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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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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진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좋아하고 그 자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의견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자유가 있고, 그것에 관한 공감과 지지를 얻을 자유가 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마치 우리 둘만 알고 있어야 할 비밀처럼 나는 내 의견을 자신있게 표현하지 못한다. 이건 흉흉한 요즘의 정세 때문도 아니고 공조직에 속해있는 활동가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현실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여러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의견을 가졌을 때 나는 여러사람의 허락 내지는 동의를 얻어야 한다.

 

주변의 어떤 이들은 어쩌면 내스스로에게 왜 좋아한다는 말을 못해? 넌 떳떳하지 못하구나라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그에 따라 상황은 변해간다. 나의 상황과 조건과는 별개로 흘러가는 상황속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만 가는데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아무 이야기도 못하고 있다.

 

그것에 익숙해져야만, 그리고 스스로를 세워내는 끊임없는 투쟁과정속에 있어야만 온전히 설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자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도망치는 생각... 다른 일거리들을 찾아가며, 정세를 이야기하며 회피하고 있다.

 

언젠가는 말해야겠지. 그것이 피해자에게도, 운동을 위해서도 또 궁극적으로는 먼 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떳떳해질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치만 자꾸 두렵다. 그래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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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접스러워지는 게 싫다

사람이 추접스러워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걸 매순간 매번 느끼는 건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늘 추접스러워진다.

 

'관계'의 문제는 나에게 늘 과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말을 해야 할지, 솔직하게 행동하면 되는건지 내가 상처받지는 않을런지.. 내가 상처받지 않는 방법으로 그런 방향으로 살기 위해서 늘 애쓰지만 늘 상처받는다.

 

그래서 이런 고민때문에 다른 일도 못한다. 아니라고, 관계문제 때문에 그런 '하찮은 일'  로 내가 '중요한'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난 괴롭다.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건 절대로 마음을 다 주지 말자는 것이다. 늘 재고, 속으로 다른 생각하고 다른 마음먹자고 한다. 그러면서도 내 입에서는 진실이 흘러나오고 마음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상처받는다.

 

나의 상대방에 대한 기대는 오로지 나 자신의 기대일뿐이다. 합의된 것도 없고, 그건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 그 자체, 없어져도 될, 망가져도 될 기대일뿐이다. 상대방이 부응하면 감사한 그것, 그 기대를 나는 늘 포기하려 애쓴다.

 

얼굴 보며 술 먹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때.... 전화통화하며 울고 싶을 때 전화를 받지 않는 상대방... 이 사소한 일로부터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느낀다. 기대를 져버린 것일텐데 나는 그것을 마음으로 느낀다.  나를 이해해주겠거니 생각하고 했던 말에 대한 의외의 대답... 의외의 반응을 나는 견뎌내질 못한다. 나는 그게 상대방의 마음인것만 같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마음을 소심, 또는 예민함으로 이야기한다.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일을 못할 정도로 심란하니... 그런데, 나는 나의 이런 복잡한 마음이 단지 소심함, 예민함으로만 압축되는게 너무나 불쾌하다. 단지 신경이 날카로워서, 마음이 여려서 이러는게 아니다.  그대를 너무 좋아해서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왔던 부족한 한 구석, 퍼즐 맞추기로라도 하듯이 찾아헤메고 있어서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누구나 다 그렇다고 다들 말하지만... 나는 내 퍼즐을 깎아서라도 그대와 맞추고 싶은거다. 그게 만남이고, 교류이고, 관계라고 생각했다.

 

관계라는 건 왜 생성되고, 왜 지속되어야 하는건지, 생존을 위해서인지, 삶을 위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정말 속이 복잡하다. 일이 손에 안잡힌다. 잊고싶을 따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가 수면위로 떠올라야 한다. 나타나야 한다. 나는 그대의 얼굴이 보고싶다. 아니, 봐야 한다. 그대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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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짜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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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유..

엊그제 평소에 좋아하던 동지를 만났다.  사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늘 이런저런 자리에서 오가며 만나왔던 사이다. 내가 그 동지를 좋아했던 이유는 운동판에서 흔히 말하는 '건강함'  때문이었다.

 

내가 갖지 못한 그의 '건강함'을 좋아는 했지만 부러워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살려면 너무 빡세니까..

 

내가 부러워했던 건 운동의 건강함을 지닌 동지보다 언론노조의 문지애 아나운서, 민변의 변호사?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돈도 없고 운동의 막막함으로 인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 같다. 뭐.. 이것도 결국 변명이지만.. 암튼 내 요새 상태가 그렇다.

 

그래서 별 부러운 마음없이 좋아하는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로부터 뜻밖의 모습들을 보았다.

그는 건강한 동지가 아니라 행복한 동지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초대해 맛난 요리를 해주는 것을 좋아하며 드립커피의 진한 맛이 좋아 로스팅을 고민하고, 사람을 너무나 좋아해 심리학까지 공부하는 너무나 바쁘고 행복한 그였다.

 

옥탑방에서 살지만, 그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베큐 파티에 로스팅한 커피 한잔, 때로는 칵테일까지 마신다는 그를 보며 잠깐의 충격에 나도 모르게 어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사는 것보다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라고 말해주었다. 빡세게 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욕구를 찾아보라니 흠...  방송국 pd가 되었다는 누구의 이야기, 유학을 갔다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며 흔들린다는 나에게 그가 해준 말은 나의 욕구를 찾아보라는 말이었다.

 

누구는 그 말이 너무나 당연하고 이제서야 충격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을 해준 사람이 소위 운동판에서 잘 나간다는 누구누구의 말이거나, 굉장히 리버럴해보이는 누군가의 말이었다면 이렇게 충격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래 나도 아는 얘기야.. 라고 말했겠지...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운동을 빛낼 줄 아는 그런.. 나쁘게 말하자면 누구보다 빡세게 사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그는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따뜻한 말로 나를 위로해주고, 욕구를 찾으라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사실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을 찾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힘이 들 때 활동가들을 만나면 울분이 차고, 마음이 풀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마음만 불편했다. 그 불편한 마음을, 억울한 마음을 갖는게 싫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잠시잠깐 그를 만나 따뜻해졌지만, 오늘 또 아침에 밀려올 카드값에 다시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도 말했다. 우울한 상황이니 다시 우울해질거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우울하고 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억울하냐고? 아직도 울분이 차냐고? 맞다. 그렇지만 울지는 않는다.  적어도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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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에 대한 고민..

반성폭력 운동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늘 막히는 문제가 바로 2차가해문제다.

나도 사건을 겪을 때마다  나는 늘 태도가 왔다갔다 했다.

처음으로 2차 가해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건 학교를 다닐 때 맡았던 성폭력 사건이었다.

그 때 나는 피해자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입을 다물라 이야기했다. 사건 자체도 논쟁적이지 않았을 뿐더러, 회자되어봤자 좋을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논쟁적인 사건은 조금 달랐다.  의견이 달랐을 경우,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나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설사 사건이 논쟁적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누구나 의견은 있었다. 그 때마다 그 이야기들이 피해자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일일이 다 막을 수는 없었다. 피해자가 강철심장이 아닌 이상에야.. 피해자는 작은 이야기에도 흔들렸고, 무너졌다.  그리고 입을 연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양쪽에 설득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설득은 '너도 이해가 가고, 또 너도 이해가 가는데, 00이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니 조심해달라.' 수준이었다.

 

어떤 때는 내가 그 논쟁을 원하기도 했다.  사건이 논쟁적일 때 특히 그랬다. 의견이 반반일 경우 더욱 그러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 등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 고민을 의견으로 이야기할 때 나는 그것을 2차 가해라 이야기하면서도 나 또한 그런 2차 가해성 발언을 했던 거 같다.

 

최근에 겪은 '아가씨와 건달들' 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 또한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나의 문제제기에 수많은 댓글과 반박성 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며, 나를 공격하는 그 수많은 글을 바라보며 정말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글들 중에 하나도 설득력 있는 글은 없었다. 문제는, 나름 그들도 자기 의견이라고 말한 것일테고, 그것은 그 나름의 논쟁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럴 때 나또한 같이 반박을 했지만, 종국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너의 그 글은 2차 가해라고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또다른 빌미를 주었다. 이것봐라, 별것도 아닌 글에 너는 이것을 가해라고 표현하며 너자신을 '희생자화'하는 것이냐. 논쟁을 하자는데 입다물라는게냐.

 

그런데 나의 이전 생각에는 마초와 같은 생각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져 입다물라, 너희가 이것을 배워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여성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항상 여성주의가 활발하게 논쟁 중일 때는 이상하게도 성폭력 사건이 발발했을 때일뿐이고, 그럴 때 우리는 몇몇 사람들의 마초성을 확인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마초성을 확인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가해자라고 이야기하고, 그 가해자들은 논쟁을 논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를 되려 욕한다. 때로는 마초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2차 가해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점에서 가해자라는 것이 현재 운동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이야기 해 볼 필요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하고 싶은 자유가,  여성주의에서는 2차 가해인 이 상황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난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 이것이 양립불가능하지는 않을까 의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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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이라 말함에도 자격이 존재하는건가?

지하조직님의 [해방이라는게 기껏 이런거 였어?] 에 관련된 글.

 

억울하고, 분노스럽고 분개할 수준의 글들이 나에게 쏟아져왔다.

그것은 내가 노동자힘 여성 활동가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노힘' 회원이기 때문이다.

 

해방연대 김광수 씨는 노동자힘을 비판하는 글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우리나라 바람둥이들의 특징은 절대 쿨하지 않다는 것이다. 침실에서 현장을 들켰어도, "저 여자 누구야, 난 술먹고 필름 끊겼는데, 그 다음에 기억이 없어"라고 왕오리발을 내미는 것이 이 나라 바람둥이들의 미덕이다. 서양애들 처럼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고 아내 눈을 보면서 이혼하자고 하는 잔인한 이야기는 안한다. 그저 몰래 바람피다가, 심지어 딴 살림 차려 놓고도 마누라한테 걸리면 좀 두둘겨 맞고 싹싹 빌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딴 짓 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이 나라 바람둥이들의 특징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아내들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그런 남편을 기꺼이 용인하기 때문이다. 바람둥이들은 그 약점을 파고들어서 가정도 지키고, 바람도 피는 양다리 작전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

...

 

"...우리 노힘아가씨는 미워도 다시한번을 되뇌이며, 민투위 건달을 계속 용서하고, 훈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노힘도 민투위도 권위와 믿음은 계속 추락해왔다. 그것을 본인들은 정치적 재조직화라 이르고 있다.
노힘아가씨들이 전국에서 벌이고 있는 정치적 재조직화에 얼마나 많은 건달들이 꼬이고 있는지는 확인할 도리는 없지만, 아무튼 참 수고 많으시다. "

라고 쓴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가 또는 해방연대가, 아니 누가 되었든지간에 노동자힘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별반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누구의 생각이든 그 자체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가 노힘을 또다시 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글에서 그가 보여준 여성의 모습 때문이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 땅의 여성들이 남성의 바람을 용인하는 것이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라는 그의 근거도 웃기지만, 그것이 설사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그런 식으로 희화화 했기 때문이다.  아가씨라는 표현도 문제제기하면 끝이 없지만, 백번 참고 또 참는다 할지라도 적나라하게 아가씨를 성적대상화한 부분을 보고서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참을 수 없는 건 내가 문제제기 한 이후의 글들이었다. 그것들을 누가, 얼마나 다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시껄렁한 문제를 니가 감히 들이대는거냐부터 시작해서 너의 이 문제제기의 의도는 무엇이냐, 너의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냐,  너같이 오물이 덕지덕지 붙은 구토유발자가 무슨 입이 있다고 지껄이냐까지... 거의 손가락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으려는 온갖 공작들이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사과라고 쓴 김광수씨의 글은 자신이 2005년도에 쓴  '여성노동자의 꿈과 의지가 세상을 혁명으로 이끈다'라는 제목의 글을  자신의 여성관이라며 자랑이라도 하듯이 올려놨다.  그 글을 보며 그를 지지한 사람들은 나에게 좀 보고 배우라는 식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별 것도 아닌 일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느니, 다른 생각을 하겠다고 자신도 "여성"임을 자랑했다.

 

내가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했을 때는 다른 누군가에게 훈수를 듣기 위함도 아니었고,  나를 보지도 못한 이들에게 온갖 폭언에 가까운 말들을 참아내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앞으로 "비유"라는 명목 하에 온갖 쓰레기와 같은 여성 비하적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낼테고, 그것을 여성들은 또 참아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나 아팠다.

 

내가 아팠던 건, 내가 평소에 생각해오던 활동가에 대한 의심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활동가와 일반남성마초와의 경계과 과연 있을까 늘 나는 의심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사회에 과연 여성이 존재할까라는 의심을 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활동가들과 일반 남성 마초와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해방세상에 저해가 되는 세력으로 노힘을 규정했다. 좋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해방세상에 저해가 되는 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여성을 아무렇지 않게 깔아뭉게버렸고, 아프다 말하는 여성활동가의 입에 주먹을 들이대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리고 내가 저항하자 또다시 '닥쳐!! 너 따위가 무슨 자격이 있어?'라고 말한다.  그 따위 시시껄렁한 문제 갖고 아프다 말하지 말라 한다.

 

당신의 표현이 나빴다고, 옳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설명이, 무슨 자격이 그렇게 필요한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언제까지 또 어디까지 이런 막말들을 나한테 퍼부을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 말들이 너무나 아프게 내 안에 들어오고, 또 그것이 악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나의 이런 감정들을 말하면, 그런 감성적인 문제는 너 혼자 입닥치고 생각하라 말한다.

 

나의 분노가, 치를 떠는 나의 이 분개가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가보다. 

 그들 중 하나가 나에게 말했다. 이럴 시간 있으면 투쟁이나 하라고.. 여성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보통은 장애여성이라 하지만;; 그의 표현은 이러했다.), 여성 노숙자(이 또한 마찬가지다.) 투쟁에 함께하라고..  나는 그 누구보다, 그 어느때보다 여성문제에 대해 당신들과 싸우고 있다. 또 투쟁하고 있다.

 

나는 당신들의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도 지금 나의 "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의도이고, 시시껄렁한 문제, 누군가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는  그 문제가 언젠가는 당신들에게도 부메랑처럼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고, 평범하고, 사소해 보이는 이 문제가 결코 사소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고, 간단하지 않다는 그토록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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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 누구의 무엇으로 살아간다는것...

누구의 무엇으로 살아간다는 것.. 힘들다. 귀찮다.

누구의 친구, 누구의 딸, 누구의 동지, 누구의 선배, 누구의 후배...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나를 옭죄인다.

나는 저 사람의 동지이니까, 저 사람의 이러이러한 행동은 동지라는 이름으로 봐줄 수 있어, 아니 참아낼 수 있어.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의 행동은 오히려 그럴 수도 있는거야라고 넘기면 안돼? 저사람은 동지니까... 이렇게 꾹꾹 하루하루를 참아낸다. 내 성질이 드러운거라 자책하면서..

 

어머니.. 난 어머니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막내딸이니까 고급스러운 우리 어머니 눈에 맞추기 위해 아둥바둥 애를 쓴다. 어머니가 하는 행동이 사치라고, 우리 형편에 어렵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 꼭 이래야 겠냐고 이러니까 돈이 없는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사는게 얼마나 바보같은지 아냐고.. 왜 그리 바보같냐고.. 왜그리 고집불통이고.. 왜 그리 엄마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딸들을 거기에 맞추려 하냐고..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지만.. 난 엄마의 딸이고.. 불쌍한 우리 엄마는  나의 엄마니까... 또 참는다.

 

한나라당 총선에 합류하겠다는 선배의 말을 들으며 머리통을 세게 맞은 거마냥 어이없고 우습지만, 난 그저 볼멘 소리만 한다. 선배는 이제 선배의 삶을 사는거니까.. 내가 좋아했던 선배의 그 모습이 이제 더 이상 아니더라도 그저 참는다.

 

누구의 며느리..

이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난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기를 원한 적이 없다. 친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이렇게 사는 건 정말 나에게 괴로운 일이다. 며느리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했는지..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억압과 고통으로 다가올지 나는 몰랐다. 엄마와, 보통의 여성들과 다르게 살고 싶었던 나는 관계를 끊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용기가 없는 마음에 또 참아낸다.

 

 

누구의 아내..

정말 최고로 힘든 일이다. 정말로 힘든..  활동가로 살아가기도 힘든데... 누구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괴롭다. 불과 결혼한 지 넉달이 다되가지만... 이미 그 넉달동안 싸우기도 참 많이 싸우고 서로 지금까지 쌓아온 애정이란 단어가 증오란 단어로 바뀔 정도로 징글맞게 싸웠다. 거의 매일매일을 붙어지내다보니.. 더 힘든 것 같기도 하다.  활동의 중심에서 나는 활동과 누구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과 누구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것을 정말 균형있게 유지하려 애쓴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감당해내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너무 힘들다.

 

 

그런데 그건 비단 상대방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주의 활동가로 살아가고자 자임하지만, 주변에 있는 '동지'들은 그런 나의 마음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가 보다. 정말로.. 나는 그 사람들의 동지로 살아가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참아내는데 그 사람들은 아닌가보다. 그러니 그렇게 상처를 주고도 모르는거겠지.. 그렇게 무심한거겠지.. 더 큰 목표와 뜻으로 우리는 동지라는 허울좋은 탈을 쓴거니까. 관계의 중요성은 없는거겠지. 그만큼 깊은 관계도 아니니까.

 

 

정말 힘들다. 그들도 마찬가지겠지.. 그 사람들도 나의 동지, 나의 친구, 나의 선배, 나의 엄마, 나의 남편으로 살아가는게 쉽지는 않을테니까... 그런데 정말 힘들다. 서로 이렇게 힘들거면 아예 끊어버리는게 더 쉽지 싶다. 어쨌든 서로가 원하는 누구의 무엇이 되지는 않을테니...

 

이 고통스러운 마음은 어떻게 해야 보일 수 있는 걸까? 감정의 진동이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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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는 거..

11월에 나는 결혼을 한다.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나의 결혼에 대해 반응하는 것 중 하나가 '니가?'라며 놀라는 것이다.

비혼주의자라고 해야하나... 암튼 난 그랬다. 지금도 난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에 태도를 바꾸고 있지는 않다. 다만.. 사람을 만나고 맞춰간다는 건 그런건가보다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거다. 그 사람을 만나고 항상 우리의 관계는 불안했고, 그 속에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왔지만, 결혼을 결정하고 난 지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행복할 수도 있구나라는 걸 알았다. 내가 늘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 웃으며 내 옆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를 요즘에서야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예찬론자인건 아니다. 다만, 내 상황에서 나는 내가 최대한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던 결혼이라는 것을 그간 내 운동의 후퇴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야기하기에도 부끄러운 선택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어느날 내 옆에서 웃으며 날 바라보던 그 사람 얼굴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여성주의 운동에 있어 정해진 길이란 게 있을까...

 

그리고 어떤 여성활동가가 내게 말했다.

결혼을 왜 이리 무겁게 생각해? 싫어지면 이혼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적어도 둘의 관계에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가족들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 나는 또하나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결혼을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데 어쩌겠는나 싶다. 그 사람 얼굴 매일 보고 싶으면 결혼밖에 방법이 없는데...

한번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정해진 길이란 없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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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운동은 과연 가능할까?

운동의 시작

보통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들을 보면 불의를 참지 못해 운동을 시작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동지들을 만날때마다 거의 돌아오는 대답이 이것이니 보통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잘 살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솔직히 마찬가지다. 나에게 이타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희생정신? 나에게 있어 희생정신이란 내가 갖고 있는 먹을 것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고 먹기도 싫은 음식 쪼가리를 내주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개념이였다.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나는 내가 구조적인 모순에 의해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얼굴도 못생기고 몸매도 영 꽝이지만,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해서 독하다는 이야기 들어가며 좋은 대학 들어가서 성공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면, 좋은 대학도 못들어가서 독하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몸매도 영 꽝이여서 좌절하고 있던 마당에 그게 내 잘못이 아니였다라고 하니까 귀가 솔깃해 듣다보니 난 앞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소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기적인 운동

그래서 내 운동은 함께 하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적과 아를 구분하는 운동이였다. 운동에 있어 적은 너무나 많았다. NL도 적이고, 자본도 적이고, 반권도 적이고 구호는 뭐든지 반대고.. 투쟁안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조직화해야 하고.. 조직화의 가능성도 안보이는 사람들은 당연히 적이고... 그렇게 투쟁하다 내가 지치면 그 투쟁도 어차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운동의 주체는 나 혼자였으니까.. 실제로 운동권은 학내에서 이렇다 할만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하는 인간들은 나, 그리고 NL이였으니까...

그래서 대상화하고 쪼아대고 공격하고... 달달 볶고.. 그러면서 내 자신도 달달 볶고...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한해한해가 힘겨웠다. 운동을 하는 나는 주변에 사람도 없고, 외롭기만 한 그리고 매우 나약하면서 독기만 서려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혀 즐겁지가 않아...

그래도 즐겁게 하고 싶었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다가 또는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데도 말 했는데도 나도 힘들어 그러니까 너도 참아내라는 대답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참아내야만 했다. 지금도 참아내는 중이다. 동지의 배신에 치를 떨면서도.. 거리에서 보면 마주보며 인사한다. 후배한테 나는 무서운 사람이 되고 말았고... 연인과는 상처가 덧나서 더이상 약도 못바르는 그런 관계가 되었고... 열사의 죽음에 무덤덤하게 그를 바라 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민주노총을 욕할 힘도.. 그 누구에게 뭐라 할 힘도 없다. 그냥 머리가 아파온다. 못하겠다고 대체 왜들 이러냐고 소리지르고 싶다. 무엇을 위해 당신들은 사람을 배신하고 상처주고 동지를 먼길로 떠나보내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는거냐고..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고, 열사의 영정을 내걸 수 있는거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놨으면서 한치의 양심도 없는거냐고...  왜 상처를 받는 건 항상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관계를 걱정하는 사람쪽이여야만하고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건 당신들과 같이 이기적이고 종파적인 인간들이여야 하는거냐고..

 

한번이라도 미안하다고 눈물흘리며 죄송하다고... 그렇게 대중 앞에서 선언했다면 이렇게까지 싫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많은 비겁합과 배신의 행동들 뒤에 왜그리 많은 설명과 변명들이 난무하는지..

그러고도 어떻게 잠이 오는지...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즐거운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참으라고 하는 사람들, 변명하는 사람들, 배신하는 사람들... 정말 짜증이 난다. 즐겁지 않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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