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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조금은 어색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 껏 쉬고 있다. 아마 오늘까지일 것 같은데, 내일부터 돌아가기 이전 몇일은 왕휘 선생의 책을 정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국/사상사를 접근하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한편으로는 헤겔의 개념적 사유와 존재와의 동일성, 즉 이성에 의한 개념과 실재의 동일성을 통한 주체성의 설명의 방식을 지지하면서 출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대립되는 슈티르너에서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에 이르는 개념 외부의 실존을 중심으로 개념적 사유를 거부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그 내용으로 갖는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가로서의 루쉰'을 이야기 할 때의 입장은 '사상'이라는 표피 너머의 실존을 핵심적인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역시 같은 맥락에 위치하며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개인의 독자성을 '사상'에 환원할 수 없다는 나름 정당한 논리가 등장하고, 정치(실천)에 대한 문학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드러내지만, 그 독자성의 출현의 조건을 개인의 실존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설명함으로 인해 역시 일정한 실존철학적 편향을 드러낸다. 나는 실천의 차원은 늘 개념과 그 외부와의 관계를 포함하지만 여전히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루쉰의 경우에도 문학에서 정치로의 전환은 '회심'이라는 개인적/실존적 결단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그 결단의 조건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내가 취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한편, 정치적으로 중국에 대한 국가주의적 반반공주의적 경향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미조구치와 다케우치의 차이는 좀 더 많은 독서를 요하는데, 가설적으로 다케우치의 해체주의적 특징에서 미조구치의 본질주의적 특징으로의 전환이 갖는 일반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는 해체가 멈추는 순간 곧 본질주의화 되어버리기 일수인데, 이는 해체가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물론 해체의 목적은 아니겠지만, 그 효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다시 비존재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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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존재론은 사실상 마르크스로부터 유래하는 관계론을 의미하는데, 이는 근대적 존재론에서 나타나는 본질주의화(인간주의/인본주의) 또는 목적/기원의 논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관계론 또는 trans-individuality의 존재론은 존재론이기 보다는 '비존재론'인 것이다. 이는 관계, 즉 구조에 관한 인식을 의미하는 것인데, 구조를 이루는 관계의 항들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일정하게 '존재론'적이어서 그 자체로서 '비존재론'과 갈등적일 수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주어진 것, 또는 현실성의 차원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적절하게 조정하는 것 역시 하나의 과제이다.