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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쌍차평가서

본문

쌍용자동차 투쟁과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과제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 고민택

 

 

<발제에 앞서>

 

- 먼저, 쌍용차 투쟁과 관련하여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시에 이번 점거파업(옥쇄파업)투쟁에 임한 모든 노동자들에게도 뜨거운 동지애를 전합니다.

- 쌍용차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현재 실무(후속)협상이 진행 중에 있으며, 그 와중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사측의 무분별한 탄압과 이명박 정권의 가혹한 수사/구속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수세적 차원에서 ‘대타협 정신’을 말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 안팎으로 이에 대한 시급한 대처와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 본 발제는 쌍용차 투쟁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서나 보고서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이 부분은 또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는 쌍용차 투쟁을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둡니다.

- 끝으로, 본 발제가 쌍용차 투쟁 주체의 공식적/집단적 평가나 판단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본 발제는 어디까지나 포괄적 차원에서 쌍용차 투쟁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입니다. 투쟁 주체와 본 발제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과 실천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들 동지들에게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1. 시사점

 

이번 쌍용차 투쟁은 긍정적 측면에서든, 부정적 측면에서든 계급투쟁의 보고(寶庫)이다. 이 투쟁으로부터 노동자투쟁/변혁운동이 어떤 교훈을 어떻게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달라지게 해야 한다. 즉 이번 쌍용차 투쟁은 한국의 노동자투쟁/변혁운동이 쌍용차 투쟁 이전의 상태로 다시 되돌아 갈 것인가, 아니면 쌍용차 투쟁을 발판삼아 한 단계 운동을 진전시켜 낼 것인가를 묻고 있다.

 

1)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노동자계급 중심성이 갖는 의미를 알리는 생생한 교과서다.

무엇보다 이번 쌍용차 투쟁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대중 투쟁을 강조하거나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중시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는 그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2008년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시위, 2009년 들어 주요한 투쟁으로 떠올라 있는 용산투쟁과 이른바 반mb 전선(mb악법 저지투쟁)에서 노동자의 역할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지난 97년 이래 노동유연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후 98년 현대자동차/만도기계, 99년 삼호중공업, 01년 대우자동차 투쟁을 끝으로 (대공장)정규직 노동자투쟁이 사실상 후퇴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비정규직(불안정고용) 노동자투쟁에 주목하면서 운동/변혁주체의 변화 또는 이동을 얘기했던 사람들에게도 노동자계급의 단결투쟁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으며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2)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번 투쟁에서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한 역할을 보면서 일종의 절망감과 분노를 느낀 사람들이 엄청 많았을 것이다. 이번 투쟁에서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10여 년에 걸쳐 축적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지 이번 과정에서 새로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축적된 현실에 비하면 대중의 압박과 압력에 의해 그 속에서나마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비록 금속노조의 공식 투쟁 결정/결의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완성사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지역지부 차원의 ‘순환 파업’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외견상 ‘단위 사업장’ 투쟁에 크고 작은 연대대오가 그 어느 시기보다 최선을 다해 연대투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민주노조운동 상층지도부의 관료화된 현실을 돌파하는 길은 단순한 지도부의 교체나 조직형식의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 이번과 같은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는 것을 통해 이룰 수밖에 없다.

 

3) 현장 활동가들에게 조합주의(단사주의) 활동을 시급히 극복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객관적으로 현장조직/현장 활동가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필요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들 역시 개별(개인)적으로는 여러 과정과 경로를 통해 이번 투쟁에 열심히 결합했지만 현장(노동자)을 직접 조직하고 움직이게 하는 활동은 매우 미미했다. 그들 역시 민주노조운동의 공식 질서와 체계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했다. 노동자연대가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한 현재적 주요 이유이다.

지난 민주노조운동에서 현장조직/현장 활동가들은 많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민주노조운동이 그나마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그들)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 전부터 그들 역시 상층 관료화된 지도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 원인과 책임을 모두 그들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그들 역시 단사 안에서의 활동에 연연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면적 재편과 변화를 위한 운동을 더는 늦추어서는 안 된다.

 

4) 진보진영도 노동자대중 투쟁에 근거한 활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명박 정권 들어 진보진영은 지난 촛불시위에서는 물론 용산투쟁/반mb투쟁/쌍용차투쟁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이른바 ‘개혁진보세력’의 한 부분으로 혹은 그들 정권의 ‘이중대’로 비쳤다면, 지금은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진보진영의 역할이 강화될 것을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특히 세계공황이 진행/전개되고 있는 상태에서 ‘제도정치’ 또는 ‘부르주아정치’와 분명히 선을 긋지 않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무망한 것인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결국 진보진영도 노동자대중 투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지 않고는 그나마의 정체성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에 기초한 양날개론으로는 정치력을 키울 수 없다.

 

5) 변혁운동/사회주의 세력의 독자적인 정치력 발휘를 더욱 요구하고 있다.

변혁운동/사회주의 세력에게 이번 쌍용차 투쟁은 하나의 시험대였다. 이들 부위가 이번 투쟁에서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가에 따라서는 하나의 변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랬을 때 ‘공투본’과 여타 실천 속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이들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평가할 일이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부족한 자원을 갖고 있는 조건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보인 활동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력은 이번 과정에서 ‘독자적인’ 실천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즉 변혁/사회주의 운동과 이번 투쟁을 연결/접목시키는 활동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보여주지 못했다. 객관적 정세는 노동자투쟁에 대한 지지/지원을 넘어 노동자투쟁을 사회변혁/사회주의 건설로 이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역량과 조건의 문제는 언제나 제한적이다. 바로 그 조건 아래에서 해결의 방책을 찾아내야 한다.

 

6) 노동자투쟁에 기반 하되, 노동자주의를 넘어 설 것을 가리켜주고 있다.

이번 쌍용차 투쟁에서 경찰병력이 공장을 에워싸기 전까지는 쌍용차 투쟁은 사실 전국적 정치 현안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야말로 쌍용차 단사 차원의 문제거나 기껏해야 평택 지역 문제로 제한/제약되어 있었다. 비타협적 투쟁이 지속됨에 따라 사측의 도발과 경찰병력에 의한 진압 작전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비로소 전국적인 정치 현안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노동자투쟁이 갖는 고유의 성격과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쌍용차 투쟁은 용산투쟁이나 반mb투쟁과 정치적으로 결합되지 못했으며, 투쟁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쌍용차 투쟁 주체 때문이 아니다. 이는 훨씬 역사적이며, 본질적인 문제이다. 노동자주의는 조합주의와 부문주의의 한 표현이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은 결코 (국내외)전체 계급 세력관계와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투쟁(쌍용차 투쟁)은 거기에서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7) 공장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반시장(자본)/반국가(제도)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이번 쌍용차 투쟁에서 ‘정리해고반대/총고용보장’ 요구가 관철됐다면 전국적으로 노동자투쟁에 엄청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격렬하고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졌다. 노동자투쟁/점거투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앞으로도 더욱 확장/강화시켜 나가야 할 전선이다. 그를 통한 생존권 사수와 반자본/반국가 전선으로의 상승/발전의 계기를 끊임없이 포착/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쌍용차 투쟁이 노동자투쟁의 전형이기는 하지만 이를 일반화/일상화하기는 어렵다. 완전고용이나 배제 없는 사회적 안전망은 자본주의 원리와 배치된다. 따라서 노동자투쟁/점거투쟁은 공장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로도 확장되어야 한다. 이는 ‘공장에서 사회로’나 ‘사회복지확충’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지금 여기, 일상에서 시작해야 함을 말한다. ‘외로운 섬’이 아닌, ‘진지전’을 넘는 직접적 적대전선형성을 말한다.

 

8) 적(노동)/녹(생태)/보(성) 연합 시도, 지역/사회운동과의 접점을 형성해야 한다.

노동자계급 또는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에서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며, 담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다양한 시각과 경로로 제출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 차원에서 이른바 적(노동)/녹(생태)/보(여성) 연합의 필요성과 지역/사회운동에 대한 고민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이번 쌍용차 투쟁을 대하면서 연대를 아끼지 않았으며 승리를 기구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는 이들 역시 노동자투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쌍용차 투쟁과 같이 전국적인 관심과 이슈가 집중되는 투쟁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하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접점 형성을 위한 일련의 과정과 노력이 좀 더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쌍용차 투쟁이 이를 위한 주요한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2. 드러난 쟁점에 대하여

 

위에서 말한 시사점은 어느 것들은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도 있지만 또 어느 것들은 간접적이거나 그 보다 훨씬 낮은 징후 정도에 그친 것도 있다. 그러나 아래 얘기하는 쟁점은 그 보다는 훨씬 노골적으로, 더욱 현실적 수준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다만 쌍용차 투쟁 주체의 의지와 요구가 워낙 강력하고 분명하게 표출된 관계로 어느 것은 수면 위에서 쟁점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또 어느 것은 수면 아래에 잠복된 것도 있다.

 

1) 투쟁 이후 지금 당장의 쟁점은 이번 쌍용차 투쟁의 결과와 그것이 미칠 영향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승리한 투쟁인가, 패배한 투쟁인가’ / ‘정리해고에 대한 일정한 제동으로 작용할 것인가, 전면적인 구조조정으로 나가는 출발점이 될 것인가’ / ‘반자본(주의)투쟁으로 나가는 계기를 형성할 것인가, 기존 정리해고 투쟁에 대한 내외적 비판을 강화시킬 것인가, / ‘노동자대중 투쟁의 사기를 끌어 올릴 것인가, 오히려 광범한 패배주의를 확산시킬 것인가’ / ‘운동의 진전을 위한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인가, 반대로 당분간 운동진영에 공황 상태를 몰고 올 것인가’ 등이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쌍용차 투쟁은 위 쟁점에서 어느 일방을 완전히 손들어 주는 차원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현재 시점에서 자신 있게 예단(판단)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그건 결국 지금부터의 실천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쌍용차 투쟁이 던진 제기는 여기까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쉬움은 남되, 후회는 없는’ 참으로 오랜만에 겪는 투쟁임에는 분명하다.

 

2) 국가 책임(공적자금 투입/국유화) 요구를 둘러싼 쟁점

이번 쌍용차 투쟁에서 가장 사회적/대중적 쟁점을 형성한 것은 ‘국가(정권)가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이미 법정 관리에 놓인 상태에서 사측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상하이자동차 책임론도 결국 국가가 처리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넓은 의미의 진보진영을 포함해 민주당조차 거들고 나올 정도였다. 투쟁 막판에 ‘경찰병력 철수/공적자금 투입’으로 요구가 집중된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편 운동진영 내에서, 특히 ‘좌파’ 세력 사이에서 ‘국유화’를 둘러싸고 얼마간의 쟁점이 형성됐다. 이를 지지하는 입장 내에서는 공적자금 투입은 결국 국유화(공기업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이유와, 국유화 요구를 사회주의적 또는 이행기적 요구와 연결 짓거나, 투쟁/요구를 정당화/강화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매개) 차원으로 이해했다. 반면 이를 부정/반대하는 입장은 체제 내적 국유화 요구는 결국 노동자계급에게 환상만을 심어줄 우려가 있으며, 공적자금 투입이 낳을 결과는 결국 또 다른 매각으로 이어지거나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그러한 방안으로 쌍용차를 회생시킬 아무런 의사/의지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자의 경우가 노동자 살리기/생존권 쟁취를 위한 상위의 개념으로 국유화를 상정/설정하고자 했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노동자 살리기/생존권 쟁취 그 자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혼선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봤다. 두 입장 모두, 특히 공황시기임을 감안할 때, 전국적 차원에서의 노동자 연대투쟁이 필요함을 전제로 삼았으며 역설했다. 그러나 이 쟁점은 현실에서 대중적 차원으로까지는 진전되지는 못했다. 바로 그 전제를 이끌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전국적 노동자 연대투쟁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를 아직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3) ‘회사 살리기냐, 노동자 살리기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형성됐다.

이번 쌍용차 투쟁 역시 전사회(계급)적 차원에서 그 책임이 무엇/누구 때문이든 노동자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회사를 회생시키는 것이 그나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것과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제하는 회사 살리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사이에서 형성됐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회사 살리기가 일방적으로 우세했던 기존과는 달리 그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형성됐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쌍용차 투쟁 주체의 비타협적이고 완강한 투쟁 자체 때문이다. 이 점에서 쌍용차 투쟁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다른 하나는 지난 투쟁의 경험과 경제공황이 끼친 영향이다. 지난 10여 년의 경험에서 노동자대중은 회사 살리기는 결국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과 고통만을 낳을 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득했으며, 특히 경제공황 시기에 그것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는 직관/직감이 형성된 때문이다.

 

4) 노동자 살리기를 둘러싸고 진보진영과 투쟁 주체/변혁세력 사이에 이견이 드러났다.

진보세력은 주로 산업정책 또는 자동차산업의 관점에서 쌍용자동차 회생 가능성(방법)을 들고 나왔다. 그렇다보니 주로 방법론/계량/수치에 초점을 맞추고 경쟁력(회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자 살리기를 우회(간접)적으로 대변했다. 반면 투쟁 주체/변혁세력은 그와 같은 논조에 동의하지 않지만 특별히 각을 세워 대응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정리해고반대/총고용보장’ 그 자체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밀고 나갔다.

이 쟁점은 전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현실적 설득력(대안)을 갖는 것으로 바라본 반면 후자의 입장에서는 그럴 경우에 오히려 국가/자본의 프레임(논리)에 갇힐 수밖에 없으며 개량주의로 빠질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또한 전자의 입장에서는 후자의 입장을 ‘반대를 위한 반대’ 또는 ‘대안 없는 투쟁’으로 바라보았다면, 후자의 입장에서는 전자의 입장은 결국 ‘회사 살리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 노동자의 양보를 인정해야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비판했다.

다만 이 두 입장은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 또는 금융화 위주의 정책이 갖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전선을 치는 부분적 효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쟁점 역시 전면화 되지 못했다. 적전분열을 보이지 않으려는 서로 간의 이심전심/고육지책(?)과 함께 이 자체가 아직 현실적/사회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한 상태에서 우선 각자의 주장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기에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구조조정, 즉 정리해고를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형성하기 위한 방향으로 노동자의 요구와 대안을 주장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럴 경우 정리해고 자체를 정당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을 것은 물론 사회적 시스템 또한 비용 문제로 노동자의 더 많은 양보를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입장이 맞서 있다.

이상은 결국 정치(강령)/변혁 노선에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반복될 전망이다.

 

5) 공장점거의 강화냐, 정치적 이슈화냐 / 요구의 사수냐, 양보안 제출이냐 / 조합주의적 투쟁이냐, 대중투쟁에 대한 몰이해냐 사이에서의 쟁점

위 첫째 쟁점은 아직 공장이 경찰병력에 의해 고립되기 이전의 투쟁 전술과 관련된 문제다. 그것은 그 둘을 선순환 되게 배치할 수 있느냐는 역량과 조건의 문제이지 어느 하나를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더라도 투쟁 초반에 정치 이슈화를 위한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했다고는 할 수 있다.

위 둘째 쟁점은 사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암묵적으로만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쌍용차 노동자의 점거(옥쇄)파업 투쟁이 워낙 강고하게 마지막까지 유지된 관계로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쟁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금속노조는 기자회견 사건을 일으킨 바 있다. 비록 투쟁 주체에 의해 간단히 정리되기는 했지만 그와 유사한 입장과 판단이 투쟁 내내 이어졌다. 어떻게 요구를 쟁취할 것인가를 고심하기보다는 어떻게 양보(안)를 제시할 것인가를 두고 머리를 감싸는 세력이 끝까지 주도권을 행사하려했다.

이들에게 연대투쟁을 강화하거나 현장투쟁을 조직하는 일은 그 자체의 투쟁을 통해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압력 정도로 배치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정리해고 반대/총고용 보장’을 끝까지 주장할 경우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압박(?)을 가하려고까지 시도했다.

‘정말 끝까지 갈거냐, 양보안을 제출할 것이냐’를 취사선택할 것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투쟁 주체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 몸통은 바로 금속노조/민주노총이며, 그 외곽은 바로 ‘자동차 범대위’가 담당했다. 이것들이 쟁점화 되지 않거나 폭로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투쟁 주체의 기세에 눌려 그들이 이를 공개적으로 일관되게 주장하고 나오지 못한 때문이다.

위 셋째 쟁점은 ‘좌파’ 세력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방연대는 대다수 ‘좌파’가 수세적인 대응(위기 전가 반대)/조합주의적 요구(정리해고반대)/대중의 꽁무니 쫒기(독자실천 방기)에 머물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투쟁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실천이 어땠는가를 따지거나 각자의 활동에 대해 말하기기에 앞서 그 자체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다만 ‘자족적’이거나 또는 ‘독백적’인 차원을 넘어 어떻게 그것들을 현실에서 극복해 나갈 것인가와 대중투쟁을 강화하고 그와 함께 사회주의 정치 실천을 수행하는 과정과 경로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3. 문제제기

 

위의 쟁점과는 별개로 이번 점거(옥쇄)파업 투쟁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 투쟁이 갖는 중요성과 의의를 훼손/폄하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현실 투쟁이 아직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번 투쟁이 갖는 의의를 확대/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한 입장과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로서, 노선과 판단을 떠나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본다.

 

1) 민주노총/금속노조 지도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이번 점거(옥쇄)파업 투쟁이 끝나자마자 민주노총 위원장은 그 첫 일성으로 ‘강성노조로는 더 이상 안 된다’ / ‘상급단체에게 교섭권을 위임하지 않은 것을 문제로 지적’하고 나왔다. 실로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발언이다. 금속노조 위원장은 투쟁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백분토론을 준비하느라 투쟁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물론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준비를 잘하는 것도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지만 그와 함께 그 전에 금속노조가 이번 투쟁에서 걸어온 행태에 대한 문제제기가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 두 이야기는 일종의 상징이자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을 지적한 것뿐이다. 민주노조운동은 한참 전부터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했다. 이번 쌍용차 투쟁을 통해서 기존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더욱 팽배해졌다. 당연한 결과다. 이제 민주노총혁신 구호 자체가 더 이상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도 민주노총을 혁신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다. 그 어떤 세력도 이를 주도하거나 성취시킬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결과로부터, 이러한 결과를 낳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력(정파)은 없다. 그 극복은 결국 이번 쌍용차 투쟁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더욱 더 일어나는 경우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쌍용차 투쟁이 그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 교섭(협상) 결과만을 놓고 이번 투쟁이 갖는 의의를 깎아 내리는 것은 실은 자신들의 잘못된 입장과 태도를 감추려는 것일 뿐이다.

이번 쌍용차 투쟁의 교섭 결과만을 놓고 벌써부터 이번 투쟁을 회의하는 반응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 엄청난 투쟁을 통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냐면서 이를 핑계로 현실에 굴복하는 자신들의 태도를 감추고 있다.

이명박 정권과 자본가 계급 그리고 수구보수언론이 보인 입장과 태도를 폭로하고 그에 맞선 분노와 투쟁을 더욱 더 조직해야 하는 이 시기에 오히려 ‘강성 노조’가 문제라거나, 정리해고를 기정사실화 한 위에서 사회적 시스템(안전망)을 만드는 쪽으로 투쟁방향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논리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백번을 양보해 이번 투쟁과 같은 강도의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지 않고 어떻게 그런 요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다. 체제를 뒤흔들 정도의 투쟁이 아니고는 자본가계급과 부르주아 국가의 양보를 강제한 경우가 전혀 없는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도외시한 그야말로 순진하거나 반노동자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알다시피 이번 투쟁을 통해 하나의 사실(진실)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노동자 투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저들 지배계급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번 투쟁을 양비론(양시론)적으로 대하던 세력들도 투쟁이 고조될수록 점점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경향을 보였고, 비록 직접적인 연대투쟁에 나서지 못한 전국의 대다수 노동자 민중도 이번 투쟁을 자신의 문제로 빠르게 받아들였다. 정말 조금만 더 연대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면, 현장노동자가 직접적인 파업투쟁으로 응수했다면 상황과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하지 않고 엉뚱하게 비타협적 투쟁을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3) 진보정치 세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르주아정치/제도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먼저 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줄기차게 큰 흐름에서 부르주아 야당과의 공조를 중시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보였던 반신자유주의(연대)조차 후퇴시키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들과의 사안별 연대(투쟁)를 하는 것까지를 문제시 할 필요와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를 넘어 민주연합을 상위의 개념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의지로는 그들을 견인하고자 할 수 있으며, 객관적으로 반이명박 전선을 강화할 필요나 이유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민주연합은 더 이상 논리적/실천적 근거와 위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역량에 비춰보더라도 결코 민주연합에서 주도권(헤게모니)을 행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이 점이 명명백백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말로써만 또는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민주노동당은 당 전체 차원에서 쌍용차 투쟁에 처음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당 내에서조차 문제제기가 나오는 결과를 낳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투쟁 막바지에 이르러 전당적 수준에서 결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지난 4월 재보궐 선거 이후 노동자투쟁과 변혁을 강조하는 모습도 없지는 않다.

이것이 혹 진보신당과의 차별화를 위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동시에 민주연합을 희석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사인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반길 일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 퇴진(투쟁)을 당론으로 결의한 것은 반이명박 투쟁(전선)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진보신당은 최근 일련의 노동자투쟁 또는 대중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쌍용차 투쟁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전국적 정치 명망가를 보유하고 있고, 비록 1석이나마 의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약은 대단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태에서 쌍용차 투쟁 이후 노회찬 대표는 지난 12일 “반MB연대, 이대로 좋은가?” 제하의 토론회를 통해 “반MB'대안‘연대 필요, '서민중심형 복지동맹' 지향해야”라는 발제를 한 바 있다. 거기에서 노 대표는 “반MB대안연대는 기존의 [정치적]민주 연합을 넘어선 사회 경제적 민주화 연합”이라며 이를 ‘민들레 연대’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반mb연대가 갖는 한계/문제를 지적한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제안 배경과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제안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통한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말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제도정치 차원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일종의 정치 공세 이상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발제에서 ‘정계 개편’을 들고 나온 것에서 본심이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쌍용차 투쟁과 같은 노동자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껏해야 제도 정치권 차원의 정계 개편을 통해서 현 시국을 돌파하려는 생각 자체가 자신이 발제에서 비판한 ‘과거로의 회귀’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인식과 실천 앞에서 세상은 끔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4) 변혁운동/사회주의 세력도 이번 쌍용차 투쟁에서 전사회/계급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하나의 ‘외부세력’으로 호명됐을 뿐이다.

물론 이들 세력은 객관적으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역량을 총력 배치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바로 이 정도라는 것이 판명된 것이다. 또는 이 정도가 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코 자괴감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 반대다. 자신이 처한 상태를 냉정히 반추/성찰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강화시키는 것도 전체 운동을 상승시키는 역할도 쉽게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바로 거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제기하고자 함이다.

이번 투쟁을 통해 변혁운동/사회주의 세력이 맺고 있었던 현장조직/현장 활동가들과의 역사적/정치적 관계가 어느 수준인지가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 그들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에도, 그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그들 정파 사이에서 주고받고 있는 정치공방은 차라리 한가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발본적인 차원에서 운동을 새롭게 조직해야 할 시급성과 스스로를 변화/혁신시켜야 할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변혁운동/사회주의 세력은 투쟁전술 운용에서는 조직력의 한계 때문에, 의제를 쟁점화는 데 있어서는 통일성의 부족 때문에 대중과의 관계에서 존재감과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4. 문제의식 및 과제

 

누구도 쌍용차 투쟁이 이번과 같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속에서 성립/진행된 투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극적이다. 쌍용차 투쟁은 대중투쟁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대중투쟁이 갖는 위력과 역동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용차 투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지 못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연대투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운동진영 모두가 그들 투쟁 주체에게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쌍용차 투쟁 / 쌍용차 노조의 경험을 민주노조운동 혁신의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쌍용차 노조는 ‘강성노조’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번 집행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히려 노사협조적인 노조였을 따름이며 당연히 그들 조합원의 투쟁 경험과 전통도 미미했다. 그런데 무엇이 쌍용차 노조와 그들 노동자를 순식간에 변화시켰는가? 그것은 그저 우연일 뿐인가, 아니면 어떤 필연이 내재해 있었던 것인가?

여기에서 그 모두를 분석할 여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지난 10년에 걸쳐 이루어진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낳은 교훈을 들 수 있다. 즉 구조조정/정리해고는 결국 노동자 죽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생생히 입증되었다. 그 어떤 처지에 있는 노동자도 이제 이를 모르지 않는다. 쌍용차 노동자도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투쟁을 이끈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지난 10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이 비록 계속적인 후퇴와 패배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코 무의미했거나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 하나는 주체의 상태와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쌍용차 노조는 그 어떤 강력한 노조보다 훨씬 집행부와 조합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들어야 한다. 그들 사이에 관료주의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집행부는 출범 때부터 헌신적인 태도로 임했으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 집행부가 상대적으로 대단한 활동가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단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며 자신이 말한 바를 묵묵히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힘은 바로 그로부터 생성되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의지하는 마음이 형성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전체 민주노조운동이 쌍용차 노조로부터 배워야 한다.

 

2) 쌍용차 투쟁은 가장 전투적인 투쟁이 곧 가장 정치적인 투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쌍용차 투쟁은 한참 동안 전국적 관심과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저 평택 지역문제 정도로 취급됐을 뿐이며 수구보수 언론으로부터 무차별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당해야만 했다. 그 시기에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안은 국회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던 이른바 미디어법 처리 문제였다.

쌍용차 투쟁은 길어야 1~2주를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명박 정권이나 사측도 초기에는 별로 게의 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조금 저러다가 끝나려니 하는 모습이었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도 그런 태도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투쟁이 두 달을 넘기면서 상황은 급속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전과는 다른 긴장이 하루하루 발생하기 시작했다. 경찰병력이 공장을 에워싸고 ,공장은 점점 전쟁터로 변해가면서부터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쌍용차 투쟁은 정국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평택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든 언론은 쌍용차 투쟁을 뉴스의 핵심으로 앞 다투어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쌍용차 사태 해결을 둘러싸고 전사회적인 차원에서 공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바로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얼마 전부턴가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운동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까지 취급하는 경향이 퍼져 있었다. 이른바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은 한 물 간 것으로 매도되었다. 이번 쌍용차 투쟁은 이런 인식과 태도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쌍용차 조합원은 노동자의 군대로까지 진전되고 있었다.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쌍용차 노동자를 함부로 비난하지 못했다. 수구보수 언론조차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번 쌍용차 투쟁은 노동자투쟁이 어떻게 진행될 때 비로소 자신의 위상과 위력을 떨칠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노동자 중심성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노동자계급이 투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역으로 밝혀주었다. 노동자계급은 오직 투쟁 속에서, 투쟁을 통해서만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국의 노동자에게 전파하였다.

쌍용차 투쟁이 정국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돼서가 아니다. 그들의 투쟁이 순수한(?) 생존권 투쟁이어서도 아니다. 그것들은 투쟁 초기에 아무런 이슈도 되지 못했다. 역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노동자의 주장과 목소리가 알려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당연한 진리가 사실 그동안 잊혀져 있었거나 무시당해 온 것이다.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을 복원시킬 것을 쌍용차 투쟁이 일러주고 있다.

 

3) 쌍용차 투쟁은 공황시기 노동자 투쟁이 갈 길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쌍용차 투쟁은 그토록 치열한 투쟁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주체적 요인을 별개로 하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그만큼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과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한 편의 양보는 다른 한편의 승리를 의미하며, 한 번의 양보 뒤에는 더 많은 양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는 언제나 그런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매번 상황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경제공황 시기다. 양보는 곧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중간은 없다. 오직 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이 날 뿐이다. 저들이 어땠든 48%를 후퇴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둘째는 쌍용차 문제는 쌍용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쌍용차 투쟁은 명백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 치러진 대리전이다. 이명박 정권과 자본가 계급은 이번 쌍용차 투쟁에 총력을 기울여 대응했다. 살인진압마저 주저하지 않았으며,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내전을 치른 것이다. 저들은 전국의 노동자에게 이를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하였다. 자동차산업 전반을 구조조정 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정책이 어떻고, 사회적 시스템이 어떻고를 말하는 것은 한가한 얘기다. 오히려 쌍용차 투쟁보다 더 큰 투쟁을 어떻게 조직/현실화 있을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모색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며,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그 어떤 대안/대책도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현실/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4) 쌍용차 투쟁은 노동자투쟁이 아무리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반자본(주의)투쟁/사회주의 건설과 연결/연속되지 않고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또한 보여주었다.

이번 투쟁 중에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쌍용차 투쟁을 생존권 투쟁이 아닌 반기업, 반자본 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고 한 것은 틀렸다. 또한 생존권 투쟁과 반기업, 반자본 투쟁을 전혀 별개의 것인 양 한 것은 사실/사태를 왜곡한 것이다. 하지만 쌍용차 투쟁이 객관적/현실적으로 그러한 성격을 띠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이런 사실을 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대중 자신이 자기의 목소리를 통해 떳떳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사실 이번 쌍용차 투쟁은 변혁과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소통하기 위한 소중한 기회/계기였다. 그것들을 단지 원칙적/추상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수준으로까지 제기/제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국유화 문제도 지지/반대를 떠나 대중적으로 토론을 부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야만 지지가 됐든 반대가 됐든 어느 하나가 비로소 현실화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과/경유하면서 만이 운동은 진전될 수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안 투쟁 대부분은 사실 사회주의 강령과 직접 연결/결합시키지 않고는 정치적 명확성을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다. 이른바 대중적/현실적 요구라고 얘기되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조금만 살펴보면 사실 애매모호한 것 투성이다. 또한 전투적/비타협적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는 노동자계급을 사회주의 정치로 안내할 수 없다. 이번과 같은 투쟁이 벌어질 때 시도하지 않고 언제, 어떻게 그것들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도 일정한 축적 과정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중의 상태를 핑계로 더 이상 대기주의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현 정세는 그를 시도할 것을 객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번 쌍용차 투쟁은 노동자대중 투쟁이 갖는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해서도 이제까지의 운동양식과 주체화양식을 전면적/근본적으로 재검토 할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처음 시사점에서 말한 바를 올려놓고 하나하나 엄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기존 관성에 머물러서는 현실을 쫒아가기에도 급급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준비정도를 훌쩍 넘어 다가온다. 그 때마다 허둥거려가지고는 운동을 진전시키기 어려우며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현실의 주어진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만은 이제 극복해야 한다.

 

끝으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이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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