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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28
    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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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08/28
    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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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08/28
    세상은 요지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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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08/28
    1990년 오늘(8.28) 후안 사마란치,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결정
    molot
  5. 2004/08/28
    1918년 오늘(8.27) 장준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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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2

작사는 정률성이 안한것으로 알고 이 노래가 팔로군, 인민해방군 식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바귀기도 했다던데 모택동 이름이 나오고 그러는게 좀 구려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 소련 국가 '천년의 흥망'은 더 심하다--;;

 

천년의 흥망( 구 소련 국가)

1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굳건한 연방을 위대한 루스가 영원히 결속했다.
민족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강력한 하나의 소비에트 연방 만세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2
뇌우 사이로 자유의 햇살이 우리에게 빛났고 위대한 레닌이
우리에게 길을 비추어주었다.레닌은 민족들을 올바른 대의에
눈뜨게 해주었고, 노동하고 헌신하도록 우리를 격려했다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3
불멸의 공산주의 사상의 승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본다.
영광스러운 조국의 붉은 깃발에 우리는 언제나 헌신적으로 충성한다.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하여튼 지난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선 인민해방군 행진곡이 우렁차게 퍼지고

중국 십억 인민들이 그에 감동 먹는걸 보고 나도 뻑갔다.(아 이 얄팍한 싸구려 감성이라니ㅠ.ㅠ)

작곡가가 정률성이라고 소개가 되던데 왜 아나운서는 정률성이 한국 사람이란 이야길 안 할까 하며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 고2였나? 이런걸 보면 어릴땐 나도 좀 민족주의자였군..아 난 어떻게 그때에 정률성을 알았나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노태우 정권때 사회주의에 관련된 내용이 좀 해금되고 한참 중국에다가 러브콜을 보냈어다. 이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학철. 이 분은 독립적으로 다뤄야할 만한 비중의 인물이다. 하여튼 이 분의 책이 그 때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소설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이었고 수필집 혹은 자서전 비슷한게 '최후의 분대장'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랴' 등이었다.

 

난 그때 최후의 분대장과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랴 를 읽었었는데 재미, 감동, 모르던 뒷이야기 충족 이 세가지 측면에서 만땅이었다. 그 책을 보면 정률성 정설송 이야기가 자세히 다뤄진다. 같이 활동하던 동지였기에...

 

결국 죽을 고생, 산 고생 다한 이 정-정 부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북조선의 수립으로 팔자가 좀 피기 시작한다. 정설송은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으로 평양주재 중국대사가 되었고(이후 멕시코, 네덜란드 대사등을 지낸다.) 정률성은 수 많은 동지들과 함께 북조선 건설에 참여해 인민군협주단장을 지낸다. 이 때 사건이 터졌으니 정률성이 인민군 합창단의 여 소프라노와 바람을 폈고 그것이 뽀록이 난것이다. 정설송은 양부양모에게 SOS를 쳤고 북경에선 바로 정률성을 소환--;;  그 기간중에도 정률성은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이 노래는 아직도 조선인민군의 공식군가이다.

 

50년 11월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으로 완전 소환되어 중국에서 활동을 한다. 이것이 정말 다행인것이 무시무시한 연안파 숙청때 무정을 비롯한 수많은 투사들이 다 김일성에게 목숨을 앗겨버린것이다. 무정이나 다른 사람들이 중공당에 바로 라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숙청을 가차 없었다. 초대 인민군 항공대장을 지낸 김학철의 매제 또한 이 때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후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정률성은 문혁당시 당연하게 4인방한테 갈굼을 많이 당하고 고생 좀 하다가 5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정률성이 조선의용대 행진곡을 만들고 김학철이 혁명연극 대본을 쓰면서 일제와 맞서 싸우던 태항산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조선인과 중국인이 함께 국제주의 원칙하에 동지로서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에 맞서 투쟁하던 그 역사는 얼마나 감동적인지....

 

아 오늘날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물론 그 때도 민생단 사건 같은 것으로 인해 조선인 출신 당원들이 깨강정이 나기도 했었다. 그 이전에 김산 의 예도 있고...하지만 광동 코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그리고 이른바 항미원조 투쟁까지 그 시절은 얼마나 좋았나? 주은래가 자기 조상들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조선족에게 사과한 글을 기억해보라...)

 

특히 짝퉁사회주의 아니 조중동등에 의해 자본주의를 하려면 저렇게 하라고 칭찬 받는 오늘날 중국...니들 정말 반성 좀 해라. 후진타오 특히 너 말야! 

 

첨언: `2004광주국제영화제' 특별작으로 정률성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을 향해서' 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볼 기회가 없을까? 2002년 9월 중국에서 송 지앙보 (Song jiang bo)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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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1

 아 일 안된다...진행하던 기사 마무리 지을려고 사무실 나왔건만 집중력도 떨어지고 평소같으면 머릿속에서 하드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오늘은 하드도 안 돌아간다. 푹신한 의자 있는 맥줏집에서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좀 톡쏘는거..국산 같으면 레드락) 노가리나 풀었으면 좋겠다.

 

집중력이 자꾸 떨어져서 밥까지 했건만 마찬가지다. (오늘 메뉴는 자장밥이었다. 감자 대2, 당근 대1, 양파 대2, 돼지고기 300g, 춘장 1봉, 레시피 생략)

 

다음까페에서 정은임 방송 다시듣기 찾아서 들으려는데 그것도 잘 안된다. 짜증 이빠이...--;;

 

손노가리나 풀어야겠다. 일전에 자일리톨님에게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도 있고 오늘 저녁은 중화요리를 만들기도 했고(정확히는 중화풍이지..) 역사왜곡이 어쩌고 하며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정설송-정률성 부부 이야기나 한 판 해볼란다.

 

정률성은 광주출신으로 조선혁명군정치학교, 중국공산당 산하 노신 예술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 팔로군, 해방이후 북한 인민군 합주단장등을 지낸 음악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그는 김학철, 무정, 석정 윤세주, 주덕해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입각해 반제국주의, 반일 투쟁과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싸운 사람이다.

 

정설송은 자녀가 없는 주은래-등영초 부부의 양녀로서 1941년 정률성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설송은 그 당시 항일군정학교 여학생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이 둘의 결혼에 어려움이 많았는데-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반당분자로 처형당한 이후 중국공산당 내의 많은 조선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무정의 적극적 도움으로 결국 결혼에 골인 했단다.)

 

하여튼 정률성과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반일 투쟁에 나섰었다. 결국 태항산 전투에서 석정 윤세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조선의용대는 당당한 한 축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었고 56개 소수민족중 몇개 민족만 자치주를 건설하는데 포함될 수있었다. 주덕해는 연변자치주 건설의 핵심적 인물이고 초대 자치주 주장을 지냈다.

 

자꾸 이야기가 딴데로 세는데 정률성은 38년 봄 힘든 대장정을 마치고 너무나 초라한 조직으로 연안에 자리잡은 공산당의 기세를 돋구기 위해 연안송(延安頌) 을 발표했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 3대 음악가이자 최고의 혁명음악가로 불리는 정률성의 시작이었다.

 

연안송은 공산당 점령지구에서 국민당 점령지구로 화북지방으로 나아가 동남아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나도 이건 못들어봈다--;;)

 

이후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로서 활동하면서 전투중에도 지속적으로 음악들을 발표하였으니 그 중의 대표작이 '조선의용대 행진곡' 인것이다. 이 노래는 라 마르세이예즈가 그랬던 것처럼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마침내 팔로군 행진곡으로 격상하기에 이른다.

 

중국본토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팔로군이 더 이상 국민당군 산하 팔로군이 아니라 인민해방군의 깃발 하에 싸우게 되던때 팔로군 행진곡은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격상된다.(아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땐 얼마나 기분이 묘하던지...괜히자랑스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통일을 선포한 1949년 이후 인민해방군 행진곡은 중국의 국가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 가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
조국의 대지에서
민족의 희망을 등에 걸머지고
우리들은 백전백승의 역량이다

두려움 없이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여
적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모택동의 기치를 높이 휘날린다.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너무 길다 . 짤라서 써야겠다. tobe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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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어제 주간동아 이나리 기자(이 양반은 신동아 에 있었는데 주간 동아로 옮긴 모양이다. 이 양반은  탁월한 인터뷰어다.황호택 따위는 잽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열정과 결핍이라는 단행본도 낸걸로 아는데 통화해보니 역시 우라까이에 급급한 다른기자들과는 다르더라. 나도 오래 이야기 할 맛이 났고...) 랑 통화하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루당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물타기 하는건 이미 알고 있었고 뭐 지들 그럴만도 하겠지 싶었지만...어제 정확한 워딩을 들으니 황당하고 열받고 아조 기분이 더러워졌다.

 

1. 열우 과거사 캐내기 조직을 가동중인데 그 팀의 첫작품이 신기남 건이다.(고로 나는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셈)

 

2. 내가 자료를 들고 한나라당 갔다가 신빙성 없다는 이유로 못팔고 그 담에는 다른 당 갔다가 그래도 못 팔아서 결국 인터넷으로 터뜨렸다.(이런 이야기 하는 넘들은 내 원글을 읽어봤을까?)

 

1,2를 슬슬 기자들한테 흘리면서 한 번 캐보라고 한단다. 뭐하나걸리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란거겠지...나쁜쉐이들..게다가 유시민이 했다는 소리를 듣곤 기가 턱 막히더라.

 

이나리 기자한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다가 난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우리 학교 총장 출신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하고 선배인 이광재, 서갑원 의원등으로 부터 당권파를 쳐내기 위한 오더를 받았다 그래서 기획한 건이다!!' 라고 말했다고 류시민 의원께 꼭 전해주세요."

 

막 웃더니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은 오픈해도 되겠냐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래 니들맘대로 갖고 놀아라. 하여튼 나중에 제자리에만 돌려놓길 바란다는 심정이다. 엄마가 그제 들려준 이야기로도 황당했건만...울엄마랑 정형근 여동생이랑 고등학교 동창이다. 친구들 모임에서 정형근 동생이 이번 건을 듣고 막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고 한다--;; 사위삼고 싶다고 했다나 머라나?  울 엄마도 얼척이 없어 하고...아 하여튼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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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오늘(8.28) 후안 사마란치,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결정

1990년 8월 28일 후안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이 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상금은 미화 20만불.

 

서울 평화상이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상이다. 88올림픽이 끝나고 흑자를 좀 많이 봤다고 해서 전두환의 명에 의해 제정된 상인데 그야말로 일해재단이랑 삐까먹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자. 제 1회 사마란치 IOC위원장, 제 2회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부 장관, 제 3회 국경없는 의사회, 제 4회 코피 아난 UN사무총장, 제 5회 오가카 사다코 UN고등 판무관, 제 6회 옥스팜.

 

사마란치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평화에 이바지 했다는 명목으로 조지 슐츠는 냉전체제를 타파했다는 명목으로(우엑. 이 자는 로널드 레이건의 오른팔로서 군비경쟁을 통해 소비에트를 어려움에 빠뜨린 바로 그 자가 아닌가?)수상했다. 그러나 사마란치가 88올림픽 개최권 획득에 힘 실어줬다는 이유로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마디로 정주영의 불도저식 로비에 넘어가준 댓가로 상도 받는다는것인데....진정한 꿩먹고 알먹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수상자만 보면 3회 부터는 뭐 좀 그럴듯하긴 하다. (이 상은 이년에 한번씩 시상된다.) 그러나 수상자들은 이 상의 권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금의 액수에 놀라고 있는 형편이고 현재 서울평화상의 주체인 서울평화재단의 이사장은 이철승(해방정국 우익학생운동의 거두이자 사쿠라 야당정치인 출신의 반핵반김 전선의 선봉장)이 세번째로 연임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안 사마란치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후안 사마란치는 카탈루냐 지방의 은행가 집안 출신이다.(그렇다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루냐 찬가'의 바로 그 카탈루냐이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 내에서 바스크 와 더불어 독립적인 지역으로서 스페인 내전 당시에 공화파의 중심지역이기도 했다. 카탈루냐 찬가를 읽어보길...프랑코 왕당파가 아닌 스탈린 주의자들에 의해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공격받는 비참한 상황이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하여튼...후안 사마란치는 1920년 출생해 내란 이후 독재자 프랑코의 졸개로서 한 세상 잘 보낸 인물이다. 프랑코 정권의 외교관으로 출발했다가(몽골, 소련 대사 역임) 국제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다놓은 이후 승승장구 IOC위원장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한마디로 박정희 정권 외교관, 경호실 간부 출신으로 국제태권도 연맹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빵에 들어가 지금은 콩밥을 잡숫고 있는 운용은 사마란치의 작은 버젼이라고 할 수있다.)

 

사마란치가 올림픽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던가? 1980년 IOC위원장에 오른 직후 올림픽은 냉전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88올림픽이 냉전 올림픽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 뿐 아니라 강력한 상업화 정책을 통해 그나마 체면 차리던 근대올림픽을 다국적 기업의 선전장으로 탈바꿈 시켰다. 막판에 자기 고향에 올림픽 개최 한 번 몰아준다음 명예위원장으로 자리를 바꿔치우고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첨언: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여전히 사마란치는 초특급 vip대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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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오늘(8.27) 장준하 출생

 먼저 '오늘은' 을 기다리는 극소수의 독자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드디어 빵꾸를 냈다.--;;

변명을 하자면 이사와 결혼식(내 결혼식이 아니다!)을 비롯한 개인적 용무들이 많았다는건데...많은 이해 있기를 바란다. 물론 언젠가 또 빵꾸를 내겠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씀 다시 드린다.

 

 1918년 8월 27일 장준하(1918-1975)가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꼿꼿한 대쪽의 그것이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 보통학교를 거쳐(리영희도 삭주 대관 보통 학교출신이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신학교에서 학병으로 징집된후 이른바 '6천리 장정' (장준하의 '돌베게'와 김준엽의 '장정'을  참고하라. 나 개인적으론 돌베게보다 장정을 흥미롭게 읽어싸.)을 통해 광복군에 몸을 담았다.

 

그의 광복군 생활은 일년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준엽과 함께 OSS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OSS- CIA의 전신으로 이차대전 당시 미군 정보기관) OSS교육은 국내진공을 위한 것이었으나 일군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을 국내진공하고자 하는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김구가 일본의 빠른 항복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일 일군의 항복이 좀 늦어졌고 광복군이 진공을 했다면 해방정국의 방향추는 아마도 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장준하는 해방정국에서 장준하는 광적이리만큼 반공적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우익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을 역임했는데 조선민족청년단은 육이오 와중의 부산정치파동(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해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에 연루되기도 한 조직이다.

 

또한 장준하는 술 먹는 자리에서 잔을 뒤집어 놓고 성경책을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족청 교무처장으로 지낼 당시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 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극우 사상을 가졌었다고도 전해진다.

 

장준하의 이런 극우성은 어디서 비롯된것일까? 물론 리영희도 통역장교 출신, 문익환도 마찬기지이고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의 배후 조종자 였을정도로 당시 서북출신 기독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특히 우익적 면모를 강하게 보였었다.

 

한가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자면 장준하가 몸담고 있던 광복군이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이나 다니고 마지막에 가까스로 미군에 의해 훈련을 받게 된데 반해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는 항일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데 대한 자격지심은 아닐런지? 

 

장준하의 반박정희 투쟁은 너무나 잘알려졌기에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2공화국 당시인 1961년 1월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은 516 쿠테타로 그 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국토건설본부의 사업안은 이름만 바뀐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도용되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실족사로 밝혀졌으나 의심의 여지가 너무나 많았고 아직도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어 있고 국정원이 제시판 과거사 과제에도 포함되어있다.

 

첨언: 청년 장준하라는 뮤지컬이 한참 공연중이다. 이부영은 장준하 기념사업회 회장이란 명목으로 자기 선전에 장준하를 잘 써먹고 있고 노무현도 직접 관람했다. 장준하 정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발언도 남기면서...그리고 8월 28일 자이툰 부대 본진이 성남공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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