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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4/08

1961년 오늘(8.30) 한국노총 결성

내일 아니지 오늘은 각종 회의와 기사로 인해 바쁠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에 이봉주를 응원하면서 미리 써놓고 자고자 한다.

 

1961년 8월 30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16개의 산별노조와 1개의 연합노조를 거느리고 출범했다.

 

'우리 노동자는 생산의 직접 담당자이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또한 우리는 사회정의 실현의 선구자이고 평화의 강력한 옹호자이며 전진적 문화 창조의 주역이다. 우리 노동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같은 역사적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장구한 시일에 걸쳐 조직적 통일을 바탕으로 자유·민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줄기차게 매진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힘찬 전진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윗 글은 어디에서 발췌했게? 예전에 하종강의 홈피를 어슬렁거리다가 읽고 감동먹은 글인데 놀랍게도 한국노총 선언의 맨 앞부분이다--;;

 

일제에 의한 자본주의 이식이후 한국 노동운동은 피와 땀의 역사를 써왔다. 일제하에서 수많은 적색노조가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원산 제네스트에는 일본 노동자들도 적극 협력하여 아름다운 국제주의를 구현했었다. 해방 이후 전평의 투쟁에 맞서 이승만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을 지시했다. 이후 전평이 불법화 되어 해산당하고 대한노동조합 총연합회가 결성되니 이것이 바로 한국노총의 직접적 전신인 것이다. 

 

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용산 철도파업, 46 총파업을 깨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니 그 선봉에 선 분이 바로 장군이 아들 긴또깡 (김두한)이다. 아마 '야인시대' 에도 관련된 꼭지가 방영된 것으로 아는데..

 

하여튼 대한노동조합 총연합회는 반공전선, 노동운동 파괴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며 자유당의 외곽부대로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 직후 해산 되었다가 약 세달 후인 8월 30일 박정희의 재가를 얻어 한국노총을 드디어 건설했다.

 

한국노총은 그로부터 약 삼십년간 사이비, 어용의 한길로 매진해왔다. 물론 한국노총 원풍모방지부, YH노조, 동일방직 노조등 몇몇 민주 노조들이 있었으나 그 노조들은 만날 한국노총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였다. 한국노총은 반공궐기대회의 주요 멤버였고 재수 좋으면 위원장들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픽업되기도 했다. 또한 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호헌선언을 한 이후 한국노총은 예총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호헌지지선언을 하며 '직선제는 안돼'를 외쳤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세워진 이후 한국노총은 설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91년 ILO가입을 필두로 하여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에선 민노총이랑 연대하기도 하는등 이젠 한노총 위원장이 삭발을 한다거나 한노총 사업장에서 빨간 머리띠가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 과거의 행적들을 근거로 오늘의 한노총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첨언: 04년 5월 취임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한달 만에 한국노총 중앙조직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급별 호봉 대신 직무 경력과 능력에 따른 다면평가를 실시해 연봉제를 도입한다. ▶성과급을 도입, 상여금 600% 중 200%를 본부별 평가를 통해 차등 지급한다. ▶장기적으로 평가를 통한 개인별 차등지급제를 추진한다'.그 와중에 76명의 한국노총 사무국 직원중 30명이 넘는 인원이 노총을 떠났다. 또한 노총은 또 주5일 근무제 도입에 맞춰 월차휴가와 하계휴가는 폐지하고 연차휴가는 축소하기로 했다. 아햏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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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오늘(8.29) 영국과 중국 난징조약 체결

아 귀찮아 죽겠다ㅠ.ㅠ 하여튼 가는데 까지 가보자.--;;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중국이 아편 전쟁 종결을 위한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은 극동에서 맺어진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 중국, 일본에서 이후 맺어진 수많은 불평등 조약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 해군 제독 페리에 의해 맺어진 자신들의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써먹기도 했다.(강화도 조약) 

 

난징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 선상에서(콘월리스라..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나? 헐리우드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귀족적 후까시를 자랑하다가 맨날 멜 깁슨 에게 뒷통수를 맞던 영국 장군의 이름이 바로 콘월리스다.)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과 영국 전구대사 포틴저가 이 조약을 조인했다. 비준서는 1843년 홍콩에서 교환됐다. 주요 내용만 짚어보자면 1) 홍콩의 영국 할양.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5개항의 개항. 3)개항장에 영사 설치 4) 전베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으로 600만불 영국 지불 5)공행과 같은 독점상인 폐지(공행은 우리나라의 시전상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6) 관세의 제한 7) 청,영 두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이 강제적이고도 불평등한 조약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아편전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산업혁명 이후 상품시장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영국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는 영국 내의 대표적 인기 사치품이었기에 무역역조 현상은 심각했다. 중상주의 정책이 일반적이던 당시로서는 용인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은의 대거 유입으로 청나라의 인플레이션 현상도 꽤 심각했지만...

 

영국이 인식하기에 이 무역역조의 근본원인은 광동 무역체제였다. 중국의 유일한 대외무역 창구는 광주였고 청의 허가를 얻은 공행이라는 독점적 상인길드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했다. 몇번 사신을 파견해 광동 무역체제를 혁파하고자 애썼으나 답답할 것이 없는 청나라가 그것을 들어줄리는 만무했다. 이 때 영국이 비장의 무기로 삼은 상품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이 아편이었다. 사실 영국에서 아편은 고급 상품이기도 햇다. 쿨리지를 비롯한 19세기 영국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아편에 취해 쓴 작품들이 많고 또한 아편을 찬양하는 작품들도 다수 있을 정도였으니....

 

영국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은 아편 중독자로 넘쳐났고 1830년대에 들어선 무역역조 현상이 역전되었으니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드디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내의 아편중독자 급증, 관리들의 아편중독등으로 국가가 흔들흔들할 지경에 이르자 청나라 도광제는 임칙서라는 칼을 뺴들었다.

 

흠차대신(전권대신이라는 의미이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를 떠올리라. 위소보가 강희의 흠차대신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임칙서는 청렴, 과감을 무기로 유명무실했던 아편 금지령을 확고히 하고 영국상인의 아편을 몰수 하였는데 영국은 이에 대해 황당하게도 전쟁으로 대항했다. 지리멸렬한 전투 끝에 결국 그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난징조약으로 연결된 것이다.

 

사실 영국 국내에서도 이 비도덕적인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컸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편 재배가 식민지 인도에서 큰 지위를 차지 하고 있었고 아편을 통해 중국으로 얻어진 은이 영국 중심 세계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상 군사상 근거지 획득이란 요구들을 일거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편전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전쟁이 생각나지 않는지?

 

 

첨언: 1997년 7월 1일을 기해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 때 영국의 마지막 총독 패튼은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유니언 잭을 내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슨 의미였는진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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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2

작사는 정률성이 안한것으로 알고 이 노래가 팔로군, 인민해방군 식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바귀기도 했다던데 모택동 이름이 나오고 그러는게 좀 구려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 소련 국가 '천년의 흥망'은 더 심하다--;;

 

천년의 흥망( 구 소련 국가)

1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굳건한 연방을 위대한 루스가 영원히 결속했다.
민족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강력한 하나의 소비에트 연방 만세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2
뇌우 사이로 자유의 햇살이 우리에게 빛났고 위대한 레닌이
우리에게 길을 비추어주었다.레닌은 민족들을 올바른 대의에
눈뜨게 해주었고, 노동하고 헌신하도록 우리를 격려했다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3
불멸의 공산주의 사상의 승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본다.
영광스러운 조국의 붉은 깃발에 우리는 언제나 헌신적으로 충성한다.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하여튼 지난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선 인민해방군 행진곡이 우렁차게 퍼지고

중국 십억 인민들이 그에 감동 먹는걸 보고 나도 뻑갔다.(아 이 얄팍한 싸구려 감성이라니ㅠ.ㅠ)

작곡가가 정률성이라고 소개가 되던데 왜 아나운서는 정률성이 한국 사람이란 이야길 안 할까 하며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 고2였나? 이런걸 보면 어릴땐 나도 좀 민족주의자였군..아 난 어떻게 그때에 정률성을 알았나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노태우 정권때 사회주의에 관련된 내용이 좀 해금되고 한참 중국에다가 러브콜을 보냈어다. 이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학철. 이 분은 독립적으로 다뤄야할 만한 비중의 인물이다. 하여튼 이 분의 책이 그 때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소설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이었고 수필집 혹은 자서전 비슷한게 '최후의 분대장'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랴' 등이었다.

 

난 그때 최후의 분대장과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랴 를 읽었었는데 재미, 감동, 모르던 뒷이야기 충족 이 세가지 측면에서 만땅이었다. 그 책을 보면 정률성 정설송 이야기가 자세히 다뤄진다. 같이 활동하던 동지였기에...

 

결국 죽을 고생, 산 고생 다한 이 정-정 부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북조선의 수립으로 팔자가 좀 피기 시작한다. 정설송은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으로 평양주재 중국대사가 되었고(이후 멕시코, 네덜란드 대사등을 지낸다.) 정률성은 수 많은 동지들과 함께 북조선 건설에 참여해 인민군협주단장을 지낸다. 이 때 사건이 터졌으니 정률성이 인민군 합창단의 여 소프라노와 바람을 폈고 그것이 뽀록이 난것이다. 정설송은 양부양모에게 SOS를 쳤고 북경에선 바로 정률성을 소환--;;  그 기간중에도 정률성은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이 노래는 아직도 조선인민군의 공식군가이다.

 

50년 11월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으로 완전 소환되어 중국에서 활동을 한다. 이것이 정말 다행인것이 무시무시한 연안파 숙청때 무정을 비롯한 수많은 투사들이 다 김일성에게 목숨을 앗겨버린것이다. 무정이나 다른 사람들이 중공당에 바로 라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숙청을 가차 없었다. 초대 인민군 항공대장을 지낸 김학철의 매제 또한 이 때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후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정률성은 문혁당시 당연하게 4인방한테 갈굼을 많이 당하고 고생 좀 하다가 5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정률성이 조선의용대 행진곡을 만들고 김학철이 혁명연극 대본을 쓰면서 일제와 맞서 싸우던 태항산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조선인과 중국인이 함께 국제주의 원칙하에 동지로서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에 맞서 투쟁하던 그 역사는 얼마나 감동적인지....

 

아 오늘날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물론 그 때도 민생단 사건 같은 것으로 인해 조선인 출신 당원들이 깨강정이 나기도 했었다. 그 이전에 김산 의 예도 있고...하지만 광동 코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그리고 이른바 항미원조 투쟁까지 그 시절은 얼마나 좋았나? 주은래가 자기 조상들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조선족에게 사과한 글을 기억해보라...)

 

특히 짝퉁사회주의 아니 조중동등에 의해 자본주의를 하려면 저렇게 하라고 칭찬 받는 오늘날 중국...니들 정말 반성 좀 해라. 후진타오 특히 너 말야! 

 

첨언: `2004광주국제영화제' 특별작으로 정률성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을 향해서' 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볼 기회가 없을까? 2002년 9월 중국에서 송 지앙보 (Song jiang bo)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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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1

 아 일 안된다...진행하던 기사 마무리 지을려고 사무실 나왔건만 집중력도 떨어지고 평소같으면 머릿속에서 하드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오늘은 하드도 안 돌아간다. 푹신한 의자 있는 맥줏집에서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좀 톡쏘는거..국산 같으면 레드락) 노가리나 풀었으면 좋겠다.

 

집중력이 자꾸 떨어져서 밥까지 했건만 마찬가지다. (오늘 메뉴는 자장밥이었다. 감자 대2, 당근 대1, 양파 대2, 돼지고기 300g, 춘장 1봉, 레시피 생략)

 

다음까페에서 정은임 방송 다시듣기 찾아서 들으려는데 그것도 잘 안된다. 짜증 이빠이...--;;

 

손노가리나 풀어야겠다. 일전에 자일리톨님에게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도 있고 오늘 저녁은 중화요리를 만들기도 했고(정확히는 중화풍이지..) 역사왜곡이 어쩌고 하며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정설송-정률성 부부 이야기나 한 판 해볼란다.

 

정률성은 광주출신으로 조선혁명군정치학교, 중국공산당 산하 노신 예술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 팔로군, 해방이후 북한 인민군 합주단장등을 지낸 음악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그는 김학철, 무정, 석정 윤세주, 주덕해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입각해 반제국주의, 반일 투쟁과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싸운 사람이다.

 

정설송은 자녀가 없는 주은래-등영초 부부의 양녀로서 1941년 정률성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설송은 그 당시 항일군정학교 여학생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이 둘의 결혼에 어려움이 많았는데-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반당분자로 처형당한 이후 중국공산당 내의 많은 조선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무정의 적극적 도움으로 결국 결혼에 골인 했단다.)

 

하여튼 정률성과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반일 투쟁에 나섰었다. 결국 태항산 전투에서 석정 윤세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조선의용대는 당당한 한 축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었고 56개 소수민족중 몇개 민족만 자치주를 건설하는데 포함될 수있었다. 주덕해는 연변자치주 건설의 핵심적 인물이고 초대 자치주 주장을 지냈다.

 

자꾸 이야기가 딴데로 세는데 정률성은 38년 봄 힘든 대장정을 마치고 너무나 초라한 조직으로 연안에 자리잡은 공산당의 기세를 돋구기 위해 연안송(延安頌) 을 발표했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 3대 음악가이자 최고의 혁명음악가로 불리는 정률성의 시작이었다.

 

연안송은 공산당 점령지구에서 국민당 점령지구로 화북지방으로 나아가 동남아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나도 이건 못들어봈다--;;)

 

이후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로서 활동하면서 전투중에도 지속적으로 음악들을 발표하였으니 그 중의 대표작이 '조선의용대 행진곡' 인것이다. 이 노래는 라 마르세이예즈가 그랬던 것처럼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마침내 팔로군 행진곡으로 격상하기에 이른다.

 

중국본토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팔로군이 더 이상 국민당군 산하 팔로군이 아니라 인민해방군의 깃발 하에 싸우게 되던때 팔로군 행진곡은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격상된다.(아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땐 얼마나 기분이 묘하던지...괜히자랑스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통일을 선포한 1949년 이후 인민해방군 행진곡은 중국의 국가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 가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
조국의 대지에서
민족의 희망을 등에 걸머지고
우리들은 백전백승의 역량이다

두려움 없이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여
적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모택동의 기치를 높이 휘날린다.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너무 길다 . 짤라서 써야겠다. tobe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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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어제 주간동아 이나리 기자(이 양반은 신동아 에 있었는데 주간 동아로 옮긴 모양이다. 이 양반은  탁월한 인터뷰어다.황호택 따위는 잽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열정과 결핍이라는 단행본도 낸걸로 아는데 통화해보니 역시 우라까이에 급급한 다른기자들과는 다르더라. 나도 오래 이야기 할 맛이 났고...) 랑 통화하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루당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물타기 하는건 이미 알고 있었고 뭐 지들 그럴만도 하겠지 싶었지만...어제 정확한 워딩을 들으니 황당하고 열받고 아조 기분이 더러워졌다.

 

1. 열우 과거사 캐내기 조직을 가동중인데 그 팀의 첫작품이 신기남 건이다.(고로 나는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셈)

 

2. 내가 자료를 들고 한나라당 갔다가 신빙성 없다는 이유로 못팔고 그 담에는 다른 당 갔다가 그래도 못 팔아서 결국 인터넷으로 터뜨렸다.(이런 이야기 하는 넘들은 내 원글을 읽어봤을까?)

 

1,2를 슬슬 기자들한테 흘리면서 한 번 캐보라고 한단다. 뭐하나걸리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란거겠지...나쁜쉐이들..게다가 유시민이 했다는 소리를 듣곤 기가 턱 막히더라.

 

이나리 기자한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다가 난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우리 학교 총장 출신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하고 선배인 이광재, 서갑원 의원등으로 부터 당권파를 쳐내기 위한 오더를 받았다 그래서 기획한 건이다!!' 라고 말했다고 류시민 의원께 꼭 전해주세요."

 

막 웃더니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은 오픈해도 되겠냐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래 니들맘대로 갖고 놀아라. 하여튼 나중에 제자리에만 돌려놓길 바란다는 심정이다. 엄마가 그제 들려준 이야기로도 황당했건만...울엄마랑 정형근 여동생이랑 고등학교 동창이다. 친구들 모임에서 정형근 동생이 이번 건을 듣고 막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고 한다--;; 사위삼고 싶다고 했다나 머라나?  울 엄마도 얼척이 없어 하고...아 하여튼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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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오늘(8.28) 후안 사마란치,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결정

1990년 8월 28일 후안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이 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상금은 미화 20만불.

 

서울 평화상이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상이다. 88올림픽이 끝나고 흑자를 좀 많이 봤다고 해서 전두환의 명에 의해 제정된 상인데 그야말로 일해재단이랑 삐까먹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자. 제 1회 사마란치 IOC위원장, 제 2회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부 장관, 제 3회 국경없는 의사회, 제 4회 코피 아난 UN사무총장, 제 5회 오가카 사다코 UN고등 판무관, 제 6회 옥스팜.

 

사마란치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평화에 이바지 했다는 명목으로 조지 슐츠는 냉전체제를 타파했다는 명목으로(우엑. 이 자는 로널드 레이건의 오른팔로서 군비경쟁을 통해 소비에트를 어려움에 빠뜨린 바로 그 자가 아닌가?)수상했다. 그러나 사마란치가 88올림픽 개최권 획득에 힘 실어줬다는 이유로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마디로 정주영의 불도저식 로비에 넘어가준 댓가로 상도 받는다는것인데....진정한 꿩먹고 알먹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수상자만 보면 3회 부터는 뭐 좀 그럴듯하긴 하다. (이 상은 이년에 한번씩 시상된다.) 그러나 수상자들은 이 상의 권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금의 액수에 놀라고 있는 형편이고 현재 서울평화상의 주체인 서울평화재단의 이사장은 이철승(해방정국 우익학생운동의 거두이자 사쿠라 야당정치인 출신의 반핵반김 전선의 선봉장)이 세번째로 연임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안 사마란치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후안 사마란치는 카탈루냐 지방의 은행가 집안 출신이다.(그렇다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루냐 찬가'의 바로 그 카탈루냐이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 내에서 바스크 와 더불어 독립적인 지역으로서 스페인 내전 당시에 공화파의 중심지역이기도 했다. 카탈루냐 찬가를 읽어보길...프랑코 왕당파가 아닌 스탈린 주의자들에 의해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공격받는 비참한 상황이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하여튼...후안 사마란치는 1920년 출생해 내란 이후 독재자 프랑코의 졸개로서 한 세상 잘 보낸 인물이다. 프랑코 정권의 외교관으로 출발했다가(몽골, 소련 대사 역임) 국제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다놓은 이후 승승장구 IOC위원장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한마디로 박정희 정권 외교관, 경호실 간부 출신으로 국제태권도 연맹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빵에 들어가 지금은 콩밥을 잡숫고 있는 운용은 사마란치의 작은 버젼이라고 할 수있다.)

 

사마란치가 올림픽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던가? 1980년 IOC위원장에 오른 직후 올림픽은 냉전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88올림픽이 냉전 올림픽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 뿐 아니라 강력한 상업화 정책을 통해 그나마 체면 차리던 근대올림픽을 다국적 기업의 선전장으로 탈바꿈 시켰다. 막판에 자기 고향에 올림픽 개최 한 번 몰아준다음 명예위원장으로 자리를 바꿔치우고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첨언: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여전히 사마란치는 초특급 vip대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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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오늘(8.27) 장준하 출생

 먼저 '오늘은' 을 기다리는 극소수의 독자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드디어 빵꾸를 냈다.--;;

변명을 하자면 이사와 결혼식(내 결혼식이 아니다!)을 비롯한 개인적 용무들이 많았다는건데...많은 이해 있기를 바란다. 물론 언젠가 또 빵꾸를 내겠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씀 다시 드린다.

 

 1918년 8월 27일 장준하(1918-1975)가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꼿꼿한 대쪽의 그것이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 보통학교를 거쳐(리영희도 삭주 대관 보통 학교출신이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신학교에서 학병으로 징집된후 이른바 '6천리 장정' (장준하의 '돌베게'와 김준엽의 '장정'을  참고하라. 나 개인적으론 돌베게보다 장정을 흥미롭게 읽어싸.)을 통해 광복군에 몸을 담았다.

 

그의 광복군 생활은 일년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준엽과 함께 OSS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OSS- CIA의 전신으로 이차대전 당시 미군 정보기관) OSS교육은 국내진공을 위한 것이었으나 일군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을 국내진공하고자 하는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김구가 일본의 빠른 항복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일 일군의 항복이 좀 늦어졌고 광복군이 진공을 했다면 해방정국의 방향추는 아마도 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장준하는 해방정국에서 장준하는 광적이리만큼 반공적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우익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을 역임했는데 조선민족청년단은 육이오 와중의 부산정치파동(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해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에 연루되기도 한 조직이다.

 

또한 장준하는 술 먹는 자리에서 잔을 뒤집어 놓고 성경책을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족청 교무처장으로 지낼 당시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 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극우 사상을 가졌었다고도 전해진다.

 

장준하의 이런 극우성은 어디서 비롯된것일까? 물론 리영희도 통역장교 출신, 문익환도 마찬기지이고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의 배후 조종자 였을정도로 당시 서북출신 기독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특히 우익적 면모를 강하게 보였었다.

 

한가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자면 장준하가 몸담고 있던 광복군이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이나 다니고 마지막에 가까스로 미군에 의해 훈련을 받게 된데 반해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는 항일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데 대한 자격지심은 아닐런지? 

 

장준하의 반박정희 투쟁은 너무나 잘알려졌기에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2공화국 당시인 1961년 1월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은 516 쿠테타로 그 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국토건설본부의 사업안은 이름만 바뀐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도용되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실족사로 밝혀졌으나 의심의 여지가 너무나 많았고 아직도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어 있고 국정원이 제시판 과거사 과제에도 포함되어있다.

 

첨언: 청년 장준하라는 뮤지컬이 한참 공연중이다. 이부영은 장준하 기념사업회 회장이란 명목으로 자기 선전에 장준하를 잘 써먹고 있고 노무현도 직접 관람했다. 장준하 정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발언도 남기면서...그리고 8월 28일 자이툰 부대 본진이 성남공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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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판 올림픽 뒷이야기

올림픽 건 기사쓰다. 야마는 잘 잡았다고 생각했건만 다 써놓고 보니 기대에 못미친다.--;;

 

방송사 사람들은 뭐 쪼잔하게 그런걸 따지냐는 눈치였고 방송위원회는 어느정도 수긍하더라.

정윤수와의 통화는 재밌었다. 내가 제기한 문제에 동의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좔좔좔 이야기를 풀어놓더라. 새로운 해설자들의 발굴이 필요하다는걸 계속 강조하던데...그건 아마 자기가 축구해설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듯^^

 

목소리도 꽤 좋고 감각도 있으니까 해설하면 잘 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만 민족주의, 엄청난 오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축구소비 문화에 정윤수가 어울릴까 생각해보면 고개가 꺄우뚱해지기도 한다.

 

운동판에 있던 사람중에 신현준은 대중음악을 꿰어 차서 한자릴 차지 했고 정윤수는 월드컵을 기점으로 축구에선 독특하고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예전엔 재수없다라는 생각도 들었는데(김규항의 비판글로 인한 영향도 있었던듯)  요즘에는 머 그냥 재밌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다.

 

사실 여주 갔던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아야 되는데 그거 할려면 사진도 올리고 뭐 할일이 많아서 그냥 이거 부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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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오늘(8.26) 미국, 여성 참정권 인정

 1920년 오늘 미국은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1792년 <여성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한 이래로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19세기말과 20세기초  영국의 활동가 에밀리 굴덴 팽크허스트와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는 주목할 만 하다. 제국주의 영국의 팽창과 더불어 남성들의 선거권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으나 여성 정치권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경우 1913년 한해동안만  12차례 단식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시위의 양상은 점점 격렬해져갔다. 1913년 WSPU의 일원인 에밀리 데이비슨이란 여인이  경마장에 난입해 시위를 벌이다가 말발굽에 밟혀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투쟁은 더욱 강화디었고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타기에 이른다.

 

결국 일차대전의 발발과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급증으로 영국에선 1918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뒤이은 1920년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 획득은 수잔 B 엔터니에 빚진바가 크다. 1820년 태어난 그녀는 재산권법 제정으로 시작하여 여성의 권위 향상을 위해 지칠줄 모르고 뛰었으나 결국 참정권 획득을 보지 못하고 눈감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8년 <여권통문>이라는 글을 통해 최초로 여성 참정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후 1919년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여귀천및 빈부의 계급이 무관하게 일체평등' 이라고 명시했다.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 부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으나 한국의 여권이 그만큼 인정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한국의 여성참정권이 정부수립과 동시에 보장된 것은 여성의 목소리와 투쟁에 의해 획득 되었다기 보단(근우회등이 일제강점기 부터 여성운동을 펼치긴 하였으나 김활란등 일부 상층부가 열매를 다 따먹었다는 평가가 있다) 좋은거 다 갖다 붙인 헌법  덕인 부분이 크다고 말할 수있지 않을까? 스스로의 투쟁에 의해 얻어지지 않은 권리이기에 소중함이 덜 했었을 수도 있는듯 하다.(사실 이런 말 하기 상당히 조심스럽다)

 

참정권의 획득은 첫발에 불과하다! 평등세상의 대장정에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 있기를..

 

첨언: 2004년 5월 16일 쿠웨이트 내각은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마침내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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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노조, 진로, 이라크 축구 뒷이야기

여기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난 물론 molot지만 이 디렉토리는 peyo가 취재 과정에 겪은 일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사화 되지 못한 일들, 취재 과정의 소회들을 molot가 편하게 써내려가는 그런 공간이 될거란게지....

 

취재 하는 동안 지하철건은 솔직히 재미없었고 힘도 별로 안났고--;; 기사 쓰기 전에는 지하철 파업이 고모양 고꼴로 끝난게 열받기도 하고 지난세월 내가 거기 사수대 뛴게 아깝기도 해서 까대볼까 싶었는데 막상 어깨에 힘 쭉 빠진 조합원들 만나니까...내 힘도 빠지더라. 위원장 직대 만나기 전엔 으휴...싶었는데 이야기들 듣고 삼각취재 해보니까 저 사람도 어쩔 수 없구나..싶더라. 그냥 서로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배일도의 추억을 꺼내어 같이 씹어주며 동지애를 나눴다 ㅋㅋㅋ

기사 올릴때 남한 최대의 지하조직이란 미다시(제목)을 뽑은게 그들의 맘을 아프게 한건 아닌지 싶어 여전히 마음 한 켠이 아리다.

 

진로건은 거의 책상에서 쓴 기사지만 반응이 좋아서 (감사 전화를 받고 남들이 내 기사 받아 쓰는걸 확인했을?? 혼자서 뿌듯해했었지^^)기분 좋았다. 취재 중에모건 스탠리측 전화번호를 발굴해내 그 넘한테 전화 했을때 황당해 하던 꼴을 보니 어찌나 신나던지 ㅋㅋㅋ

진로는 한노총 사업장이다. 이 회사는 사실 노사협력 대상--;; 같은 웃긴 상을 받은 경험도 있고 비정규직도 거의 안 쓰는데다가 거의 근속년수가 높은 직원들이 많고 워낙 일들을 잘하는지라 회사랑 사이도 좋은 사업장이다. 골드만삭스 10쉐들이 노략질 한 이후에야 좀 빡셔지긴 했지만 솔직히 법정관리 업체 치곤 그나마 대우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하여튼 뭐 그렇다. 이번 파업들어가고도 사측은 배짱 튕기는데 자기들이 먼저 쫄고 있으니...결국은 조정안 비슷하게 타결되고 말았는데(첨엔 중노위 조정안을 사측이 거부하는 웃긴 일이 있었다.) 좀 안타깝다. 우리는 이런 사업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재벌 좋아하는 대안연대 이찬근이랑 민노총 허영구가 투기자본 감시센터인가 먼가를 만들었다는데 걍 갑갑할 따름이다.

 

이라크 축구팀건은 프레시안에서 국제면은 Znet(www.zmag.org 이 사이트를 자주 활용하시길 권한다. 거의 미국판 미디어 참세상--;; 이라 할 수 있다. 프레시안이라던가 한겨레 혹은 기타 진보적 국제뉴스들은 거의 여기 올라온걸 우라까이-재탕, 남의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약간 보충해서 쓰는거- 한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촘스키 등등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 영어가 두려운가? 나도 영어 못한다! 논적인 글은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인터뷰 따서 올린 거 부터 보면 접근이 쉬울 수 있다.)

스포츠 면은 Si(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www.cnnsi.com 뭐 한마디로 세계최대의 스포츠 매체이지...요즘 이라크 축구팀의 부시공격발언들은 다 여기를 통해서 알려진거다)를 우라까이 한다는걸 눈치 챘기 ??문에 나도 Zmag이랑 Si 그리고 이라크 인들의 포털 격인 www.aliraqui.org를 서핑하면서 정보를 모아서 썼다. (아 이런 영업비밀을 누설하면 안 되는데--;;)

 

알이라키 닷 오알쥐 들어가서 이라크 사람들 반응을 보니 참 짠하더라 . 베를린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땃을때 조선 민중들 마음이 그랬을까? 기사에도 썼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파라과이 꺽고 이라크랑 붙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니....정말 진게 백번다행이다. 올림픽 대표 애들 군대가야 되긴 하지만..어쩌랴. 노무현을 욕하거라.

 

오늘 안타깝게도 이라크는 파라과이 한테 3:1 로 져서 결승진출이 좌절됐다. 그러나 이라크 축구팀은 너무나 큰일을 해냈다. 이라크 인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그들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뿐인가? 조지 부시의 웃긴 행위에 대해 날카로운 일침을 날렸다. 누가 이라크 팀의 승리와 이라크 인들의 환호를 비웃으랴! 저항으로서의 민족주의는 역시 유효하다.

 

에구..나는 왜 이렇게 글만 쓰면 길어지나 모르겠다. 김훈 글을 그렇게 많이 읽고 좋아라 하건만..

이 글은 고마 여기서 시마이 하자.

 

첨언:뒷담화(談話)라는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물론 뒤에서 하는 이야기란 의미의 뒷담화도 의미는 통한다. 그러나 뒷다마가 맞는 표현이다. '뒷다마 깐다.' 할때의 뒷다마는 뒷통수를 말하는 것이다. 원래 다마는 구슬을 일컫는 말이다. 예컨데 당구치는걸 다마 친다라고 한다던지, 전구 다마라는 표현, 구슬치기가 아니라 다마치기라는 표현등이 다마의 올바른 용례이다. 우리말을 풍요롭게 하는 일본말을 많이 사용하자! 일본말은 우리말의 시다바리 역할을 하며 우리의 어휘를 풍요롭게 한다.(이 지점에서 당신에게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권한다. 복거일의 지속되는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복거일을 싫어할 수 만은 없게만든게 이 소설이다. 이 소설 보고난뒤 복씨가 몇년전부터 영어공용론 주장하는걸 떠올려 보라. 복거일은 진짜 분열적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거다)

 진짜로 여기서 시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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