓겨났었어?

아내의 눈꼬리가 갑자기 올라가더니만
애를 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느덧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는지
축축한 오한이 몰려오고
어지러운 머리 속으로 몇 개의 말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자유 밥 사랑


▲ 채광석 시모음 <밧줄을 타며> 겉그림
ⓒ2003 풀빛
좀 길긴 하지만 채광석씨를 읽으며 눈물이 찔끔 나옵니다. `자유 밥 사랑'을 바라고 지키고자 그렇게 애쓰고 싸우다가 고문실로 끌려가 모진 발길질 손찌검을 받았던 일을 떠올린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채광석씨는 나이 서른아홉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사람. 한때는 <채광석 전집>도 나오고 이래저래 추모도 했지만 이제 채광석 씨는 우리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어 자그마한 책방 <풀무질> 책꽂이 한켠에 겨우 고개를 내밉니다.

사지는 않고 읽으면 좋겠다고 보이는 책도 여럿 눈여겨봅니다. <풀무질> 사장님은 <더글러스 러미스-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2002)>라는 책이 아주 대단하다며 나중에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추천합니다. 척 보기에도 퍽 읽을 만하다는 느낌입니다. 나중에 꼭 찾아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그마한 책임에도 책값이 퍽 나가는군요. 6000원이면 알맞겠다 싶은데 7000원을 매겨 놓았습니다. 그 작은 책이...

▲ 잘나가는 책 100선 - 책방 <풀무질>에서는 "이곳에서 잘 팔리는 책 100 가지"와 "<풀무질> 책방에서 추천하는 책 100가지"를 문 바로 옆에 있는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 놓고 있습니다
ⓒ2003 최종규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종로서적>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책은 판이 끊어졌을 뿐 아니라 종로서적이 문을 닫아 버려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보름쯤 앞서 `한걸음'이라는 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새로 냈군요. 그 책이 눈에 띕니다. 새로 나온 판은 <권정생 이야기>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 어디에도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를 새로 낸 판이라는 소개가 없습니다. 무척 아쉽군요. 그리고 한 권짜리 책을 둘로 나누면서 작은 판으로 만들었는데 책값을 8500원씩 매겼습니다. 아. 그러니까 둘을 사자면 17000원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 놀랍습니다. 헌책방에서는 1500~3000원이면 살 수 있는 책을 17000원을 들여야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히유. 그냥 한 권으로 묶었으면 아무리 비싸게 매겨도 12000원 안팎이 될 텐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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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에 붙은 것 - 파리채, 책겉장, 부적, 스티커, ......
ⓒ2003 최종규
책방 <풀무질> 간판은 열여덟 해가 되었답니다. 이제는 낡아서 밤에 형광등도 켜지지 않는답니다. 그래도 그냥 두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형광등을 새로 갈고 간판을 새로 간다고 책방 장사가 더 잘 되거나 책방 모습도 더 깔끔하고 보기 좋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도 중요하고 겉도 꾸미면 좋습니다. 그러나 겉과 함께 속을 가꾸는 마음이 있어야 좋아요.

제가 잘은 모르나 <풀무질> 사장님에게는 간판 바꾸는 일보다 알뜰한 책을 <풀무질> 안에 잘 갖추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힘을 쏟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돈 얼마 들이고 잠깐 짬을 내면 간판이야 얼마든지 갈 수야 있지만 세월히 흐르고 흐르면서 `낡은 간판'을 갈기보다는 `역사'와 `기억'으로 그대로 남겨두는 일도 좋지 싶어요. 한동안은 `불편함'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새로운 역사'처럼 남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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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프와 무엇 - 노래테이프, 카드계산기, 이런저런 스티커 딱지가 붙은 책상......
ⓒ2003 최종규
대학로로 술 한잔 꺾으러 가거나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조금 걸어서 한성대입구역 <삼선서림>을 가 보아도 좋겠고 성대 쪽으로 가서 <논장>과 <풀무질> 같은 책방으로 가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갖춘 책을 휘 둘러보면서 우리를 가꾸고 살찌울 좋은 책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즐겁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적시는 책을 만나면 눈물도 찔끔 나오고요.
- 성균관대 앞 <풀무질> / 02) 745-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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