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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Why Socialism?"을 읽기 전에 (I)

/* 몇년전에 사노위 계간지(월간지인지 정확하지 않음) 기획이 있었죠.  그때 적은 원고인데 오늘 우연히 E-mail 정리하다 발견이 되었네요. 그후 사노위 계간지가 무슨 이유인지 유야 무야 되고, 이글은 그냥 사라졌고.  후속편도 적지 못하고 기억속으로 사라졌죠. 암튼, 우연히 발견해서 다시 읽어 보니, 반갑기도 하고해서 blog에 올립니다.  혹 comment하실 꺼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아인슈타인의 “Why Socialism?"을 읽기 전에 (I)

 

사람들에게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고 하면, 어릴 때 낙제했고, 대학도 1년 재수 했지만 결국 천재성을 드러낸 과학자, 혹은 덥수룩한 머리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소 세상과 동떨어진 연구소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천재의 모습, 그리고 실생활에 어둡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대해 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국가를 반대한 친 유대주의자(시온주의자)였으며, 원자폭탄 제조를 요구해 놓고 나중에 원자폭탄개발에 반대한 사람, 혹자는 여성편력이 심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듯 싶다.

 

그러다 아인슈타인 글 “Why Socialism"이라는 글을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이 글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나쁜 점 중에서 가장 최악은 개인을 불구자로 만드는 것’이라며, 이 악을 제거하는 것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 ‘계획경제가’ 모두 ‘사회주의가 아’님 환기시키며 관료주의 문제나 민주주의 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연상하게 하는 이글은 미국의 좌파 잡지 [월간평론(Monthly Review)] 창간호(1949년)에 실려 발표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매카시 광풍이 시작이 되는 해이기도 하며,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나치는 그를 처단 명단에 올렸고, 미국은 FBI를 통해 그를 22년 동안 비밀 감시해 1800쪽의 문서를 남겼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글이 어쩌다 나온 글이 아니라 그의 인생에서 상당한 정치적/철학적 활동의 결과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해 준다. 이를 증명하듯 [위키페디아]라는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아인슈타인은 과학논문으로 300여편 이상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과학 분야가 아닌 글들도 150여편이나 되며, 이 중에는 사회주의와 국제 관계와 같은 철학적, 정치적 주제에 대해서 다수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905년, 혁명을 준비하며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울름에서 중소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자들에게 특별하다. 1870년에는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1878년, 1879년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태어난 해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4살 되는 해 맑스가 사망했다.

 

어린 시절 아인슈타인은 다른 아이들처럼 호기심이 많았고 자연의 비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독일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는 권위주의적인 독일 김나지움 교육에 항상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6세 때 군사적 기풍과 주입식 교육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돌연 우울증과 신경과민이라는 진단서를 제출하고 자퇴해 버렸다.

 

학교를 자퇴한 아인슈타인은 비교적 자유로운 스위스로 건너가 스위스의 연방공대(ETH)에 지원하였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고1을 중퇴하고 바로 대학 입학시험을 본 것이다. 입학시험은 두 부분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전공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교양시험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교양시험의 성적이 좋지 못해, 스위스에서 고등학교 1년을 더 다닌 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군 입대를 거부하고 국적을 포기한 때도 이 시기이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던 것이다.

 

스위스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인슈타인이 후일 특수상대성 이론을 펼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중, 아인슈타인은 벌써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맥스웰 이론과 갈릴레오의 상대성의 원리 사이에 있는 모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갑돌이가 시속 60km의 속도로 일정하게 달리는 차안에 있고, 갑순이가 시속 40km로 달리는 차에 있다고 하자. 갑돌이는 갑순이 차가 시속 20km 속도로 뒤처지게 보이고, 반대로 갑순이는 갑돌이 차가 시속 20km 속도로 앞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갑돌이가 61km속도로 속도를 증가시키면(가속시키면) 갑돌이가 느끼기에 시속 60km에서 61km로 변했으니, 1km속도 증가(가속도)를 확인할 수 있고, 갑순이도 갑돌이 차가 20km에서 21km로 변했으니 1km의 속도가 증가(가속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운동법칙 ‘힘=질량X가속도’ 에 따라 질량이 같고 가속도가 같기 때문에, 갑돌이가 관찰한 운동법칙과 갑순이가 갑돌이 차를 관찰한 운동법칙이 같다. 이것이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이다. 즉, 관찰하는 사람이 등속도로 움직이든, 정지해 있든 물리 법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빛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16세 아인슈타인에게 고민은 이 것이었다. “빛에 올라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갈릴레오의 이론에 따르면 “내가 빛과 같은 속도로 운동하면서 빛을 바라본다면 제자리에서 진동하는 빛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과학을 집대성한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는 관측자가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상관없이 항상 일정해야한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10년 동안 지속된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에서도 성적이 아주 우수했거나 천재적인 특이한 기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수학이 싫어 수업을 빼먹고, 실험을 하거나 사색을 즐겼다. 그리고 성적과 무관하게 관심 있는 학문에 대해서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학교에서 성실한 마르셀 그로스만과 미셀 안젤로 베소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다. 이들과 학창시절 내내 철학과 과학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 이때 마흐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이 있었고, 마흐가 뉴턴의 절대 시공간에 대한 비판한 것에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졸업 시점이 다가왔을 즈음, 아인슈타인은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학교에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1902) 여기 저기 비정규직 강사로 전전하다가 다행히 친구 그로스만 아버지 덕분으로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국에 취직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취직하면 대부분 회사일 에 쫓겨 다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틈이 없는데, 당시는 좀 달랐을까? 아인슈타인은 친구들과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만들어 계속 과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즐겼다. 그이 이론적 업적은 바로 이 모임의 자유로운 토론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학창시절 친구이자 아카데미 구성원이었든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한다(1903년). 수학 전공인 밀레바는 수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의 중요한 동료 파트너였다. 이렇듯 아인슈타인의 생활은 아주 평범했다. 오히려 이러한 평범한 생활이 주류 과학계의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했다는 평도 있다.

 

1905년의 혁명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1905년은 아인슈타인에게도 경이로운 해였다. 그는 양자역학, 특수 상대성 이론, 그리고 브라운 운동에 대한 논문을 제출한 해였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의 첫 번째 논문은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의 (열의 분자운동론에 의한) 운동에 대하여>로 브라운 운동(랜덤 운동)에 관한 것인데, 물속에 꽃가루가 무작위로 (랜덤하게) 운동하는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주류과학은 원자나 분자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꽃가루의 무작위 운동의 원인을 열에 의한 대류로 보았다. 마흐와 물리화학의 창시자 빌헬름 오스만발트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지할 수 없는 것, 즉 감각을 통해 보여줄 수 없는 것은 자연과학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실증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기술로 측정할 수 없는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였다. 주류에 대한 도전은 늘 안타까운 희생을 요구하였다. 통계 역학으로 유명한 볼츠만은 원자론을 바탕으로 이론을 발표하다 에너지론 학자들에게 시달려 결국 자살을 하였다. 실증주의자들은 원자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터무니없고, 악랄한 유물론이라고 물아세우며, 존재의 기초는 물질이 아닌 에너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볼츠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원자(분자)가 실재한다는 가정을 대범하게 받아 들였고, 꽃가루의 무작위(랜덤한) 운동은 물 분자에 의한 충돌에 의한 것으로 계산해서 만족할만한 설명을 얻어 내었다.

 

아인슈타인은 “마흐의 인식론적 입장은 젊은 시절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금은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왜냐 하면 그는 사색, 특히 과학적 사색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구조적이고 이론적인 본질을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했다. 그 결과 구조적, 이론적인 특성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이론, 예를 들어 원자의 동역학 이론에 대해 비난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고 비판하였다. 당시 레닌 역시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서 오스트발트의 ‘에너지론’을 비판하였다. “운동을 물질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마치 사유 활동을 객관적인 실재로부터 분리하거나 내 자신의 감각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것과도 똑같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념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질과 상관없는 운동을 가정하면서, 즉 물질을 부인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속임수는 바로 물질과 사유 사이의 관계를 무시하는 데 있다. 마치 이 물질과 사유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음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이 관계를 끌어 들인다. 애초에는 이관계가 표현되지 않다가 어쩔 수 없이 점차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성과는 논쟁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볼츠만이 자살을 택한 것도 아인슈타인이 이 논문을 발표한 다음해 였다. 이 논쟁을 종식 시킨 것은 그로부터 2년후 프랑스 물리학자 장 페렝이 실험으로 입증하고 나서였다.

 

두 번째 논문은 <빛의 방출과 변화에 관련된 예시적 관점에 대하여>라는 양자역학에 관한 논문이다. 혹자는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부정했다고 알고 있는데, 오히려 양자역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과학자였다. 이 논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독일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막스 프랑크가 빛이 양자화 되어 있음을 발견하던 때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물리학자를 괴롭힌 것은 가열된 물체에서 나오는 에너지였다. 고전물리 이론을 종합하여 그 에너지를 계산한 레일리, 진스는 가열된 물체에서는 무한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복사) 해야 하는 모순에 부딪혔다. 고전물리학에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플랑크였다. 그는 가열된 금속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계산하는 수식에서 우연히 면적을 구하지(적분을 사용하지)말고 개별입자의 덧셈(수열의 합)으로 계산을 하면 실험과 동일한 수식을 얻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인 에너지 다발로 방출하고 흡수한다는 의미였다. 플랑크는 이 에너지 다발을 광양자(quanta)라고 불렀다.

 

그러나 에너지가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측정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마흐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당시로서는 이러한 수식 결과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주류 과학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려 준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두 번째 논문에서도 대범함을 발휘했다.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다발이라는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여, 이미 실험적으로 알려진 광전효과(빛을 금속판에 쪼이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효과)의 여러 특성들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의 빛의 입자론을 부활시킨 것이다. 이 입자론으로는 빛이 회절과 간섭을 하는 파동의 성질을 설명할 수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의 물리학자 밀리칸은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0여 년간에 걸쳐 매우 정밀한 실험을 반복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보다 2년 늦은 192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광양자 이론과 빛의 이중성(파동성과 입자성)의 모순은 이후 양자역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의 진정한 명성은 세 번째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라는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은 어느 날 갑자기 천재의 재능을 발휘한 논문이 아니라 16세 때부터 10여 년간 지속적인 연구와 토론의 산물이며, 그리고 이제까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성과들을 집대성한 결과였다.

 

당시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자기파임이 입증 되었고, 전자기파는 절대로 정지하지 않는다는 특성도 실험과 이론으로 증명되었다. (전자기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인데, 변하는 전기장이 자기장을 발생시키고 다시 변하는 자기장이 전기장을 발생시키면서 앞으로 퍼져나간다. 즉, 전기장이든 자기장이든 하나가 정지해 버리면 빛은 사라져 버린다.)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오의 상대성의 원리와 빛의 속도 불변성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정하고, 공간과 시간을 상대화시켜 해석했다. 여기서 시간을 상대화 시켰다는 말은 사람들 마다 시간이 다르게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충분히 이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수식을 이용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빛의 속도를 일정하다고 하자, 그런데 그 속도는 분자에 공간을 변수로 분모에는 시간을 변수로 갖는다. 간단하게, ‘속도 = 거리(공간)/시간’ 이라는 수식을 생각해 보자. 공간이 상대적으로 변한다면 시간도 상대적으로 변해야 분자, 분모의 변화가 서로 상쇄되어 변하지 않는 속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개념의 변화는 상식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기차안의 갑돌이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기차 밖의 갑순이에게는 따로 따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관찰자에 따라 측정 결과가 다르다고 관찰자의 ‘의지’에 의해 결과가 좌우된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곤란하다. 그런데 기차안의 갑돌이는 갑순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갑돌이가 보기에 갑순이는 동시에 발생한 사건을 따로 따로(시간을 두고) 측정해 놓고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두 사람 각각은 모순이 없는데, 두 사람이 만나면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빛과 같이 고속으로 운동을 하면 이런 일은 실제로 발생한다. 이 이론은 경험만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아무튼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이들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것으로, 물리법칙은 모든 관성계(등속운동을 하는 좌표계)에서 똑같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상대성 원리’라고 부르지 말고 ‘불변성의 원리’라고 부르자는 제안도 있다.

 

특수 상대성 원리는 아무리 쉬운 책을 봐도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 이유는 특수 상대성 원리는 바로 4차원 공간, 즉 가로(x)-세로(y)-높이(z) 축에다가 시간(t)의 축을 더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차원에 사는 개미는 3차원을 이해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3차원에 사는 우리들은 4차원의 세계를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이후 많은 실험과 측정으로 증명이 되었다. 우주에서 지구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떨어지는 미세 입자들 수명을 측정하는 실험에서, 실제 수명이 길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특수상대성 원리의 수식을 전개하다 보면, 유명한 E=mc^2 이라는 에너지-질량 등가 법칙, 즉 에너지 질량의 “상호 전환”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 이 관계는 후일 원자력 에너지와 원자 폭탄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획기적인 발견을 이끌어 내었다. 1920년 후반에 물리학자 디락은 특수상대성이론을 양자역학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물질’이 필요함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고, 1933년에 와서 실제 반물질인 양전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양전자는 현재 병원에서 측정 장치로 이용하고 있다.

 

1905년에 특수 상대성에 관한 논문 발표를 하고나서 상당한 논란이 기대했지만 의외로 조용했다. 그의 논문의 우수성을 알아 본 사람은 당시 ‘물리학 연보’ 편집장이었던 막스 플랑크 였다.

 

 이들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조금씩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1911년 프라하에 2년 계약직으로 강의하던 아인슈타인은 당시 연방공대 교수인 친구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1912년 8월 연방공대의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로스만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자유로운 스위스는 아인슈타인에게 또 다른 선물을 제공했다. 그 곳에는 당시 여러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의 피난처였던 오데온 카페(Odeon Café,)가 있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수업을 빼먹고 사회주의나 아나키스트 학생들과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기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여기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우리에게 친숙한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트로츠키 그리고 몇 년 후에 레닌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서적

 

D.P 그리바노프 “아인슈타인 -철학적 견해와 상대성이론” 일빛

홍성욱, 이상욱외 “뉴튼과 아인슈타인” 창비

김성원, “빛보다 빠른 것은 없을까” 과학동아 2005

David Renton, "Albert Einstein's Socialism" RETHINKING MARXISM, Vol. 13 (2001)

Wikipedia "Albert Einstein's Political view"

John J. Simon "Albert Einstein, Radical : A Political Profile", Monthly Review (2005)

Albert Einstein "Why Socialism?" Monthly Review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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