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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오늘(9.11) 살바도르 아옌데, 쿠테타군에 의해 사망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쿠테타 군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 반란군의 해외망명제안을 거부하고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소총으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사살당했다.

 

 

아옌데 최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사실 911하면 우리는 지난 2000년의 WTC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지난 삼십여년간 911은 세계민중들에게 아옌데의 죽음으로 먼저 다가왔다. 언제던가? 공중파 방송에서도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를 상영하지 않았던가?

 

1908년에 태어난 아옌데는 칠레 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통제가 칠레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옌데는 사회당의 길을 걸었다. 52년 부터 세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9년 12월 칠레의 대중운동 조직 MAPU를 비롯하여 사회당, 공산당,진보당, 사회당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며 위대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였다. 네루다는 후보자리를 양보했다. 권력 싫어하는 사람이야 드문게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진리이지만 인상좋은 할아버지 시인 네루다는 정말 대통령 자리가 싫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11월 5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권력이 선거를 통한 집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칠레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자본과 백인 소수 상층부에 의한 경제적 지배, 극심한 빈부격차, 미군에 의해 교육받은 군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인민연합의 구리 광산 국유화, 경제 구조 재편에 대해 자본은 모든 수단을 다해 저항했다. 73년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300%에 달했고 운수자본가들은 상품 수송을 거부하며 사보타지를 일으켰다. 미국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비축 구리를 국제 시장에 무차별로 풀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들의 아옌데에 대한 지지는 강고했다. 73년 벌어진 총선에서 인민연합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을 정도였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아옌데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를 실시하고자 했다. 재신임안 통과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바로 그 투표일에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테타가 벌어진후 일주일 동안 칠레전역에서는 삼만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벤세레모스'(단결하라)라는 노래로 선거운동극을 만들어 온 나라를 누비고 다니던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 '빅토르 하라'도 이 떄 산티아고 경기장에서 총을 맞고 죽고 말았다. 심지어 병석에 누워있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 또한 살해당할 뻔 하였으나 겨우 살해를 피하고 그해에 자연사했다.(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영혼의 집'을 권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피노체트 집권 이후 망명한 저널리스트 출신 소설가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나왔다. 초호화 캐스팅이었는데 주인공이 누구였더라? 제레미 아이언스 였나?)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군사평의회 의장 자리에 앉은 피노체트는 미국과 영국의 비호하에 쿠테타 동료들을 숙청하고 대통령 자리를 거머 쥐었다.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만 명...이것이 바로 피노체트의 성적표이다.

 

고령으로 정권을 내어놓은 피노체트가 스페인에서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되었을때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섰던 사람은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이다. 대처가 뭐라 그랬더라? '위대한 용기를 지닌 이 인물에 대한 어떠한 법적 기소행위도 반대한다 그랬던가?' 피노체트에 얽힌 아햏햏한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오늘 군이 봉기한 이유는 이 혼란에서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뿐이다. 조국은 혼란 속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맑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했다. 혁명위원회는 사법권과 언론 통제권을 갖게 되며 다음 조치가 있을 때까지 국회는 휴회한다. 이상"-이것이 피노체트 쿠테타 군의 포고문이다--;;

 

피노체트의 망령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올해 중앙일보는 '남미가 변한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특집을 진행했다. 그 특집 기사에 따르면 칠레의 포퓰리즘적 전통을 꺠고 경제개혁이라는 길에 매진한 비젼있는 지도자가 바로 피노체트란다. 지랄병도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자본과 군부, 미국 정부의 사보타지가 일어나고 삼십여년이 지난 오늘..이 역사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베네주엘라에서는 1998년 선거를 통해 우고 차베스가 집권했고 석유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등의 볼리바르 혁명을 이끌고 있다.  기득권, 자본, 미국은 그들이 아옌데에게 했던 만큼 소금 뿌리기를 계속 하고 있다. 02년 4월의 쿠테타 시도, 02년 12월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에 이어 얼마전 소환 투표까지...다른 점이 있다면  아옌데보다는 차베스가 군부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우리나라 보수 신문들을 보면 차베스를 무슨 군바리 출신 독재자 비스무리하게 묘사하고 그에 저항하는 자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처럼 그리는데 정말 쌍으로 웃기는 것들이라 하겠다)

 

아옌데 정권보다 차베스 정권의 생명력이 더 강해보이긴 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베네주엘라 반정부 세력들은 공공연히 무장봉기와 쿠테타를 떠들고 다닌다. 이에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의 저자 타리크 알리를 비롯한 150명이 좌파 지식인들은 국경을 떠나 차베스 정부르 엄호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아옌데 정권의 비극을 두고 나온 분석들이 꽤 된다. 혁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개혁을 선택함에 따른 당연한 말로라는 분석도 있고 선거건 뭐건 간에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적 국가기관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 생각엔 뭐니뭐니 해도 미국탓이 제일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전투를 잠깐이라도 보거나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의 장엄한 최후에 관한 글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콧잔등이 시큰해질껄...앗 노무현 탄핵 당시에 아옌데가 어쩌고 우리가 지켜야할 민주정부 어쩌고 하면서 견강부회 하던 작자들이 많던데 각자 알아서 대가리 박고 반성하기 바란다.

 

다음은 쿠테타군이 대통령궁을 폭격하던 당시 칠레 국영 라디오와 전화를 통해 방송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최후의 연설 끝 부분이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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