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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없어지나?

▲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005 동문선
'느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현대인들에게 게으름, 나태, 현실에 뒤쳐짐, 무능력 등의 이미지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또한, 느리게 행동한다는 것은 급변하는 현대에서 템포에 발맞출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인식되어왔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느림'은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현실 부적응의 태도라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쌍소는 '느림'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적 의미-게으름, 나태, 현실에 뒤쳐짐, 무능력-를 거부하고 그 정의를 새로이 하고 있다.

즉, '느림'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며 어느 한 기간을 정해 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데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쌍소가 주장하는 '느림'이라는 태도는 어느 정도 우리 사회 현실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극단적이며 이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태도를 어느 한 쪽으로 강요하고 있는 듯 한 논조가 조금은 비논리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바탕으로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 적실성 및 논리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쌍소는 '느리게 사는 것'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로부터 결연히 벗어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쌍소는 그 의미에 대한 공통된 합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생활의 여유를 가지며 주위를 돌아보고 다시금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게 사는 것이라는 이상적인 견해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호한 정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모호해지고 단순히 이상적으로 인식되어지고 만다.

또한, 저자는 "지금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것을 꿈꾸겠지만, 현실 속 그들은 영원히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끝없이 바쁘게 살아간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느림은 게으름이나 무력감과는 다른 것이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설득력이 없는 이상적인 삶의 제시에 불과하다. 시간에 쫓겨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연 그들 모두가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부족한 시간을 최대한 효율성 있게 활용하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뭔가 결핍 된 듯 한 갈증 속에서 끝없이 바쁘기 만한 삶이냐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최대한 효율성 있게 활용하여 최대한의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만족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느림이라는 정의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러한 느낌은 저자가 함께 제시하고 있는 느림을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쌍소는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우리에게 한결같은 평안함을 보장해 주는 몇 가지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한가로이 거닐기'로 나만의 시간을 내서 발걸음이 닿는 대로, 풍경이 부르는 대로 나를 맡겨보는 것을 말한다. 즉, 아무생각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인생이나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한가로이 거니는 자세는 현대인에게 부족한 모습인 동시에 필요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한가로이 거닐면서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가져다주는 것이 심적 평안함 이외에 과연 무엇이 더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이러한 심적 평안함은 한가로이 거닐기 이외에도 정신수양을 위한 각종 훈련법 및 체조 등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거닐기만이 가져다줄 수 있으며 다른 방법과 구별되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음으로 신뢰하는 이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는 '듣기'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상대방에게 몰입함으로써 오히려 삶은 윤택해진다고 설명한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받아 급하게 대화를 몰아가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죽은 시간들과 침묵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듣기'의 자세는 단순히 저자가 주장하는 '느림'이라는 큰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지극히 모범적이고 필수적인 자세일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는 자세의 중요성은 교육과정이나 사회생활을 통해 누구나 터득하고 있는 삶의 진리인데, 그러한 진리를 새삼스레 '느림'이라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태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논거의 참신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을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하고 애정을 느끼는 '권태', 우리의 내면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희미하면서도 예민한 의식을 일깨우는 '꿈꾸기', 자유롭고 무한히 넓은 미래의 지평선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는 '기다리기', 내 존재 깊은 곳에서 지금은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부분, 우리 안에서 조금씩 진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마음의 소리를 옮겨보는 '글쓰기', 절제라기보다는 아끼는 태도, 그 방식을 따라 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훌륭한 느림의 태도로 꼽고 있다. 새삼스레 이러한 느림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지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삶의 요구 자세라는 것이다.

쌍소는 이와 같이 제시한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지극히 옳고 형이상학적인 말이다. 이러한 말들은 '느림'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다양하게 포함할 수 있는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에 실려야 할 말들이다. 특정단어에 대해 나름대로 재창조한 정의를 가지고 삶의 태도를 바꾸라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또한, 쌍소는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나는 유명한 이의 격언이나 속담 등을 이용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단 하나의 문장 등으로 압축력 있게 무언가를 표현하는 아포리즘의 효용은 단순한 압축미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포리즘은 간단한 단어의 재배열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불안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쌍소가 인용한 파스칼의 아포리즘 역시 그러하다. 수학의 대우 명제를 사용해 그 문장을 재배열하면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단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된다. 사실이 그러한가? 문구 그 자체로 해석해 봐도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이고, 그 것이 휴식할 줄 모르는 데 있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가? 대우 명제를 통해 보아도 고요한 방에서 휴식할 줄 알면 인간의 불행은 없어지는가?

사실, 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학자인 피에르 쌍소의 유명세와 프랑스 논픽션 부문 1위라는 책표지의 현란한 문구에 유혹 받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명세와 논픽션 부문 1위에 걸맞은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한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제공받았다. 그와 동시에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를 몸소 체험한 것 또한 하나가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내 시간을 한 없이 느리게 만들어 놓았고, 지나치게 나의 마음에 여유를 두었다는 점. 이 점이 너무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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