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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스 "수정주의는 '수정'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관한 논의를 할 때 으레 회자되는 책이 있다. 미국 시카코대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62)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전 2권)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논구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책은 1981년 1권이 출간되자마자 미국 학계에서 한국학의 수준을 중국학이나 일본학 수준으로 일거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흔히 '수정주의'라고 설명되는 커밍스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한국현대사에 대한 커밍스의 해석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현재성은 어떠할까.

"내전은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주로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식민통치기간 동안 한국에 부과된 외부세력과 그것이 전후의 한국에 남긴 독특한 자취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일월서각 펴냄)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그의 문제의식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에 대한 내 책의 전체적 강조점은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한국현대사>(김동노 외 옮김·창비 펴냄) '한국어판을 내면서'중에서)는 입장으로 드러난다.

커밍스는 당시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40년 동안 일본의 운명에 매여 있었던 한국은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그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두 조각으로 쪼개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며, "그로부터 5년 간 한반도에서의 주된 문제는 새로운 충성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가- 모스크바인가, 워싱턴인가, 북경인가 -에 있었다"고 봤다.

▲ <한국전쟁의 기원> 영문판 표지와 일월서각 번역본 표지.
ⓒ2005 조성일
이런 입장에서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구체적 발발 유형을 ▲전면남침설 ▲남침유도설 ▲전면북침설 등 세 가지로 나눈 후 분명하게 어떤 것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에 무게중심을 두고 설명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휴전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했는데, 이날 감행된 공격도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분명치 않다는 것.

또한 그는 한국전쟁은 소련의 사주 없이 김일성이 주체적으로 수행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훗날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서 허락을 받고, 남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주장이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미국과 남한, 혹은 미국의 '남침유도설' 내지 '남침묵인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기존의 '북한 남침설'에 입각한 정통적 연구방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수정주의로 받아들여졌다.

수정주의에 가해진 다양한 비판들

커밍스의 수정주의는 1980년대 한국의 소장 연구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특히 해방공간이라고 불리는 8·15해방 후 3년간 혹은 해방에서 단독정부 수립까지 8년 동안의 정치·사회적 변동에 대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1950년 6월25일 이전의 몇 주일 혹은 몇 달 간의 사건에 초점을 맞춰 '남침과 북침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분법적 논쟁 속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남침설'이외의 주장은 허용하지 않았던 보수적 관제 사관이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던져진 커밍스의 신좌파적 수정주의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음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의 이같은 시각은 <고개숙인 수정주의>(전통과 현대 펴냄)라는 책을 펴낸 전상인 교수의 말처럼 한국 현대사 해석과 관련하여 우리 학계에 좌파적 시각의 '커밍스 콤플렉스'와 우파적 시각의 '커밍스 알레르기'를 동시에 일으켰다.

<고개숙인 수정주의>에서 전상인 교수는 "1980년대 '커밍스의 아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었지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이 고개를 숙였다"며, 커밍스가 당대의 객관적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는 실증적 접근이 아닌 역사와 사회의 흐름 속에서의 구조적 변화에 관심을 갖는 소위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택한 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전2권, 나남출판) 역시 커밍스의 비판과 극복의 성과물이다. 박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른바 '48년 질서'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던 요소는 이념도 경제도 아닌 정치라고 전제한 후 전쟁은 혁명과 달리 결정의 과정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한국전쟁에 관한 한국 학자들의 연구서들과 커밍스의 저작들.
ⓒ2005 조성일
따라서 한국전쟁은 정통성의 배타적 독점을 주장하는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 원인이며, '48년 질서'를 타파하려는 북한 리더십의 급진군사주의의 결과라는 것.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감독이 여러 번에 걸쳐 통독했고, 필자에게 자문까지 구했던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돌베개 펴냄)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한국 전쟁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전쟁 발발과 책임 규명에만 맞춰져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 후 김 교수는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왜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는가?"가 아닌 "전쟁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 한국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커밍스에 대한 오해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한국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서너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로 인한 '친북인사'라는 복선 아래 그를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 오해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는 한국전쟁을 남한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학자"라는 주장이다.

이런 자신에 대한 오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커밍스 교수는 <한국현대사>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례적으로 그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 책에 따르면, 커밍스 교수는 언젠가 한 한국인 외교관을 만났는데, 그는 "당신이 이제 생각을 바꾼 것을 이해합니다. 이제는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지요"라고 하더란다.

▲ 6·25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에서 한 사형수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커밍스 교수는 자신이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기 때문에 그들 체제의 관리들은 자신과 자신의 저작을 비방하는 게 편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신이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는 것. 그러나 커밍스 교수는 "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결코 바뀐 적이 없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생각은 앞에서도 말했듯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는 입장을 지금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가가 그 복잡한 역사를 알고 있는 한 수많은 요인으로 빚어지는 전쟁에 대해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조국(미국-인용자)이 한국에서 해온 행위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비춰보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인데 이것 역시 새로 찾아낸 문서의 결과로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믿게끔 인도된 냉전신화와 모순된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 인정할 때 문제 해결 시작"

지난 3월 커밍스 교수의 2004년 신간 <김정일 코드>(원제 North Korea : Another country, 따뜻한 손 펴냄)가 번역 출간되면서 요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북핵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북한'만을 테마로 삼아 집중분석한 이 책에서 커밍스 교수는 "북한 침략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정당했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가혹했던 미군의 전쟁 수행 방식은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분노와 불신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폭력전문가들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병영국가'개념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북한을 규정한 커밍스 교수는 그렇더라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그 작동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라고 말한다.

최근 '6·15 5주년 기념 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했던 커밍스 교수는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인정해야 문제해결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국 현대사에 관한 연구로 일약 세계 석학의 반열이 올랐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커밍스 교수의 스칼라십은 비판자들의 지적처럼 시쳇말로 '약발이 다한 이론'일지라도 그 영향은 단순한 수정주의의 시각과 방법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든 안하든, 한국전쟁과 한국 현대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커밍스 책 영문판 판권도 ‘역비’가 갖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역작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전2권)에 대한 영문판, 한국판 출판권은 모두 한국의 역사비평사(대표 장두환)가 갖고 있다.

1981년 1권과 1990년 2권 모두 미국의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이 책의 출판권이 만료되자 커밍스 교수는 한국인 제자인 코넬대 신동준 교수에게 이 책은 한국책이나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출판사가 출판권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와 함께 믿을만한 역사 전문 출판사를 추천해달라고 했던 것.

이 부탁을 받은 신 교수는 역사비평사에 편지를 보냈고, 역사비평사는 ‘사업성’ 따위는 아예 따지지 않고 커밍스 교수의 계약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졌다.

커밍스와 계약을 한 후 역사비평사는 2003년 5월말 이 책의 영문판을 발간,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고, 내년 상반기에는 새로운 정본 개념의 한국어판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역사비평사는 올해에 나올 예정인 <한국전쟁의 기원> 축약본도 번역 출간할 예정이며, 청소년을 위한 축약본 등도 따로 기획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6년 일월서각에서 1권만 타계한 언론인 송건호씨의 추천사와 함께 번역 출판되었고, 2권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 조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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