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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8

1994년 오늘(8.25) 박홍 주사파 파문 터뜨리다.

1994년 8월 25일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이 여의도 클럽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후 정치, 언론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취임 당시 '어떠한 동맹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라는 파격적 취임사를 통해 전향적 모습을 보였지만 김영삼의 개혁드라이브는 94년으로 접어들어가며 흐지부지 되는 모습을 보였다.뒤이어 94년 봄 김영삼은 우루과이 라운드 쌀개방 파동을 통해 '대통령 직을 걸고 쌀개방만은 막겠다'던 자신의 호언장담을 썡까버렸다.

 

곧 이어 정국돌파용으로 김영삼은 김일성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놀랍게도 김일성 또한 그 회담을 전격적으로 수락했다.(정국 돌파와 여론 반전을 위한 김영삼의 노림수와 대북봉쇄와 자연재해, 천리마식 경제개발의 한계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김일성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속셈이야 어떻든 전향적인 제안이었고 남북관계는 유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조선일보 조차도 어리둥절해 했고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하여튼 김영삼 특유의 퍼스낼러티가 발휘된 사건이었다.

 

한편 민족주의 정국에도 불구하고 94년 6월 24일 지하철 노조는 파업을 벌였고 철도 기관사들 역시 전평 총파업 이후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좌파 학생들은 농활을 미룬채 궤도 농활을 외치며 연대투쟁에 돌입했으나(나 또한 미제의 압잡이가 되기 위한 카투사 원서를 찢어버리......고 간게 아니라 투덜거리면서--;; 합류했다)   가열찬 투쟁은 남북 정상회담에 묻혀 학생운동의 다수였던 NL계열의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이러던중  별안간 들려온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정국을 급반전 시켰다.

 

어리둥절 해 하던 다수 언론과 다르게 조선일보는 발빠르게 김일성 까대기를 시작했고 뒤이어 정부가 조문을 할 용의는 없는지 물었던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에 대한 공격, 각 학교에서 터진 조문 파동.....유화적이었던 사회분위기는 공안정국으로 급반전됐다. 언론, 보수정치권, 경찰, 검찰, 안기부는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가 되어버렸다. 당시 우리과도 과방을 싹 뒤집어서 관련 문건들을 정리했을 정도였다.

 

이 때 독재에 저항했던, 학생운동권의 친구였던, 술고래라는 설명과 함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자랑하면 (BGM 두둥)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바로 그 였다.

 

박홍 총장은 94년 8월 25일 그 유명한 주사파 발언을 하였다. 주사파가 몇만명이고 그 중에 자신이 회개 시킨 사람이 수백이라는 둥, 예수께서도 일찌기 성전앞의 환전상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셨다는 둥 심지어 사노맹 뒤에 사로청이 있고 그 뒤엔 김정일이 있다는 골때리는 발언까지 하셨다.

 

물론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당시 주사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주사파가 사회 각처에 진출한것도 사실이다. 노무현의 오른팔로 삼성에서 승용차로 불법 정치자금 수십억 떙긴게 뽀록나 지금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는 안희정, 그 안희정도 그 유명한 구국동맹의 일원 아니었던가? 미문화원 점거를 배후에서 기획했다던 전 삼민투 위원장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도 계시지 않던가? 어디 주사파 뿐인가? 에전엔 남로당원들도 많았고 남로당원들도 사회 각처에 진출하지 않았던가?(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하지만 당시 박홍 총장의 그 발언은 우습지만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언론들은 박홍 총장을 용기있는 지식인, 시대의 양심으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주사파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라는 질문들에 대해서 박홍은  스스로 나타나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해선 증거 묻는 사람이 바로 주사파라는 심오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그 뿐인가? 김일성 장학금을 탄 사람이 교수가 되어 있다는 연속된 발언들을 통해서 박홍 총장은 자신의 선배격인 매카시의 수준을 우습게 뛰어넘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빵으로 보내 콩밥을 멕였던 박홍 총장은 이후 서강대 예수회 재단 이사장으로 영전해갔다. 그리고 박홍 총장 아니 박홍 재단 이사장님은 오늘날까지 이 사회의 공산화를 막기위한 험난한 길의 중심에 서 계신다. 지난 8월 17일 박홍 재단 이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이유로 모든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다. 사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원은 못해 줄 망정 경영권을 빼앗아 교사ㆍ교수들에게 주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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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오늘(8.24) 미국, 공산주의자 단속법 제정

 헥헥 자정 이전에 그날 글 쓴다는게 역시 힘들군....

 

1954년 8월 24일 미국 의회는 '공산주의자 단속법'을 제정했다. 국가보안법이라던지 치안유지법 같은 그럴 듯 한 이름을 가진 법들도 많은데 역시 미국은 화끈하게^^ 공산주의자 단속법(Communist Control Act) 이란 이름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산주의자 단속법 하면 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조지프 R 매카시 위스컨신 주 상원의원. 상원의원이 대단한 권세이긴 하지만 한 주당 두명씩 있는것이 상원의원이니 상원의원 명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힘들지만 매카시는 그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우리에게 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미국의 50년대는 '매카시 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매카시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들어있는 종이 몇장을 말아쥐고 ' 이 안에 소련과 내통해 간첩행위를 하는 자들의 명단이 있소이다' 고 외쳐서 온 세계를 떠들석 하게 한 이후 이른바 '비미국적 반동행위' 상원청문회(HUAC, House committee on Un-Americas Activites)를 열고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비미국적 반동행위 상원 청문회(헥헥 길기도 길다. 예전엔 집회 이름도 긴 것 많았는데 '우리민족 가로막는 반동적 제국주의 미국 규탄과 전노구속을 위한 서부총련 투쟁대회' 뭐 이런식 말이지...) 를 장식한 명단들을 화려하다. 로널드 레이건, 월트 디즈니, 엘리아 카잔등은 매카시의 압잡이로서 동료들을 팔아먹었고(이 당시 레이건은 연예노조 위원장이었다. 어디에나 자기 조직 팔아먹는 이런 개쉑들이 있다.)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번스타인, 브레히트 등이 이 떄 톡톡히 고생한 사람이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스위스로 망명하기에 이르렀고ㅠㅠ

 

몇년전 이상한 역사 재평가 흐름을 타고 배신자 엘리야 카잔이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묘하게도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앉은채로 침묵하거나 야유를 보낸 반면 오른 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다수는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찰리 채플린이 죽기 얼마전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탈 때 전 관객이 일어서서 끝없는 기립박수를 보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1949년 폴 스위지가 만든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Why Socialism? 이라는 멋진 글을 발표하여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자랑스럽게 해준 아인슈타인 조차도 공산주의자 단속법의 거미줄에 포착되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단속법 자체가 수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는데가 아인슈타인의 대중적 인기는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높았다. 그리하야 미 연방수사국과 매카시는 아인슈타인을 단속 대상에 넣는 대신에 괴상한 천재의 이미지를 퍼뜨리기 시작했고 아직도 아인슈타인에 대한 괴상한 천재란 이미지는 지배적이다.

 

이후 매카시의 뻥은 점점 실체를 드러냈고 미국시민 사회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이 났고 법 제정 한지 삼년이 지나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결국 공산주의자 통제법은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 소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2001년 10월 역시 그 이름도 황당한 '애국법'(Patriot Act)를 만들었다. 애국법은 미국 민중 뿐 아니라 해외인사에 대한 무차별적 도청, 감시, 통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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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오늘(8.23)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되다. 서명자는 당시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겸 외무인민위원 비야슬라체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스탈린의 수많은 실책들이 지적 되지만 독소불가침 조약이야 말로 대표적 실책으로 기억되고 있다. 파시스트 독일과 소비에트가 어찌 조약을 체결할 수 있냐는 비분강개 외에도 이 조약이 낳은 어이 없는 결과들은 너무나 많다.

 

동유럽과 발트해 지역을 사이좋게 독소가 분할한 이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동서로 나뉘어 독소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발트 국가들은 소련에 합병되었다. 물론 독소불가침 조약이 꺠진 후 독일과 소련이 발트 지역을 두고 서로 다퉜으나 결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소비에트에 합병되었다. 오직 영웅적이고 전설적 투쟁을 펼친 핀란드 많이 독립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임을 스탈린과 소비에트에게만 온전히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38년 9월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와 영국은 뮌헨 회담을 통해 독일의 수데텐 병합을 추인했을 뿐더러  38년11월 프랑스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의 분열로 인민전선 정부가 몰락하고 들어선 보수주의 정부는 소련에 우호적이지 못했다.

 

앗 회의다. tobecontinued 

 

하여튼 곧 독소불가침 조약은 뽀개지고 기나긴 독소전쟁이 벌어졌고 히틀러 또한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다. 스탈린과 별개로 소비에트 인민들의 투쟁은 영웅적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관련된 영화중에선 주드 로 와 애드 해리스가 독소 양측의 스나이퍼로 숨막히는 대결을 벌였던 에네미 앳 더 게이트 를 추천함.

 

에이 연속해서 쓸려니까 흥이 안나네...

 

다음 날짜부터는 좀 더 성의있게 쓰겠으니 이건 그냥 넘어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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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오늘(8.22) 마이클 콜린스 영면.

 내가 매체에서 일하게 되면 꼭 해봐야지 하고 욕심 냈던게 바로 이런 꼭지다. 진보넷에도 천일야화 코너가 있는데 나도 예전에 어디다가 '세헤라자데'라는 이름으로 진보천일야화를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ㅠ.ㅠ)연재한 적이 있다.

 

그냥 오늘의 소사를 쭉 읊어주는게 아니라 그 가운데 좀 좌파적이면서도 현재에도 의미가 있을 만한 사건을 하나 골라서 자세히 소개하고 의미를 부여하는거....마치 한국일보에서 고종석이 하는 것 처럼 말야.

 

매체에서 일하긴 하지만 블로그에다가 이런 코너를 만드는것 하고 우리 매체는 상관이 없지만--;;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을테지 하고 자위해본다.

근데 이건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지만 극도의 성실성이 필요한 작업이임엔 분명하다. 고로 매일 매일 블로그에 업데이트 시킬 수 없다는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자주 뺴먹을진 모르겠지만...하여튼 오늘 이 작업을 시작해본다.

 

1922년 8월 22일 IRA의 창설자 마이클 콜린스가 32년의 짧지만 화끈한 그리고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삶을 마감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우리나라엔 리암 니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하고 닐 조단이 감독한 영화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16년 더블린 부활절 투쟁이 영국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된 후 마이클 콜린스는 에이몬 드 발레라와 함께 처형을 모면하고 투옥되었다. 출옥 발레라는 신페인당의 의장이 되고 마이클 콜린스는 정보담당으로 활동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이후 조직내 암약하는 영국 프락치들을 색출해 처형하며 성가를 높였다. 지난한 투쟁 이후 결국 영국은 마침내 평화를 선포하고 협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마이클 콜린스는 자신이 게릴라 전사이지 정치가가 아니라며(!)  협상 대표자로 선정된 걸 거부하다가 결국 협상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비타협적인 게릴라 마이클 콜린스가 들고 돌아온 런던협약의 주된 내용은 아일랜드의 분할이었다.(아직도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이고 지금은 좀 뜸하지만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IRA와 영국군의 충돌과 피의 역사는 유명하다. 얼마전 개봉한 블러디 선데이란 영화를 떠올려 보길. 그리고 신지 마카리가 쓰고 슈 아카나가 그린 뽀대나는 니고시에이터 만화 '용오' 에서도 IRA와 북아일랜드를 다룬 꼭지가 등장한다.) 아일랜드 의회는 협약을 비준하고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발레라는 의회를 탈퇴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마이클 콜린스는 평화를 떠들고 다니다가 동지들에게 열라게 욕을 잡숫다. 결국 영국군과의 싸움이 아닌 협약파-반협약파의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마이클 콜린스는 저격에 의해 짧고 화끈하지만 약간 헷갈리는 삶을 82년전 오늘 마감했다.

 협약 거부를 외치며 무기를 들었고 마이클 콜린스 저격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받는  에이몬 드 발레라는 웃기기 짝이 없게도 1926년 협약안을 받아들이고 수상을 거쳐 초대 대통령 자리를 꿰어 찬다. 그리고 1966년 "역사는 마이클 콜린스가 위대했으며 나의 식견이 짧았음을 기록할 것이다."
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발언은 발레라 자신이 민중을 배신하고 협약안을 받아들이고 게다가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가 영국하고 충돌하는 척 하면서도 뒤론 쇼부 치면서 한 세월 잘 보낸 점에 대한 캄플라쥐에 불과하다.

 

결국 예전 자신의 비타협적 투쟁 노선은 잘못된것이고 마이클 콜린스의 노선이 옳은 것이다란게지. 자신의 기만적 행보는 마이클 콜린스의 옳은 노선을 따른 것이고 따라서 합리적인 것이라는걸 강조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한것이 라고 난 생각한다.( 뭐 물론 난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고 그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기에 반론이 있을 수 있을게다. 내 관점이 이렇다는 거지)다. 하여튼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평가는 아일랜드 내에서 아직까지도 엇갈리고 있다고 한다. 고향에 세워지는 기념물들이 족족 뽀개질 정도로...

 

아마 아일랜드 주류층에선 평가가 긍정적이고 비주류 쪽에선 평가가 나쁜 모양인데...이승만하고 비교하면 총들고 싸웠던 마이클 콜린스가 지하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겠지만 비슷한 면모가 있는것 같긴하다. 일단 국가의 건설이 중요하다(지가 대통령 해먹을려고 친일파 대거 중용하고 미국에 빌붙은 이승만 하고 마이클 콜린스를 동일 선상에 놓는건 어불성설이긴 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온갖 힘을 쏟았던 것, 그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에선 마찬가지라는 거지..

 

조직내에서 강온 대립이 있을때 강경파가 온건파를 공격해서 쳐내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다. 근데 그 노선 투쟁에서 선명성을 무기로 권력을 잡은 강경파가 지가 쳐낸 온건파 보다 더 역겨운 짓거리를 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개혁의 화신인양 굴면서 이매진을 BGM으로 깔고 눈물 흘리는 연기를 통해 집권한 노무현을 보라! 저건 허위고 권력 잡으면 바뀌기마련이라고 비판을 이미 가했지만서도 씨바 미국 없으면 강제노동수용소에 있을거라면서 꼬리 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나?

 

첨언: 크라잉 게임에서 IRA 를 좀 묘하게 그려가지고 지네 나라에서 엄청 욕먹은 닐 조단은 마이클 콜린스를 영화화하면서는 그를 만방 영웅으로 그렸다. 이 영화 이전에 이미 쉰들러 리스트, 롭 로이 등에서 고뇌에 찼지만 결단력 있는 영웅의 이미지를 보였고 키가 190이 넘는 리암 니슨을 마이클 콜린스 역할에 캐스팅 했을때 부터 그 방향은 결정 됐는지도 모르지(그리고 리암 니슨 또한 아일리쉬다)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를 장식하기 위해 줄리아 로버츠를 애인으로 붙여주기도 했고... 하여튼 흥미로운 소재긴 했지만 영화 자체는 그닥 재밌지는 않았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아 그러고 보니 롭 로이에서도 리암 니슨은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스코티시 영웅이었네..이제 웨일즈 저항 영웅만 남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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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제목,주소,별명에 대한 간단한 설명.

미디어 참세상 일을 시작하면서 아이디를 peyo로 정할 때 갈등이 좀 있었다. 지금까지 처럼 그냥 메일 주소 혹은 끄적거리는 글들 위에 달려나가는게 아니라 미디어 참세상의 이름으로 나가는 기사 위에 달릴 아이디기에 좀 부담이 됐던게지...

 

그리하여 또 허영심이 발동하야 이런 저런 뽀다구 나는 이름들을 몇가지 떠올려봤다. 먼저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것은 페이요와 발음이 비슷한 페로. 노어로 펜이라는 뜻이고 레온 트로츠키의 별명이었다지 아마. 트로가 글을 워낙 잘 써서 별칭이 페로라고 붙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내 글들에 붙기에는 너무 과분한 별칭. 그래서 비슷한 발음을 지닌 이름을 붙였다. 알다시피 peyo는 개구장이 스머프를 그린 프랑스 만화가 이름. 지금에사 스머프의 문제점이 몇가지 제기되고 있지만(여성에 대한 몰이해-스머페트- 라던가 똘똘이를 통한 트로츠키의 희화화등등) 개구장이 스머프는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빨간 감성을 쉽고 재밌게 심어주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만화가 아니던가! 따라서 나도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은근슬쩍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는데 이바지 하겠노라는 마음으로 Peyo로 이름을 정했다.

 

설명에 따르면 블로그야 일기장이라고 하니 별로 은근슬쩍 글 쓸 필요도 없고 그냥 속에 이야기 편하게 풀어놓으면 되는거지 싶기도 하고 공식적인 뉴스에 나가는 peyo의 부담을 덜고도 싶어서 다른 이름을 정했다.

 

 자 그렇다면 molot는 무슨 뜻이란 말이던가?? 소비에트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몰로토프 또한 마찬가지다. 레온은 사자, 스탈린은 강철에서 따온 말이고 몰로토프는 망치를 의미하는 몰로트에서 따온 이름. 이 블로그에선 공식적 기사와 달리 그냥 망치로 짜증나는것 뽀개듯이 글을 쓰겠다는 의미로 몰로트로 별명을 정했다. 게다가  지금은 3대 동안 한국에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남기다가 얼마전 드디어 지네 나라 미국으로 떠나버린 Mrs. Underwood의 스피치 수업  demonstration 발표 시간에 그 당시 가장 자신 있었던 Molotv cocktail을 만드는 시범을 보이겠다고 하다가 거의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던 기억이 났기에^^

망치와 꽃병을 떠올리며 몰로트로 정한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Peyo로서의 정체성이 블로그에도 영향을 미칠 것에는 분명하기에 'Peyo와 molot사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을 것이고...

 

그렇다면 주소는 왜 프로핀테른인가? 할아버지가 적색농조, 협의회 활동하던 30년대에 조공재건 일환으로 지역조직 건설에 매진하라는 택이 코민테른, 프로핀테를에서 내려왔다지. 지금 생각하면 참 놀랍기 짝이 없다. 모스크바 택에 따라서 경북 칠곡에서 백여명이 움직였다니....

하여튼 프로핀테른의 정식 명칭은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赤色勞動組合- Red International of Labour Unions) ...요즘 시각에서 보면 참 촌스럽고 스탈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자 조직이긴 하다. 그러나 프로핀테른은 개량의 대명사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이 아니던가?

 

게다가 혁명 수행, 조직적 계투, 정치적 중립성의 거부라는 화끈한 강령을 내건것도 마음에 든다.

게다가 통일전선과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채택해서 활동하다가 결국 스탈린에 의해 장렬히 해산 된 멋진 조직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기구로서 반민족주의 반파시즘 노선을 지향했던 점 까지..

 

민노총도 욕먹는 요즘 프로핀테른 같은 국제적 상급 단체 이름을 들먹인다는게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도 하지 싶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많은 블로그들에선 자율적 연대의 기조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내가 민집제에 의거한 강력한 상급 조직의 시대에 대한 복고적 열망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민족주의를 내세웠음에도 식민지 국가 투쟁가들이 자신들의 인터내셔널로 받아들였을 만큼 국제주의에 충실했던 모습 그리고 개량에 대한 확고한 대립각(암스 인터내셔널의 경우에야 언제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을 세웠던 그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이 방의 제목을 프로핀테른으로 정했다. 

 

앗 그렇다고 해서 이 방에서 다른 블로그들을 지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는건 전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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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하기 너무 어렵다.

소싯적에 연필은 좀 잘 굴렸건만 창의적인 인간이 못되나 보다. 블로그 만드는데 선택하라는게 너무 많다. 너무 어렵다. 우리네 인생에선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게 그리 많지 않은데 이건 좀 다르군.

사실 이런게 정상이긴 하다. 예컨데 민주주의 한 번 제대로 할려면 얼마나 어렵나?

규정에 맞게 회의 해야 하고 정족수 맞춰야 되고 동의, 제청, 삼청 으이구 ...회의하다가 회의주의에 빠진적이 어디 한 두번이었나? 물론 사회주의자 답게 사회자에게 많은 권한들을 위임하고 꾸벅꾸벅 졸았기 일쑤지만..

 

 선택지가 주어지면 외려 두려움과 귀찮음을 느끼는 우리(뭐 나만 그렇다고?)는 참 불쌍한 인생 살고 있지 싶다. 근데 소개란에 보니 블로그는 웹에 쓰는 일기장이나 마찬가지라는데 자기 일기를 카테고라이징 하라는건 진짜 웃긴 일이 아닌가 싶다. 사회, 정치, 문화 뭐 이런식으로 카테고라이징 한 것 같긴 한데 제대로 기억도 안나고 꼴리는 데로 쓸 내 일기를 카테고라이징 하라는건 폭력이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다른 블로그들을 좀 둘러보니 시각 이미지들이 너무 현란하다. 너무 현란한 이미지들은 이해를 돕는게 아니라 오히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건지 모르게 하는 경우들이 많다. 물론 직관을 가능케 하는 이미지의 힘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는 이미지들을 가능하면 블로그에서 사용하지 않으련다. 그냥 담백하게 텍스트 위주로 갈란다. 물론 이러다가 나도 이런 저런 사진들 덕지 덕지 올리고 별의 별 색깔과 폰트를 사용할지도 모르지만--;; 그 때 가서 이 글 때문에 쪽팔려도 그건 감수할란다.

 

꼬마적에 담임선생한테 잘 보일려고 있지도 않은 일 지어내서 일기 쓰던 기억이 난다. 뭐 할머니 다리를 주물려 드렸다는둥 엄마 심부름을 토달지 않고 했다는둥 오늘은 책을 두권 밖에 못읽었는데 내일부턴 세권 읽겠다는둥...

 

이 공간도 그렇게 되선 안 되는...벌써 되고 있다. 

 

별명을 뭐로 할거냐는 질문에 머리 아파해 하다가 몰로트로 붙였다. 내가 처음 만들었던 아이디가 뭐였었지? 언젠지 기억도 잘 안나지만 아마 97년경 이었던 듯 싶다. che68 이 아마 최초 아이디 였지 싶다. 통신 아이디였었던 듯. 내 참 이런것도 유행탄다고 남한 땅에 늦게 상륙한 che의 열풍에 영향 받고 역시 유행하던 68혁명에서 68을 땃었지...돌이켜 보니 너무 너무 유치하다. 그 즈음에 또 쓰던게 amc94 ㅋㅋㅋ 역시 쪽 팔리는 아이디지만 그래도 이건 좀 정이 간다. 혼자 뿌듯해 하고 저 아이디에 걸맞는 삶을 살리라 하고 과도한 감상에 빠져 비장해하곤 했었지비. 아 참 몇 년전에 삼성에서 amc를 가지고 마케팅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며 깜짝 놀랐었는데...삼성이 제기한 amc는 anycall mobile club 이었다--;;

 

 그 밖에 praxis 도 썼었고...아 루이도 있군--;; 진보누리 같은데 루이 쓴다는게 정말 아까와서 쓰기 시작한 으허허도 있구나.  

 

그리고 얼마전 미디어 참세상 아이디를 정해야 했을때 역시 정말 고민했다.  여기서 부턴 tobe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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