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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바라보는 몇가지 관점

▲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시인 백석의 절창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도입부다. 이 시를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다. 특히 ‘가난한 나’의 사랑노래가 마음에 물기를 돋게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유년시절, 신약성서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난’과 ‘천국’의 관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곤 했다. 알쏭달쏭했다.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라는 시의 일부다. 삶의 남루에도 불구하고 인간됨의 위엄은 훼손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자못 울림이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던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도, 가난에 대한 꽤 낭만적인 헌사에 바쳐진 듯했다.

그러나 산 체험으로서의 가난은 사실 혹독하다. 가치나 지향이 사라진 가난의 혹독함은,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절규와 함께 강림한 비극이다. 가난에 단련될 수 없는 구체적인 인생들에게, 가난에 대한 성찰적 물음은 죄다 ‘개똥철학’에 불과하다. 게다가 ‘돈’ 본위의 사회가 되어버린 오늘 날, 가난은 ‘무능의 증거’로 규탄된다. ‘부자 아빠’가 노골적으로 예찬되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의 사랑, 행복, 타고난 마음씨는 물론이고, 천국 따위는 도대체가 낯선 은하계인 것이다. 설화 속의 흥부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와 놀부 사이에서 갈등했던 ‘제비’는 오늘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가난은 신자유주의라는 지배적 시스템의 측면에서도 규탄되지만, 그것의 모순을 지양하려는 대안적 시스템에서도 곧잘 ‘제거’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한다. ‘민중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가난’을 악의 상징으로 규정하는 일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의 반대편에 있는 ‘부’야말로 ‘선’이라는 이야긴데, 이러한 관점은 가치론적으로 보자면, 결코 올바른 시각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과 ‘부’의 문제를 물질적 차원에서 보는 일과 가치론적 차원에서 보는 일, 그리고 공동체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잘 구분해야 한다. 대원칙은 ‘가난’과 ‘부’가 그 자체로 옹호되거나 규탄되어야 할 상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난과 부, 그 자체를 양극화하여 규탄하거나 옹호하는 시각은 오히려 초점이 빗나간 논의를 이끌어내기 쉽다. 부자 아빠를 예찬하면서 가난한 아빠에 대해 무능의 딱지를 씌우거나, 부자 아빠들의 정체야말로 가난한 아빠에 대한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는 시각은 선동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주장이지만, 이는 물질적 양극화 못지않은 인식론적 편견을 불필요하게 확대재생산 한다.

가난과 부의 가치평가 문제에서 중요한 사항은 ‘경쟁조건의 평등성’과 이에 따른 ‘분배구조의 형평성’, 개별적 필요를 과잉 초과하는 부의 사회환원을 통한 사회구성원 공통의 이익과 복지의 증진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가치론적 차원에서 ‘가난의 철학’을 정립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좀더 섬세해지고 성숙해져야 한다. ‘자발적 가난’에 대한 지식인의 담론이 자주 공허한 지적 허위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비움을 통해 삶을 채울 수 있다는 사색은 인간들이 지속해왔던 오래된 성찰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명원/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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